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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 2일 토요일 [(배)주님 봉헌 축일(봉헌 생활의 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교회는 주님 성탄 대축일 40일째 되는 날, 곧 해마다 2월 2일을 주님 성탄과 주님 공현을 마감하는 주님 봉헌 축일로 지낸다. 이 축일은 본디 성모님께서 아기 예수님을 낳으신 뒤 모세의 율법대로 정결 의식을 치르신 것을 기념하는 ‘성모 취결례(정화) 축일’이었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따른 전례 개혁으로 1970년부터 현재의 명칭으로 바꾸어 주님의 축일로 지내 오고 있다. 왜냐하면 모든 점에서 죄가 없으신 성모님께 ‘취결례’라는 말은 오해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1997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이날을 ‘봉헌 생활의 날’로 정하고, 자신을 주님께 봉헌한 수도자들을 위한 날로 삼았다. 이에 따라 해마다 이날, 교회는 수도자들을 기억하는 한편, 젊은이들이 봉헌 생활로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도록 기도할 것을 권고한다. 말라키 예언자는, 주님께서 홀연히 당신의 성전으로 오시리라고 한다(제1독서). 정결례를 거행할 날 예수님의 부모가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치자, 시메온은 아기가 반대받는 표징이 되리라고 예언하고 한나 예언자는 하느님께 감사드린다(복음).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 말라키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3,1-4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너희가 좋아하는 계약의 사자 보라, 그가 온다.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2 그가 오는 날을 누가 견디어 내며 그가 나타날 때에 누가 버티고 서 있을 수 있겠느냐? 그는 제련사의 불 같고 염색공의 잿물 같으리라. 3 그는 은 제련사와 정련사처럼 앉아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하게 하고 그들을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리라. 4 그러면 유다와 예루살렘의 제물이 옛날처럼, 지난날처럼 주님 마음에 들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또는> <예수님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2,14-18 14 자녀들이 피와 살을 나누었듯이, 예수님께서도 그들과 함께 피와 살을 나누어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권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당신의 죽음으로 파멸시키시고, 15 죽음의 공포 때문에 한평생 종살이에 얽매여 있는 이들을 풀어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6 그분께서는 분명 천사들을 보살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보살펴 주십니다. 17 그렇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자비로울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충실한 대사제가 되시어, 백성의 죄를 속죄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8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22-40 22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23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24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 25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26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 27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들어오자, 28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29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30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31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32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33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에 놀라워하였다. 34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35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36 한나라는 예언자도 있었는데,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37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38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39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그들은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40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은 주님 성탄 대축일에서 40일째 되는 날입니다. 교회는 이날을 주님 성탄과 공현을 마무리하는 ‘주님 봉헌 축일’로 지냅니다. 본디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맏아들, 곧 첫아들은 주님의 몫이었습니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의 맏배도 그러하였습니다(탈출 13,2 참조). 그것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해방될 때, 하느님께서 이집트에 내리신 마지막 재앙이 맏아들과 맏배를 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집트 사람들의 맏아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어린양의 피를 집의 두 문설주와 상인방에 발라, 그것을 본 죽음의 천사가 그 집을 건너뛰게 하여 죽음을 면하였습니다. 그 건너감에서 ‘파스카’라는 말이 나왔고, 맏아들의 봉헌은 곧 이집트에서 해방됨을 기억하는 행사였습니다. 가나안에 정착한 다음에 모든 맏아들을 성전에 봉헌해야 한다는 율법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이집트에서 해방된 뒤 모든 맏아들은 하느님께 속한 것이 되고, 부모들은 성전에 제물을 바치고 맏아들을 하느님에게서 받아 오는 것입니다. 