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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을 하면서도 뿔이 날 때가 있나요?
약을 살살 올리면 누구든 뿔이 납니다.
자존심이 팍팍 상하는 일이 있으면 뿔이 납니다.
먹을 것을 가지고 살살 놀리면, 뿔이 납니다.
가장 가까이서 사랑하고 챙겨주어야할 사람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뿔이 납니다.
당신은 무슨 일이 있을 때, 뿔이 납니까?
믿음대로 살려고 애를 쓰는 데도, 뿔이 나나요?
시편기자도 뿔이 났습니다.
시편73편은 믿는 사람이 뿔이 난 이야기입니다.
왜 뿔이 났을까요?
시편 73편에서 시인(아삽)이 뿔이 난(화가 나고 실족할 뻔한) 이유는 '악인의 형통함'과 '의인의 고난'이라는 불공평한 현실 때문이었습니다.
시인이 시험에 들고 분통을 터뜨린 핵심 이유는 무엇일까요?
너무나 잘나가는 악인들의 모습 (3~9절)
“[2] 나는 하마터면 발을 헛디뎌 미끄러질 뻔하였고, 걸음을 잘못 디뎌 넘어질 뻔하였다. [3] 그 까닭은, 내가 악한 자들이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보고는, 그런 거만한 자들의 형통을 부러워했기 때문이다. [4] 그자들은 고생이란 것을 모른 채, 일평생 몸도 건강하고 아무런 문제도 없다. [5] 살다보면 짊어지게 마련인 인생의 근심 걱정과도 거리가 멀고, 심지어 누구나 겪는 병치레도 하지 않는다. [6] 그리하여 저들은 교만을 목걸이처럼 걸고 다니고, 폭력을 나들이옷처럼 온몸에 두르고 다닌다. [7] 저들은 잘 먹어서 살은 피둥피둥하게 쪘고, 거만하게 눈을 치켜뜬 채 뻐기면서 다니고, 마음속의 탐욕은 하늘 높은 줄 모른다. [8] 언제나 남을 비웃기를 잘 하고, 악의에 찬 말을 마구 쏘아붙이며, 거만한 태도로 다른 사람을 짓누르는 폭언을 일삼는다. [9] 입을 놀려 하늘을 욕하고, 혀를 날름거리며 온 세상을 제 소유물인 양 휩쓸며 쏘다닌다.”(시 73:2-9, 쉬운말)
악인들은 죽을 때까지 고통이 없고 건강하며, 재물은 날마다 불어납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무시하며 교만하게 행동하는데도 아무런 재앙이나 고난을 겪지 않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고난받는 의인의 현실과 억울함 (13~14절)
정작 하나님 뜻대로 살며 손을 깨끗하게 하고 마음을 지킨 자신은 종일 재난을 당하고 아침마다 징벌을 받는 현실을 마주했습니다.
이에 "내가 경건하게 산 것이 다 헛된 일인가?" 하는 깊은 회의와 박탈감을 느꼈습니다.
수평적·비교적 시각의 한계 (2절, 16절)
하나님과의 수직적 소통 없이 세상 사람들과 자신을 수평적으로 비교하다 보니 질투와 시기가 일어났고, 하나님을 떠날 뻔할 정도로 심한 영적 고통(실족 위기)을 겪었습니다.
이 깊은 분노와 고민은 17절에 이르러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비로소 풀리게 되며, 악인의 영원한 종말(심판)과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복을 깨닫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17]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시 73:16-17)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내가 그들의 종말을 깨달았다"라고 고백합니다. 개역한글 성경은 '결국'이라고 번역했습니다. 17절의 핵심 단어는 '성소'와 '종말(결국)'입니다. 우리말 어감으로는 '결말을 알았습니다'라고 이해하면 더욱 와닿습니다. 소설이나 영화를 보며 긴장감이 고조될 때 결말을 궁금해하듯이, 마침내 결말을 보게 된 것입니다.
성소란 도대체 무엇이기에 그 성난 뿔이 없어지고, 마음의 답답함이 시원히 해결되었을까요?
