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472
4월26일[부활 제3주간 수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24B--TmkAGg
(최남식 베드로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우리에게도 깊은 회심, 심오한 삶의 이동이 필요합니다!>
가끔 저 자신도 돌아보고, 주변 형제들도 살펴보면서 드는 한 가지 진리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참으로 부족하고 나약하며 죄인인 우리를 당신 구원 사업의 도구로 선택하시고, 적극적으로 활용하신다는 것입니다.
때로 놀라운 일도 봅니다. 하나 하나 살펴보면 너무나도 부족한 당나라 군사들처럼 보이는데, 그래서 우왕좌왕, 티격태격하면서도, 이런 형제들이 힘을 합쳐, 놀라운 기적을 창출해 나간다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를 선택하시고 활용하시는 주님의 선택은 놀라움에 앞서 충격적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은 회심 이전의 바오로 사도가 어떠한 삶을 살았었는지, 살짝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사울은 교회를 없애 버리려고 집집마다 들어가 남자든 여자든 끌어다가 감옥에 넘겼다.”(사도행전 8장 3절)
보십시오.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에 벌어진 낙마 사건 이전 사울은 정통 율법학자요 바리사이로서, 앞날이 창창한 청년 지도자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극단적 율법 중심 주의로 무장한 채, 율법을 거스르는 행태를 보이는 사람을 보면 피가 거꾸로 솟구쳤습니다.
사울의 머릿속은 온통 세속적인 영예와 헛된 기대로 가득했습니다. 혈기왕성하다 보니 야심도 크게 품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사울은 유다최고회의에 허락을 구해 체포영장까지 발부받았던가 봅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율법에 반하는 삶을 사는 이단으로 규정하고, 그들을 체포하고 박해하는데 최선봉에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참으로 묘하십니다. 당시 유다 최고 지도자들 가운데는, 예수님과 그리스도교에 호의적이었던 니코데모나 가말리엘도 있었는데, 그들은 제쳐주고, 그리스도교 박해와 관련해서 넘버원이었던 사울은 당신 일꾼으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잘 나가던 사울을 깊은 바닥으로 내동댕이치십니다. 더 이상 내려갈 수 없을 정도로 심한 바닥 체험 이후, 그를 환골탈태시키십니다. 그리스도교 박해에 가장 열렬하던 적대자에서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주님을 사랑하는 사도로 변모시키십니다.
하느님은 묘하신 분, 오늘도 한없이 부족한 우리를 도구로 삼아 당신의 인류 구원 사업을 펼쳐나가십니다. 그분의 충실한 협조자가 되고자 한다면, 오늘 우리에게도 바오로 사도에게 벌어졌던 그런 깊은 회심, 심오한 삶의 이동이 필요합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cN7HqzXgPzM
++++++++++++++++++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법>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생명의 빵”이라고 하시고 당신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빵은 우리에게 힘을 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 빵을 보고 믿는 사람은 구원을 얻는데 그렇다면 생명의 빵을 보고 믿는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오래전에 개신교 신자에게 “당신을 구원받았습니까?”라는 질문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제가 잘 모르겠다고 머뭇거렸더니 그러면 구원받지 못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돌아가셔서 우리가 완전히 죄에서 해방되었음을 믿는 순간이 있고 그 순간을 기억하지 못하면 아직은 주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세례 때 이것을 믿습니다. 그럼, 그때 구원받은 것일까요?
이는 한 번에 구원받고 그 구원이 영속된다는 잘못된 믿음에서 나오는 생각입니다. 어린아이가 태어나면 바로 인간이 될까요? 아이는 태어나서 인간이 되려면 20년 정도는 부모와 사회에서 교육받아야 합니다. 세 살 때부터 여덟 살까지 개와 함께 살았던 옥사나 말라야는 성인이 되어서도 자신을 개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인간이 되지 못한 것입니다. 인간이 되어가는 것처럼 하느님의 자녀도 되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견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견진을 제대로 살고 있다면 구원을 확신해도 됩니다. 고토홀드 에프라임 레싱(Gotthold Ephraim Lessing, 1729-1781)은 독일의 시인, 극작가, 문학 비평가입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현자 나탄' (Nathan der Weise)은 1779년에 발표된 5막의 희곡입니다. 현자 나탄에서 나오는 반지 이야기는 작품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야기로, 종교 간의 이해와 화합을 상징하며, 진리의 상대성에 대해 고찰하게 합니다. 이 이야기는 나탄이 자기 아들로 생각하는 기사 템플러에게 말하는 우화입니다.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옛날 어느 왕족은 전통으로 소중한 반지를 물려주어 왕위와 가문의 통치자가 되게 하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그 반지를 착용하고 살면 신과 백성들로부터 사랑과 명예, 부를 모두 받을 수 있다고 전해집니다. 왕은 그 반지를 끼고 그런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왕은 세 명의 아들이 있었으며, 모두 그의 사랑을 동등하게 받았기에 누구에게 반지를 물려줄지 결정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왕은 반지를 복제하여 세 개의 완전히 같은 반지를 만들어 세 명의 아들에게 각각 하나씩 주었습니다. 그 후 왕이 죽자, 아들들은 각자가 진짜 반지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며 소송을 벌였습니다. 재판이 진행되어 판사는 아무도 진짜 반지를 가진 사람을 알 수 없다고 판결하며, 세 명의 아들에게 각자의 반지가 진짜라고 믿고 선하게 살아가라고 말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하려고 하는 것은 반지도 중요한 반지를 낀 이의 자세입니다. 내가 진짜 반지를 끼고 있다면 하느님과 이웃들의 사랑을 받기 위해 노력할 것이고 그것 자체가 반지가 진짜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반지는 그 사람의 착한 뜻을 완전하게 해 주는 도구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와의 동행도 그런 효과를 냅니다. 그리스도를 본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당위성을 안고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엄마와 함께 있는 아이가 엄마가 원하지 않는 일을 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뜻은 무엇일까요? 