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걸으려 해 / 신달자 나는 걸으려 해 아주 느리게 서서히 천천히 가려 해 발자국이 찍히는 감각 속에 지난 세월의 우울이 감지되고 깊이 느끼고 발이 오르고 내리는 걸 감지하고 아침에서 저녁 오는 거리로 작정하고 서서히 걸으면 내 입술로 부른 이름들이 나를 앞으로 나가게 밀고 밀어주고 밀었는데 나는 뒤로 뒤로 새처럼 날아오르게 될 거야… 나는 두 발에 힘을 주고 열 발가락을 못처럼 바로 여기에 찍고 있는데… 그렇게 그렇지 서 있는 듯 아끼며 한 발 두 발 가고 싶었어 지금에 내가 여기 있고 싶었어 그런데 도무지 누구의 명령일까 순간 흔들리고 소나기가 퍼붓고 폭풍이 광풍이 미친 듯 사방을 한바탕 휩쓸어 버리더니 아아 한걸음에 백 리를 훌쩍 가 버렸네 여기 어디야? 어떤 이름을 불러야 하나 이 두 손을 어디다 두어야 하나 앞은 짧고 텅 비고 내 뒤에는 광활한 이야기가 흐르고 있는데…
ㅡ 계간 《시산맥》 2024년 가을호 -------------------------
* 신달자 시인 1943년 경남 거창 출생. 숙명여대 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1972년 《현대문학》 박목월 시인 추천으로 등단. 시집 『간절함』 『열애』 『북촌』 『전쟁과 평화가 있는 내 부엌』 등. 저서 『너는 이 세 가지를 명심하라』 『나는 마흔에 새의 걸음마를 배웠다』 등. 2009년 공초문학상, 2016년 정지용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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