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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14. 묵상글 ( 성 십자가 현양 축일. - 큰 고통과 긴 고통을 겪는 이들에게.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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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14. 성 십자가 현양 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큰 고통과 긴 고통을 겪는 이들에게
오늘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의 독서 민수기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길을 가는 동안에 백성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제가 히브리어를 모르기에 원어의 뜻을 직접 해석할 수 없어
다른 번역들, 공동 번역과 개신교 성서와 영어 번역을 찾아봤는데 이러합니다.
“길을 가는 동안 백성들은 참지 못하고”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with their patience worn out by the journey,”
이 네 번역을 다 감안할 때 백성은 가나안으로 가는 길에
무척 지치고 인내가 한계에 도달해 마음 안에 조급함과 불만이 차올라
마침내 불평이 입에서 터져 나올 지경이 된 것 같습니다.
이런 그들을 보며 바로 떠오른 말이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큰 고통과 긴 고통이 떠올랐고,
큰 고통과 긴 고통을 나라고 잘 견딜 수 있을까 이런 성찰을 하게 되었고,
큰 고통과 긴 고통을 견디고 이기는 사랑이 내게 있는지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제는 80이 넘으신 노부부의 병문안을 갔습니다.
남편이 치매에 매주 3번 신장 투석을 해오셨는데
이번에 자매님까지 폐암을 앓게 되신 분들이었지요.
그런데도 자매님께서는 남편을 요양 병원에 보내지 않고,
손수 돌보시는데 너무도 정성껏 그리고 깔끔하게 돌보시는 거였습니다.
제가 진심으로 걱정되어 위로의 말씀을 드리려고
많이 힘드시지요 하고 위로를 건네니 자매님께서
견딜 만하다고 너무도 훌륭하게 답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견딜 만하다!
힘들어 죽을 지경이라고 하시지 않고 견딜 만하다고 하시는 겁니다.
그러나 당신의 항암치료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보면
저와 같은 사람에게는 견딜 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저와 달리 그 큰 고통을 그분이 견디실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그 큰 고통보다 더 큰 사랑이 그분에게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저는 큰 고통과 더불어 긴 고통에 관해서도 얘기하려고 합니다
제 생각에 긴 고통을 견뎌낸 분들이 큰 고통을 견뎌낸 분들보다 위대합니다.
저는 태어나서부터 장애를 지닌 분이나 오래 고통을 겪은 분들을 볼 때마다
한 편으로는 마음이 아프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그 긴 고통을 견뎌내심에 머리가 절로 숙여집니다.
이분들 중에는 행복이란 것은 생각지도 않고 사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분들 앞에서 저는 제가 행복한 것이 미안하고 죄스럽습니다.
사실 행복은 사치이고 사랑을 얘기하는 것은 적절치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다만 기도할 뿐입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이분들에게 위로가 되고 더 나아가 힘이 되기를 말입니다.
그리고 그저 견디는 것에서 더 나아가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고통에서 승리하시게 되기를 또한 기도합니다.
고통에서 승리하고 죽음의 고통까지 승리하여 부활에 이르게 하는 사랑,
이런 주님의 사랑을 일컬어 Passio 또는 Passion이라고 하는데
이 Passio의 사랑이 이분들의 긴 고통의 열매로 주어지기를 기도합니다.
큰 고통과 긴 고통을 겪는 이들에게
주님 Passio의 사랑이 함께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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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14. 성 십자가 현양 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요한 3,16).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습니다.”(요한 3,16).
그렇습니다. 이 큰일을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십자가’를 통하여 이루셨습니다. 사실 ‘십자가의 형벌’은 손과 발이 못박인 채 철저히 무력해진 참으로 무력하기 짝이 없는 비참함의 끝이요, 노예 죄수에게나 행해지는 참으로 냉혹하기 짝이 없는 철저하게 버림받음이요, 그야말로 완전한 패배요, 저주의 상징이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누구나 저주받을 자다’라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듯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저주받은 자가 되셔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해 내셨습니다.”(갈라 3,13)
그래서 십자가는 유대인들에게는 걸림돌이요, 그리스인들에게는 어리석음이었습니다(1코린 1,23 참조). 그러나 “멸망할 자들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1코린 1,18).