아기도 엄마처럼 언젠가는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엄마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새로 태어남은 줄탁동시입니다. 그분과 나의 협력으로 이루어지고 그분이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그분에게 협력하고 있습니다. 착해지기 위해 계속 고해성사를 멈추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분명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그분과 동행하며 나 자신과의 싸움을 멈추지 않는다면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여전히 그리스도처럼 될 수 없다고 믿고 걸음마나 옹알이를 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면 믿음을 잃었으니 그 상태로는 다시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또다시 태어나는 과정은 고해성사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구원의 확신을 두고 살아갑시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4년 동안 신문사의 주방을 도와주시던 어르신이 ‘병가’를 얻었습니다. 다행히 팔순 잔치를 잘 마치셨고, 자녀들과 이웃들이 축하해 주었습니다. 어르신은 참 부지런하였습니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도 기쁘게 하였습니다. 마당에 텃밭을 일구어서 깨, 방울토마토, 고추, 호박을 심었습니다. 신문사 직원이 먹을 만하였고, 이웃들에게도 기꺼이 나누어 주었습니다. 성모상 앞에는 코스모스를 심었습니다. 바람이 불면 꽃들이 성모님 앞에서 춤을 추는 것 같았습니다. 어르신은 참 알뜰하고 검소하였습니다. 마트에서 준 비닐봉지가 큰 박스로 있었습니다. 냉동실에는 언제나 물건이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창고에도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물건이 많았습니다. 어르신이 건강을 회복하여 예전처럼 밝은 모습으로 지내시기를 기도합니다. 어르신의 병가를 계기로 창고와 냉장고 정리를 하였습니다. 이제 사람을 새로 구하기보다는 저도 홀로서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예전에 토론토에서 지낼 때도 혼자서 청소하고, 빨래하고, 밥해 먹고 지냈습니다. 직원들도 저의 홀로서기를 응원하였습니다.
문명이라는 옷을 입으면서 예전에는 당연히 하였던 일들이 잊히기도 합니다. 도시에서 지내면서 물질적인 풍요를 공유하지만 자연의 향기가 사라지기도 합니다. 사제서품을 받으면서 늘 주방을 도와주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청소를 해 주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그것에 익숙해져서인지 음식을 준비하는 것도, 청소하는 것도 남의 일인 것처럼 생각하였습니다. 미국에서 보니 많은 사제가 주방을 도와주는 사람 없이 혼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사제들이 한국처럼 바쁘지 않아서인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혼자서 하는 것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변을 돌아보니 한국에서 교포사목으로 온 신부님 중에도 혼자서 음식을 준비하고, 청소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재정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사람을 구하기도 쉽지 않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위해서 손수 불을 피우시고 음식을 마련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너희도 그렇게 하라고 본을 보여 주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예전에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라는 책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눈과 귀는 스마트 폰의 검색 창을 보고, 유튜브의 소식을 듣습니다. 그래야 살아 있는 것 같고, 그래야 어딘가에 소속된 것 같습니다. 정보의 바다에서 진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쓰레기의 바다에서 헤매는 것 같습니다. 문명의 옷이 우리의 오감을 즐겁게 해 줄 수는 있지만 우리의 이성과 영성을 깊게 하지는 못합니다. 우리의 이성과 영성을 풍요롭게 해 주는 것은 쉴 새 없이 깜빡이는 검색창의 커서에 있지 않습니다. 신선하고 새로울 것도 없는 가십거리 뉴스에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아들을 보고, 믿는 것입니다. 아들을 보고 믿는 것이 현실에서 풍요로운 삶을 약속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들을 보고 믿는 것이 성공과 권력을 보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아들을 보고 믿는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스테파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스테파노는 교회에서 첫 번째로 순교하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스테파노는 이 세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살았고, 천국 시민의 자리를 차지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교회에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박해가 심해질수록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늘었습니다. 박해가 심해질수록 교회는 예루살렘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더 큰 세상으로 나갈 수 있었습니다. 사도들은 박해의 풍랑을 넘어서 마귀를 쫓아냈고, 병자들을 고쳐주었습니다. 사도들에게 박해도, 고통도, 죽음도 두려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은 이미 영원한 생명을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문명이라는 옷이 우리를 따뜻하게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끄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이라는 옷만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6,35-40: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35절) 주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삶 전체를 영원한 생명으로 바꾸어 놓을 빵이시다. 본래 죽지 않도록 창조된 인간이 이제 죽음을 이기게 되었다. 이 생명의 빵을 먹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다. 생명의 빵께서 우리를 생명의 말씀으로 회복시켜 주시고 참 생명을 주셨다. 그들은 성경도 알고 예수님께서 일으키시는 기적도 보았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아버지께서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37절)이라는 말씀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37절)이라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순명하신다. 당신의 뜻은 바로 아버지의 뜻을 행하시고 아버지의 뜻을 완수하는 것이다. 십자가에 돌아가시기까지 아버지의 뜻을 행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자체가 아버지의 뜻이고 그 권능이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그런 일들을 하며 당신을 닮도록 초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아버지 뜻에 바치셨다. 우리도 하느님의 뜻을 행하도록 우리를 바칠 수 있어야 한다. 이제는 이 생명의 빵에 대한 응답이 올바로 이루어져야 한다.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40절)
