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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과학 게시판 스크랩 정치 우리는 모두 양반의 자손? 돈 없는데 양반이라고 별수 있나
째루 추천 0 조회 37 11.01.02 07:4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우리는 모두 양반의 자손?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 자신의 조상이 양반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그런데 성종 때 350만 인구중 노비는 150만명 정도였다. 평민의 수도 이와 비슷했다. 사실상 국민의 대다수는 양반이 아니었던 것이다. 당시는 관료가 양반을 뜻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소수였던 것이다.

 

당시 노비들은 성씨를 사용하지 못하였고 평민들에게도 성씨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자신의 조상 중에 노비가 있으면 자신들도 노비가 되어야하기 때문에 기억을 지워버리고 살았기 때문이다. 사실상 전국민의 절반이상이 성조차 없었던 것이다.

이때 양반임을 증명하는 것이 족보이다. 조선초기에는 등장하기 시작한 족보는 17세기 까지는 극소수의 전유물이었다. 그런데 조선후기 신분제가 동요되면서 경제적 상승을 한 평민과 노비들이 신분상승에 이어 군역의 면제수단으로 족보위조를 하게된다. 이때 서울에는 인쇄시설을 해놓고 직업적으로 족보를 위조해주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한다. 영조실록에는 영조(1764)가 이들의 처벌을 지시한 기록이 있다.

하지만 대폭적으로 증가한 것은 일제시대 호적법 때문이다. 1900년초 구한말 일제가 호적법을 시행하면서 가문중심의 호적이 아닌 당사자의 신고에 의해 당사자의 신고에 의해 호적을 작성하는 원칙을 통해 추상적으로 가의 연속을 표시하는 종전의 방식이 폐지된 것이다. 이 결과 현재 우리나라의 54%가 '김, 이, 박, 최, 정'의 5성으로 구성되는 결과를 낳았다.

따라서 많은 명문가에 가문과 상관없는 사람들이 끼어 들게 되고 일제시대와 산업화시대를 거쳐 양반계급이 몰락한 지금은 오히려 그들이 문중의 주류가 되었다는 분석도 있다.

 

실례로 19세기 전반 한 세도가의 족보는 74년만에 세배로 증가했다고 하니 폭발적으로 양반의 후손만 증가하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다른 나라의 경우 노비였음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서구의 경우에는 귀족의 후예가 전국민의 3%에 불과하기 때문에 특수사람들이고 나머지는 모두 평등하니 그런 문제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최근 민법 개정을 위한 공청회에서 발제자가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을 이야기하자 분노한 사람들에 의해 토론회가 사실상 중단되었다고 한다. 온국민이 양반의 후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의 조상 절반이 노비라는 말은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가치가 아니라 현실이다. 우리 조상은 대부분 노비였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양반일 가능성도 높다. 섞여 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비면 어떤가. 일부를 제외하고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지배하기만 한 양반보다 성실한 노동으로 오늘의 우리가 있게 한 노비조상이 더 자랑스럽다. 

출처 : 시민의신문 2003  정창수(시민행동 밑빠진독상 팀장)

 

                         

 

                     兩班이란 무엇인가?

 
兩班은 ‘관료제도와 귀족제도의 묘한 혼합체’ (제임스 팔레)
 

⊙ 양반은 양인 중에서 지배계층만을 의미”(이성무)
⊙ “조선 초기 양반은 특권계급 아니다”(한영우)
⊙ 17세기 이후의 양반은 ‘특권적’이고 세습화된 지배세력으로 굳어져
⊙ 율곡, 양반을 ‘權姦’과 ‘流俗’이라고 비판

崔鎭弘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 선임연구원·정치학 박사
⊙ 1963년 충남 청양 출생.
⊙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서울대 정치학 박사.
⊙ 현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 선임연구원.
⊙ 저서 : <법과 소통의 정치>.

 

 

                                                     창덕궁 인정전 앞의 품계석.

             임금 앞에서 문무관료들이 동반과 서반으로 나뉘어 선 데서 ‘양반’이라는 말이 나왔다.

 

 계면쩍은 말이지만, ‘양반’이라는 칭호를 그나마 자주 들어봤으리라는 추측 때문에 필자에게 ‘양반’에 대한 과제를 맡긴 듯하다. ‘양반’이라는 말을 자주 들어왔고, 또 사용해 본 적도 있는(‘그 사람 참 양반이지’ 혹은 ‘저 양반이 도대체 왜 저래’ 등과 같은 표현에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막상 그 의미에 대해 천착해 보지 못한 것은 이런 분야에서 공부하는 필자에게는 무책임한 일이었다는 생각이 이 글을 쓰면서 들었다.
  
 어린 시절 필자가 자신의 이름 다음으로 많이 들어본 단어는 ‘양반’과 ‘종손(宗孫)’이었다(필자는 면암 최익현 선생의 종손임-편집자 註). 아직도 오지(奧地)라 할 수 있는 필자의 고향에는 사당을 모시고 있는 ‘큰집’인 우리 집과 ‘작은집’ 몇 집이 옹기종기 아담한 마을을 이루고 있었는데, 작은집의 할머니들은 항상 필자를 ‘우리 종손, 우리 종손’하며 정성어린 간절함으로 부르셨다(지금도 나는 이 칭호를 가끔 듣는다).
  
  ‘큰집’의 종부(宗婦)이신 할머니는 항상 필자에게, “양반은 이래야 한다. 양반은 이러면 안된다”는 등의 말씀을 많이 하셨다. 그러다 보니 양반이 무엇인가를 따져보고 생각해 보기도 전에 양반이라는 말은 하나의 ‘이미지’로, 하나의 ‘선입견’으로 나에게 굳어지게 된 모양이다.
  
 <월간조선>으로부터 원고청탁을 받은 것을 기회로, 양반에 대해 제대로 정리하겠다는 ‘책임감’에서 우리의 ‘역사적 정치적 보고(寶庫)’인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양반’에 대한 기록을 일차적으로 정리해 봐야겠다는 생각에 자료를 검색했더니, 이 작업은 도저히 몇 페이지의 짧은 논문으로 정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닌 듯했다. 이런 ‘과제’는 차후에 더 깊고 광범위한 연구를 해야 할 좋은 연구 주제라고 스스로를 위무하고, 기존의 이루어진 연구들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밀가루도 없이 수제비를 만들 수는 없지 않은가.
  