오늘은 ‘십자가’에서 세 가지 의미를 되새겨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십자가는 ‘죄인임을 공적으로 인정하는 곳’입니다. 십자가는 죄인이 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먼저 우리가 죄인임을 인정할 때라야 십자가는 지게 됩니다. 그러기에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을 때 우리는 십자가를 피하고 도피하고 있는 것이라 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용서해야 할 존재’이기에 앞서, ‘용서받아야 할 존재’임을 깨달아야 할 일입니다. 동시에, 나아가서는 죄인이라서가 아니라 ‘죄 없음에도 죄를 뒤집어쓸 줄을 아는 일’입니다. 이해받지 못하고 오해받고 곡해 받고 누명쓰는 일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둘째>는 십자가는 ‘죽는 곳’입니다. 십자가는 죽음의 장소입니다. 곧 죽이는 일이 아니라 죽음 당하는 일이요, 이기는 것이 아니라 지는 일이요, 앞서는 일이 아니라 물러나는 일입니다. 승리하는 일이 아니라 패배당하는 일이요, 중심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변두리로 밀려나는 일입니다. 동시에, 나아가는 틀려서가 아니라 옳으면서도 지는 일이요, 힘 있으면서도 눌리는 일입니다.
<셋째>는 ‘타인을 위하여 건네주는 곳’입니다. 마지못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그가 잘 되기를 바라며 하는 것이요, 그가 구원되기를 희망하여 자신을 건네주는 일이요, 사랑으로 하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승리요, 구원이 됩니다. 곧 십자가는 죽음이지만, 동시에 죽음을 죽이고 진정으로 참 생명으로 살아납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무력함이지만, 구원을 이루는 전능함이 됩니다. 낮아짐으로써 진정 높아지며, 패배이지만 사랑의 승리가 됩니다. 지면서도 쳐부수며, 승리의 깃발이 되고 영광의 월계관이 됩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로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 그야말로, 십자가는 우리 삶의 의미가 되었고, 역사의 역전이며 혁명이요, 하느님 사랑의 표상이며 완전한 승리의 표상이요, 현양이며 영광이 되었습니다. 이 십자가가 바로 우리의 자랑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을 베푸신 하느님 사랑이 바로 우리의 자랑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고백합니다.
“나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갈라 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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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14.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의 십자가
“너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에 달아 놓았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민수 21,8-9). 쳐다본 사람과 ‘봐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보지 않은 사람과의 운명은 분명히 다릅니다. 믿음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말씀대로 행함으로써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생명을 얻는 방법을 알려 주었으면 단순히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16,24).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10,38).고 하셨습니다. 사실 “십자가를 질질 끌고 가는 것보다 차라리 짊어지는 것이 가볍습니다”(성 아우구스띠노). 그러니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십시오. 그리고 믿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구리 뱀을 쳐다본 사람들이 살았듯이 영원한 생명을 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십자가가 아니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십자가라고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먼저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곳곳에서 십자가를 볼 수 있고 또 몸에도 지니고 다닙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에 담긴 주님의 사랑을 일깨우고 십자가를 지겠다는 고백을 못 한다면 그 십자가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십자가가 점점 더 화려해지고 상품화되는 현실에서 나를 정화 시키고 성숙시키는 은총의 십자가를 바로 세워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십자가의 승리를 이루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영광에 앞서 반드시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십자가는 내 눈과 가슴에만 있을 뿐만 아니라 내 안에서 생생하게 생활하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만일 생활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자가 된다면 그분은 분명히 나를 부활시켜줄 것입니다”(성녀 벨라뎃다). 힘겹고 고달픈 십자가의 길이지만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를 미리 깨닫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많은 경우 ‘왜 나만 십자가를 져야 하느냐? 고 하소연합니다. 왜 나는 이런 무거운 십자가를 져야 하느냐고 투덜댑니다. 그러나 그 투덜거림 속에서 십자가는 더 무거워 집니다. “십자가의 길에서는 언제나 첫발이 중요합니다. 십자가를 무서워하는 것이 바로 우리에게 더 큰 십자가가 됩니다. 첫 발을 예수님께 맡기십시오”(성 요한 비안네).