유대인들은 보았지만 믿지 않았다. 아들을 보고도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 이들은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지 못했지만 믿고 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보지는 못했지만 믿는 우리가 행복하다고 말씀하셨다. 사도 토마스가 주님의 상처를 확인하고 싶어 했을 때, 주님께서는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하셨다. 사도들은 정확하게 증언해야 했기에 보았어야 했고 우리는 그 증언을 듣고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 우리의 완성을 위해 노력하며, ‘마지막 날’이 될 때까지 완성될 것을 우리는 믿고 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아드님께로 인도하시고 아드님은 그들을 받아들이시어 생명을 주는 성령을 부어주심으로써 다시 살리시며 완전히 새사람이 되어 죽지 않게 하신다. 이렇게 우리의 구원은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아드님께서 주신다.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40절) 이 말씀은 믿음, 곧 생명으로 넘어감이 첫 번째 부활이며,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40절)라는 말씀이 두 번째 부활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생명의 빵이신 그분을 믿음으로 새로이 태어나야 하고, 마지막 날에 참으로 부활하는, 구원받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참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
=====================
[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내가 생명의 빵이다.”라는 말씀은, “내가 바로 메시아다.”라는 뜻이기도 하고, “나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생명의 빵’이라는 말은, 예수님만 믿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아닌 다른 것, 또는 다른 사람은 ‘생명의 빵’이 아닌 ‘죽음의 빵’입니다. <무슨 독약이라는 뜻이 아니라, 허무하게 끝난다는 뜻입니다.>
“나에게 오는 사람, 나를 믿는 사람”이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충실하게 사는 사람을 뜻합니다.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라는 말씀과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설명하신 말씀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것은 ‘영원히 안 죽는’ 단순한 일이 아니라, ‘완전한 행복’을 누리면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여기서 ‘배고픔’과 ‘목마름’은 인간 세상의 고통과 불행들을 상징합니다.>
이 말씀에서 ‘삶의 질, 유병장수’ 같은 말들이 연상됩니다. 장수를 누리면서도 병고에 시달린다면, 오래 사는 것 자체가 고통이 되는 것처럼, 만일에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에 ‘영원히 사는 것’만 있고 ‘완전한 행복’이 없다면, 그 나라에서 영원히 사는 것은 곧 ‘영원한 고통’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것을 희망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은 ‘완전한 생명’이고, ‘완전한 행복’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기 때문에, 그것을 희망합니다.
“그러나 내가 이미 말한 대로, 너희는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36-40)
여기서 “너희는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라는 말씀은, “너희는 왜 내가 하는 일을 보고서도 나를 믿지 않느냐?”라고 안타까워하시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빵의 기적’을 직접 체험했고 그 빵을 먹었으면서도, ‘빵’만 보고 그 빵을 주신 예수님은 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빵만 보았으니 빵만 찾았고, 예수님을 보지 않았으니 예수님에 대한 믿음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그랬던 것은 아니고, 예수님을 믿고 따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이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따로 선택하신 사람이 있다는 뜻으로 생각하기가 쉬운 말씀인데, 그런 뜻은 아니고, 인간 쪽의 능동적인 신앙생활을 뜻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앞의 5장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나는 너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안다.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른 이가 자기 이름으로 오면, 너희는 그를 받아들일 것이다.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한 분이신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은 추구하지 않으니, 너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요한 5,42-44)
유대인들 경우에, ‘사랑 없이’ 겉으로만 신앙생활을 하는 위선자들은 예수님을 안 믿었습니다. 반대로 ‘사랑 가득한’ 신앙생활을 하는 진실한 신앙인들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또 하느님을 믿는다고 주장하면서 세속의 영광만, 즉 세속의 부귀영화만 추구하는 자들은 예수님을 안 믿었고, 참된 구원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사랑 가득한’ 신앙생활을 하면서 참된 구원을 추구하는 진실한 신앙인이 바로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주시는 사람”입니다.
