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국산 최고급세단인
홍기(紅旗)가 오는 11월 5일부터 11일까지 베이징에서 열리는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 의전차량으로 선정됐다.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를 비롯해 베이징 APEC 정상회의에 참석하는 정상들은 홍기의 최고급 세단 ‘홍기 L5’를
타게 된다. 그 아래급 인사들에게는 지난해 5월 출시한 배기량 2000~3000㏄의 고급세단 ‘홍기 H7’이 APEC 의전차량으로
제공된다. 중국 자국산 고급 자동차의 국제무대 본격 데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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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진타오 전 주석이 홍기 오픈카를 타고 사열 중이다. /주간조선
‘홍기 L5’는 12기통에 배기량 6000㏄를 자랑한다. 전장만 5555㎜에 달한다. 거대한 라디에이터 그릴과
툭 튀어나온 원형 헤드라이트 등 ‘깍두기’를 연상케 하는 복고풍 디자인이다. 마오쩌둥(毛澤東)을 비롯 역대 중국의 최고지도자가
10월 1일 국경절(건국기념일) 베이징 천안문(天安門)광장에서 열병식을 거행할 때 탑승하는 차량과 외관이 거의 흡사하다. 차량
앞덮개의 정중앙과 양 측면 등 삼면에는 ‘붉은 깃발(홍기)’ 모양의 엠블럼이 붙어있다. 마오쩌둥의
‘삼면홍기운동(총노선·대약진·인민공사)’을 상징하는 엠블럼이다. 운전대와 앞뒤 바퀴 가운데는 붉은 바탕에 금빛 태양인
‘동방홍(東方紅)’이 새겨져 있다. 실내 인테리어는 전통공예인 경태람(景泰藍) 등으로 장식돼 있고, 뒤트렁크 중앙에는 마오가
친필로 갈겨쓴 ‘紅旗(홍기)’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대당 가격은 무려 648만위안(약 11억1000만원).
홍기 브랜드가 처음 나온 것도 마오쩌둥의 한마디에서부터다. 1956년 마오쩌둥이 당 중앙정치국 확대회의에 참석하면서 “언제 우리
스스로 생산한 차를 타고 회의에 출석하나”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이후 중국공산당 중앙은 건국 10주년인 1959년의 국경절
대열병식에 맞춰 홍기 생산에 착수한다. 홍기 생산을 담당한 자동차 회사는 지린성 창춘(長春)에 본사를 둔
제일기차(第一汽車·자동차). 줄여서 ‘이치(一汽)’로 불리는 ‘제일기차’는 상하이에 본사를 둔 상하이차와 함께 중국의 남북 시장을
양분하는 국영 자동차 기업이다.
당시만 해도 자동차 독자 생산기술이 없을 때라 이치는 중국 특유의
‘베끼기’에 착수한다. 이치는 미국 크라이슬러의 1955년식 자동차를 완전분해한 뒤 이를 기초로 고급세단 제작에 착수했다. 특히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가 자신의 르노차를, 천이(陳毅) 부총리가 자신의 벤츠차를 이치에 연구용 샘플로 기증했고, 이를 기초해
중국 최고 고급세단인 ‘홍기 CA72’를 생산했다.
이후 중국의 역대 최고지도자들은 10월 1일 국경절
천안문광장에서 열리는 대열병식 때 홍기 브랜드의 사열차를 타고 삼군을 열병했다. 덩샤오핑(鄧小平)을 비롯 장쩌민(江澤民),
후진타오(胡錦濤)도 10월 1일 국경절 대열병식 때 홍기를 타고 세계 최대 직선도로인 장안가(長安街)를 누볐다. 이에 홍기는
중국에서 ‘국차(國車)’ 또는 ‘원수급(元首級) 차’로도 불린다. 1972년 미국 닉슨 대통령도 방중 때 홍기 리무진을
의전차량으로 이용했다.
사실 홍기는 의전 행사용 차로 명성이 높으나 차량의 성능에 대해서는 평가가 좋지
않았다. 겉모양만 으리으리하지 연비와 같은 실속은 형편없다는 얘기를 들었다. 홍기 브랜드와 대부분 차량은 외관은 독일 아우디에서,
엔진은 일본의 닛산 등에서 빌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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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방중한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 전용기 앞에 서 있는 홍기 L5
이치는 1991년과 2000년부터 각각 독일의 폭스바겐과 일본의 도요타, 마쓰다와 합작해 이치폭스바겐, 이치도요타,
이치마쓰다를 생산해 왔다. 중외(中外) 합작기업이라 하지만 사실상 독일, 일본 조립차였다. 특히 홍기 HQ300은 도요타의
고급세단인 ‘크라운 마제스타’를 간판만 바꿔 단 모델이라 ‘중국의 치욕’이란 얘기까지 나왔었다.
홍기
브랜드를 이치가 다시 끄집어낸 건 자동차 국산화 요구가 거세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 정부와 이치는 지난 2008년부터
‘홍기’의 최고급 독자 브랜드화에 착수했다. 2009년부터 100% 독자개발 및 생산을 목표로 준비에 들어갔다. 특히 APEC
국빈 의전용으로 쓰이는 홍기 L5에 투입된 연구개발 인력은 1600명. 비용은 52억위안(약 8930억원)에 달한다.
그 결과 태어난 ‘홍기 L5’는 지난해부터 중국을 방문하는 외국 정상들에게 간간이 제공되기 시작했다. 지난해 4월 중국을
국빈방문한 프랑스 올랑드 대통령이 홍기 L5를 탄 것을 시작으로, 같은해 5월 중국을 국빈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에게도 홍기 L5가
제공됐다. 이 밖에 베이징을 찾은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 마그레테 2세 덴마크 여왕 등에게도 홍기
L5가 제공됐다.
홍기 L5를 미국 대통령 전용차로 ‘야수(Beast)’란 별명을 갖고 있는
제너럴모터스(GM)의 ‘캐딜락 DTS 리무진’에 맞먹는 자동차로 키우려는 것이 중국 정부의 야심이다. 이에 중국 정부는 각국
정상들이 타고 오는 ‘공군 1호기’(전용기) 전면에 홍기 L5를 노출시킨 다음, 베이징 수도(首都)공항에서 인민대회당이나
조어대(釣魚台) 국빈관까지 홍기를 타고 이동하게 해 브랜드 노출을 극대화하고 있다. 지난해 박근혜 대통령도 수도공항에서 홍기
L5를 타고 인민대회당까지 간 다음 시진핑 주석과 함께 의장대를 사열했다. 이 장면은 중국판 SNS인 웨이보(微博)나
웨이신(微信)에도 많이 노출됐다. 지난 7월 시진핑 주석의 방한 때 의전차로 국산차 대신 독일의 ‘벤츠 S600 풀만가드’를
제공한 한국과 정반대 마케팅이다.
오는 11월 베이징 APEC 때 홍기 L5와 홍기 H7은 중국산
춘풍(春風) 오토바이의 경호 속에 베이징 수도공항과 인민대회당 등지를 뻔질나게 오갈 것으로 보인다. 최근 시진핑 정권은 지난
2003년 후진타오 정권 때 교통체증을 이유로 폐지했던 오토바이 경호도 부활시켰다. 그리고 과거 의전용 독일산 ‘BMW
850RT’ 오토바이를 중국산(産) ‘춘풍 650’ 오토바이로 일제 교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