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은 잠을 잘 때에도 꿈을 꾸지 않으면 깊은 잠에 빠진다. 이것은 중생에게 번뇌와 무기의 현상이 잠을 잘 때에도 깨어 있을 때와 꼭 같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잠을 잘 때[寐時]에도 깨어있을 때[寤時]와 마찬가지로 수행할 수 있어야만 한다.
수행자가 수행방편(修行方便)에 대한 간절한 생각으로 인하여 삼매관성(三昧慣性)이 생겨
그 삼매관성이 어묵동정간(語默動靜間)에 완벽하게 이어지게 되고 육계에서도 선(線)으로 이어지는 삼매(三昧)의 신호를 감지하게 되면, 잠잘 때 꿈 속에까지도 깨어있을 때와 똑같이 수행하는 상태가 계속 연장되는데 이것을 공부의 몽중일여(夢中一如)라고 한다.
수행자의 공부가 몽중일여(夢中一如)하게 되는 것은 공부의 어묵동정일여(語默動靜一如)가 완벽하게 되어야만 가능하다.
그러나 깨어 있는 때의 공부가 한결같지 못하면서도 꿈 속에서 공부하는 때가 있는데, 이것은 공부의 몽중일여가 아니고 일종의 잠꼬대 현상인 것이다.
공부의 몽중일여에 이르게 되면 오시(午時)의 공부가 몽시(夢時)의 공부와 같고 몽시(夢時)의 공부가 오시(寤時)의 공부와 같음을 수행자 자신이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이때에는 잠자는 시간도 적고, 잠잘 때 꿈꾸는 경우도 드물며, 잠에서 깬 뒤에도 수행에 몰두하여 꿈 속의 일을 생각할 틈도 없으므로, 처음에는 자신의 공부가 몽중일여(夢中一如)함을 모르고 있다가
어느 때에 이르러 수행자가 자신의 공부가 몽중일여함을 확인하게 되는데 이때에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1) 수행자의 공부가 오시일여(寤時一如)함이 연장되어 잠잘 때 꿈 속에까지 이어져 꿈 속에서도 공부가 깨어있을 때와 꼭 같이 한결같다가,
잠에서 깨어나면서 '꿈 속에서도 지금 깨어있는 이때와 꼭 같았지!'하면서 수행자 자신이 확인하는 경우가 있다.
2) 깨어있으면서 어떤 경계에 갑자기 부닥쳐 꿈 속의 일을 연상하게 될 때, '지금 내가 깨어 있으면서 공부하는 이것이 꿈 속에서도 이와 꼭 같았지!'하며 수행자 자신이 확인하는 경우가 있다.
이상의 두 경우를 비교해 보면 수행자의 공부 수준은 첫째와 둘째의 경우가 꼭 같지만 자신이 확인하는 시점(時點)은 다르다고 하겠다.
첫째의 경우는 오랜 세월동안 꾸준히 공부를 계속하여 온 수행자가 긴 시간 동안의 수행의 연속으로 인하여 삼매가 필연적(必然的)으로 몽중(夢中)까지 자연스럽게 연장되었기 때문에, 몽중일여가 시작되는 시점부터 알게되는 경우이다.
둘째의 경우는 첫째와는 달리 짧은 기간에 공부의 강도(强度)를 높여온 수행자가 자신의 삼매가 몽중일여(夢中一如)에 이르렀음에도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깨어있을 때의 수행 중 어떤 경계에 부닥치면서 꿈 속의 일이 연상되면서 몽중(夢中)에도 공부가 이러했음을 갑자기 확인하면서 감탄하는 경우이다.
이와 같이 수행자가 공부의 몽중일여(夢中一如)함을 어떻게 확인하는가를 보면 수행자가 지난 날의 공부를 어떻게 해 왔는가도 알 수 있다.
7. 공부의 숙면일여(熟眠一如)
수행자가 수행방편을 망각하지 않고 계속 일으킴이 행주좌와일여(行住坐臥一如)하고, 어묵동정일여(語默動靜一如)하고, 몽중일여(夢中一如)하게 되면
다음에는 깊은 잠 속에까지 한결같게 이어지게 되는데, 이것을 공부의 숙면일여(熟眠一如)라고 한다.