유대인들이 아닌 경우에도, 즉 하느님을 모르고 살던 이방인들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원한 구원을 추구하는 사람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사람은 복음에 대해서도 예수님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특정인을 편애하시거나 차별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쪽에서 무엇을 희망하고 추구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여기서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끝까지 보호하겠다.”라는 약속입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이라는 말씀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초대’나 ‘부르심’으로, 그리고 우리가 하는 신앙생활을 ‘응답’으로 표현할 때가 많은데, 실제로는 우리가 간청하고 예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사실 신앙생활은 내가 살고 싶어서, 내가 원해서 하는 생활입니다. ‘구원’도 ‘영원한 생명’도 내가 얻기를 원하는 것이고, 내가 그것을 원하니까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런 나에게 예수님께서 그것을 주겠다고 약속하시는 것, 바로 그것이 주님의 은총이고 자비입니다. 다음 말씀은 우리의 처지를 잘 나타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루카 18,7)
‘밤낮으로 부르짖는’ 그 사람이 ‘바로 나’입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들은 나의 부르짖음에 대한 응답이고, 내가 청하는 것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수원가톨릭 대학교 신학 대학 교수)]
오늘 복음은 마르코 복음서의 ‘긴 결말’(16,9-20 참조)에 속하는 부분으로 2세기 무렵 덧붙여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과 승천 이야기를 보충하고 싶었던 이들이 다양한 전승 자료들을 수집하고 편집하여 빈 무덤 이야기로 마무리되는 마르코 복음서에 이를 더한 결과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도 목격 증인들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완고하여 믿지 못하는 제자들(16,11.13.14 참조)을 세상의 복음화를 위한 도구로 쓰고자 하십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떠나가서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복음 선포는 서로 다른 두 가지 결과로 드러날 것입니다. 누군가는 복음을 믿을 것이고, 다른 누군가는 복음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믿는 이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이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겠다는 결의와, 그분과 함께 부활하리라는 희망으로 세례를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믿고 세례를 받는 이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와 반대로 믿지 않는 자는 멸망할 것입니다. 복음의 수용과 거부에 따른 결과는 극명한 차이, 곧 구원 아니면 멸망으로 이어집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복음을 전하고, 모든 이를 구원으로 인도하고자 하였습니다. 오늘 선포되는 복음을 듣고 있는 우리는 그 복음을 진정으로 믿으며 살아가고 있는지요?
=====================
[안동교구 임준기 다미아노 신부님]
<신뢰심>
‘신뢰심’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참으로 중요하고도 필요한 삶의 조건 중의 하나입니다. 신뢰심을 잃게 되면 그 사람은 어느 집단에든지 쉽게 소속될 수 없으며, 결국 외톨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만큼 신뢰심을 얻는다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의 이익보다는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서 공동체가 바라는 일을 해나가는 사람은 공동체의 신뢰심을 얻게 되고 또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면서 행복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은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심지어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철저한 신뢰심의 관계 속에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우선으로 실천하셨습니다.
이웃보다는 내가 먼저, 하느님보다는 돈과 명예가 우선시 되는 이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통해 ‘신뢰심’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나’보다는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 세상’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는 사람이 많을 때 서로에 대한 신뢰심은 회복될 것이고, 세상은 행복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요?
=====================
[전주교구 경규봉 가브리엘 신부님]
<박해를 통해서 더 널리 전파되는 복음>
예루살렘 교회는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았다. 그리하여 사도를 제외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루살렘을 떠나 도처로 흩어지게 되었다.
박해로 인해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은 사마리아를 비롯하여 페니키아, 키프로스, 안티오키아에까지 이르기까지 널리 복음을 전파했다.(사도행전 11장 19절)
흩어진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가장 먼저 필립보가 소개되는데,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일곱 봉사 중의 한 사람이다.(사도행전 6장 5절)
그는 사마리아의 한 도시에서 복음을 전하였는데 그의 말에는 권위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함으로써 사마리아 사람들은 모두가 그가 전하는 말씀을 믿었다.
그는 영적인 불구자뿐만 아니라 육신적인 불구자까지 치유하였다. 소외된 불구자들의 쾌유, 악령으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사람들이 누리는 기쁨은 복음이 받아들여진 곳에서 일어나는 필연적인 결과이다.
교회의 역사는 박해와 순교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교회는 초창기부터 많은 박해를 받았고 많은 이들이 순교했다.
그러나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면 여러분은 그들을 없앨 수 없을 것입니다.”(사도행전 5장 39절)라는 율법학자 가믈리엘의 말처럼 박해를 통하여 교회를 없앨 수는 없었다.
많은 이들이 박해받고 순교하기도 했지만, 교회는 그럴수록 더 널리 전파되고 성장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피해 각처로 흩어진 곳마다 주님의 복음이 두루 전파되었다.
그리고 복음이 전파된 곳마다 많은 이들이 온갖 질병과 악령으로부터 해방되어 주님께서 주시는 자유와 평화,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이처럼 박해 속에는 복음을 온 세상에 널리 전파하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섭리가 숨겨져 있었다. 당시 초대 교회 사도들은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뿐만 아니라 땅 끝에 이르기까지”(사도행전 1장 8절)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에만 머물러 있었다.
이에 하느님께서는 교회가 유대인들로부터 박해를 당함으로써 예루살렘을 떠나도록 하셨고, 이를 통하여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는 전기를 마련하셨다.
세상에는 도저히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범죄와 악, 재앙, 온갖 불의와 부정부패 등등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난다. 하느님을 믿으며 의롭고 선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고통과 억압을 당하고 죽기까지 한다.
이러한 속에서 ‘하느님이 어디 계시냐? 하느님께서 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고 울부짖으며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처럼 느낄 때도 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하늘 아래서 하시는 일은 아무도 알 수 없다.”(전도서 8장 17절)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까지 불의하게 죽임을 당하도록 하심으로써 인류를 구원하셨다. 하느님께서는 그처럼 죄와 악을 통해서도 우리를 구원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기에 참고 기다릴 따름입니다.”(로마서 8장 25절)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에 따라 참고 기다리자. 악을 통해서도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섭리를 믿고 인내하며 기다리는 신앙인이 되자.