 전통 사회에서는 국왕이 정무를 볼 때 남쪽을 보고 앉는다. 이를 남면(南面)이라고 한다. 남면한 국왕을 기준으로 왼편인 동쪽에는 문관(文官)이 동반(東班)으로서 늘어섰고, 오른편인 서쪽에는 무관(武官)이 서반(西班)으로서 늘어섰다. 한편 그밖에 잡역(雜役)직은 남반(南班)이라 하였다. 그러다가 차츰 동반과 서반을 중심으로 관직 제도가 정비됐다. 이는 남반이 오를 수 있는 최고 품계가 7품이었기 때문에 고위 관직은 동서 양반이 차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을 두 개의 반(班)이라는 의미에서 ‘양반’(兩班)이라 하였다.
  
 이렇게 두 반을 나누어 동반과 서반이라 부른 것은 고려 성종(재위 981~997) 때이기 때문에 양반이라는 용어는 이미 10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10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양반을 간단하게 정리하기란 결코 단순한 작업이 아닌 것 같다. 그래서 필자는 우선 기존의 양반에 대한 연구를 간단히 살펴보는 것으로 이 글을 시작하기로 한다. 양반에 대한 기존 연구는 우선 양반이 과연 특권(特權)신분인가 아닌가 하는 데에 큰 논점이 있다. 
 
“양반은 특권신분”(이성무)
 양반에 대해 일찍이 깊은 연구를 수행한 이성무(李成茂) 전 국사편찬위원장은 “양반은 양인(良人: 평민) 중에서 지배 계층만을 말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가문의 역사와 문지(門地: 대대로 내려온 그 집안의 지체, 문벌)는 양반과 양인을 구별하는 가장 기본적인 경계선이었다고 주장했다. 양반은 양인과 구분되는 독특한 역사와 전통을 구체적으로 소유한 지배 계층이라는 것이다.
이성무 전 국사편찬위원장.
 
 이성무는 과거(科擧) 제도가 사실상 조선 전기(前期)부터 열린 등용문이 아니라 폐쇄적으로 운영됐다고 주장한다. 비록 양인이 과거를 보는 것에 대한 법률적 제한은 없었지만, 그들은 양반가문과 같은 경제력이 없고, 당시에는 적지 않은 비용이 소모되는 서적을 구입할 수도 없었으며, 지방의 서당(書堂)이나 향교(鄕校)에서 공부할 수밖에 없었는데, 현실적으로 그곳에서 공부에 전념할 만한 여유가 없었고 지방의 교육 수준도 상당히 낮았으므로 사실상 과거를 준비하는 것은 어려웠다는 것이다. 
  
 반면 양반의 자제들은 수준 높은 독선생(獨先生)을 모셔 교육을 받는 등 질 높은 사(私)교육을 받을 기회가 많았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절박한 과제 중의 하나로 제기되는 사교육 문제는 짧지 않은 역사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경제적인 구속이 없는 상태에서 학문에 전념할 수 있는 기회는 사실상 양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양반들은 어린 시절부터 유교 경전에 대한 체계적인 학습을 하고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는 것이 당연한 과정으로 간주되었던 데 비해, 양인들은 비록 실력이 출중하더라도 과거에 급제하는 과정에서 많은 장애가 있었다. 예를 들어 신분이 자연스럽게 증명되는 양반에 비해, 양인들은 호적과 관원에게서 받은 보단자(保單子)라는 신원보증서 및 추천서를 지방과 중앙에 제출하지 않고는 과거 자체를 보기도 힘들었던 것이다. 
 
“관직보다 가문이 중요”
 송준호(작고) 전 전북대 교수는 새 왕조의 첫 세기 동안 양반은 신분으로 존재했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성문법(成文法)에 규정된 특권들을 보장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양반이 될 수 있는 자격의 기준을 국가가 법률로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법률에 보장된 특권들과 그 지위에 관련된 정부의 정책을 살펴보면 ‘양반’이라는 특권 신분이 실질적으로, 구체적으로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17세기 이후 사실상 ‘양반’이 특권 계급화가 된 것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이 거의 동의하지만, 그런 변화의 싹은 조선 전기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송준호는 양반이 특권을 가진 개인과 그들의 친족(親族), 특히 향촌(鄕村)에 거주하는 친족 집단이었음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로 세조대의 유명한 문신(文臣) 양성지(梁誠之·1415~1482)의 말을 제시했다.
  
 양성지는 “양반이 사회적 안정의 기반으로 기능하면서 오랫동안 역대 왕조의 국왕을 보필했기 때문에 한국의 왕조들이 중국보다 오랜 수명을 누릴 수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양반들이 국초(國初)부터 국왕을 실제적으로 보필했던 특권 관료 계급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양반이 존재할 수 있었던 핵심적 요인은 바로 노비를 소유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면서, “북부지방에는 사노비가 너무 적었기 때문에 양반도 적었다”는 말까지 한다. 이는 양성지가 관직이나 과거 급제보다 훨씬 폭넓은 자격조건을 가진 사람들이 양반에 포함된다고 생각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이와 같은 의견에 반대하는 논자(論者)들은 “양인은 누구나 노비를 소유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런 주장은 세습적 양반 신분이 독립적으로 존재했음을 입증하는 데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양반이 다른 신분들보다 거의 언제나 더 많은 노비를, 때로는 대규모로 소유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송준호는 양반신분을 유지하는 데 결정적인 요건은 관직보다는 훌륭한 가문이었다고 주장한다. 특정 관직이 없는 ‘진사(進士)’나 ‘생원(生員)’도 가문의 영향으로 양반 행세를 보장받았다는 것이다. 일부 가문에서 누대에 걸쳐 학문적 전통을 유지한 것이 그들이 양인 농민들을 지배하는 데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양반은 특권신분이 아니다” (한영우)
한영우 이화여대 석좌교수
 이에 비해 한영우(韓永愚) 이화여대 석좌교수는 양반이 특권신분이라는 주장을 거부한다. 그는 조선 초기에 양반이라 불리는 사회계층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그들이 과연 통설대로 의무는 없이 ‘특권’(교육·벼슬·군역 면제 등)만 가지고 있었으며, 그들이 지배신분으로서의 지위를 ‘세습적으로’ 유지했느냐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한다.
  