사람마다 져야 하는 십자가는 다르지만, 모두가 자기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가난이 십자가일 수도 있지만 오히려 큰 부가 십자가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자녀, 남편, 아내, 동료가, 공동체의 일원, 장상이 장애물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격, 언어의 습관, 주변의 환경이 십자가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는 그 십자가를 통해서 나를 다듬고, 겸손하게 하고, 기도하게 하고, 마침내 내가 취할 길을 발견하게 하고, 가야 할 길에 용기를 얻게 해주십니다. 따라서 십자가를 피할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질 수 있는 은총을 구해야 합니다. 십자가 안에서 사랑을 보십시오. 십자가를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함으로써 십자가를 극복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가 어디서 오는지 아예 생각하지 마십시오! 언제나 하느님으로부터 옵니다. 십자가는 언제나 하느님께서 우리의 사랑을 당신에게 증거하는 방법으로 주시는 것입니다”(성 요한 비안네). 십자가는 우리 모두의 교과서입니다. 십자가는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구원의 도구임이 틀림없습니다. 십자가 현양 축일에 사랑의 십자가를 제대로 바라보길 바랍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큰 기쁨과 희망을 안겨줍니다. 특별히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에는 우리를 무조건 살리고 싶어 하는 하느님의 구원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의 구리뱀을 바라보기만 하면 무조건 살았듯이 우리도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기만 하면 무조건 살 수 있게 해주고 싶어 하시는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에 감사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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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14. 성 십자가 현양 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여행 중에 교우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면서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어떻게 운명처럼 예수님을 만났습니까?” 저는 모태 신앙이기에 어려서부터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학문적으로 예수님을 만난 것은 신학교에서 신학과 성서를 배울 때였습니다. 신앙 안에서 예수님을 만난 것은 사제가 된 후 몇 번의 좌절과 시련을 겪은 다음입니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 기도할 때, 길을 걸으며 묵주를 돌리면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먹구름 뒤에는 밝은 태양이 있듯이 시련과 좌절이 지나가면 주님께서 그 시간에 함께 하셨음을 알았습니다. 배우자와 결혼 하면서 예수님을 만났다는 분도 있었습니다. 무교였지만 배우자의 신앙을 따라서 자연스럽게 예수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서는 배우자를 보내 주셨고, 배우자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예수님을 만났으니 감사하다고 하였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한 자매는 홀로 외국에서 생활하면서 예수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편하고, 어려움이 없을 때는 습관적으로 교회에 다녔는데 가족과 떨어져서 혼자 있게 되면서 예수님을 더욱 찾게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다고 생각하니 혼자 있는 것도 외롭지 않고, 낯선 타국에서의 생활도 두렵지 않다고 합니다.