이 율법에 따라 요셉 성인과 성모님께서는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요 하느님이시기에 당신 자신을 봉헌하실 필요가 없으셨지만, 스스로 봉헌하심으로써 겸손과 순종의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성부의 뜻에 온전히 순명하시는 성자의 모습으로, 하느님께 봉헌하는 모범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십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성모님의 모습에서도 봉헌의 모범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시메온의 말대로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아픔을 겪게 되실 성모님께서도 당신 자신과 당신이 가장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온전히 하느님께 돌려 드리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 봉헌 축일을 맞이하여 과연 하느님께 무엇을 봉헌하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 봅시다. (이성근 사바 신부) |
주님께서는 우리를 거룩함에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참 하느님이셨지만, 동시에 완벽한 인간 존재로서의 삶을 지향하고 추구하고, 또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셨습니다. 만왕의 왕이시며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전혀 그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우리와 똑같이 마굿간 탄생을 통해 요셉 가문과 이스라엘 백성의 일원이 되신 것입니다. 참으로 놀랍습니다. 하느님께서 키를 낮추셔서 우리와 시선을 맞추시고, 우리와 어깨를 나란히 하신 것입니다.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상류층 명망가들이나 고관대작들이 아니라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과 운명을 공유하셨습니다. 율법의 주인이시기에 율법의 지배를 받을 하등의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율법 규정의 지배를 받으셨습니다. 때로 너무 비이성적으로 몰상식할 정도로 세분화된 다양한 규정들을 정확하게 준수하셨습니다. 탄생 8일째 되던 날, 예수님께서는 다른 아기들과 마찬가지로 할례를 받으셔야 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할례를 받으셨다고 명확하게 밝히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준수는 그분 일생에 있어서 기본 토대였습니다. 그분께서는 순명하셨습니다. 순명을 통해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율법의 참된 정신과 의미가 그분 안에 온전히 성취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간 세상에로의 완벽한 적응은 할례로만 끝나지 않았습니다. 율법의 규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요셉과 마리아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탈출기 13장에는 맏아들과 맏배에 대한 봉헌 세칙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너희는 태를 맨 먼저 열고 나온 것을 모두 주님께 바쳐야 한다. 너희 가축이 처음 낳은 것으로 수컷은 모두 주님의 것이다. 너희 자식들 가운데 맏아들은 모두 대속해야 한다.”(탈출기 13장 12~13절) 그 이유에 대해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이집트에서 종살이할 떄, 파라오가 우리를 내보내지 않으려고 고집을 부렸으므로, 주님께서 사람의 맏아들부터 짐승의 맏배까지 이집트 땅에서 처음 난 것을 모조리 죽이셨다. 그래서 나는 태를 맨 먼저 열고 나온 수컷을 모두 주님께 바친다.”(탈출기 13장 15절) 가축의 맏배들은 희생 제물로 바쳐져야 했지만, 사람의 맏아들은 그대신 속전(贖錢)이 치러져야만 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정결례 제물 등급 가운데 가장 낮은 등급인 산 비둘기 한 쌍을 바쳤는데, 그 중 한 마리는 번제물고, 다른 한 마리는 속죄 제물로 바쳤습니다. 제사와 제물의 주인이요 주인공이신 예수님께서 높은 곳에 좌정하셔서, 제물을 받으셔야 마땅한 일인데, 천부당만부당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겸손하게도 자신을 낮추셔서 우리 인간과 똑같은 모습으로 제사상 앞에 서신 것입니다. 놀라운 겸손이요 자기 낮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완벽하게 순결하신 분이시기, 정결 예식이 전혀 필요 없으신 분께서, 겸손하게도 죄투성이인 인간들이 제정해 놓은 정결예식에 기꺼이 참여하셨습니다. 틈만 나면 죄의 깊은 구렁 속으로 떨어지는 우리들입니다. 늘 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우리들입니다. 언제나 정결 예식이 필요한 우리들입니다. 부끄럽고 송구스럽지만 틈만 나면 정결 예식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겠습니다. 정기적인 고백성사를 통해서, 그것이 힘들다면, 미사 앞부분의, ‘작은 고백 성사’라고 할 수 있는 참회예절을 통해서, 그 순간도 놓쳤다면, 또 다른 기회인‘주님의 기도’를 통해 우리의 몸과 마음을 씻고 또 씻어야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거룩함에로 부르셨습니다. 지속적으로 거룩한 상태를 유지할 것을 원하십니다.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기 19장 2절) 씻고 또 씻어 정결하게 된 우리 자신을 이제 감사의 정을 담아 기쁜 마음으로 주님께 봉헌해야 겠습니다. 매일의 정결 예식, 매일의 봉헌, 그것이야말로 주님 앞에 늘 깨어있는 신앙인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게 우리를 인도할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협상의 기술: 요구가 아닌 욕구에 집중하라.
허브 코웬이란 작가는 “인생의 8할은 협상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협상은 회사에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삶 전반에서 매 순간 일어나는 일입니다. 부부싸움을 하더라도 나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상대와 어느 정도 협상을 하게 됩니다. 이 협상의 기술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매일 싸우느냐, 사이좋게 지내느냐가 결정됩니다.
아인슈타인 이후 가장 천재적인 물리학자라 불리는 파인만이 있습니다. 그는 천재였지만 성격이 고약하여 그의 기행만 따로 모아놓은 책이 있을 정도랍니다. 특별히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성격이었습니다.
