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아무튼, 스케이트 (*실제로 출판되는 <아무튼,> 시리즈는 생각만 해도 즐거운 것에 대한 에세이집 시리즈이다.)
240116 문예진
초등학교 6학년 겨울, 친구와 처음으로 스케이트를 타러 갔었다. 어려울 줄 알았던 스케이트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아서 곧잘 탔다. 그리고 그때를 계기로, 스케이트에 완전히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애정은 사라지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중학교 때 피겨 스케이트를 3년 정도 배웠던 걸로 기억한다. 물론 선수들이 경기 중에 보여주는 그런 수준에는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그 애정은 선수들 뺨치지 않았나 싶다. 고2때는 1년 정도 하키를 배우기도 했었다. 피겨와는 색다른, 거친 느낌에 하키도 재밌어 했던 걸로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빙상장에서 알바를 하고 있으니, 아무래도 빙상장을 벗어나기는 글렀구나,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든다. 스케이트는 인생에서 떼어 놓을래야 떼어놓을 수 없는 부분인 것이다(라고 말하면 너무 거창해 보이려나).
스케이트는 크게 세가지로 나뉜다. 피겨 스케이트와 스피드 스케이트와 하키이다. 이 세가지 종목은 생각보다 많은 부분이 다르다. 피겨는 개인 종목에 가깝고, 스피드는 때로 팀으로도 경기하지만 개인의 역량이 더 중요하다. 그러나, 하키만은 팀 스포츠인 만큼 팀워크가 아주 중요하다. 신발 모양도 다르다. 스케이트 신발은 날 부분과 부츠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종류에 따라 그 모양이 다 다르다. 일단, 피겨는 부츠가 발목 위로 올라오고, 끈은 발 끝부터 발목 부근까지 구멍을 통과해서 엮이다가, 발목을 타고 올라오면서는 고리에 걸어서 엮어 묶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신을 때마다 발목을 꼭 조이면서 고리에 걸어 엮은 뒤 묶어주어야 한다. 너무 헐거우면 점프나 스핀을 돌 때 발목을 다칠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하키 스케이트도 마찬가지로 발목 위까지 올라오는 부츠를 가지고 있는데, 피겨와는 달리 고리가 없다. 발목까지 구멍을 통과해 엮이며 묶는 방법이라, 신을 때마다 엮어줄 필요는 없고, 끈을 잡아 당겨 꽉! 조여주기만 하면 된다. 물론 그렇게 조이는 데에 힘이 엄청 들어간다는 것이 조금 불편한 점이다. 반면, 스피드 스케이트는 부츠가 복숭아뼈 근처에서 끝난다. 그리고 보통 끈으로 되어 있긴 하지만, 그 위에 한 번 더 덮을 수 있는 덮개 같은 것이 있기도 한다.
다음으로 피겨와 스피드와 하키의 차이는 스케이트 날이다. 세 가지 중 가장 날이 얇은 것은 스피드 스케이트이다. 가장 길고, 가장 얇다. 1.0~1.4mm 정도이다. 스피드 스케이트의 날은 곡선이 없고 일자로 이어지며, 얇은 직사각형처럼 생겼다. 반면, 피겨 날의 두께가 4.5~5.0mm로 가장 두꺼운데, 이는 점프 착지를 안정적으로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날의 전체적인 모양은, 앞쪽에 둥글게 톱니 같은 것이 있고 나이키 상표처럼 뒤쪽이 날카롭게 빠지면서 약간의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자세히 보지 않으면 직선으로 빠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피겨를 탈 때는 앞, 중간, 뒷 날을 기술에 맞게 따로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하키 역시 피겨 날과 비슷한 두께로, 가장 크게 다른 부분은 날의 전체적인 모양인데, 피겨에 있는 톱니가 없다. 또한 날의 전체적인 모양이 곡선인데, 육안으로도 확연히 보일 정도이다. 더하여 피겨와 스피드와 비교했을 때 날 길이가 짧다. 스피드는 앞뒤로 날이 더 빠져 있고, 피겨는 뒤쪽으로 날이 빠져 있는 데에 반해, 하키는 뒤로도 앞으로도 날이 빠져있지 않기 때문이다. 급격한 방향 전환과 속도 내기, 속도 줄이기를 위해서 그런 모양을 하게 된 것이다.