문병란 시인은 ‘희망가’라는 시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는 헤엄을 치고/ 눈보라 속에서도 매화는 꽃망울을 튼다./ 절망 속에서도 삶의 끈기는 희망을 찾고/ 사막의 고통 속에서도 인간은 오아시스의 그늘을 찾는다./ 눈 덮인 겨울의 밭고랑에서도 보리는 뿌리를 뻗고/ 마늘은 빙점에서도 그 매운맛 향기를 지닌다./ 절망은 희망의 어머니 고통은 행복의 스승/ 시련 없이 성취는 오지 않고 단련 없이 명검은 날이 서지 않는다./ 한 고비 지나면 구름 위 태양은 다시 뜨고/ 꿈꾸는 자여, 어둠 속에서 멀리 반짝이는 별빛을 따라 긴 고행 길 멈추지 말라./ 인생항로 파도는 높고 폭풍우 몰아쳐 배는 흔들려도/ 고요한 뱃길 순항의 내일이 꼭 찾아온다.” 시련과 좌절의 표상인 십자가는 신앙인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위한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첨탑에는 십자가가 있고, 성당의 제단 뒤에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시면서 하느님께 이렇게 청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괴로웠지만 행복했던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셔야 할 일을 잘 아셨고,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전에는 치욕과 모욕의 상징이었던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지고가심으로써 속죄와 구원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해야 할 일을 외부에서 찾은 적이 많습니다. ‘성공, 명예, 업적, 능력’이 내가 해야 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얻기 위해서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나 정말 해야 할 일은 나의 깊은 내면에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눔, 헌신, 십자가, 사랑’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면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이 세상에서 이미 시작하는 것입니다. 해야 할 일을 알았고, 최선을 다했던 윤동주 시인의 ‘십자가’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은 예배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렸습니다./ 첨탑이 저리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했던 예수 그리스도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드러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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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14.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의 마지막 부분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원에 관해 이야기를 해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구원이란 무엇일까요?
구원이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것은 스스로 구원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한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스스로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구원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함께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전화 한 통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고, 따뜻한 손길 한 번으로 구원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한강 다리에서 떨어지려던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 그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떨어지려는 순간 전화기가 보였고, 마지막으로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던 내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 전화 한 통은 저를 구원했습니다. 따뜻한 위로가 저를 다시 살게 했습니다.
구원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어떤 방식으로든 함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 곁에 계십니다.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우리 곁에 계시고 늘 우리는 하늘나라로 초대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늘나라는 하느님과 우리가 함께 있을 수 있는 곳이며 동시에 그것이 참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함께 있어 주는 주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함께 있어 줌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우리가 함께 있어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안에 구원이 있고 희망이 있습니다.
카레를 처음 만나면….
그대는 언제 카레를 처음 만나셨나요?
처음 만나는 것은 모두 경계심을 갖게 합니다.
제 아버지 신부님께서 들려주신 이야기입니다.
나는 60년 전쯤 카레를 처음 봤어.
외국 수녀님들이 만들어주셨지
근데 색이 너무 이상한 거야
꼭 화장실에서 볼법한….
거기에 건더기는 또 어떻고….
처음에는 이상했는데
한번, 두 번 먹다 보니 그것이 맛있다는 것을 알았어.
소신학교를 다니며 식사 전 카레 향이 성당을 가득 채우면
그 맛을 알기에 배가 너무 고파지더라고….
주님의 은총도 그럴지 모르지….
처음에는 부담스럽고 원하는 것이 아니라고 투덜거릴지 모르지!
그런데 알게 될 거야.
주님께서 주신 그 은총이 지금 알맞은 은총이고 맛있는 은총이라는 것을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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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14. 성 십자가 현양 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국민이 가장 행복하지는 않습니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나라로 손꼽히는 일본, 싱가포르, 한국, 독일, 영국도 마찬가지로 행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콜롬비아 등을 비롯해서 국제적으로 많은 문제를 안고 있으면서 어려움을 겪는 나라들이 의외로 행복 지수에서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관계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강력한 가족 유대감이나 지역 사회의 연대감 등 서로 지지하고 연결하는 관계가 사회 분위기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관계를 통해 행복감을 얻게 되었다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예를 들어, 덴마크인 중 93%는 사교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합니다. 그들은 지속적으로 친구들과 교류하고, 다른 사람을 지지하고, 그들 자신도 다른 사람으로부터 지지받을 수 있는 모임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관계를 유지하면서 행복 지수를 높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3년 동안 열심히 지켰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실 개인주의가 훨씬 더 커졌고, 동시에 행복도는 크게 내려갔습니다. 함께 살 수밖에 없는 존재가 우리 인간입니다. 그래서 계속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합니다. 관계를 끊는 데에만 노력을 쏟는다면 우리의 행복은 점점 더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과의 관계도 중요합니다. 문제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주님과의 관계만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을 채워주시는 주님, 어렵고 힘든 것을 모두 치워주는 주님, 꼴 보기 싫을 정도로 미운 사람을 가뿐하게 치워주는 주님 등 나의 이기심과 욕심을 채워줄 주님과의 관계만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과의 관계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속죄하시려고 몸소 지신 십자가를 묵상하고 경배하는 날입니다. 이 십자가는 과연 어떤 의미일까요? 편안함과 쉬움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부와 명예를 보여주는 것도 아닙니다. 고통과 시련의 상징이고, 또 죽음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들과 정반대의 것입니다. 그 안에는 무한한 사랑과 평화가 있었으며, 하느님 나라에 대한 강한 희망이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지금 순간의 만족과 안락함만을 추구하면서 십자가의 주님과 관계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결국 구원의 길에 들어설 수 없게 됩니다.
