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도(南海島) 여행/ 가족 여행
알뜰 아내가 큰 결심을 하였다. 2018년 78세의 생일을 맞아 가족 남해여행 비용 경비로 거금 300만원을 내겠다는 것이다. 자식들이 어머니 8순 여행을 위해 적금을 들어 놓은 것이 있으니 그것을 쓰겠다고 나서서 내가 그 진화 작업으로 자식들에게 만류하는 문자를 보냈다.
'이 번 여행은 자식들에게 부담을 안 주고 가족이 다 함께 여행을 다녀 오고 싶다는 엄마의 순수한 소원이니 도와 드리게나. 경비가 남으면 불참한 손주들에게 한 5만원 정도씩 나누어 주고 싶다시네. 허니 왈가왈부 말고 엄마의 마음 받아 드리는 게 효가 된다는 것을 유념하도록. 아빠가.
자식들이 그러하기로 하고 토요일부터 2박 3일로 월요일은 직장에 월차를 내고 가족 13명 중 4명이 빠진 9명이 둘째 사위와 아들이 모는 차에 나누어 타고 남해섬(南海島)과 '세계장미꽃 축제'를 한다는 곡성(谷城)에 가서는 한우로, 고추의 고장 순창(淳昌)에 가서는 게장으로, 전주(全州)를 들려서는 비빔밥으로 눈과 입을 호강시키며 2박 3일의 여행을 다녀왔다.
여행 경비가 넉넉해서 이번 여행은 먹거리 여행이 된 것이다.
*. 충(忠)과 효(孝)의 고장 남해도(南海島) 한국은 인도네시아, 필리핀, 일본에 이어 세계 4번째로 섬이 많은 나라다. 그 섬 중에 제일 큰 제주도에 이어 거제도, 진도, 1973년 남해대교가 개통되기 전까지는 우리나라에서 4 번째로 큰 섬이 남해도(南海島)다.
면적은 297㎢, 남북 길이 약 26㎞, 동서 길이 약 10~20㎞로 크고 작은 섬 13개의 섬을 거느린 표주박 모양의 섬으로 경작지보다 산이 많아 농경지가 적은 섬이라서 어항이 많고 농부보다 반농반어(半農半漁)의 가구가 많은 섬이다.
남해도(南海島)를 흔히 '삼자(三子)의 섬' 이라고 한다. 따뜻한 남쪽 나라 섬이라서 유자(柚子), 비자(榧子), 치자(梔子)로 이름 난 곳이란 말이다. 유자 껍질은 향신료(香辛料)로, 비자의 열매는 기름을 짜서 식용이나 등유, 도료로. 목재는 건축. 조선. 바둑판 등에 쓰인다. 치자는 이뇨제(利尿劑) 또는 적황색의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염료로 쓰이고 있다.
남해(南海)는 그보다 충(忠)과 효(孝)의 섬으로 더 유명하다.
남해를 '충(忠)의 섬' 이라고 하는 것은 이순신 장군으로 인연해서다.
노량해전은 1598년 11월 19일 2시경 조명 연합함대(朝明聯合艦隊) 400척으로 일본군 300여척을 격파하여 임란 중 대첩을 이룩한 전투로 이 전투에서 혼전 중 일본군 총탄이 이충무공 왼쪽 가슴을 관통하여 죽음에 임하였을 때 유언은 오로지 국가를 염려하여 '전쟁이 한창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戰方急愼勿言我死)'라는 말을 남기고 순국하였다.
남해 대교를 막 넘어 좌측에 있는 충렬사(忠烈祠)는 이순신 장군의 영구(靈柩)를 향리 아산(牙山)으로 모시기 전에 잠시 이곳에 초빈(草殯)되었던 곳으로 지금은 가묘(假墓)로 모신 곳이 충열사(忠烈祠)다.
수십 년 남해에 처음 왔을 때에는 자암 김구 선생도 남해가 귀양처라 그 유허비(遺墟碑)가 충렬사 문 입구 우측에 있더니 지금 와서 보니 자암김구적려추모유허비(自庵金絿謫旅追慕遺墟碑)로 충렬사 아래에 따로 고이 모셔져 있다.
그 비석의 자암 김구(自庵金絿)를 보고 사람들은 백범 김구(白凡 金九)를 영상하여 말하는데 천만의 말씀이다. 자암 김구는 조선조 중종 때 사람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자암 선생이 젊어서 궁에서 수직(守直)을 설 때 밤 깊어 낭낭히 들리는 자암의 책 읽는 소리 듣고 찾아온 중종(中宗)에게 바친 시조다.
