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추 한 알 / 장석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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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숲을 거니는 만보객, 장석주 시인
서울에서 차를 타고 한 시간 쯤 걸리는 경기도 안성에 가면 ‘수졸재(守拙齋)’라는 집이 한 채 있다. 품새가 주위 경관과 잘 어울리는 아담하고 단출한 그 집에는 2만 권이 넘는 책이 있고 그 책을 파먹으며 글을 쓰는 시인 이 한 명 살고 있다. 시인, 소설가, 평론가, 방송인, 출판인 등 글과 책에 관련된 직업은 안 해 본 것이 없는 이 서재 주인은 장석주. ‘수졸(守拙)’이란 바둑 초단의 별칭으로, ‘겨우 자기의 집이나 지킬 정도’이라는 뜻이다. 그는 초심을 잃지 말자는 겸양의 뜻에서 자신의 보물창고를 수졸재라 하였다. 장석주에게는 이곳 말고 서재가 서울에 하나 더 있다. 수졸재 비하면 장서는 적고 안성에 비하면 번잡한 곳이지만 또 하나의 서재에서 그는 매일 읽고 쓰며, 먹고산다. 그리고 주말에는 안성의 가족들을 만난다. 수졸재 방문은 아쉽게도 시간이 허락지 않았다. 그래서 서울의 또 다른 ‘책터’에서 장석주를 만났다. 역시 거기도 책은 많았다. 봉우리로 쌓여 있다. 주인의 말로는 한 4천 권 쯤 된다 고 한다. 벽 이곳저곳에는 그림이며 판화며 가족과 단란한 한 때를 담은 사진이 걸려 있다. 시선이 덜 가는 구석진 자리에는 불상이 조용히 명상을 하고, 또 한 구석에는 인물화 한 점이 객들을 바라보고 있다. 그가 글을 쓰는 컴퓨터에는 수졸재의 사진이 있다. 새벽 4시면 어김없이 읽어나 책을 읽고 글을 쓴다. 12시가 되면 잠시 몸을 쉬게 한 후 밥을 먹고 산책을 다녀오고 또 책을 읽는다. 담배와 술을 멀리하는 대신 책과 그림, 명상과 산책으로 채워지는 그의 시간은 느릿하면서도 알차다. 한가로우면서 엄격한 절제력은 그에게 글을 쓰는 힘과 동년배보다 십년은 젊어 보이는 건강을 주었다. 일어나 오후 무렵 다 읽은 책은 우주의 비밀을 파헤친 마커스 초운의 『네버엔딩 유니버스』(영림카디널) 이고 어제는 다이앤 애커먼의 논픽션 『미친 별 아래 집』(미래인) 이었다. 그에게 최근 읽은 책을 묻는다면 오늘 12시 무렵에 책장을 덮은 책을 말할 것이다. 반나절 만에 한 권을 독파한다니 읽는 속도가 빠른 편이다. 그러나 그의 말은 달랐다. “책을 천천히 읽는 편입니다. 빠르다고 생각되는 이유는 집중력 때문입니다. 계속 읽다보니 집중력이 생겨서 읽는 속도가 빠른 것 처럼 보입니다. 여기에는 특별한 비법은 없습니다. 집중력이 생기고 높은 수준의 책을 읽을 수 있는 고급 독자로 성장해 나갑니다. 책이야말로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며, 독서야말로 아무에게도 해가 되지 않는 청정한 취미이자 취향입니다.” 그에게 독서는 음악을 듣는 것,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과 같은 충만감과 행복의 또 다른 이름이다. 21살에 시로 문단에 이름을 올렸으니 빠른 축이다. 등단을 하면 글로 먹고 살줄 알았지만 청탁이라곤 한 건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더 읽고 더 쓰면서 노력했다. 신춘문예도 여러 번 미끄러졌다. 25살이 되던 해에 기어이 시와 평론이 중앙일간지 두 곳에서 당선되었다. 그러자 청탁이 들어왔다. 글 청탁이 아니라 고려원 출판사에서 같이 일해보자는 러브콜이었다. 당시(1970년 후반과 80년대 초반 사이) 고려원은 국내 출판시장을 주름잡던 거대 출판사로 그의 재주를 보고 부른 것이다. 입사 후 6개월이 지나 장석주는 편집장이라는 파격적인 인사발령을 받는다. 장석주의 문인, 편집인 인생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백제 장군 계백의 일화에 울었고, 소설가 오영수의 소설 을 읽으며 번뜩했다. 방학동안 삼성출판사의 한국단편 문학대계, 신구문화사의 신한국문학전집을 다 읽었을 때 글쓰기가 왠지 운명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막연하던 그 느낌은 십대 후반과 이십대 초에 콜린 닐슨의 『아웃사이더』,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바슐라르의 『몽상의 시학』을 읽으며 글쓰기가 운명이라 걸 확연하게 깨닫게 되었다. 가에 대해서는 ‘외로움’ 때문이라고 말한다. 학창시절 친구들이 많았어도 어딘지 외로웠다. 그러나 책을 읽을 때만큼은 외롭지 않았다. 독서는 그를 행복하게 해 주었다. 그는 청소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수험능력만을 배양한 친구들은 상상력, 사고력, 논리력, 세계를 이해하는 힘이 떨어져 한계에 일찍 부딪힙니다. 반대로 책을 많이 읽은 친구들은 스스로 공부하며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 나갑니다. 어떤 분야든 크게 성공한 사람들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표피적이고 말초적인 감각적 재미에 만족하며 살고 싶다면 굳이 책을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책보다 재미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요. 독서를 통해서 즐거움을 찾는 사람은 나중에 몇 배의 보상을 받을 것 입니다." 그는 청소년들에게 카프카의 『성』, 니체의 『차라투스트라 는 이렇게 말했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생떽쥐페리 의 『어린 왕자』,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 등 잘 알려 진 고전 명작부터 읽어보라고 권했다. 나올 예정이고 죽기 전까지 101권의 책 정도는 내고 싶어 한다. 그 101번째 책은 자신의 모든 것이 담긴 정제된 명작 으로 말이다. 그에게는 소원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지중해의 한 섬에 스며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한 3년 동안 살다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수졸재를 문학관 으로 만드는 것이다. 책을 5만 권쯤 모아 도서관을 만들고 문학강좌, 철학강좌를 열어 사람들이 지혜를 배우고 음악을 듣고 커피를 마시며 한가롭게 놀 수 있는 그런 공간을 만들고 싶어 한다. 그리고 자신은 그곳에서 조용히 마당이나 쓸고 있는 늙은이로 남고 싶다고 장석주는 꿈꾸듯이 말했다. *********************************************** 장석주 시인 충남 논산 출생. 1975년 월간문학 신인상 공모를 통해 등단, 문학평론 『존재와 초월』로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햇빛사냥』 『새들은 황혼 속에 집을 짓는다』, 『어떤 길에 관한 기억』 『크고 헐렁한 바지』 『절벽』 등 평론집 『한 완전주의자의 책읽기』 『문학, 인공정원』 등 소설 『낯선 별에서의 청춘』 『길이 끝나자 여행은 시작되었다』 등 산문집 『비주류 본능』 『새벽예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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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淸韻詩堂, 시인을 찾아서 원문보기 글쓴이: 동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