 양반이라는 용어는 그 당시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관직과 품계를 가진 관원, 문무과 급제자와 생원·진사, 그리고 관원은 아니었지만 교생과 군사(軍士), 즉 관직에 임용될 수 있는 사람들만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양반은 특권신분으로서 존재한 것이 아니라, 특정 집단으로서 존재했다고 보는 것이다(한영우 교수는 양반에 대해 ‘신분’이 아닌 ‘계급’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이는 상하층의 지배구조를 연상시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양반을 충원하는 모(母)집단은 양인이므로 이를 특권 계급으로 생각하는 것을 잘못이라는 것이다. 
  
 한영우 교수의 주장은 “조선 초기의 사회구조를 그 체계가 무너진 조선 후기의 상황에서 소급해서 이해하지 말자”는 것이다. 고려 후기의 사회적 긴장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소외계층, 즉 천민(賤民)의 피가 섞인 사대부(士大夫)와 경제적으로 곤궁한 농민의 광범한 개혁의지의 소산이라는 관점에서 조선 초기 사회를 이해한다면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서 ‘특권’ 계급으로서 양반이 존재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15세기 학자와 16세기 학자 사이에 신분·계급 사상이 같지 않다는 것에 주의하면 조선 초 양반에 대한 이해가 더 정확해질 수 있을 것 같다. 
  
 즉 15세기 학자들은 대체로 양천제(良賤制)를 강력하게 옹호하면서 상전과 노비의 관계를 군신(君臣)관계 혹은 천지(天地)관계로 이해했다. 그러나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사민(四民)에 대해서는 그 직업분화는 지지하면서도 사(士)와 농(農)의 뚜렷한 구별은 짓지 않았으며, 선비의 소업(所業: 업으로 삼는 일)으로서 경학(經學) 이외에 사학(史學)·문학·기술학도 존중하는 태도를 보였다.
  
 즉 선비와 농부의 차별은 조선 후기의 사회에서만큼 극명하게 존재했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종직(金宗直·1431~1492)을 비롯한 사림(士林)학자들은 사의 소업을 경학이나 시사(詩史)에 국한시키고 기술학을 잡학으로 배격했으며, 사림 주도의 질서를 수립하기 위하여 향약(鄕約)·서원·유향소(留鄕所) 등을 주요 정강(政綱)으로 내세워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회적 질서에 대한 주장을 보였다.
  
“15세기는 거의 평등 사회”
 즉 15세기의 한국에서 모든 사람의 신분은 양인과 천인 중 하나였으며, 양인의 범주는 양인부터 최고의 대신까지 모두 포괄했다는 것이다. 관직을 갖는 것이 다른 사람에 대한 우월감을 느끼는 권리를 주지는 않았다고 생각된다. 양반이나 사족(士族)이 특별하고 세습적인 부류로 구분되어 간 16세기에 양인들은 양반이 보기에 천민이나 노비와 거의 구별되지 않는 비천한 집단이 됐다. 조정에 관직을 가진 선대로부터 우월한 신분을 세습받았던 양반 집단이 이제는 뚜렷한 하나의 특권 사회 집단 계급으로 고착화된 것은 16세기 이후다.
  
 조선 전기 사회에서는 노비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거의 평등한 기회를 누렸으며, 고려시대에 ‘하층’ 신분으로 간주되었던 사람들을 양인 신분으로 승격시키고 모든 양인에게 평등한 권리와 의무를 차별 없이 부여함으로써 양인 신분으로 인정되는 사람들이 계속 늘어나는 상황이었다는 연구 결과도 존재한다(劉承源 가톨릭대 교수).
  
 이들은 “새 조선 왕조는 고려와는 달리, 모든 양인이 국립교육기관에 들어갈 수 있고, 과거를 치를 수 있으며 관직에 임용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법률로 명시했다”면서 “양반이 하나의 특권 계급이 아니었다는 것은 반박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에 대해서 이들의 해석이 너무 성문법의 법 조항에 구속되어 있는 것이고, 실제로 그것이 현장에서 구현됐는지에 대한 연구는 없다는 비판도 제기되어 있다.
  
“양반은 관료제도와 귀족제도의 묘한 혼합체”(팔레)
 이런 두 대립되는 주장을 잘 종합하고 그 문제점들을 제시한 사람은 제임스 팔레(작고) 미(美) 워싱턴주립대 교수다. 팔레에 의하면, 양반은 ‘실력 위주의 관료제도와 세습적 귀족제도라는 상반된 정치형태의 묘한 혼합체’이다.
제임스 팔레 美워싱턴주립대 교수.

  
 국가는 거의 모든 범주의 양인이 과거를 치르고 관직에 등용될 수 있게 함으로써 조선 건국 이전이나 16세기 이후보다 신분 상승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좀 더 확대시켰다. 하지만 양반은 조상의 신분에 상관없이 양인들이 새로이 올라갈 수 있는 집단이 절대 아니었다. 양반가문에서 태어나는 것은 여전히 그 가문의 지위와 부(富)·권력·권위 등의 주요한 이점을 보장해 주었다. 그 결과 세습적 신분과 특권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은 관원들로 대체하려는 일부 성리학자들의 급진적 개혁이 존재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조선왕조의 본질적 구조는 중앙집권적 정부 관료조직과 세습적 신분의 강인한 전통이 혼합된 것이었다. 한편에서는 중앙집권적 관료제도가 시행되고 다른 한편에는 세습적 귀족이 존재하는 사회·정치조직의 원리는 근본적으로 갈등의 씨앗을 그 안에 담고 있었다.
  
 세습 귀족들은 가족관계, 개인적 인맥, 세습된 특권과 신분을 중시했지만, 관료 국가는 정치권력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를 넓히고 객관적으로 인재를 선발·평가하며, 양반 관원들을 제외하고는 사회를 평등하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이 양자(兩者)의 대립이라는 측면에서 조선 초기 사회의 양반 특권 계급화에 대한 문제에 접근하지 않으면 균형적인 연구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 팔레의 주장이다.
  
 중국의 당(唐)이 그랬듯이, 조선도 중앙집권적 관료제도를 채택하면서 세습적 귀족제도의 요소를 처리하는 문제에 부딪혔다. 그것은 자신들의 권력을 줄이거나 박탈하려는 일부 국왕들의 노력에 맞서 권력과 지위를 유지하려고 노력한 세습적 지배계층인 양반을 수용하는 문제와 연결된 것이었다.
  
