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정의 칼
우종숙
말을 시퍼렇게 갈고 있다
단칼에 베어 아픔을 느끼지 못하도록 떨어진 제 목을 보고 환하게 웃을 수 있도록 내 말이 바람처럼 날렵해 표정이 베이지 않도록 포정의 칼처럼 평생을 쓸 말을 갈고 있다
모래에 스미는 물처럼 파랗게 벼리고 있다
푸른 하늘에 나는 새털처럼 부드러운 율동, 빛과 같은 속도로 꽂히는 한 마디 화살처럼 천리마가 날고 있다
그러나 뒷모습만 보이는 말은 자욱이 먼지만 남기고 사라져 버린다 고삐를 단단히 잡지 않으면 굴러 떨어지거나 제멋대로 날뛰기 일쑤인 말인 것을,
말이 나를 베어버린다
---우종숙 시집 {포정의 칼}에서
포정庖丁이란 그 옛날의 소, 돼지, 개 따위를 잡던 사람을 말하고, 소위 최하천민인 백정을 말한다. 우종숙 시인의 [포정의 칼]은 ‘포정의 신화’를 차용하여 ‘말의 사제’로서 이 말을 갈고 닦는 제일급 시인의 솜씨를 보여준다. 우종숙 시인은 날이면 날마다 “말을 시퍼렇게 갈고” 있는데, 왜냐하면 그의 말에 목이 떨어져도 그 아픔을 느끼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그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말과 생명은 하나이고, 말을 잃으면 ‘인간은 인간’이라고 할 수가 없다. 말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살릴 수도 있고, 이에 반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죽일 수도 있다. ‘우리는 모두가 한 형제이며 한 민족이다’라는 말은 전자의 예에 해당되고, ‘그들과 우리는 종교적, 문화적 차이로 인해 한 솥밥을 먹을 수가 없다’라는 말을 후자의 예에 해당한다. 말은 포정의 칼처럼 천하제일의 명검이지 않으면 안 되고, 시인은 포정처럼 천하제일의 말의 사제이지 않으면 안 된다.
내 말에 목이 단번에 떨어져도 그 아픔을 느끼지 못하도록 하는 것, 제 목이 떨어져 나간 것을 보고도 환하게 웃을 수 있게 만드는 것----, 이 불가능한 꿈을 위하여 그는 그의 말을 “모래에 스미는 물처럼 파랗게 벼리고”있는 것이다. 말은 칼이 되고, 칼은 날렵하고 빠른 모습으로 천리마가 되어 하늘을 날아다닌다. 푸른 하늘을 나는 새털처럼 부드러운 율동으로 춤을 추고, 빛과 같은 속도로 꽂히는 한 마디의 화살처럼 천리마가 되어 날아다닌다. 말은 언제, 어느 때나 그 얼굴을 보여주지 않고 뒷모습만을 보여주고, 먼지만을 자욱이 남기고 사라진다. 말은 천리마이고, 빛보다 더 빠른 속도를 지닌 말의 고삐를 단단히 잡지 않으면 굴러 떨어지거나 제멋대로 날뛰기 일쑤인 말에 내가 베어진다. 칼로 일어난 자는 칼로 망하듯이, 말로 일어난 자는 말로 망할 수가 있다.
장자의 말에 따르면, 포정은 고대 양혜왕의 주방장이며, 그 칼질하는 솜씨가 마치 상림桑林의 춤과도 같고, 경수經首의 음악과도 같았다고 한다. 능숙한 칼잡이도 1년에 한번씩은 칼을 갈고, 어중간한 칼잡이도 한 달에 한번씩은 칼을 갈지만, 그러나 포정의 칼은 19년 동안 수천 마리의 소를 해체했지만, 아직도 금방 숫돌에 갈아온 듯 날카로웠다는 것이다. 포정은 그의 칼로 살과 힘줄과 뼈를 베는 것이 아니라, 살과 살, 혹은 살과 뼈 사이의 틈을 비집고 가른다고 한다. 포정의 칼솜씨는 단순한 칼솜씨의 수준을 떠나 ‘내 마음의 경로’만을 따르는 ‘도의 경지’에 올라섰다고 할 수가 있다.
모든 일의 목표도 도이고, 모든 시인의 목표도 도이다. 말로 타인의 목을 베어버려도 그 목베임을 전혀 모르고 그 떨어진 목을 보고 웃게 만든다는 것----, 이것의 도의 길이고 참다운 삶의 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포정의 칼도 살림의 칼이고, 우종숙 시인의 말도 살림의 말이다. 이때의 말과 칼은 흉기가 아닌 철학적 의사의 칼이 되는 것이다.
포정도, 시인도 가축이나 사람을 죽이지 않고, 그 모든 생명체들을 되살려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