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렁 벗겨진 머리에 딸기코,불룩 솟은 배를 다 드러내 놓고 만면에 미소를 머금은 채 계곡의 널찍한 바위에 비스듬히 앉아 알듯 말듯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람을 연상해보자.이러한 풍모에 가장 멋지게 어울리는 사람은 역시 노자(老子)다.
노자가 실제의 인물인가,가상의 인물인가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고 그의 생존연대에 대해서도 정확히 알 길은 없다.다만 분명한 것은 이 세상에 ‘도덕경(道德經)’이라는 책이 있으며 이미 기원전부터 이 책이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동북아 철학세계에 시선 집중
그리고 이 책은 오랜세월에 걸쳐 읽혀 도가철학을 신봉하는 많은 사람이 있다는 것,최근들어 서구인들이 집에서 도서관에서 지하철에서 탐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우리는 노자가 실제의 인물이든 가상의 인물이든 상관 없다.도가철학이 있고,노자는 도가철학에 대한 상징적인 인물로서 존재한다는 것 그 자체를 인정하면 된다.
다가오는 21세기 지구촌을 이끌어갈 철학적 주제는 무엇일까.불안,이념,논리가 20세기를 주도한 철학적 주제였다면 21세기를 여는 인류 정신사의 첫 주제는 무엇일까.
그토록 견고할 것만 같았던 마르크스 레닌의 사회주의 이념이 무너지고 논리를 앞세운 과학적 정보화 시대가 20세기 끝을 장식하면서 인류의 정신사는 그만 방향타를 잃고 말았다.
포스트 모더니즘,탈구조주의 등 문예 이데올로기들이 등장하고 있지만 그것이 미래 인류의 정신사를 이끌어갈 주제는 아닌 것 같다.항상 큰 흐름은 있는 법이다.그 흐름의 시작은 무엇일까.20세기를 마지막으로 대자연의 운행질서에 순응하며 살던 시기는 끝났다.20세기 후반부터 이미 자연 질서에 역행하는 과학적 노력들이 속속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환경오염 등으로 인한 자연조건의 변화로 엄청난 재해를 겪으면서도 이제 지구가 통째로 무너져내리는 모습을 속수무책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게 되었다.인류의 문명사를 보면 가장 안정적인 시대는 정신문명이 물질문명을 살짝 누르고 있을 때다.그러나 지금은 물질문명이 정신문명을 앞질러 가고 있다.
○인류의 관심 신비주의로
20세기 인간과학의 걸작품인 컴퓨터가 미래 인류의 희망인지 절망인지는 더 두고봐야 알겠지만 컴퓨터의 힘은 날로 세기를 불리고 있다.과거 조물주의 힘으로만 취급되었던 우주적 신비들이 컴퓨터에 의해 그 베일이 하나둘 벗겨지고 있다.신비로움이 차츰 과학화되면서 인류의 관심이 신비주의에 눈을 돌리고 있다.현재 서구에 심령술 심리학과 같은 학문들이 유행하고 있는 추세도 신비주의의 확산이라는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어느새 인류의 정신과학은 자꾸 동북아의 오래된 철학정신을 뒤돌아보고 있다.
참선을 하는 파란 눈의 서양인,동양이론과 물리학을 접맥하는 신과학운동,21세기 동북아 시대를 예견하는 서구의 학자들,타락한 정신의 회복을 동양철학에서 찾으려 하는 기운 등이 우리를 주목케 한다.
미루어 짐작컨대 21세기의 중요 주제는 신비가 될 것이며 과학적 신비주의,현실적 이상주의가 철학적 탐구의 주요 대상으로 자리매김될 것이다.
○“가장 심오하고 아름다운 작품”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다시 노자를 주목하고자 한다.만일 21세기의 첫 시작이 과학적 신비주의가 화두로 된다면,철학적 이상주의와 신비주의의 원조격인 노자의 ‘도덕경’은 21세기 미래의 정신사를 연구하는 가장 중요한 텍스트가 되는 셈이다.
노자의 ‘도덕경’은 상편의 도경 37장과 하편의 덕경 44장을 합쳐 81장으로 구성되어 있다.5천여개의 한자로 이뤄진 작은 책이지만 여기에 담긴 내용은 너무나 커서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그런 책이다.
케임브리지대 교수 조지프 니덤은 이 책을 가리켜 ‘두 번 다시 다른 예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중국어로 된 것 가운데 가장 심오한 아름다운 작품’이라 했다. 실제로 서구의 언어로 번역된 중국의 사상서 가운데 ‘도덕경’은 가장 많은 사람에 의해 번역되어 미국과 유럽에서 읽히고 있다.번역서만도 2백여권을 휠씬 넘는다.서구에서 ‘도덕경’이 많이 읽히는 이유는 앞서 언급한 현대 서구 정신사적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중국어의 한자가 복잡성과 고립성에 대한 비판을 받으면서도 그 훌륭한 가치를 인정받는 것은 한자(漢字) 한 자 한 자에 담긴 속뜻이 엄청나다는 것이다.즉,이(理) 기(氣) 태극(太極) 음양 (陰陽) 등의 한자어 속에는 엄청난 철학적 인식이 내재되어 있다.
○각박한 세상 슬기롭게 승화
노자는 이 한자어의 의미구조를 적절히 효용한 사람이다.몇 자 안 되는 한자를 통해 엄청난 의미를 그 한 글자 한 글자에 부여하고 우주만물의 운행질서 및 인간사의 모든 현상을 압축적으로 설명해내고 있다.
도란 무엇인가,덕이란 무엇인가.무는 무엇이며 유는 무엇인가.회의와 부정,모순과 역설,낙천과 자연,이상과 도피,생성과 조화,무언과 반언을 변증법적으로 넘나들면서 자연과 인간의 철학적 형질을 보여줄 듯 보여주지 않으며 신비와 이상 속에서 둥근 원을 그리며 그의 우주론은 끝난다.
마치 최근의 이 시대정신을 대변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가,이 시대를 질책하기도 하고 이 시대에서 도피하기도 한다.노자에게는 이미 컵의 물은 물이 아니다.바다의 물만이 물인 것이다.
이 각박하고 어려운 세상을 슬기롭게 넘기는 방법이 있다면 노자의 호방한 현실적응법을 배워볼 필요가 있다. 특히 우울증에 빠져 있는 사람이 있다면 노자에게서 그 해결점을 찾자.어쩌면 우울증 치료와 함께 21세기의 인류 정신사를 이끌어갈 원류와 같은 책을 미리 읽어 두는 부수적인 효과를 거둘 수도 있다.
금강산 유람을 떠나는 것도,설악산 단풍 구경을 가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보다 더 좋은 것은 정신의 풍요로움을 찾는 길이다.순간적인 정신의 맑음이 아니라 오래 간직될 수 있는 정신의 맑음을 위해 이 아름다운 가을을 독서와 함께 즐기는 것도 향기로운 삶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