=====================
[부산교구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님]
<비상시기>
주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주어질 놀라운 능력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놀라운 능력은 말씀하신 대로 모두 이루어졌습니다.
더러운 영을 쫒아 내고 병든 이를 고치고 독사에 물려도 죽지 않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기적과 표징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주님께서 오시기 훨씬 전에도 비일비재하게 기적이 일어난 사실이 기록되어 있으니까요.
때문에 이집트 탈출 시기의 모세와 엘리야 예언자 시대, 그리고 엘리사 예언자의 시기에 이어 초대교회 시대에 유독 눈에 띄는 기적 사건이 흔했던 일에 주목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시기들이 모두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비상시기’였음을 깨닫습니다.
신앙에는 단계가 있습니다. 믿음 생활에도 성장하고 성숙해 나가는 과정이 있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가르침도 상대가 지닌 믿음의 수준에 따라 달라지고 신앙의 강도에 따라 변화되며 받아들이는 의지력에 의해서 차이가 있는 까닭이라 짚어 봅니다.
그분의 말씀은 어린 신앙인들에게 달래듯 살갑고, 젊은이에게 사용하는 어투는 열정적입니다. 또 성숙해진 신앙인에게는 행하고 실천할 것을 권하실 뿐 아니라 그분의 생각과 다짐까지도 일러 주시지요. 하느님께서 세상에 보여 주신 가장 큰 기적은 우리에게 생명의 빵을 선물하신 일입니다.
그 기적적인 사건은 우리를 자신의 힘이 아니라 그분의 기운으로 숨 쉬며 살아가게 하셨으니까요. 그분의 몸과 그분의 피로 새로워진 우리들은 이제, 병이 치유 받는 기적보다 훨씬 근사하게 병을 얻었을 때에도 감사하는 기적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부족함 없어 감사하는 삶보다 훨씬 멋진 없는 중에도 나누는 기쁨을 살게 되었습니다. 내 뜻이 아니라 그분의 뜻에 따라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기적의 선물을 선포하는 엄청나게 놀라운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수많은 기적들이 수많은 그리스도인을 통해서 계속 일어나게 하시는 하느님의 뜻은 이때가 바로, 지금이 바로, 숨 가쁜 비상시기라는 걸 밝히심이라 믿습니다.
그분께서 꼭 살리기 원하시는 그 사람에게 그분으로부터 받은 사랑과 이해로 감싸는 기적을 드러내 보이십니까? 용서와 나눔으로 품어주는 징표를 보여 그들에게 새로운 기쁨 표징을 선물하십니까? 그래서 그들의 삶 안에 땅의 것이 아닌 하느님의 것에 의한 전혀 새로운 큰 기쁨이 넘치도록 하십니까?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그 한 사람의 영혼을 위해 기적을 드러내 보일 사람은 바로 우리라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희망이 오늘을 감당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희망이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는 구원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과연 구원받게 될 것인가? 에 대한 걱정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예수님을 믿는다면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아버지께서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날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지금 주어진 삶에서 주님께서 주신 가르침에 순종하면 족합니다.
사실 믿는다는 것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온전히 자신을 내어 맡기는 수동의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연 그것이 그러한지는 모른다 해도, 그렇다면 그런 줄 알고, 시키는 대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스승의 지도에 자기의 주견과 고집을 세우지 않고 오직 순종하는 것이 신심입니다.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저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의탁하는 믿음의 삶이 주님을 더욱 깊이 만나게 해 줄 것입니다. 그분의 가르침을 믿고 실천하면 할수록 더 큰 믿음을 지니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에 예수님을 보내주신 뜻은 영원한 생명에로 우리를 초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느님의 뜻은 미래의 사건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미래는 오늘을 통해서 오기 때문에 지금 그때를 지금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더 좋은 날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날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오늘의 삶이 중요합니다. 하늘의 문은 세상에서 이미 열리기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봄에 씨를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하고 선언하셨습니다. 결코,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을 영원한 생명의 빵을 이미 우리에게 양식으로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생명의 빵을 먹어야 합니다. 미사 안에서 주어지는 성체는 우리를 위한 생명의 양식입니다. 생명의 양식에 대한 갈망이 커졌으면 좋겠고 그에 합당한 준비를 해야 하겠습니다. 성체는 살아계신 예수님이십니다.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는 고해신부에게 말했습니다. “신부님, 저는 배가 고픕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위하여 이 영혼에게 양식을 주십시오. 성체이신 주님을 주십시오. 주님을 모실 수 없을 때는 성당으로 가서 그분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또 바라봅니다. 저는 이렇게 만족을 얻습니다.” 성 알도 마르코치는 “저는 식사를 거르는 것보다 영성체를 못하는 것이 더 견디기 힘듭니다.”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성체를 모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성체를 사랑하려고 노력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생활화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도, 잊지 않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모두를 내어 주셨듯이 나도 내어 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전적인 자기희생의 삶, 겸손의 삶을 추구하고 이웃을 위해 밥이 되어주고, 영양이 되어주는 삶을 엮으시길 희망합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하는 마음의 자리에 세상 걱정만 가득해서 도무지 예수님께서 편하게 계시지 못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예수님을 모시는데 그 어떤 장애물도 없기를 기도합니다. “영성체는 우리의 그리스도교적 생명력을 지탱하는 힘입니다. 