주님과의 관계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깊은 묵상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 십자가 안에서만 구원이 있다는 것, 그러나 그 십자가는 세상의 가치가 아닌 하느님의 가치가 들어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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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고난과 역경에 처할지라도 마음의 여유를 잃지 않고 미소 짓는 삶의 자세야말로 운명을 역전시키는 기적의 비밀이다(헤르만 헤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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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14. 성 십자가 현양 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사랑합시다”
십자가 예찬
-한반도의 십자가-
오늘 성 십자가 현양 축일 주님 수난 성금요일 십자가 경배시 사제와 회중이 주고 받는 아름다운 곡이 생각납니다.
"보라, 십자 나무 여기 세상 구원이 달렸네.
모두 와서 경배하세."
가톨릭 교회의 전례가 참 고맙습니다. 9월부터의 가을은 수확의 계절임과 동시에 기도의 계절입니다. 9월 순교자 성월, 10월 로사리오 성월, 11월 위령성월에 이은 대림시기, 그러다보니 1년이 성큼 지난듯 합니다. 참으로 깨어 간절히 기도해야할 총체적 난국, 총체적 위기의 시대를 맞이한 한국입니다. 9월 순교자 성월,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오늘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이 참 반갑습니다.
가톨릭 교회의 기도중 가장 짧으며 가장 좋은 기도가 <가톨릭 기도서> 맨처음에 나오는 성호경일 것입니다. “성부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십자 성호를 그으며 바치는 성호경 얼마나 좋습니까?
오늘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 역시 집무실에 들어오자 마자, 그리스도의 십자고상과 그 아래 태극기를 바라보며 성호경과 영광송 기도후 만세육창을 하고 성가처럼 애국가 1절을 부른후 하루를 시작했고 이어 쓰는 매일 묵상글 강론입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요셉 수도원 만세!”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모르지만 참 절박한 기도입니다. 어제 모일간지에서 미국 캔자스 대학 역사학과 교수이자 저명한 군사전략가인 에이드리언 루이스의 인터뷰 기사를 읽고 공감했습니다.
“한국은 다극주의 강대국에 둘러쌓여 있다. 미국이 한쪽 편을 들라고 강요하더라도 이를 맹목적으로 따를 필요는 없다. 기억할 것은 한국은 주권국이란 사실이다. 균형을 갖춘 입장을 취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를 감안하면 쉽지 않은 결정이라는 것을 안다.
자국의 안보를 동맹에 의존하는 것은 최근 세계 각국의 외교안보 전략 접근법이 아니다. 미국은 아프카니스탄에서 지켜준다고 약속하고선, 나중에 전황이 불리해지자 철수했다. 미래에 한국에서 미군 철군과 같은 상황이 오는 것을 완전 배제할 수 없다. 미국에 모든 걸 의존하는 것은 온당치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다.