오리의 짧은 다리 학의 다리 되도록에
은 가마귀 해오라비 되도록애
향복무강(享福無疆)하샤 억만세를 누리소서.
자암 김구(自庵 金絿) 선생은 중종 때의 문인으로 한석봉, 양사언, 안평대군과 함께 '조선 초 4대 서예가' 의 한 분이다. 조광조의 기묘사화(己卯士禍)와 연루되어 15년 동안 이 남해에 유배생활을 하다가 풀려나서 고향 예산에서 작고한 말년이 불우한 분이었다.
그 자암 선생이 금산(錦山) 일대의 풍경을 극찬하면서 이를 그분이 지은 화전별곡(花田別曲)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天地涯 地之頭 一點仙島 (천지 가 땅의 머리에 신선 같은 섬 하나)
左望雲 右錦山 봉내 고내 (좌로 望雲山, 우로 錦山 흐르는 *봉내 고내)
山秀奇水 鍾生豪傑 人物繁盛 (산수 빼어나니 호걸 인물 번성하다)
위 天南 勝地 ㅅ 景 긔 엇더하니잇고 ( 아, 남녘 勝地 경치가 그 어떠합니까)
風流酒色 一時人傑 風流酒色 一時人傑 (風流와 酒色 한 때 人傑 )
위 날조차 몇 부니신고. (아, 나까지 몇 분입니까)
주)*봉내 고내: 지금의 봉내천과 화천
세상 사람들이 경치를 얘기할 때 물 좋고, 산 좋고, 정자 좋은 곳이 어디 있냐고 한다. 그 셋을 아울러 다 갖추고도 더하는 것이 있는 곳이 바로 금산(錦山)이다.
보리암(菩提庵)에서 굽어 보면 활처럼 달처럼 둥근 원을 긋고 있는 우측의 상주해수욕장과 하늘보다 더 짓푸른 바다에 떠 있는 점점의 섬들은, 자암선생이 말한 일점의 선도(仙島)요, 선산(仙山)이요 천하 절승(絶勝)이다.
남해를
'효(孝)의 섬'이라고 하는 것은 서포 김만중(金萬重)에서 유래 된다. 유복자(遺腹子)로 태어나서 평생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았던 서포가 옛날 이야기를 좋아하는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서 한글로 쓴 고대소설 구운몽(九雲夢)은 당시 유배지였던 남해 상주해수욕장 서쪽에 있는 작은 섬 노도(櫓島)에서 서포는 3년 동안 귀양살이 하다가 56세로 병사하였다. 그 노도(櫓島)는 西浦金萬重先生 유허지라 해서 남해 7경으로 꼽고 있다.
*. 걸어 넘는 창선 ․ 삼천포 대교
우리를 태운 차는 삼천포 대교를 지나 금산을 향하고 있다. 지금은 가족과 함께 차로 넘고 있지만, 홀로 남해를 찾아 왔을 때는 삼천포(三千浦)와 남해(南海)를 잇는 붉은 아치의 창선 ․ 삼천포 대교가 너무 아름다워서 나는 그 다리를 걸어서 남해에 갔었다. 삼천포를 연결하는 이 삼천대교는 남해 12경 중 12경에 해당하는 다리였다.
이 다리는 그냥 단순하게 육지와 섬을 연결한 다리가 아니다. 초량섬, 모개섬, 늑도 등 4개의 섬과 섬을 5개의 삼천포대교, 초양교, 늑도교, 창선교, 단항교로 연결한 총연장 3.4km의 다리가 바로 창선 ․ 삼천포 대교다. 그 다리 모양도 PC빔교, 하로식아치교, PC BOX교, 종로식 아치교 등 각기 다른 공법을 이용하여 다리의 박물관이라 할 정도의 관광명소를 이룩하여 놓았다.
관광버스도 이 아름다운 경치를 그냥 넘기 아쉬웠던지 관광객을 풀어 일정 구간을 걷게 하는데 이 남쪽 나라 섬들에는 그 때도 지금처럼 유채꽃이 만발하여 있었다.
그 삼천대교 바다에는 TV에서 보던 남해지족해협죽방렴(남해8경)이 곳곳에 있다. 물살이 빠르고 수심이 얕은 곳에다가 조류가 흘러오는 방향을 향해 V자 모양의 날개나 부챗살 모양으로 길이 10m 정도의 참나무 말뚝을 갯벌에 박아 놓고 밀물에 들어온 고기가 빠져나가지 못할 만큼 촘촘히 주렴처럼 엮어 놓는다. 그러면 앞으로만 향하는 고기의 습성을 이용하여 밀물에 걸려든 고기를 썰물에 필요한 만큼 건져 내는 원시어업이 죽방렴이다.