우리가 육신에 영양을 주기 위해 밥을 먹어야 하듯 우리의 영혼을 위하여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성 가롤로 보르메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공원을 산책하다가 영산홍이 활짝 핀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활짝 핀 꽃이 너무 예뻐 가까이에서 자세히 보고 싶어서 다가갔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 많은 꽃송이가 조금씩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떨어져 있었을 때는 모두 똑같아 보였는데, 완전히 똑같다고 할 수 없었습니다. 하긴 사람도 모두 다르지 않습니까? 겉모습이 똑같아 보이는 쌍둥이도 부모와 가족의 눈에는 전혀 다르게 보입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대화라고 하는 기도를 생각해 봅니다. 모든 기도가 똑같을까요? 사람이 모두 다르듯, 하느님과 인간의 대화 역시 모두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같은 어조와 음색을 가진 목소리로 같은 기도문을 수없이 반복해서 바치는 것은 어떨까요? 이 기도 역시 늘 새롭게 됩니다. 주님의 영이 늘 새롭게 우리에게 다가오시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기도만 해서 지루하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언어이고 똑같은 내용이라도 전혀 다를 수 있음을 베르나데트 수비루 성녀를 통해서 깨닫습니다. 성녀는 ‘성모송’ 이외의 다른 기도를 바칠 줄 몰랐다고 합니다. 하지만 성모님의 발현을 18번이나 목격하실 수 있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은 기도 같지만, 그 안에 자기의 마음을 정성껏 담았기에 그리고 주님께서도 매 순간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시기에 매번 다른 기도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기도는 하느님의 뜻을 찾을 때 시작된다는 어느 신비가의 말씀이 와닿습니다. 성호경 한 번 긋는 것도 어떤 마음을 담느냐에 따라 어떤 기도보다도 가장 훌륭한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똑같은 기도만 외워도 성인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도 안에 자신의 마음을 담아야 합니다. 이 마음에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 주님의 뜻을 찾고 실천하려는 의지 등을 담을 때, 주님의 참 자녀가 되어서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생명의 빵이다.”(요한 6,35)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밥’을 주식으로 먹지만, 이스라엘 사람은 주식으로 ‘빵’을 먹습니다. 아무튼 우리 인간은 빵이나 밥으로 대표되는 음식을 먹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바로 우리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믿는다는 것은 그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분이 하신 일을 그대로 인정하는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의 기도는 달라도 뭐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똑같이 성호경을 그어도 주님 앞에서는 다른 내용이 되고 맙니다.
믿음은 단순히 ‘믿는다’라고 말하는 알맹이 없는 믿음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오신 예수님처럼, 우리 역시 하느님의 뜻인 사랑을 실천하는 적극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때 나의 기도가 진정한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성인이 될 수 있습니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을 보았으니 나는 믿습니다>
요한 6,35-40 (생명의 빵)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이르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미 말한 대로, 너희는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당신을 보았으니 나는 믿습니다>
당신을
보았으니
나는 믿습니다
길을
보았으니
나는 걷습니다
사랑을
보았으니
나는 사랑합니다
희망을
보았으니
나는 희망이 됩니다
살림을
보았으니
나는 살립니다
당신을
보았으니
나는 당신처럼 됩니다
=====================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어떤 상황에서도>
"그날부터 예루살렘 교회는 큰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사도들 말고는 모두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다. 한편 흩어진 사람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였다.“
오늘 사도행전이 얘기하는 초대교회 상황은 그야말로 ‘격동’, ‘격변’입니다. 그리고 격동과 격변으로, 교회 상황은 바람 앞의 불과도 같은 상황입니다.
이렇게 계속 가면 교회는 망할 것 같습니다. 모두 흩어졌다고 하는데, 모두 흩어지면 교회는 망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두 가지 때문에 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는 사도들은 흩어지지 않고 예루살렘에 남아있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흩어진 사람들이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먼저 사도들이 흩어지지 않고 예루살렘에 남은 것을 보겠습니다. 사도들도 나중에는 로마로 가고 곳곳으로도 가겠지만 당분간은 예루살렘을 딱 지키고 있습니다.
동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어떻게 이렇게 동요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하느님을 믿고 주님의 사랑을 믿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모든 것이 변해도 변하지 않으시는 하느님, 고통과 죽음이 닥칠지라도 변함없는 주님 사랑을 믿기 때문이고, 무엇보다도 주님이 돌아가신 최악을 이미 경험했고, 죽음에서 다시 살리신 하느님 부활 능력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격동의 상황에서는 동요하지 않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우리에게 있어야 하고, 그 동요 없음이 하느님께 대한 믿음 때문임을 구성원들이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 박해 때문에 흩어진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 것을 보겠습니다. 그런데 흩어진 신자들이 오히려 하느님 말씀을 전한 것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습니까?