이와 같이 깨어있는 시간과 잠자는 시간의 전(全)영역을 공부로써 채워 버리게 되면 수행자의 공부는 오매일여(寤寐一如)하다고 한다.
중생의 일과(日課)는 무기(無記)에 빠짐과 번뇌(煩惱)가 일어남의 반복이다.
그러한 가운데 오시(午時)에는 무기보다는 번뇌가 많고, 매시(寐時)에는 번뇌보다는 무기가 많다.
매시(寐時)에도 얕은 잠에서는 번뇌가 일어나고, 즉 꿈을 꾸게 되고, 깊은 잠에서는 무기에 빠지게 된다.
수행자가 공부를 한다는 것은 수행방편(修行方便)을 의식(意識)으로 굴리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깊은 잠에 빠지게 되면 기절(氣絶)했을 때와 꼭 같이 의식(意識)의 작용이 멈추어 꿈도 없고 생각도 없고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는 깊은 무기(無記) 속에 있을 때인데, 이 때에는 수행을 해야 할 것인가?
수행자의 공부가 행주좌와시(行住坐臥時)에서 어묵동정시(語默動靜時), 몽시(夢時)까지는 거의 의식(意識)으로 공부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숙면시(熟眠時)는 무기관성(無記慣性)만 미치는 영역이어서 의식으로 공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때에는 수행자의 공부가 행주좌와일여하고 어묵동정일여하고 몽중일여함에 이르기까지 수행의 힘으로 생기게 된 삼매관성(三昧慣性)을 무기관성만 미치는 영역 속으로 이어지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수행자가 숙면시(熟眠時)를 삼매관성(三昧慣性)으로 이어지게 하는 것이 공부의 숙면일여(熟眠一如)이다.
수행자가 무기관성(無記慣性)만 마치는 시간의 영역을 삼매관성(三昧慣性)이 이어지게 하려면, 추번뇌를 모두 평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즉, 공부가 숙면일여(熟眠一如)에 이르려면 추번뇌를 모두 평정해야만 가능하다.
추번뇌를 모두 평정한 수행자라면 중생(衆生)이 아닌 성인지(聖人地)인 보살지(菩薩地)이며 불퇴전지(不退轉地)이므로 분단생사(分段生死)에서는 벗어나게 된다. --------------------------------------------------------------------------
수행자의 공부가 숙면일여에까지 이를 수 있는 것은, 수행 중 거쳐야 했던 어려운 단계마다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수행방법이나 수행자세를 불조(佛祖)께서 이미 제시하여 놓으셨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나 조사(祖師)들께서는 수행자의 공부가 오매항일(寤寐恒一)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특히 고려(高麗)의 태고(太古) 스님이 화두를 들 때의 오매일여(寤寐一如)에 대한 귀중한 말씀을 남긴 것이 있다.
태고(太古) 스님은 "점점 자나깨나 한결같은 때에 이르거든 단지 화두하는 마음을 여의지 않음이 중요하다 [漸到寤寐一如時 只要話頭心不離]"고 하셨는데
이 글은 공부가 오매일여함에 이르렀을 때에 자신이 직접 터득했던 것을 간결한 글로써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어떤 스님은 '점도오매일여시 지요화두심불리 (漸到寤寐一如時 只要話頭心不離)'라는 이 글을 다음과 같이 잘못 번역하거나 잘못 해설을 붙인 것을 볼 수 있었다.
(漸到寤寐一如時에도 只要話頭心不離)'고 한 태고(太古) 선사의 유훈(遺訓)과 같이 극히 어려운 오매일여의 깊은 경계에서도 화두를 힘써 참구하여야 한다.
한문은 언문일치(言文一致)가 되어 있지 않아서 문자(文字)에 대단히 밝은 사람이라도 돈오(頓悟)하지 못하면 글을 쓴 사람의 뜻을 잘못 전달받게 된다.