미국을 온전히 믿지 마라. 심각한 실수가 될 수 있다. 미국과의 관계는 중요하다, 하지만 다른 문도 열어놓아야 한다. 초강대국이 개별 국가의 안보를 대리해주는 시대는 1950년대가 마지막이었다. 자국의 안보를 다른 나라에 맡길 수는 없다.”
십자가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은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참으로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십자가 주님의 지혜와 보호 은총이 각별히 요청되는 상황입니다. 그러니 궁극의 답은 기도뿐이요 고맙게도 계속되는 기도의 계절 가을입니다. 우리가 바라보며 기도할 대상인 십자가의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예수님은 지금도 여전히 분단된 한반도의 십자가를 지고 가십니다. 우리가 지고 가는 한반도의 무거운 십자가를 주님께서 함께 지고 가심이 얼마나 큰 위로와 격려가 되는지 모릅니다. 하느님과 모세에게 대들며 불평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불신의 벌로 불뱀들에 물려 죽어가자 모세는 기도했고, 이어 그들은 모세가 만든 기둥 위에 달아 놓은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납니다. 기둥 위에 달린 구리 뱀이 상징하는 바, 우리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한결같이 일편단심 사랑하고 바라봐야 할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며 하느님을 믿는 신자들이 늘 삶의 중심에 모시고 바라보며 살아가야 할 십자가와 부활의 파스카 예수님입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님은 답입니다. 인간 무지와 허무에 대한 유일한 처방도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 삶의 중심이자 삶의 좌표가, 삶의 이정표가 됩니다. 우리 삶의 중심에 십자가의 주님이 계시지 않다면 우리 삶은 얼마나 공허하고 허무하겠는지요! 십자가의 예수님은 우리 십자가의 도상에서 우리의 영원한 인도자이자 도반이 되십니다. 끊임없는 회개의 표지가 되고, 희망의 표지가 되고, 영적승리의 표지가 됩니다.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볼 때 다시 용기백배 힘을 내어 살게 됩니다. 절망은 사라지고 희망이 샘솟습니다. 백절불굴의 믿음도 십자가 예수님의 은총입니다. 그러니 십자가의 주님은 우리의 유일한 구원의 길, 하늘길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니코데모에게 주시는 말씀은 그대로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인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늘에서 내려 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주님은 바로 십자가의 주님을 믿음이 영원한 생명의 구원임을 천명하십니다. 참으로 우리가 평생 사랑해야할 십자가의 예수님이요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대로 화해와 평화의 상징도 됩니다. 어제 저녁성무일도중 콜로새서의 그리스도 찬가중 마지막 대목이 생각납니다.
“과연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콜로1,19-20)
이래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느님 사랑의 절정의 표현이요 가톨릭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전 인류의 구원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의 시야를, 이해 지평을 하느님 수준으로 넓혀야 함이 우리에게 주어진 평생과제입니다.
행복이 선택이듯, 믿음도, 구원도 선택입니다. 날마다 십자가의 주님을 선택하는 믿음의 결단입니다. 늘 사랑하고 선택하여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살아야 할 십자가의 예수님이십니다. 세상 누구나에게 활짝 열려있는, 믿음의 선택으로 누구나 갈 수 있는 구원의 문, 구원의 길, 십자가의 예수님입니다. 바로 다음 복음중의 복음이 더욱 십자가의 예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함을 가르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새삼 십자가의 예수님은 가톨릭 교회뿐 아니라 온 세상, 온 인류에 주신 구원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과 더불어 이 거룩한 “미사” 역시 온 세상,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해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의 성사임을 깨닫습니다. 성 십자가 현양 축일에, 늘 바쳐도 늘 새롭게 느껴지는 제 좌우명 고백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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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14. 성 십자가 현양 축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믿는 사람>
송두리째 비우시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신 분을
닮고 따라서
아래로
아낌없이 베푸시어
하늘과 땅과
함께하신 분을
닮고 따라서
함께
살리시러 죽으시어
땅에서 하늘로
오르신 분을
닮고 따라서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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