 15세기에 조선 정부가 그 일을 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상당한 논란이 있다. 팔레는 조선 정부가 그런 능력을 가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고려의 귀족들이 단절됐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조차도 17세기 무렵 양반이 특권적이고 세습적인 지배세력이었다는 데에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조선의 지배세력은 대체로 양반이라고 불리지만, 실제로 모든 양반이 지배세력의 일원은 아니었다. 양반이라는 용어는 ‘훌륭하고 오랜 역사를 가진 핵심적 가문’을 의미했다. 그들은 대체로 토지·부·노비를 소유하는 데 다른 사람보다 유리했고 비슷한 신분의 다른 가문과 제한된 결혼관계를 맺었으며, 교육과 학문의 전통을 굳게 지키고 평균보다 훨씬 높은 과거 합격률을 독점했다. 이것들은 사회에서 가장 높은 특권을 차지할 수 있는 원천이 됐다.
  
 하지만 지배세력과 양반가문의 지속이 과거에서 주기적으로 성공한 데 달려 있었다는 점에서 양반을 순수하게 혈통적인 귀족으로만 간주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양반 가문에 소속된 사람들이 지배세력, 특히 최고 관직의 대다수를 차지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팔레의 연구에 의하면, 조선중기 실학자인 유형원(柳馨遠·1622~1673)은 세습적 귀족제도의 원인을 설명한 뒤 그것을 존속시키는 핵심적 변수로 과거제도를 지목했다.
  
 조선에서도 과거제도의 채택은 양반을 해체하지 못했다. 승려·노비·상인·공인·그 밖의 천민을 제외한 모든 양인을 대상으로 객관적이고 공정한 선발 기준을 만들 것이라고 표방한 의도와는 달리 조선의 양반은 자신의 자제를 미리 적극적으로 준비시킴으로써 과거제도의 평등적 경향을 피해갈 수 있었다.
  
 유형원은 세습적 귀족을 없애고 과거제도를 혁파하는 두 개의 제도적 개혁이 조선에 절실하다고 결론짓는다. 세습적 귀족인 양반은 혈통을 근거로 유능한 인재가 미천한 신분(예를 들어 서출, 아전 등의 경우)의 탓으로 배제되게 하는 과거제도를 통해 관직을 독점했다는 것이다.
  
 중국 역시 귀족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중앙집권적 관료제도 아래서 과거제도를 시행했지만 그 결과는 세습적 귀족제도만큼 나빴다. 
  
 팔레는 “과거제도와 지나친 중앙집권적 관료제도의 통제를 거부하고, 훨씬 훌륭한 교육과 관리 등용제도인 고대의 공립학교와 천거제도를 시행하자는 것이 유형원의 주장이었다”고 설명한다. 그에 의하면, 유형원의 진정한 목적은 도덕교육을 받아 완벽해진 학자이자 관원인 사대부를 백성 중에서 좀 더 널리 선발해 도덕적으로 불완전한 당시의 세습적 양반을 대체하는 것이었다.
 
中人 계급의 출현
 고려의 왕권이 쇠약해진 까닭이 전적으로 당시 양반들의 잘못 때문은 분명히 아니었지만, 고려의 국왕은 중앙관직과 토지와 노비를 독점한 양반가문이 성장해 고려를 지배하는 상황에 거의 저항하지 못했다. 
  
 이성계(李成桂)에게 협력한 성리학자들은 세습적 양반 귀족들이 고려를 지배하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좀 더 강력한 국왕이 필요하고 과거에 급제해야만 고위관직에 임명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제 중앙 조정에는 성리학의 규범을 배운 사람들만이 임용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모든 지방 관원을 중앙의 정규 관원으로 임명함으로써 중앙집권적 관료제도를 전국적으로 실시하려고 계획했다.
  
 고려 후기의 귀족제도를 실력 위주의 사회로 바꾸려는 목적에서, 고위 관직에 오르기 위해서는 과거를 보아야 했다. 과거 준비에 필요한 교육과정은 14세기 전반 원이 추진한 개혁에 대항하기 위해서 주로 사서(四書)에 대한 주희(朱熹·주자)의 주석으로 편성했다.
  
 그러나 고위 관원들이 항상 도덕적·학문적으로 가장 뛰어난 사람들 중에서 선발된 것은 아니었다. 15세기에 공신(功臣)들이 많이 책봉된 것은 엽관(獵官)제도의 한국적 형태로서, 국왕은 협력자들의 충성을 계속 유지시키기 위해 관직·토지·노비 등을 하사했다. 유교의 이상에 따르면 국왕은 꾸며낸 능력에 속지 말고 장점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관직에 등용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새로 권력을 잡은 지배세력은 정규 관원과 서리(胥吏) 사이에 새로운 경계선을 그었다. 그 결과 향리(鄕吏)는 지방 관원으로 임명되지 못했고 서리는 정규 관품(官品)으로 승진하지 못했다. 국가는 향리와 서리에게 수수료와 선물·뇌물을 받아 생활하도록 방치한 채 그들에게 주는 녹봉을 중단했다. 이 부류는 중인(中人)이라 불렸으며 시간이 갈수록 혈통에 의해 많은 제약을 받게 됐다. 
  
양반은 조선조 500년의 핵심 
 조선왕조는 과거제도가 최적의 관직 후보자를 얻는 데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은 채 정규 관원을 등용하는 주요 수단으로 그것을 계속 실시했다. 그러나 세습적 귀족정치를 무너뜨리고 유교의 고전과 주희의 주석에 담긴 사상에 기초한 능력 위주의 사회를 건설하려던 시도가 완전히 성공하지는 못했다. 조선왕조를 이끈 지배 계층조차도 대부분 고려 후기의 지배세력에서 충원된 면이 있었다. 
  
 결국 조선의 양반은 귀족사회의 전통을 여전히 가지는 것이었지만 과거제도를 통한 능력의 검증을 어느 정도 필요로 했다는 점에서 이전의 완전한 귀족사회의 귀족과는 차별적인 면이 있었던 것이다. 
  