1965년 전화 한 통화가 걸려옵니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니 상을 받으러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비행기 타면서 만나야 할 사람들, 일주일 동안 여행해야 하는 것들이 너무도 끔찍하여 이렇게 응답합니다.
“됐어요. 상 받으려면 북유럽까지 오가느라 비행기를 10시간이나 타야하고 일주일이란 시간을 써야 하는데 ... 귀찮아요. 받지 않겠습니다.”
이에 놀란 노벨상 재단 측에서는 갖은 회유와 협박을 가했습니다.
“이 상은 초등학교 우등상이 아닙니다. 받으시면 국가의 영광이 되는 상입니다. 그리고 교수님, 일주일 씩 있을 필요는 없고요, 상만 받고 바로 가셔도 됩니다. 교수님이 이러시면 앞으로 다른 미국 노벨상 후보자들에게도 지장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파인만은 “됐습니다. 귀찮습니다.”라고 거절했습니다.
이들은 협상이 아니라 협박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협상과 협박을 구별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협박은 쌍방이 둘 다 기분 좋게 끝날 수는 없습니다.
이때 파인만의 아내가 나섭니다.
“여보, 가기 싫으면 가지 마세요. 그런데 이걸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이번에 당신이 상을 거부하면 인류 역사를 통틀어 자발적으로 노벨상을 거부한 첫 인물이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누가 관심을 가질까요? 바로 기자들이겠죠. 그냥 며칠 고생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파인만은 아내의 말에 설득당해 노벨상을 수상하러 떠났습니다.
[참조: ‘거절할 수 없는 협상의 신이 되는 법’, 웅이사의 하루 공부, 유튜브]
이 이야기는 최철규 작가의 ‘협상의 신’이란 책에 나오는 사례입니다. 최철규 작가는 협상의 가장 중요한 것으로 ‘요구에 집중하지 말고 욕구에 집중하라.’는 원칙을 제시합니다.
파인만이 제시했던 요구는 오랜 시간 여행하는 것이 귀찮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말만 듣고 날짜를 줄이려는 노력과 더 나아가 협박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파인만의 아내는 남편의 욕구에 집중하였습니다. 남편이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가지 않으면 기자들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시달려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말하는 것에 집중하지 말고 상대의 욕구에 집중해야 상대로부터 많은 것을 얻어낼 수 있습니다. 물론 상대도 즐겁게 말입니다.
이것은 하느님과 인간과의 사이에서도 통용됩니다.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요셉과 마리아께서 아드님 예수를 성전에서 하느님께 봉헌한 것입니다. 이제 자신들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아들을 쓰시라는 뜻입니다. 당신을 참 주님으로 인정하고 자신들이 가진 가장 소중한 아들을 주님 뜻에 맡기는데 주님께서 즐겁지 않으실까요?
아무래도 주님은 당신이 주님으로 인정받는 것을 가장 기뻐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미사 때 무언가를 청할 때 돈과 함께 청하는 것 같습니다. 성경을 통틀어 하느님께서 인간을 통해 가장 즐거워하시는 일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인간에게 감사의 봉헌을 받는 것이라 당당히 말할 수 있겠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주님께 봉헌되어져야 했던 선악과를 봉헌하지 않았기에 모든 죄가 들어왔고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봉헌하셨기에 그 죄가 사해졌습니다. 무엇을 얻어내려면 그 무언가를 주시려는 분의 욕구를 올바로 알고 그 욕구에 합당한 것을 채워주어야 합니다. 주님께는 그것이 ‘봉헌’입니다.
어떤 아이가 땀을 흘리며 슈퍼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아저씨에게 “콜라 하나 주세요!”라고 말합니다. 아저씨는 콜라가 떨어진 것을 발견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말해야할까요? 콜라 없다고 가라고 해야 할까요? 그 아이는 콜라가 먹고 싶은 것이 아니라 갈증을 해소하고 싶은 것입니다. 요구가 아니라 욕구를 볼 줄 아는 주인이라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콜라 몸에 안 좋아. 완전 설탕 덩어리야. 물이나 이온음료가 어떻겠니?”