17절의 단어를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에서 성소는 히브리어로 '미크다쉬(Miqdash)'입니다. 성경에서 성소는 무엇을 하는 곳입니까? 출애굽기 25장 8절과 9절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성소를 지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출애굽기와 레위기에서 성소는 한마디로 '제사드리는 곳'입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을 제사장이라 부릅니다.
공간적으로는 성소이지만, 기능적으로는 제사드리는 곳입니다. "내가 어찌하면 이를 알까 고민하다가, 제사를 드리고서야 그 결말을 알았다"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사의 현대적 의미는 바로 '예배'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소통입니다. 인간이 마음을 하나님께 올려드리고, 하나님께로부터 응답을 받는 자리입니다. 성소에 들어가기 전 시인의 시각은 하나님과의 수직적 소통 없이 세상만 바라보는 수평적 시각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남과 비교하는 수평적 관점에서 불평을 토로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소에 들어가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과의 수직적 교통이 회복됩니다. 예배는 드리는 순서(기도, 찬양, 헌금)와 받는 순서(말씀, 축도)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과의 수직적 소통이 이루어질 때 인간은 수평적 지평을 넘어서게 됩니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하늘은 막히지 않습니다. 위를 바라보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가 밑을 내려다보신적이 있습니까?
그렇게 중요하게 여겼던 집들이 성냥갑만하게 보입니다. 아둥지동 사는 인간의 모습들이 개미처럼 작게 보입니다.
복잡하게 얽혀 있던 길과 방향, 길의 끝이 한눈에 보이는 것처럼, 하나님과의 소통을 통해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각을 갖게 될 때 비로소 삶의 방향과 결말이 보입니다. 이것이 바로 "종말을 깨달았나이다"라는 고백의 의미입니다.
한편 열왕기상 8장에서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지은 후, 성전은 '기도하는 곳'으로 강조됩니다. 솔로몬의 봉헌 기도에는 '제사'라는 단어 대신 '이곳을 향하여 기도하거든'이라는 표현이 반복됩니다. 따라서 성소의 두 번째 기능적 의미는 '기도'입니다. "기도를 드리고서야 그들의 종말을 알았다"는 뜻입니다.
성막(Tabernacle)은 이동식 텐트였고, 성전(Temple)은 고정된 건축물이었습니다. 반면 성소(Sanctuary)는 제사드리는 곳과 기도드리는 곳 모두를 아우르는 대표 명사입니다. 시인이 성소(미크다쉬)에 들어갔다는 것은 예배와 기도를 통해 수직적 차원의 영적 조망을 회복했음을 의미합니다.
기도를 통하여 천국을 맛보고 오면, 기도를 통하여 주님이 준비하신 영원한 세계를 여행해보고 나면 이제야 비로소 세상이 바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사 2:22)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
18절과 19절에서 시인은 악인이 미끄러운 곳에 던져져 파멸에 이르는 심판의 결말을 봅니다. 다니엘서 10장 14절의 '말일' 역시 '아하리트'입니다. 예배와 기도를 통해 마지막 때의 계시적 결말을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이에 시인은 21절과 22절에서 세상만 보고 짐승처럼 어리석게 불평했던 자신을 깊이 회개합니다.
그런데 연결되는 시편 74편은 충격적입니다. 그렇게 믿고 의지했던 신앙의 중심, 삶의 중심 성소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시편 74편은 73편과 깊은 연관성을 지닙니다. 시편 73편이 성소에서 개인의 신앙적 고민을 해결 받는 이야기라면, 시편 74편은 그 신앙의 중심이었던 성소가 파괴되는 국가적 비극을 배경으로 합니다.
열왕기하 25장에 기록된 예루살렘 성전 파괴는 히브리 백성들에게 설명 불가능한 사건이자 삶의 터전과 신앙의 기초가 송두리째 무너지는 경험이었습니다(시편 11:3).
