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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사람 스크랩 이승훈(李昇薰) 독립운동가 민족대표 33인 중 한분
섬김이 추천 0 조회 64 19.07.10 00:4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이승훈(李昇薰) 독립운동가 민족대표 33인 중 한분

[1864-1930]

1. 교육가이며 사업가로 활동

이승훈1864년 3월 25일 평북 정주군 정주읍에서 이석주의 차남으로 출생. 생후 8개월만에 모친을 여의고 조모송씨 슬하에서 자라다가 6세때 맏형 승모를 따라 납청정으로 이거하였다. 7세때 그곳 사숙에 입하여 한학을 수학하였으며 10세때 부친을 여의니 이듬해 한문공부마저 중단하였다.

그후 1874년 같은 동네 유기상 임일권의 집 사환으로 취직하여 4년동안 일을 하였고 그후에는 두터운 신임을 받아 수금원이 되었다. 1878년 같은 동네 이경강과 결혼하여 비로소 독립생활을 꾸렸으며 이듬해 부터는 황해도 안악. 봉산 등지를 떠돌며 행상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던 중 1887년 24세 때 떠돌이 행상을 중단하고 납청정으로 돌아와 개인점포를 개점, 평양에는 지점을 두는등 활발한 상업활동을 펴기 시작했다.

1894년 청일전쟁으로 패점하고 덕천 산골에 피신해 있다가 1895년 청정동으로 돌아와 철산 오씨의 후원으로 다시 상업으로 계속하였으며 1899년 36세때 용동으로 이주한뒤 비로소 서숙을 개설하고 승훈제를 후원하는 등 교육사업에도 손을 뻗치기 시작하였다.

1901년 선천 오희순의 지원으로 사업을 확장, 서울과 인천에 진출하여 외국에서 들어오는 석유.양약 등을 매점방매하는 등 무역사업에 투신하니 순이익만 50만량이 넘었으며 사업가 이승푼으로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1905년 만주무역 관계로 영구와 대련에 다녀왔고 무역계로부터 은퇴, 용동 서숙에서 경서를 읽다가 1907년 평양 모란봉 밑에서 수만 군중에게 연설하는 안창호를 만나 국가사업에 이바지할 것을 굳게 약속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일대 생활전환을 했다.

용동에 있는 서숙을 증축 수리하여 강명의숙을 설립하는 한편 이종성, 이치순, 조형균, 백양녀 등과 협력하여 3백석 추수와 향토지를 기금으로 오산학교를 설립하였고 신민회에 가입하였다.

1908년 향교재산을 유림원에서 되돌려 주고 사유 토지전체를 털어 학교경영을 맡았으며 평양에 자기회사를 설립하여 숙련공 양성에도 힘썼다.

2. 기독교의 입교

1910년 기독교에 입교하여 교회 설립에 힘쓰는 한편, 그의 육영사업 방향을 기독교 정신에 둠으로써 오산학교 교장에 로버츠가 취임하였다. 1911년 신흥 무관학교 사건에 연류되어 검속당한 후 제주도에 유배되 었으며 일제가 날조한 105인사건에 연좌되어 서울로 압송된 후 1912년 10년 징역을 언도받고 옥중에서 신약성서를 1백회 독파하였다. 1915년 가출옥하여 세례를 받은 후 평양 장로회 신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16년 장로로 장립되었다.

3. 독립운동 (33인중 1인)

1918년 토오쿄오와 상해로부터 독립운동의 밀의에 접하여 3.1운동을 추진, 민족대표 33인의 자격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고 그후 일경에 의해 체포되는 한편 오산학교 교원 전원도 검거됨과 동시에 교사. 교회등이 전소되어 버렸다.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 3년형을 언도받고 복역중 조형균에게 학교 재건을 부탁, 조만식, 유승모,박우병,장지영,백봉제,현상윤 등의 노력으로 그해 7월 오산학교가 개교되었다. 1921년 부인 이씨가 별세하였고 1922년 7월 가출옥 석방되어 용동에 자면회를 창립, 사유재산 1천여평을 제공하여 공동경작제를 실시하였으며 오산학교 경영에 심혈을 기울였다.

4. 노년기와 소천

1923년 조선교육협회 간부로 활약하는 한편 민립대학기성을 추진하였으며 1924년 동아일보 사장에 취임하였고 장선경과 재혼, 회갑기념으로 [61의 남강]을 출간하였다. 1925년 오산학교 재단법인 이사장에 취임하였고 1926년 이 학교를 오산고등보통학교로 승격시켰으며 신천농민학교에도 자주 나갔다.

1930년 5월 3일 졸업생의 발기로 이승훈 동상이 건립되었으며 그달 8일 밤 협심증이 발병, 이튿날 새벽 4시에 별세하였다. 그의 유해는 사회장으로 오산 성현동에 안장되었고 1931년 묘비가 건립되었으나 1942년 일제에 의해 파괴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정부로부터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장로교,장로
독립운동가
민족대표 33인중의 1인
본명 인환
아명 승일
호는 남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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