상대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으면 상대는 내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을 것입니다. 성당에서도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지도 않은 채 내가 원하는 것만 줄기차게 청해봐야 그 원하는 것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먼저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립시다. 그러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받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우리가 드리는 ‘감사의 봉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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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인
성녀 요안나 드 레토낙(Jane de Lestonnac)
신분 : 과부, 설립자
활동연도 : 1556-1640년
같은이름 : 레토냑, 요한나, 잔, 잔느, 쟌, 제인, 조반나, 조안, 조안나, 조한나, 지아나, 지안나, 지오바나, 지오반나, 후아나
성녀 요안나 드 레토낙(Joanna de Lestonnac)은 프랑스의 보르도(Bordeaux)에서 저명한 집안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당대의 유명한 인문주의 철학자였던 미셸 에켐 드 몽테뉴(Michel Eyquem de Montaigne)의 조카이다. 당시 프랑스는 국가의 분열뿐만 아니라 가족 간의 분열을 가져온 종교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혼란을 겪고 있었다. 성녀 요안나의 어머니는 칼뱅주의(Calvinism)에 빠져 그 누구의 권고도 듣지 않았다. 다행히도 성녀 요안나는 아버지와 삼촌 덕분에 자기 종교로 이끌고자 했던 어머니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성녀 요안나는 17살에 가스통 드 몽페랑(Gaston de Montferrant)과 결혼하여 여덟 자녀를 두었다. 그러나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던 그녀는 1597년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41살에 과부가 되었고 네 아이도 어려서 잃었다. 그녀는 나머지 네 자녀가 모두 자라서 독립할 수 있을 때까지 돌보았다. 그녀의 두 딸인 마르타(Martha)와 막달레나(Magdalena)는 보르도에 있는 수도원에서 서원을 했고 아들 프란치스코(Franciscus)는 결혼을 했다. 아직 어린 소녀였던 막내딸을 아들에게 맡기고 성녀 요안나는 어린 시절부터 꿈꾸어 온 수도생활을 하기 위해 1603년 툴루즈(Toulouse)의 개혁 시토회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그러나 수도원의 엄격한 생활은 그녀의 건강을 해쳤고 그녀는 서원을 하기도 전에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툴루즈 수도원에서 지냈던 마지막 밤에 성녀 요안나는 하느님의 특별한 비추임을 체험하였다. 그것은 설립자로서의 소명과 마리아 영성에 대한 직관이었다. 새로운 수도원을 설립하려는 그녀의 계획은 몇 년에 걸쳐 조금씩 윤곽이 드러났다. 즉 청소년 교육이라는 과제와 자신의 구원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구원에도 마음을 써야 하는 방향으로 서서히 정리되었다.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한 그녀는 젊은 소녀들을 모아 라 모드(La Mothe)에 있는 자신의 땅에서 2년 동안 준비의 시간을 가졌고, 보르도에 극심한 역병이 발생했을 때 용감하게 시민들을 간호하였다. 그러던 중 1605년에 새로 부임한 예수회의 요한 드 보르드(Joannes de Bordes) 신부와 라이문두스(Raymundus) 신부를 비롯한 몇 명의 사제들이 영적으로 그녀의 헌신을 알아보고 결정적인 도움을 주게 되었다.
당시 보르도에서는 특히 여자 아이들의 교육이 큰 문제였다. 대부분 칼뱅주의에 빠진 여교사들이 소녀들의 교육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영혼에 심각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당시 예수회가 소년들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던 것처럼 가톨릭적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던 소녀들을 위한 교육을 맡아줄 여성 수도회의 설립이 절실하던 때였다. 요한 신부와 성녀 요안나는 이런 점에서 서로 뜻을 같이 하고 이를 하느님의 섭리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곧바로 수도회 설립 작업에 들어갔다. 1606년 3월 6일 성녀 요안나는 요한 신부의 도움으로 보르도의 대주교를 설득하여 특별히 여자 아이들의 교육을 직접적인 사도직으로 하는 여성 수도회인 마리아회를 설립하였다.
성녀 요안나의 마리아회는 1607년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로부터 승인을 받았고, 1610년 마침내 보르도에 마리아회의 첫 번째 수녀원을 설립하고 원장이 되었다. 그녀는 수도회의 사도직을 실현하기 위해 학교를 설립하여 소녀들의 교육에 전념하였다. 한때 그녀는 다른 수녀들의 음모에 휘말려 희생될 위험에 처하기도 하였으나 모진 시련을 인내로써 극복하였다. 1640년 2월 2일 96세의 일기로 선종하여 보르도에 묻힌 성녀 요안나의 마리아회는 프랑스 전역뿐만 아니라 에스파냐를 비롯해 세계 각지로 퍼져나갔다. 그녀는 1900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49년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시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