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으로부터
이혜미
오토바이를 타고 나선계단을 올랐어
끝없이 이어지는 소용돌이를 따라
높이 더 높이,
구름을 뚫고 선 키오스크를 만났지
달처럼 밝았어
아름다운 영화들이 상영 중이었지만
성인인증이 필요했다
어떤 장면을 만나기 위해 어른이 되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지 신의 창문 앞에서 머뭇거리는 동안
계단이
무너지고 손에 쥔
핸들이 녹아내리고
소설과 눈보라
솜사탕에 닿은 혀끝
인증번호 6자리
긴 양말과 젖은 편지
진눈깨비 같은 사람에게 휘감겨
흔들리던 한때를 생각하면
차가워진 입술이 푸르게 떨렸다
너무 꽉 쥔 마음이 더 빨리 녹아 사라지듯이
오래 지어 가진 거짓말은 개인적인 진실이 된다
그래서 소설과 거짓말의 차이는
얼마나 긴 시간을 견뎠는지에 있어
얼음과 어른의 차이처럼
몰래 간직한 유년을 얼음조각처럼 달게 굴리면
입속에서 낯선 색들이
흘러나오고
나는 비밀을 빛이라 믿으며
키오스크 앞을 서성이는 사람
좋아해
녹지 마
속삭이면서
입가를 타고 데워진 말들이 넘쳐 나올 때
무엇을 더 껴안아야 할지 알 수 없었지
작은 오토바이를 타고 달까지 오르던 꿈처럼
숨겨둔 얼음을 향해 가던 그 어둠 속에서는
이혜미
2006년《중앙일보》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시집『보라의 바깥』『뜻밖의 바닐라』『빛의 자격을 얻어』『흉터 쿠키』,
산문집『식탁 위의 고백들』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