그것은 단순합니다. 흩어졌어도 그들이 하느님 말씀을 간직했기 때문입니다. 뒤집어보면 급박한 상황에서도 하느님 말씀을 놓치거나 잃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국전쟁 때 피난 가는 그 급박한 상황에서 모든 짐을 다 놓고 떠나도 가장 소중한 것 하나만은 갖고 떠나듯 신자들은 말씀을 간직하고 떠난 겁니다.
이렇게 신자들이 흩어지니 하느님 말씀이 온 세상으로 퍼져나갑니다. 싸우고 결별하고 절망하고 흩어졌다면 교회는 망하고 말았을 텐데 박해 때문에 흩어지고 말씀을 안고 떠나니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이것을 보는 우리는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를 봅니다.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퍼지는 놀라운 섭리 말입니다.
초대교회 신자들도 처음에는 흩어지는 것이 퍼지는 것인 줄 몰랐을 겁니다. 자기들이 흩어지는 것이 복음이 선포되는 것인 줄 정녕코 몰랐을 겁니다.
처음에는 흩어져 자기들 신앙이나 간직하고 살려는 마음뿐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말씀을 간직하고 있으니 땅속의 씨가 한참 뒤 싹을 틔우듯이 말씀이 싹이 돋고 민들레 홀씨처럼 퍼져나간 것입니다.
우리나라 박해 때도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박해 때문에 피신한 신자들이 교우촌을 이루었고, 우리 신앙이 곳곳으로 퍼져나가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말씀을 간직하는 것,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 사랑을 믿는 것,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도 복음을 전파하는 것 이것이 신앙 공동체요 부활의 공동체임을 오늘 초대교회에서 배우는 우리입니다.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생명의 빵>
-“예수님은 영원한 도반이시다”-
“온 땅은 춤추며 하느님을 기리라. 그 이름의 영광을 노래하여라. 빛나는 찬미를 주님께 드려라.”(시편66,1-2)
논어 맨처음에 나오는 군자삼락(君子三樂)은 언제 읽어도 공감이 갑니다. 생명의 빵이신 주님을 영원한 도반으로 둔 우리 구도자들이자 수행자들에게도 그대로 들어맞는 말씀입니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친구가 있어 멀리서 찾아오면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
“사람들이 나를 몰라주더라도 화를 내지 않으면 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人不知而不溫 不亦君子乎;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을 찾는 끊임없는 지칠줄 모르는 갈망이 진리를 공부하게 하고 도반을 찾게 하고 마음의 평화에 이르게 함을 깨닫습니다. 어제 수도원을 찾은 여러 도반들과의 진실하고 소박한 만남도 참 반갑고 기뻤습니다. 늘 흘러야 맑은 물이든 늘 흘러야 맑은 삶입니다. 늘 한결같이 주님을 목말라, 배고파 찾을 때 맑은 삶, 깨어 있는 삶입니다.
“밖으로는 산
천년만년 주님을 기다리는 산
안으로는 강
천년만년 주님 향해 흐르는 강”
참으로 주님을 찾는 이들은 이런 ‘산(山)과 강(江)’의 영성을 삽니다. 생명의 빵이신 주님만이 우리의 근원적 목마름과 배고픔을 해결해 주기 때문에 끊임없이 기다리는 주님이요 끊임없이 주님 향해 흐르는 우리의 삶입니다.
“목말라 눈떴고, 눈뜨면 목말랐다
아픔에 눈떴고, 눈뜨면 아팠다”
지금도 여전히 새벽마다 일어나 강론을 쓰게 하는 주님께 대한 목마름이요 아픔입니다. 생명의 빵이자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만이 영혼의 갈망을, 영혼의 아픔을 해결해 주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생각나는 지금도 여전히 애송하는 7-8월에 배밭 곳곳에 피어나는 야생초 “메꽃”에 대한 무려26년전 자작시입니다.
“이 가지 저 가지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하늘 가는 여정의 다리로 삼아
분홍색
소박하게
하늘 사랑 꽃피어내며
끊임없이
한결같이
하늘로 하늘로
오르는
메꽃들!”-1997.8.21
사실 사람 마음 깊이에는 누구나 이런 하늘이신 주님을 찾는 끝없는 갈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끊임없이 주님의 집인 수도원을 찾습니다. 바로 이런 영혼의 갈망을 충족시켜주는 요한복음의 생명의 빵이자 영원한 생명이요 영원한 도반이신 예수님의 초대는 늘 들어도 반갑고 기쁘고 고맙습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과의 만남만이 우리 영혼의 근원적 배고픔과 목마름을 일거에 해결해 준다는 것입니다. 이래서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생명의 빵 예수님을 모시는 우리들입니다. 한 두 번의 만남이 아니라 매일 평생 끊임없이 찾아 만나야 하는 생명의 빵, 영원한 도반이신 예수님입니다. 이어지는 복음 말씀도 참 은혜롭습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 왔기 때문이다.”
바로 우리의 정체와 예수님의 정체가 환히 드러납니다. 결코 우연한 우리 존재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보내 주신 아버지의 선물들인 우리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보내 주신 아버지의 선물들인 우리를 예수님은 결코 물리치지 않을 것이며 다음 대목에서 그분의 결의는 더욱 빛납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날에 그들을 살릴 것이다.”