이것이 남해 12경중 4번째라는 창선교와 원시어업 죽방렴이다. 시원한 바닷바람에 짓푸른 바다 위에 서니 시흥이 절로 난다.
다리에 들어서면 죽방렴의 고기처럼
그림 속에, 시 속에 바장이는 갈매기처럼
훨훨훨
한려수도(閑麗水道)에 갇혀
푸른 노래 되는구나.
여행의 목적은 잘보고, 잘 먹고, 잘 자는 것이다. 새로운 것을 잘 보아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하고, 그 지방 토속 먹거리로 입을 즐겁게 하며, 노독을 풀기 위해 잠자리가 편해야 한다는 말이다.
남해의 대표적인 먹거리는 멸치라 우리는 충렬사를 보기 전에 'xx 멸치 쌈밥집'을 찾았다. 남해에 가서는 꼭 먹어야 하는 토속음식이라는데 음식 상은 푸짐한데 먹을 것이 없다는 것이 공통된 의견이다. 그 중 가장 맛없는 것이 주종인 멸치무침이었다. 멸치철이 아니라서인가. 멸치회를 생각하고 기대를 갖고 갔는데 한 맞미로 '아니올씨다'였다.
*. 금산(錦山) 봉수대에서
옛날 상주해수욕장 근처 상주리매표소에서 오르면서 본 용왕대, 도선바위와 쌍용문을 오르며 전개되는 바위의 전시장 같은 금산의 아기자기한 기암괴석에 놀랐는데, 그래서 이렇게 무리해서 다시 찾아온 것인데, 옛날 복곡저수지를 지나 복곡 주차장에서 미니 버스를 타고 금산 8부 능선까지 10분에 싱겁게 올랐더니 오늘 새로 생긴 도로를 따라 보리암 오르는 길도 그랬다. 연등이 길게 보리암으로 계속되고 있는 것을 보니 그때도 오늘처럼 석가 탄신일이 가까운 무렵이었나 보다. 금산은 섬이면서도 전설 어린 38경의 기암괴석이
금강산을 빼어 닮았다 하여 '소금강(小金剛) 또는 남해의 금강(南海金剛)으로 불리는 산이다. 전에 왔을 때 정상까지 230m라는 이정표 따라 오르니 키가 넘는 산죽 길을 지나니 기암괴석이 연이어 앞을 막는 오솔길이었다.
정상이 가까와 질수록 바위가 더 많아지고 그 바위 위에 암각(岩刻)한 글씨가 더 자주 보이기 시작하더니 드디어 정상이 나타나는데 정상에는 돌로 쌓은 탑 같은 사각형의 봉수대(烽燧臺)가 있었다.
봉화(烽火)란 왜구의 노략질이 극심하던 고려, 조선 시절, 평시에는 밤에는 불꽃을, 낮에는 연기를 1번만 올리다가 적이 바다에 나타나면 2번, 해안에 접근해 오면 3번, 접전이 시작되면 4번, 육지에 상륙하면 다섯 번을 올렸다.
그러면 창선도 대방산(470m)으로 해서 사천과 진주 등을 거쳐 서울 남산까지 이어진다. 그래서 서울의 남산은 봉화(烽火)가 도착하는 마지막 산이라 해서 종남산(終南山)이라고 한다.
망대와 마주하고 있는 정상 오르는 길목에 문어 같은 커다란 바위가 있고 그 바위 옆에 커다란 6자의 글이 있다. 명필바위라고도 부르는 문장암(文章岩)이었다.
우리나라에 최초의 서원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 : 소수서원) 지었다는 주세붕 선생의 글이라는 '由虹門 上錦山'(유홍문 금산)은 직역하면 '쌍홍문(雙虹門)을 통하여 금산(錦山)에 올랐다'는 단순한 글이지만 거기에는 금산을 찾아온 기쁨과 우리 산하에 어린 사랑이 포함되어 있는 말이다.
오늘 보리암을 오르는 길은 그런 옛길이 아니다. 산아래 주차장에서 보리암까지 새로운 도로가 생긴 것이다.
주차장에 차를 맡기고 보리암까지 10분 걸린다는 29인승 미니 버스를 타니 매표서 입구에서 내려 0.9km을 발품을 팔다 보니 보리암(菩提庵) 내려가는 돌층계가 나타난다.
길은 편해졌지만 쌍홍문(雙虹門) 바위를 통하여 기암괴석을 보며 금산을 오르던 운치는 사라지고 만 것이다.