 잠깐 여기에서 지적하고 넘어가고 싶은 점은, 대체로 양반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에 대한 문제이다. 과연 양반에 부정적인 요소가 그렇게 컸다면 어떻게 조선조가 500년이라는 긴 역사 동안 유지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양반사회의 배타적 속성은 조선사회의 한 측면을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 그것이 조선사회의 전체 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양반은 정치적 주도 세력일 뿐 아니라 조선조 문화를 창조하고 누리는 핵심집단이기도 했다. 오늘날 우리는 모두 훌륭한 양반의 후손임을 내세우고 있다. 나아가 세계를 향해 그 정신과 문화를 자랑하고 있다. 
  
 이처럼 양반의 정신세계와 선비 문화는 현재 우리의 삶에 보이지 않는 저변을 형성하고 있다. 우리는 과거 양반이 물려준 문화에 기반해 삶을 꾸려가고 있다. 그러나 ‘양반’의 긍정적인 전통에 대한 연구는 후일로 미루기로 하고 양반의 ‘문제’에 대해 계속 논하기로 한다.
  
 이상에서 양반에 대한 그간의 학계의 연구 내용을 간략하게나마 살펴보았다. 조선 초기의 양반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17세기 이후의 양반은 ‘특권적’이고 세습화된 지배세력으로 굳어졌다는 점에는 모두 인식을 같이하고 있다. 그럼 문제의 실마리는 17세기의 특권화된 양반이 나타나기 직전의 모습을 살펴보는 데서 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權姦과 流俗
 양반의 문제를 가장 적극적으로 지적하고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한 사람이 바로 16세기에 살았던 율곡 이이(栗谷 李珥·1536~1584)라고 할 수 있다. 율곡은 바로 특권화되기 직전의 양반 중의 하나였다. 그래서 율곡을 통해 16세기 양반의 모습을 살펴보고 율곡의 양반에 대한 문제 지적을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꽤 깊은 일인 것 같다.
 
16세기 양반의 폐해를 지적한 율곡 이이.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율곡은 평생 한 번도 양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도대체 양반이라는 용어를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인물을 통해 양반을 기술하는 작업이 과연 의미가 있는 것인가. 하지만 율곡이 양반이라는 용어를 왜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해 보면 의외로 문제는 쉽게 풀린다.
  
 율곡의 시기에 이미 양반은 ‘양반’(좋은 의미의)의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즉 양반은 이미 없어졌다. 그 이유는 우리가 양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인물들에 대한 율곡의 명명법을 보면 드러난다. 
  
 율곡은 당시의 ‘양반’ 즉 지도층 인사들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부르고 있었다. 하나는 권간(權姦)이고 하나는 유속(流俗)이었다. ‘권간’은 자기 마음대로 권력을 주무르던 윤원형(尹元衡·?~ 1565) 등의 세력을 지칭하는 말이었고, ‘유속’은 권간이 사라진 후 복지부동하며 그 권력과 부만을 유지하려고 애썼던 지배층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율곡의 시기를 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당시 백성들의 삶을 보아야 한다. 율곡이 본 당시의 민생은 기본적인 삶조차도 영위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것이었다. 율곡은 당시의 안타깝고도 긴박한 상황을, “장정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약한 자들은 도랑과 구덩이를 메울 정도로 죽어가, 울부짖는 백성들이 마침내는 곤경이 극도에 달하여 난리를 일으키는 지경에 이르고야 말 것”이라고 절규했다.
  
 율곡의 시대는 임꺽정의 시대였다. 당시 율곡이 본 것은 임꺽정의 난이었고 그 난을 가져온 원인을 고민한 율곡이 내린 결론은 바로 잘못된 정치였다. 그 정치적 문제의 중심에는 바로 ‘양반들’이 있었던 것이다. 세금과 군역 문제 등에서 백성들의 삶은 이미 사람의 인내심으로 이겨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런데 당대의 양반이었던 권간과 유속들은 ‘민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말은 수도 없이 내뱉었지만 실제로 그들은 민생을 피폐시키고 민을 착취하는 자들이었다.
  
 율곡의 눈에 양반은 이미 권간화되어 있었다. 율곡에게는 양반은 없어져 버렸고 권간과 유속만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사적 이익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율곡은 ‘사적 인간’일 수밖에 없는 인간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양반이 어느 정도 ‘공적 인간’의 요소를 가지고 있어야만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公論’이란 무엇인가
 율곡은 양반이 전부 권간과 유속으로 변한 사회의 해결책으로 사림과 도학(道學)을 강조했다. 그 도학이 후에는 다분히 명분화된 측면이 있었지만 율곡이 말한 도학은 바로 실천학이었다.
  
 율곡이 도학을 통해 실천하고자 던진 화두는 무엇이었을까. 현대 정치학의 화두가 ‘민주주의’라면 조선조, 특히 율곡 시기 정치의 화두는 바로 ‘공론(公論)’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선조(수정)실록>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표현은, 신료(臣僚)들이 선조에게 ‘(이러한 사안이) 공론 이옵니다’와 ‘속히 공론을 따르소서’라는 말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 말 속에 등장하는 공론의 의미이다.
  
 율곡에게 공론은, ‘일반인(國人)들로부터 나오는 자연스러운 여정(輿情)으로, 모든 사람이 옳다고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공론이란 ‘양반 혹은 관직에 있는 지배세력의 백성에 대한 판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백성의 소리’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즉 율곡은 민정(民情) 그 자체를 바로 공론으로 인식하고자 하였지, 단순히 삼사(三司: 사헌부·사간원·홍문관) 관리들의 의견일치를 공론으로 보기를 거부한다. 
  
 그러나 당시의 위정자(爲政者)들이 인식하는 공론은 바로 삼사만의 결정을 의미했다. 따라서 백성들의 소리는 소외된 것이었고, 따라서 권간화된 양반은 이미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이었다.
  
 율곡이 공론을 강조한 것은 언로를 독점하고 만장일치만을 지향해 아무런 결론을 내리지 못한 때가 많았던 당시 삼사의 잘못된 풍토를 비판하기 위한 것이었다. 유속들은 이런 풍토 속에서 피혐(避嫌 : 의견이 다른 자와 같이 일을 못하겠다고 사직하는 것)을 남발하며 백성의 소리를 전달해야 할 양반, 사회지도층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이다. 
  
