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도의 길
김해자
고려극장 창고 앞 의자에 앉아 있는 범도 사진을 보고 있으면
범도도 나를 본다 80년을 건너뛰어
어릴 때 동네에서 흔히 보던 마을 하르방처럼
깊은 주름 서넛 패인 이마에 하양과 거멍이 반반인 콧수염이다
만주 대한독립군 총사령관이었던 홍범도 장군과
그 누구와도 겨뤄서 진 적이 없었다는 호랑이 포수 범도도 놀랍지만
어릴 때 머슴살이하다 밥 준다는 방을 보고
평안 감영 나팔수로 입대했다는 범도도 울컥 범도같다
포기하지 마시오, 그날은 밤의 도둑처럼 옵니다.
직업은 의병이오, 희망은 고려독립,
봉오동 전투를 지휘하고 청산리대첩 제1연대장이었던 범도도 범도지만
곡괭이와 낫을 든 백성들 때려잡는 일을 차마 더는 할 수 없어
스무 살에 탈영했다는 범도도 참 범도답다
길이 보이지 않으면 몸을 좀 낮춰보시오.
짐승의 높이로 낮아지면 길은 어디에나 있소.
190센티 장신인 범도는 허구헌날 맞으며 종이공장에서 일하다
월급도 못 받고 쫓겨났다
만주와 연해주를 떠돌며 인쇄소에서 조판을 하고
탄광에서 석탄을 캐고 부두에서 짐을 나르며 군자금을 보탰다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드시오.
한 명이 갈 수 있는 길이라면 왜 열 명은 못 가며 천 명인들 못 가겠소.
짐승처럼 기차 화물칸에 실려 카자흐스탄 황무지에 내팽개쳐진
범도가 밥 먹던 숟가락으로 언 땅을 판다
병원 경비를 하고 고려극장에서 야간 수위를 보던
범도의 마지막 일터는 크즐오르다 정미공장 날품팔이였다
-웹진 《님Nim》 2024년 9월호
김해자
1998년《내일을여는작가》로 등단.
시집 『무화과는 없다』『축제』『집에 가자』『해자네 점집』『해피랜드』『니들의 시간』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