*. 전설 따라 찾은 금산(錦山) 나는 금산에 3번째로 온다. 첫번째는 금산의 정문에 해당하는 쌍홍문(雙虹門)을 통하여 왔고, 두 번째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금산 의 뒤 복거 주차장에서 1,000원 짜리 미니 버스를 타고 왔는데 세 번째인 오늘은 새로 생긴 아스팔트 길을 미니버스를 타고 금산의 정면에서부터 보리암까지 올라 왔다.
전에 쌍홍문을 보며 올라올 때는 동물 형상의 바위가 마치 바위 동물원에 온 것인가 착각을 일게 하였는데-.
바위들은 보리암 주변에 다 몰려 있어서 대장봉, 쌍홍문, 거북바위, 농주암, 화엄봉, 금산기암, 만장봉 등 그 바위마다 각가지 불교와 관련된 전설들이 열려 있었는데 그런 운치가 편리에 묶여 사라진 것이다.
해골의 두 눈 같기도 하고 쌍무지개 같기도 하다는 쌍홍문(雙虹門). 날 '日(자)' 자도 같지만 다시 보면 '月'(월) 자 같다는 일월암(日月岩), 굴속에 들어가 바닥을 두드리면 장구 소리가 난다는 음성굴(音聲窟). 원효대사인가, 의상대사인가 이 바위에서 화엄경을 읽었다는 화엄(華嚴)의 '華'(화) 자와 비슷하다는 화엄봉(華嚴峰). 보리암 경내에 원효대사가 좌선했다는 좌선대(坐禪臺), 높이가 만 길이나 된다는 만장봉(萬丈峰). 흔들흔들 흔들바위. 어미 돼지가 새끼 돼지를 업고 있는 모습이라는 저두암(猪頭庵) 등등-.
그 중 신분을 초월할 수 없어 주인집 아가씨를 짝사랑하다가 뱀이 된 전설이 어린 상사바위도 있었다.
주인 딸 사랑하다 뱀이 된 머슴 총각
처녀를 칭칭감고 풀어 주지 않아서
굿을 해
벼랑에 떨어져
죽은 곳 상사바위라네
이와 다른 이야기도 전해 오고 있다. 여수의 한 총각이 고기잡이 왔다가 남해의 한 과수댁을 짝사랑하다가 상사병에 걸려 죽을 지경이 되매 과수(寡守)가 이 사랑을 받아들여 이 상사바위에서 운우지락(雲雨之樂)을 나누어 고쳤다는 이야기다. 그런 것이 다 볼 수 없게 된 것이 비정한 새로된 아스팔트 길이었다.
*. 우리나라 4대 관음 기도처의 하나 보리암(菩提庵)
신라 때였다. 원효대사가 금산(錦山) 이 산에 초당을 짓고 수도하다가 관세음보살을 친견하였다. 원효대사는 그후에 이 산 이름과 초당 이름을 보광산(普光山), 보광사(普光寺)라 하였다.
금산(錦山)은 한려해상국립공원(閑麗海上國立公園)으로 지정된 유일의 산악공원(山岳公園)으로 높이는 681m로 남해에서는 화방사가 있는 786m의 망운산(望雲山)보다는 낮지만 누구나 와보고 싶어하는 삼남 제1의 명산이다. 금산의 본명은 보광산(普光山)이었다.
산 이름을 금산(錦山)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태조 이성계와 연관된 전설이 전하여 온다.
이성계가 앙위에 오르기 위해서 명산 대찰을 찾아 다니면서 기도를 드리다가 보광산(普光山)에 와서 기도를 드릴 때였다.
이성계는 기도처 앞에 있는 3개의 큰 바위를 향하여 "제가 중국까지 정벌할 수 있다면 바위 3개를 모두 세워 주시고, 한 나라의 왕이 될 수 있다면 2개의 바위를 세워 주시고, 장수나 재상이 될 운명이라면 1 개의 바위를 세워주소서." 하고 100일 기도를 드렸더니 2개 바위가 벌떡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이성계는 산신(山神)에게 감사를 표하면서 "제가 왕위에 오르게 되면 이 산 전체를 바단으로 덮어 드리겠습니다. "고 약속을 하였다. 나라를 세운 후에 태조 이성계는 보광산을 영세불망(永世不忘)의 영산(靈山)이라 하여 그 약속을 지키려 하자, 정도전 등의 신하가 만류하는 것이었다.
"비단을 덮으면 지금은 좋지만 오래 되면 더럽혀 지니, 그보다는 산의 이름을 비단(錦) 산(山)이라는 한자어 금산(錦山)으로 부르면 좋겠다고 고하는 것이었다. 이에 태조 이성계는 보광산(普光山)을 왕명으로 금산(錦山)이라 고쳐 부르게 하였다.