 율곡은 논(論)보다 의(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의를 살려냄으로써 정치의 장에서 소통의 기반을 마련하려는 시도를 한다. 율곡의 비판은 ‘논’만 있지 ‘의’가 없다는 것이었다. ‘논’은 ‘결론’에 가까운 의미가 되며, ‘의’라는 말은 그 ‘과정’에 가까운 의미다. ‘논’이 혼자서 결단하는 것이라면, ‘의’는 더불어 함께 구체적인 사안들을 따져보는 것이다.
  
  ‘논’을 강조하다 보면 ‘시비(是非)’의 문제를 우선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의정부(議政府)의 ‘의정(議政)’은 ‘논정(論政)’의 의미가 아니었는데, 이 기능이 상실됨으로써 결과적으로 ‘무의미한 정쟁적 시비론’의 결정체인 정치의 붕당화를 양산하였다.
  
 삼사가 주도한 ‘의 없는 논’은 마침내 ‘옳고 그름(是非)’만을 논하게 됐다. 권간은 의와 논 자체를 무시했고, 유속은 의와 논 자체를 회피하였다. 
 
양반은 임금과 백성의 매개자
 폐법(弊法)은 이러한 권간의 결과이고, 폐정(弊政)은 이러한 유속의 결과물이다. 율곡에 따르면 좋은 의미의 양반이 사라진 자리에 권간과 유속이 득세했고 그래서 폐법과 폐정으로 나라가 10년 내에 토붕와해(土崩瓦解)될 것이라는 진단을 내린다. 
  
 민생이 피폐하고 정치가 그 민생 문제들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시비 문제를 통한 권력 다툼에만 빠져 있는 상태에서 율곡이 제시한 해결책의 하나는 바로 ‘만남’이다. 즉 나라의 근본인 백성과 정치의 근본인 임금과의 만남인 것이다. 
  
 백성과 임금이 직접 만나기는 어렵다기보다는 오히려 불가능하다. 따라서 임금과 백성을 만나게 해줄 매개자가 필요하다. 그 매개자 집단이 바로 신료라고 할 수 있고 원래 의미의 ‘양반’이라고 할 수 있다.
  
 율곡은 ‘민정’을 중시하였다. 그가 선조(宣祖)에게 폐법과 폐정을 개혁하자고 주문하면서 근거로 삼은 것은 바로 ‘민정이 모두 원하는 바(민정해원·民情皆願)’였다. 민정이란 ‘일반 백성들이 느끼는 1차적 감정으로 인간의 가장 진실된 모습’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위정자의 1차적 책임은 바로 민정을 잘 파악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민정은 ‘민의(民意)’와는 다르다. 민의는 왜곡될 수 있지만, 민정은 그 자체가 바로 현실 정치에 대하여 직접 느끼는 가장 솔직한 감정이다. 민의가 아닌 민정에 주목할 때, 위정자는 결코 백성을 ‘설득’의 대상으로 볼 수가 없게 된다. ‘세종시 문제’를 설득을 통해 해결하려는 시도는 민정이라는 중요한 정치적 요소에 민감하지 못한 결과이다. 
  
 백성을 민정에 기반을 두고 접근하지 못하고 도구로 인식하는 양반 혹은 신료들이 주로 강조하는 것은 바로 ‘애민(愛民)’이다. ‘애민’이란 ‘백성을 사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사랑이 구체적인 결과를 나타내지는 않고 하나의 당위만을 말하는 것이다. 누구나 백성을 위한다고 하고 누구나 백성을 사랑한다고 한다. 하지만 ‘애민’의 관점에서는 백성의 실제 삶, 즉 민생(民生)을 정확하게 볼 수 없다. 따라서 민생 문제에 대한 소통이 필요 없게 되고, 그 결과 백성이 정치의 근본으로 인식되지 못하고 도구화되어 버린다.
  
 하지만 율곡은 ‘애민’보다는 ‘안민(安民)’을 말한다. ‘안민’이란 ‘백성이 편안하다’는 말로 백성에 대한 정치적 행위의 구체적인 결과를 지시하는 말이다. ‘애민’은 헛된 구호로 그치기 쉽지만 ‘안민’을 구호로 속일 수는 없다. 율곡의 주장대로, ‘안민’에서 출발하면 명백한 소통의 가능성이 존재하게 되고 정치적 실효를 얻을 수 있다. 이런 기능은 관리들이, 사회적 지도 세력인 양반들이 해야 할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에 율곡의 암묵적인 양반에 대한 비판이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의 ‘애민’과 ‘안민’에 대한 구별이 낯설게 느껴진다면, 학생이 배제된 학생회와 농민이 없는 농협(農協)의 모습을 상상해 보기 바란다.
  
 양반이 그 원래의 의미를 상실하고 ‘양반’이라는 말조차 사용하지 않고 양반을 비판한 율곡의 논의를 오늘날 우리가 잘 살펴보고 현실을 바라보는 잣대로 삼는다면 우리는 ‘저 양반 도대체 왜 저래’라는 저속한 의미에서 ‘그 사람 참 양반이지’라는 긍정적인 의미의 양반을 다시 살릴 수 있는 하나의 좋은 길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출처 : 월간조선 2010년 2월호 

 


                            돈 없는데 양반이라고 별수 있나

                       [안대회의 조선의 비주류 인생]

 

노동과 장사를 천시했지만 생존 위해 어쩔 수 없이 시장으로 흘러 들어온 몰락한 양반의 다양한 군상들

 시장은 물건과 화폐가 유통되는 곳으로서 신분과 계층 같은 권위나 인격과 도덕 같은 인간의 내재적 가치가 대우받는 곳이 아니다. 화폐와 물건이 그런 가치에 앞서 대우받는 곳이다. 조선 후기의 시장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조수삼은 이러한 시장의 생리를 너무도 잘 알았고, 그 실상을 드러내는 한편 시장의 논리와는 달리 살아가는 인간들의 모습을 포착하려고 노력했다. 물질과 금전의 추구와는 또 다른 측면에서 개성 있게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도 찾아내고자 했다. 그런 그의 시선에 포착된 한 부류의 독특한 인간군이 바로 비참하게 몰락한 양반이었다. 그들도 시장의 한 귀퉁이를 빌려쓴 셈이다.