하키를 탈 때는 속력을 즐길 수 있고 급격히 방향 전환을 할 때의 즐거움이 크다. 피겨는 학 한 마리 같고, 스피드는 백조 한 마리 같다면, 하키는 독수리 같다. 퍽(축구에서의 공 같은 것)을 향해 돌진하고, 서로 부딪히고, 퍽을 이리저리 다루며 경기하는 모습은 한 마리의 맹수 같다. 반면, 스피드 스케이트는 우아하다. 화면 상으로만 봤을 때는 그런 느낌이 잘 들지 않았던 것 같은데, 실제로 눈 앞에서 보면 압도 당하곤 한다. 조용하고 빠르게 얼음 위를 아주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모습은 정말로 경이롭다. 코너를 돌 때 발 한쪽을 다른 발 위로 넘겨야 하는데(‘크로스’라고 부른다), 발을 내려 놓는 소리 없이 아주 부드럽게 동작들을 이어가는 모습이 멋있다. 마지막으로, 피겨는 그저 스포츠가 아니라, 예술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하나하나의 동작들을 익히고, 그들을 조합해 하나의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은 발레와도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피겨 경기 중 완벽에 가까운 프로그램을 만나게 되면, 예술 작품 앞에서 느끼는 짜릿함을 경험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김연아의 경기 중 2010년 벤쿠버 올림픽에서 보였던 쇼트 프로그램, ‘제임스 본드 007’에서 그런 감정을 크게 느꼈던 것 같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타는 것을 보는 것과 내가 타는 것은 확연히 다르다. 선수들이 타는 것만큼 탈 수는 없지만, 직접 발로 전해지는 느낌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얼음을 온 몸으로 느끼며 스케이트를 탈 수 있는 것이다. 얼음의 질에 따라, 정빙(얼음결을 따뜻한 물로 얇게 정리하는 것)이 된 직후 혹은 직전에 타느냐에 따라, 혹은 스케이트 날의 상태나 스케이트 부츠 상태에 따라 얼음을 느끼는 감각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스케이트의 날은 무뎌지기 마련이고 무뎌지면 얼음 위에서 너무 쉽게 옆으로 미끄러져버리곤 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타고 나면 날을 연마해주어야 한다. 물론 나는 선수가 아니기 때문에 일정 기간을 정해놓고 날을 연마하진 않는다. 그러나 그렇기에 오히려 날의 상태에 굉장히 예민해지게 된다. 날의 이가 빠지거나, 뭉툭해지면 바로 연마해주어야 편하게 탈 수 있기 때문이다. 연마된 날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것과, 그렇지 않은 날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것은 천지 차이다. 그리고 연마실마다 연마 스타일이 다르기 때문에, 이곳에서 연마했을 때와 저곳에서 연마했을 때 타는 스케이트의 감각도 다르다. 연마된 강도에 따라 스케이트를 타는 방법도 조금씩 달라져야 할 때가 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예민함을 애정한다.
스케이트를 얼음 위에서 밀고 나가면, 얼음이 사각사각거릴 때가 있고, 긁히는 듯한 때가 있고, 어떤 느낌조차 들지 않을 때가 있다. 나는 어떤 느낌도 없이 매끄러운 얼음을 가장 좋아하는데, 가장 좋은 빙질의 빙상장이더라도, 그런 느낌은 자주 느낄 수 없다. 정빙기가 돌고 난 직후, 얼음이 매끈매끈한 그때 만끽해놓지 않으면 가망이 없는 것이다.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닌 얼음은, 결국 울퉁불퉁해지기 때문이다. 사각사각거리는 느낌도 좋다. 만년필로 글자를 적어내릴 때의 느낌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긁히는 듯할 때는 스케이트 날이 걱정되어서 언짢아지곤 한다. 보통 많은 사람이 다녀간 빙상장의 얼음이 거칠어서 긁힌다. 그 외에도, 수영장과는 미묘하게 다른, 조금 더 건조한 느낌의 빙상장 냄새도 좋아한다. 피겨에서 스핀을 돌 때, 약간의 앞 날을 이용해야 하고, 그럴 때 얼음이 갈리는 것을 느끼는 것을 좋아한다. 점프를 할 때, 왼발의 상태에 심혈을 기울이는 것도 좋고, 점프를 하기 직전과 날이 얼음에서 떨어지는 순간에 알게 되는 점프의 성공 여부도 재미있다. 그렇게 열심히 타고 나오면, 날에 얼음조각이 붙어 있는 것도 좋아한다. 그리고 손으로 날을 스윽 쓸어주면 얼음 조각들이 후두둑 떨어지는 것도 나름 통쾌하다.
이렇게나 좋아하던 스케이트를 더이상 배우지 못하게 되었을 때의 나는 나의 모든 꿈이 사라져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그렇게 나의 모든 포기를 ‘스케이트'라는 것에 밀어넣어 스케이트를 ‘포기'에 대한 제유提喩의 대상으로 삼았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스케이트는 내 삶의 일부분이지만, 동시에 일부분일 뿐이라는 사실을 안다. 따라서, 스케이트는 내 삶의 일부로만 남게 되겠지만, 일부만으로도 충분히 사랑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일부분 뿐이라서 사랑할 수 있는 것도 있음을, 이제는 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스케이트를 타다보면, 너무 마음에 드는 부분들이 많아서 가끔은 속절없어짐을 느낀다. 하릴없이 어떤 것에 빠져드는 것. 어쩌면 사람 간의 사랑과 닮은 부분일지도 모른다. 앞으로도 이러한 애정이, 삶의 일부분으로써 소중한 것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앞으로 내 인생에 있어서, 스케이트 외에도 어떤 것들을 사랑하게 될지, 또 그것들이 내 삶에 어떤 식으로 개입할지 기대가 된다. 그렇게 좋아하는 것들과 함께 한다면, 충분히 행복한 삶이지 않을까. 꼭 사랑에 보답받지 못하더라도. 나의 삶은 그렇게 충만해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