도대체 이런 예수님이 아닌 누구가 영원한 생명으로 우리의 근원적 배고픔과 목마름을 충족시켜 줄 수 있을런지요. 그리하여 살아있는 그날까지 끊임없이, 한결같이 영원한 생명을 주는 생명의 빵이자 영원한 도반이신 예수님과의 우정을 날로 깊이하는 우리들이요 바로 이것이 우리 영적 삶의 모두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사도행전에서 스테파노의 순교에 이어지는 박해로 들불처럼 번지는 말씀의 불길이 “순교자들의 피는 교회의 씨앗”임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장차 바오로 사도로 변할 섭리의 인물 사울이 언뜻 눈에 띕니다. 마치 주님 향한 배고픔과 목마름으로 바싹 마른 영혼들이 살아 있는 말씀을 통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자 활활 타오르는 분위기입니다. 말그대로 사랑의 불길, 생명의 불길입니다. 박해로 흩어진 사람들은 곳곳에 말씀을 전하였고 군계일학(群鷄一鶴) 필리포스의 활약이 눈부십니다.
필리포스가 그리스도를 선포하자 아버지께서 보내신 사람들은 필리포스의 말을 듣고 또 그가 일으키는 표징들을 보고, 모두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 생명의 말씀을 듣습니다. 참으로 생명의 빵이신 주님과의 만남으로 본래의 모습으로 치유 회복된 모습이 흡사 기쁨으로 활짝 피어난 파스카의 꽃들 같은 다음 장면입니다.
‘사실 많은 사람에게 붙어 있던 더러운 영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고, 또 많은 중풍 병자와 불구자가 나았다. 그리하여 그 고을에 큰 기쁨이 넘쳤다.’
얼마나 신바람 나는 장면인지요! 더러운 영들 가득한 혼란한 사회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소비주의, 중독, 물질주의, 금전만능주의, 극심한 빈부 격차, 온갖 질병들, 생존경쟁, 탐욕, 두려움, 질투, 이념갈등, 곳곳에서의 분쟁과 전쟁등 더러운 영들이 발호하는 시대 같습니다. 이 모두가 인간 무지의 죄악에서 기인함을 봅니다.
제대로 미치면 성인들인데 잘못 중독되어 미쳐 폐인들, 괴물들 가득한 시대 같습니다. 이 모두가 인간 무지의 죄악에서, 주님을 잊는 업보에서 기인함을 봅니다. 이 모두에 대한 답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과의 만남뿐입니다. 우리 영혼의 근원적 배고픔과 목마름을 충족시켜 주실 분은 죽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뿐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온 세상이 주님 앞에 엎드려, 주님을 노래하게 하소서. 주님 이름을 노래하게 하소서.”(시편66,4). 아멘.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가 생명의 빵이다."(요한6,35)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
오늘 복음(요한6,35-40)은 계속 이어지는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입니다. 빵의 기적을 체험한 군중, 먹고 마시는 것에 큰 관심을 갖고 있는 군중이 예수님을 따릅니다. 한마디로 또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 군중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6,33)
그러자 군중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6,34)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하는 이들에게 이르십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6,35) 그러면서 믿지 않는 그들의 믿음을 지적하십니다.
'왜, 성당엘 나오는가?'
어떤 사람은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우리는 죽지 않고 살기 위해서 나옵니다. 우리를 살리는 것, 그것도 영원히 살리는 것, 바로 그것이 당신을 이 땅에 보내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6,40)
요즘 사람들을 보면, 약에 의존해서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건강 때문이지요. 살기 위해서입니다. 이미 건강이 나빠진 사람들도 많고, 또 예방 차원에서도 약을 먹습니다. 그리고 건강 보조 식품에 의존하기도 합니다.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
'우리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채워주시는 예수님!'
'이제와 영원히 우리를 살리시는 예수님!'
'우리의 건강을 지키시는 예수님!'
이런 예수님, 이런 주님을 단순하게 믿고, 따라가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나도 살고, 너도 살고, 우리 모두가 함께 사는 하느님의 나라가 지금 여기에서 건설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NNC9GnGEdeI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 40)
비 맞은
봄빛이
우리의 생명을
비추어 줍니다.
생명의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 삶입니다.
사람으로
사는 진정한
삶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시고
다시 살리시는
생명으로
우리를
이끌어주시는
지극하신
하느님 사랑을
만납니다.
가장 위대하신
사랑이 오늘도
우리를
감쌉니다.
알몸으로
태어나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생명의 빵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는
이것이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이와 같이
사랑은
다시 생명을
얻는 예수님을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오늘의 생명이
있기에
내일이 있고
마지막이 있고
다시 살아나는
영원함도 있는
것입니다.
생명을
지키시는
마지막
생명이신
우리의
주님이 하늘의
뜻을 실천하십니다.
생명의
빵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이끌고
예수님께서는
친히 우리의
생명의 길이
되십니다.
오늘을
마지막같이
살라고
우리의 생명이
유한한 것입니다.
빵이 되시는
예수님을 통해
영원한 생명이
새롭게
펼쳐집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또한
생명의 빵으로
오늘을 살길
간절히 바라십니다.
사랑의 배고픔과
사랑의 목마름을
채워주는
생명의 오늘이길
기도드립니다.
오늘이 살아나야
마지막 날도
다시 살아날 수
있음을 믿습니다.
생명이 생활이
되어 우리의
오늘을
보게합니다.
오늘이
모두 사랑인
오늘이 되길
기도드립니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