 

 

                 돈 없는데 양반이라고 별수 있나.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조선 후기 들어 구걸하는 양반까지 나와

 

 본래 조선의 양반 사대부들은 시장을 멀리했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이란 말에서 선비와 상인의 거리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듯이, 사대부는 장사하는 사람과 시장을 멀리했다. 예의염치를 중시하는 양반 사대부가 싸게 사서 비싸게 팔아 일정한 이윤을 추구하는 행위를 한다는 것은 스스로 양반임을 포기하는 짓이었다.

그렇지만 조선 후기 들어 더 이상 생계를 이어가기 어려운 극한에 도달한 양반들이 적지 않게 등장했다. 그러한 상황에 처한 양반들이 현실을 타개하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시장에 나타나 생계를 이어가는 것이었다. 극단에 몰린 사람은 아예 구걸하는 거지로 떠돌기까지 했다. 그래도 그런 부류는 자기 인생을 책임지는 편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보다 더 무기력한 존재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19세기에 편집된 야담 <어수록>(禦睡錄)에는 몰락한 양반 일가족의 죽음을 묘사한 짧은 일화가 실려 있는데 그런 무기력한 존재를 잘 보여준다.

한양의 소의문(昭義門) 밖에 홍(洪) 생원이 사는데 홀아비에 딸 둘을 두었다. 너무나 가난해 생계를 꾸려갈 방법이 없자 훈조막(熏造幕) 일꾼들에게 구걸하자 일꾼들이 십시일반으로 밥을 모아 주었다. 그는 그 음식을 잎사귀에 싸서 집으로 가져가 딸들을 먹였다. 여러 날 그렇게 하자 어느 날 취한 일꾼 하나가 그에게 “생원이 훈조막 부군당(府君堂)이나 되고 우리 상전 자식이나 되냐?”며 욕설을 하자 홍 생원은 눈물을 떨구고 집안으로 돌아갔다. 대엿새가 지났는데도 인기척이 없자 일꾼 하나가 집안을 들어가보았더니 부녀가 누워서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일꾼이 불쌍히 여겨 급히 나와 죽을 끓여 가져다주었다. 홍 생원이 13살 난 큰딸에게 “너희는 이 죽을 먹고 싶지? 우리 셋이 간신히 굶주림을 참은 지 이제 엿새째라, 곧 죽게 되었으니 그동안 애쓴 것이 아깝다. 이제 이 죽 한 그릇이라도 저 사람이 계속 주면 좋겠지만 이 뒤로부터 당할 욕됨을 어찌 견디겠느냐?” 그럴 때 5살 난 딸이 죽 냄새를 맡고 힘겹게 머리를 치켜들자 큰딸이 손으로 머리를 눌러 “자자! 자자!” 달래서 다시 재웠다. 다음날 일꾼들이 가보았더니 모두 죽어 있었다.

‘홍 생원이 굶어 죽었다’는 이 비참한 사연은 조선 후기 기아 선상에 헤매는 사람들의 처지, 특히 생계를 꾸려나가는 데 극도로 무기력했던 몰락한 양반의 처지를 인상 깊게 보여준다. 그 부인이라도 있었다면 홍 생원 가족이 이렇게까지 비참하게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홍 생원은 구걸하다 차라리 죽어 욕을 당하지 않는 가장 무기력한 길을 택했다. 그만큼 양반 남성 신분은 노동과 장사를 천시했다.

 

“나무 사려” 대신 “내 나무”라고 외친 양반

 

 홍 생원 같은 위기에 봉착한 양반이 한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추재기이>에는 이렇게 생계의 위기에 봉착해 할 수 없이 시장으로 내몰린 양반들이 여러 명 등장한다. 그 가운데 장사에 나선 양반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 ‘내 나무’이다. 다음은 그 전문이다.

“내 나무는 땔나무를 파는 사람이다. ‘나무 사려!’라고 외치지 않고 ‘내 나무!’라고만 외친다. 심하게 눈보라가 치는 추운 날에는 골목골목을 다니면서 외치고 그 나머지 시간에는 거리에 앉아 있다. 나무를 사러 오는 사람이 없을 때에는 품 안에 든 책을 꺼내 읽는데 고본(古本) 경서(經書)였다.”

어떤 특이한 땔감 장수의 사연인데 그 장사꾼의 이름은 없이 ‘내 나무’(吾柴)라는 별명만 있다. 그의 이름이 밝혀지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사실 그 당시에는 장사 밑천이 없는 서민이 입에 풀칠할 수 있는 대표적인 일거리가 나무 장사였다. 그들은 산에 올라가 나무를 해다가 한양 사람에게 팔아 근근이 먹고살았다. 그 시절에는 동대문 안팎에 큰 땔감 시장이 섰다.

그런데 이 ‘내 나무’는 일반 땔감 장수와는 여러 가지가 달랐다. 그중 하나가 “나무 판다!”거나 “나무 사려!”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니 않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이다. 매매하고 흥정을 붙이는 행위는 상인의 행위로서 양반 사대부가 가장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였다. 이 나무 장수는 신분이 양반이라 팔기는 하되 판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렇게 한 이유가 그가 양반임을 드러내려 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신분을 숨기고 싶었으나 부지불식간에 드러났다. 그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은 “내 나무”였다. 내게 나무가 있으니 사가라는 말이다. 양반으로서 자의식과 자존심이 묻어나는 호객 행위이다. 그러니 그 많은 나무 장수들 틈에서 얼마나 도드라져 보였을까? 그 우스꽝스러움을 보지 않아도 알 만하다. 그 때문에 그는 시장에서 유명해졌다.

그의 유별난 행동은 여러 가지지만 그중 하나가 손님이 아무도 없을 때 품 안에서 책을 꺼내 읽는 것이다. 그는 품 안에 경서, 그것도 구하기 힘든, 아주 오래전에 간행된 고본을 지니고 다녔다. 현재는 나무꾼 신세지만 그의 집안이 과거에는 명문가였음을 암시한다. 조수삼은 이 인물을 놓고 이런 시를 지었다.

 

몰락했지만 책만은 팔지 않는 명문가 후손

 

“눈보라 거세게 치는 큰 거리에서

이쪽저쪽을 다니며 ‘내 나무’라고 외친다.

바보 같은 회계(會稽) 마누라라면 틀림없이 비웃겠지만

송나라 판본 경서는 품 안에 가득하다.”