그리고 이상과 같은 중요한 글을 잘못 번역하고 잘못 해설하여 이 세상에 내어놓으면 수행자들에게 크게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말과 글은 언문일치(言文一致)가 되어 있고, 그 구조가 '…하다, …한다, …하겠다, …이다, …있다, …것이다' 등의 명확한 직설형(直說形)이고 표현할 수 없는 것이 거의 없으므로 의사전달에 대한 잘못은 거의 없을 것 같아 다행이다. -----------------------------------------------------------------------------
수행자가 화두를 든다는 것은 의식(意識)으로 의심을 굴리는 것이므로, 의식의 작용이 멈춘 숙면시(熟眠時)에는 화두를 들 수 없다.
깊은 잠에서 화두를 든다고 하면 깊은 잠이 아니고 꿈 속에서 화두를 드는 것이지 공부의 숙면일여(熟眠一如)는 아닌 것이다.
중생이 깊은 잠을 잔다는 것은 깊은 무기관성(無記慣性) 속에 있음을 말한다.
중생에게 그 무기관성이 영원히 이어진다면 유정(有情: 동물의 총칭)이 아니고 무정(無情: 동물이 아닌 것)일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중생에게는 무기관성의 정도가 육도(六道) 중 갈 곳을 결정지워 주는 두 가지 인자(因子) 중 한 가지가 되며 사람으로 태어나더라도 운명(運命)의 반쪽을 차지하게 된다.
그러나 중생의 의식(意識)으로는 그 내용을 감지(感知)할 수 없으므로 공부가 숙면일여에 미치지 못하면 그것을 따져서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화두(話頭) 들 때의 숙면일여함을 말로써 접근시켜 보면, "다만 그때에는 화두가 빠져버린 한결같음만, 즉 분명한 삼매관성(三昧慣性)만 있다"고 하겠다.
더욱 실감나는 아주 간결한 표현도 있지만 이러한 것은 수행자가 직접 수행을 통하여 터득하도록 아껴둘 필요가 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부가 숙면일여(熟眠一如)에 이른다는 것이 육신(肉身)을 잠재우지 않고 공부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전혀 잠을 자지 않으려고 하는 수행자를 볼 수 있고, 자신은 육신을 잠재우지 않고 공부하므로 자신의 공부는 숙면일여에 이르렀다고 말하는 수행자도 볼 수 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공부의 숙면일여(熟眠一如)는 공부가 깊은 잠에서도 이어질 수 밖에 없는 앞 과정의 공부를 반드시 거쳐야 가능한 것이다.
그러한 앞 과정의 공부를 거치지 않고 잠을 자지 않고 수행하면 숙면일여에 이를 것으로 생각하거나, 잠을 자지 않고 수행하는 것을 숙면일여에 이른 것으로 생각한다면, 이러한 수행자는 자신이 멍청이인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그러한 수행자는 외도(外道)가 되거나 멍청이로서 일생을 마치거나 착각도인(錯覺道人)이 될 것이다.
수행자는 자신의 공부가 숙면일여(熟眠一如)하다고 생각되면 그 확실성을 여러 각도(角度)에서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없으면 그것은 환상(幻想)일 수도 있다. ----------------------------------------------------------------------------
그러므로 수행자는 그 확인하는 방법인 *숙면일여의 검증법(檢證法)*을 반드시 찾아야 한다.
숙면일여의 검증법은 자신의 공부의 확인을 위해서도 필요하겠지만, 다음에 자신이 선지식이 되어 후학(後學)을 지도할 때에도 반드시 갖추고 있어야만 선지식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게 된다.
외도(外道) 중에는 공부의 수준이 대단히 높은 사람도 있는데 이러한 사람을 가려내기 위해서도 선지식은 반드시 숙면일여의 검증법을 갖추고 있어야 되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이 깨쳤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선지식이라고 생각하면서 숙면일여의 검증법을 갖고 있지 않으면 자신이 외도(外道)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수행자의 공부가 숙면일여(熟眠一如)하다는 것은 구경각(究竟覺)에 이르는 필요조건(必要條件)을 갖추게 되는 수행단계이다. 그 이유(理由)에 대해서는 9. '내외명철(內外明徹)'에서 설명하겠다.
첫댓글 여여한 수행정진 이루겠습니다.. 옴 아비라 훔 캄 스바하 _()_()_()_
고맙습니다. _()_
감사합니다 _()()()_
감사합니다...
감사 합니다
옴 아비라 훔캄 스바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