74편 1절부터 11절은 무너진 성소를 보며 느끼는 처절한 절망을 토로합니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버리시나이까... 원수가 성소에서 모든 악을 행하였나이다.“
원수들이 도끼와 철퇴로 성소를 부수고 불태웠으며, 하나님의 회당을 훼파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성전이 무너졌다고 해서 하나님이 사라진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니엘은 성전 기명이 바벨론으로 넘어간 것을 두고 "주께서 넘기셨다"(단 1:2)고 기록했고, 에스겔은 포로지 그발 강가에서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이상을 보았습니다(겔 1:1). 성소가 무너져도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계셔서 온 세상 온 우주를 주관하시고 계십니다.
“그 사방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엎드려 말씀하시는 이의 음성을 들으니라”(겔 1:28)
시편 74편 12절부터 23절은 성전이 파괴된 절망 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드리는 위대한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예로부터 나의 왕이시라 사람에게 구원을 베푸셨나이다.“
성전이 무너진 자리에서 시인은 공간에 갇히신 하나님이 아니라,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바로 그분은 온 우주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예에서 바다를 가르시고 건져내신 구원의 하나님, 다니엘서를 통해 세계 역사의 시작과 끝을 보시며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만유의 주관자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13절과 14절에서 바다를 가르시고 리워야단(애굽과 바로의 상징)의 머리를 깨뜨리신 홍해 사건을 회상하며, 16절과 17절에서는 낮과 밤, 빛과 해, 땅의 경계를 세우신 창조의 역사를 노래합니다.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마련하셨으며 [17] 주께서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주께서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나이다”(시 74:16-17)
하나님은 건물 성소에만 갇혀 계신 분이 아니라,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늘의 하나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엘 엘리온)'이십니다.
이를 바탕으로 시인은 18절 이하에서 주의 멧비둘기 같은 백성을 들짐승 같은 바벨론의 손에 넘기지 마시고, 맺으신 언약을 기억하여 일어나 주의 원통함을 풀어달라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늘 우리도 우리의 믿음의 터가 무어진 시대를 삽니다.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시 11:3)
교회마저 타락하고, 빛된 삶을 살아야 할 목사들마저 탐욕에 길들여진 삯군처럼 되었습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할 교회마저 세상의 걱정거리와 염려가 되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무너지지 않는 하늘로 우리의 시선을 옮겨야 합니다.
우리를 실망시킬 인간이 아니라 절대 희망의 근원이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사람을 신뢰하는 사람과 육신을 그의 무기로 삼는 사람과 그의 마음이 주로부터 떠난 사람은 저주를 받으리라.”(렘 17:5, 한글킹)
“[7]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8] 그는 물 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렘 17:7-8)
왜냐하면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계시며 온 우주를 다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 3:1)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히 4:14)
이제 머지않아 주님께서 하늘 지성소의 문을 여시고 이 땅에 재림하실 것입니다. 그날에 우리의 모든 눈물과 수고를 기억하시며 상을 주실 것입니다. 그날을 바라보면 우리는 절대평안, 절대소망을 누릴 수 있습니다.
“[11]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 [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계 22:11-13)
그 사실을 기억하면 더 이상 뿔이 날 이유가 없습니다.
세계가 놀라워하는 위대한 조각가 미켈란젤로가 모세상을 조각할 때에 모세도 뿔난 모양으로 조각을 했습니다. 그 조각을 한 성경적 근거는 이것입니다.
“[29]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모세의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30]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더니”(출 34:29-30)
광채로 번역된 히브리어 케렌 qeren은 뿔로도, 광채(선)로도 번역될 수 있는 단어입니다. 이 구절을 라틴어 불가타역 번역본에는 "모세의 얼굴에 뿔이 난 것을 알지 못하였더라(quod cornuta esset facies sua)"라고 기록되면서, 르네상스 시대의 미켈란젤로는 이 텍스트를 충실히 반영하여 머리에 두 개의 뿔이 돋은 모세상을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입니다. 뿔이 난것이 아니라 광채가 난 것입니다.
우리는 뿔난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광채, 주님의 사랑의 성품을 세상에 나타내는 작은 빛들이 되어야 겠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https://youtu.be/rL2p6iuoP1Q?list=RDEHjLt0O-Zfc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