18대 왕 현종(顯宗)이 이 말을 듣고 이 절을 왕실의 원당(願堂)으로 삼았다고 한다.
백일 기도로 왕위에 등극까지 하게 하였다 하여 이 보리암 해수관음 보살은 강원도 낙산사(洛山寺), 강화도 석모도의 보문사(普門寺), 여수의 향일암(向日庵)과 더불어 우리나라 4대 관음기도처(觀音祈禱處) 중에서도 으뜸이 되는 절로 친다. 관세음보살은 어떤 보살인가. 대자대비(大慈大悲)하여 중생이 고난 중에 열심히 그의 이름을 외면 달려와 구제를 해주는 보살이 아닌가. 특히 보리암 삼층석탑을 돌면서 관세음보살을 염하며 소원을 들어 주는 용험한 부처라서인가. 사월초파일을 앞둔 수많은 사람들이 탑돌이를 하고 있었다. 아내도 그중에 하나였다. 그 기도 내용이 무엇이겠는가. 묻지를 말라. 자식 잘되기를 비는 엄마의 마음이었을 것이니-.
보리암 보광전(普光殿)에서 200m 아래 제석봉 왼쪽에 '태조 이성계 기도하신곳'이라는 표지 따라 이씨기단(李氏祈壇) 선은전(璿恩殿)에 내려 가보고 싶었지만 생략하고 말았다. 가는 길이 아니고 다시 올라와야 되는 곳이기 때문에 생략한 곳이다. 사진은 엊저녁 내 말을 들은 아들이 부지런히 다녀와 전해 주는 귀한 사진이다. 여행 끝날 우리 가족은 아들의 주선으로 옥천(沃川)에 있는 가족묘를 찾기도 하였다. ilman이 누군가. 자식 자랑하다가 병신 소리를 듣기를 고소원하는 사람이 아닌가.
가던 날이 장날이라더니 오늘은 초파일이 낀 징검다리 연휴라서 금산 보리암은 전국에서 몰려 드는 차로 차산차해(車山車海)여서 오는 길에는 많은 시간을 지체해야만 했다.
게다가 보리암에 오르니 연등으로 연산연해(蓮山蓮海)였지만 다만 인경의 명(銘)이 있어 나그네의 시름을 달래주었다.
南海錦山無限景(남해금산무한경) 天邊雲外此鐘聲(천변운외차종성)
森羅萬象非他物(삼라만상비타물)
一念不生猶未明(일념불생유미명)
남해 금산 무한경에 하늘 가 구름 밖에
보리암 종소린 森羅萬象 他物)가
未明에
홀로 서 있어도
한 생각 나지 않네
탑대에 내려가 보니 옛날에 없던 해수관음상이 남해 상주해수욕장을 바라 미소짓고 있다.
그 옆에 옛날에는 모르고 지나쳤던 보리암 3층탑이 고색창연하다. 탑은 얼풋보기에는 4층탑 같은데 자세히 보면 하단은 기단부(基壇部)였다.
그 기단석 위에다 나침반을 올려 놓으면 나침반이 제방향을 잃는다는 탑이다.
가야의 김수로왕비 허태후가 인도에서 싣고온 파사석으로 원효대사가 세웠다는 전설의 탑인데 보리암과는 직접 관계있는 탑은 아닌 모양이다.
셔틀버스를 타러 주차장을 향하여 연등의 행렬 따라 불자들 속에 섞여 내려오고 있는데 한 여자가 절을 향해 올라가면서 상냥한 인사를 하며 가는데 그의 말이 걸작(?)이다. 시공간을 초월한 광신자이기 때문이다.
"예수 믿어 천당복 받으세요."
상주해수욕장에 이르니 뒤로는 병풍처럼 둘러싼 금산(錦山)을 둘러두고, 앞으로는 나무섬과 돌섬이 풍랑을 막아주고 있는데, 반달 같은 포물선을 그리며 2km 은모래의 완만한 해수욕장에 백사장 뒤로 울창한 송림을 갖춘 남해 3경이라는 상주해수욕장이었다.
깊이가 0.5m~4m라는 이 물은 바닥이 훤히 보일 정도로 맑고, 넓이가 120m가 되는 산과 바다를 겸하는 곳이어서 여름에는 100만 인파가 들끓는 남해 중부를 대표하는 해수욕장이었다.
내가 가본 호주의 시드니의 본다이비취나 하와이의 해수욕장도 이 상주해수욕장보다 아름답지가 않았다.
이렇게 이 여행은 나의 마음 속에 가득한 아름다움에다가 남해 금산과 상주해수욕장의 아름다움을 더하게 되었구나.
-2018. 5.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