 

 여기서 바보 같은 회계 마누라는 곧 한(漢)나라 때의 명사 주매신(朱買臣)의 본처를 가리킨다. 이 여자는 집안이 가난해 땔나무를 하며 공부에만 열중하는 남편을 부끄럽게 여겨 이혼했다. 그런데 뒷날 주매신이 회계군 태수가 되어 부임하자 전처는 부끄럽게 여겨 자살했다. 이 시를 보면, 이 나무꾼이 언젠가는 성공할지도 모른다고 암시를 언뜻 했다. 그러나 그런 기대가 현실에서 일어나기 힘들다는 것을 그 자신도 잘 알았다.

시에서 말한 송나라 판본 경서는 일반 사람은 소장하기 어려운 비싼 책이었다. 그런 귀한 재산을 팔지 않고 품 안에 끼고 읽는 것은 양반 후예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다. 그는 우스꽝스러울지 모르지만 나무라도 해서 생계를 유지하며 뒷날을 기약한 양반이었다. 그런 점에서 조수삼은 그런 기대라도 걸었던 것이다.

<추재기이>에는 이렇게 몰락한 양반임에도 책만은 팔지 않는 명문가 후손의 이야기가 또 나온다. 경호(磬湖)에 사는 박(朴) 생원은 책 수천 권을 소장했는데 아무리 가난하다 해도 책을 내다팔지 않았다. 낮이면 집을 나서 한강 일대를 비롯해 경성(京城) 안의 친지와 친구들을 찾아보고 밤이면 집에 돌아와 정성껏 두 아들에게 책을 가르쳤다. 두 아들은 뒷날 약간의 성취를 거두었다고 했다. 아마도 초시에는 합격해 양반 신분을 유지하기는 했다는 말일 것이다. 이렇게 조상 전래의 귀중한 장서라도 지킨 부류는 그래도 형편이 나은 축이다. <추재기이>에는 아예 그런 기반조차 사라진 불쌍한 양반 여럿이 시장에 모습을 나타낸 사실을 기록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복홍(福洪)이란 거지다.

“복홍은 그 내력을 알 수 없다. 그에게 성이 무어냐고 물으면 “몰라!”라고 대꾸하고, 이름이 무어냐고 물으면 “복홍이야!”라고 대꾸하였다. 나이는 쉰여남은 살쯤 되어 보였다. 그렇지만 그 나이에도 총각이었다. 날마다 성 안을 다니며 밥을 구걸하는데, 날을 가려서 문을 선택하는데 그 순서를 어기는 법이 없었다. 밤이 되면 사용하지 않는 관아에 들어가 잠을 자는데 볏짚으로 만든 멍석을 깔고 덮은 채 밤새도록 <맹자>를 암송하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복홍은 한양의 유난스런 거지다. 아무 집이나 찾아가지 않고 꼭 일정한 룰에 따라 구걸할 집을 찾아갔다. 그는 이름만 있고 성이 없으며 식구도 없다. 자신의 내력을 철저하게 숨겼다. 그런 거지에게 사람들은 왜 호기심을 가졌을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가운데 하나가 아무도 없는 괴기한 빈 관아 건물에 멍석을 깔고 덮은 채 밤새도록 <맹자>를 암송하는 것 때문이다. <맹자>를 암송한다는 것이 숨겨진 그의 이력을 표현한다. 비록 시장과 골목을 돌아다니며 구걸하고 노숙하는 부랑자일망정 그의 품성에는 양반 사대부의 피가 흐르고 공부하던 사람의 지성이 보존되고 있음을 말한다. 그가 꼭 양반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맹자>를 암송할 정도인 것을 보면 그럴 가능성이 높다. 사람들은 그에게 일종의 연민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복홍처럼 드러내놓고 구걸하는 거지는 아니라 해도 생계를 해결하지 못하고 남에게 빌붙어 살거나 간헐적으로 구걸하는 부랑자가 제법 있었다. 송(宋) 생원이 그런 인물이다. 송 생원이 한양의 저잣거리에 모습을 나타냈을 때 생원이라고 불린 것을 보면 양반으로 보이지만 가난할 뿐만 아니라 돌아갈 가정도 없었다. 일부러 미친 척하면서 장난도 치는 떠돌이 부랑자인 그의 뒤를 철부지 동네 아이들이 졸졸 쫓아다녔다. 아마도 “송 생원, 송 생원!” 놀리면서 따라다녔을 것이다. 거지인 주제에 특이하게도 시를 잘 지은 것이 아이들을 몰고 다니는 이유였다.

그런데 사람들이 시를 지어보라고 운자(韻字)를 불러주면 그는 즉시 시를 지어냈다. 그리고 시 한 구절에 대가로 돈 한 푼을 달라고 했다. 동전 한 푼을 손바닥에 얹어 놓아주면 받았으나 땅에 던져서 주면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것을 보면 그는 시시한 거지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절대로 구절만을 지을 뿐 시 전체를 말해주는 법은 없었다. 그가 지은 시에는 아름다운 구절도 제법 있었다.

 

시 지어주고 돈 한 푼 받는‘ 낭만 거지’도

 

“천리 타향에서 만난 벗을 만 리 멀리 보낼 때에

강으로 이어진 성곽에 꽃은 지고 비는 부슬부슬 내린다.”

 

 떠돌이 부랑인이 지었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고운 시다. 고향의 역말 사람을 배웅하는 시인데 꽤 운치가 있다. 이런 멋진 시 한 구절 지어주고 돈 한 푼 받는 부랑인, 너무도 낭만적인 거지다. 그러나 그는 양반 신분을 지탱하지 못하고 시장 바닥을 떠도는 몰락한 신세일 뿐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명문가인 은진 송씨라고 수군거렸다. 어느 날 갑자기 그가 시장에서 사라졌는데 그 집안에서 부끄럽게 여겨 그에게 가정을 꾸려주고 출입을 막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내 나무’나 복홍, 송 생원은 모두 당시 시장에서 꽤나 이름이 알려진 존재들로 보인다. 시장 사람들에게 그들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한편으로는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조선왕조를 지탱하던 양반들이 더 이상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지는 모습들이 하나둘씩 도시의 시장과 골목에서 발견되었다.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 한문학  출처 : 한겨레 21[2009.07.13 제7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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