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가 지난 6월 8일 도시건축공동위원회를 통해 명동성당과 그 일대를 ‘관광명소’로 특화 개발한다는 ‘명동관광특구 제1종지구단위계획구역내 명동성당 특별계획구역 세부개발계획’을 확정한 가운데, 6월 11일 민주항쟁 24주년 기념 민주올레의 명동성당 출입이 거절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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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올레 순례팀은 들머리 위에도 올라가지 않고 명동성당에 대한 아쉬움을 곱씹어야 했다. 들머리 앞에는 보수단체에서 세워둔 현수막이 나부끼고 있었다. 이제 서울시 계획대로 명동성당이 관광명소로 개발되면 지금의 들머리 모습도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진행팀은 개별적으로 성당에 올라갈 사람은 다녀오라고 했지만, 한 사람도 '가볼 필요 없다'며 향린교회 쪽으로 난 판넬골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명동지역 개발로 이 '역사적인' 판넬골목도 재개발로 헐릴 예정이다.(사진/한상봉 기자) | 지난 6월 11일 시민주권(대표 이해찬)은 박종철기념사업회, 이한열 기념사업회, 성만사랑(조성만기념사회)과 함께 6월민주항쟁 24주년을 맞이해 6월 항쟁 당시의 현장을 순례하는 ‘민주올레’ 행사를 치렀다. 민주올레의 이한열 코스는 이한영 열사 피격 장소인 연세대 교문에서 출발해 성공회성당으로 집결하기로 하였고, 조성만 코스는 ‘남산’으로 불리던 구 중앙정보부 건물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출발해 서울역 광장과 한국은행 앞 분수대, 명동성당, YWCA회관, 향린교회, 구 미문화관을 거쳐 성공회성당으로 집결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명동성당 측의 거부로 전 과정 중에서 유일하게 ‘명동성당’만 순례자들이 방문하지 못한 채 명동성당 들머리와 YWCA회관 사이에 서서 명동성당과 민주화운동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곧바로 다음 행선지인 향린교회로 향했다.
시민주권 측은 지난 6월 2일자로 명동성당 측에 사전 장소협조를 요청하는 공문을 보낸 바 있다. 공문은 “6월 항쟁의 상징적 상소라 할 명동성당을 순례할 예정”이라며, 명동성당 내 마당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청했고, 성당 측에 “명동성당과 민주화운동에 대한 해설”까지 부탁했다. 소형 휴대형 스피커를 사용할 예정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이에 명동성당 측은 시민주권에 전화로 “당일 혼례미사가 예정되어 있어서 안 된다”고 전해왔다.
이에 시민주권 측에서는 재차 계획을 변경해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명동성당과 민주화운동에 대한 소개를 마치고, 성당은 조용히 한바퀴 둘러보고 나올 것”이라고 수정제안을 했다. 그러나 명동성당 측은 “아무튼 안 된다”고 전화로 통지해 왔다. 민주올레 담당자인 한종수(루카) 씨는 명동성당 나눔교리 봉사자이기도 했는데, “도대체 어느 신부님 생각이냐?”고 본당 측 담당자에게 따졌으며, 성당 측은 “밝히기 곤란하다”는 말만 되풀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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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동성당 주차장엔 혼례를 위한 뷔페차량과 몇 몇 승용차가 주차해 있었고, 예수상 뒤편으로는 부조금을 내는 창구에만 사람들이 북적였다.(사진/한상봉 기자) |
이날 기자가 확인한 결과, 당일 오전 11시, 12시에 명동성당에서 혼례가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혼례가 시작되고 나서도 하객들과 혼례용 뷔페차량 등이 주차하고 있을 뿐 성당 마당은 비교적 한산한 편이었다. 그리고 성당 입구에 꽂혀 있는 ‘명동대성당’이라는 리플렛에는 전면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1945년에는 광복을 맞아 성당명을 종현대성당에서 명동대성당으로 바꾸었다. 명동성당은 197,80년대 근현대사의 격동기에 한국사회의 인권신장 및 민주화의 성지로서의 역할을 했으며, 현재에는 기도하고 선교하는 공동체로 세상을 향하고 있다.”
리플렛의 내용은 상당히 애매모호하다. 명동성당이 과거에는 “한국사회의 인권신장 및 민주화의 성지”였으나, 지금은 다만 “기도하고 선교하는 공동체”라는 말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민주올레에 참석한 명동성당청년단체연합회 출신의 한 민주올레 참석자는 “한번 성지(聖地)는 영원한 성지가 아닌가”하고 의문을 제기했다.
민주올레에 참석한 안승길 신부(원주교구)는 “박종철 군의 희생이 묻혀 버릴 뻔 했는데, 1987년 5월 18일 ‘감추어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라는 성서말씀처럼, 정의구현사제단과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 군 고문치사 은폐조작’을 폭로한 곳이 명동성당이다. 유신정권 때 지학순 주교가 양심선언을 한 곳도 명동성당이다. 이런 민주화의 상징적 장소를 순례하려고 왔는데, 성당 측에서 결혼식을 핑계로 거절한 점에 대해 천주교 사제로서 죄송스럽다”고 말했다.
이어 “명동성당은 이미 민주화의 성지로서 가진 상징성을 포기한 것 같아 안타깝다”며 “4대강 사업을 반대하는 생명평화미사를 드리고 사제들이 들머리에서 농성할 때도 물 뿌리며 나가라고 하던 그 모습을 다시 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
다른 참석자인 권오창 씨는, “당시 명동성당에 밀려 들어왔던 농성자들에게 밥을 해 주던 분들이 들머리 계단에 천막을 치고 있던 상계동 철거민들이었다”면서 “그때 밥해 주던 분들을 끝까지 책임지지 못해서 죄송하다”며 반성을 촉구했다.
한편 당시 명동성당청년단체연합회 회장이었던 기춘 씨는 “6월 15일까지 성당에서 농성하는 동안 30-40여 명의 사제들이 청년들과 함께 하며 ‘나부터 잡아가라’고 했다. 특히 계성여고 여고생들이 등교할 때 도시락을 두 개씩 싸와서 안겨주고는 ‘아저씨들, 힘 내세요. 저희가 기도 드려요. 내일은 밥 더 많이 싸올께요’하던 모습이 선하다”고 회상했다.
성만사랑 대표인 이원영 씨는 조성만이 1988년에 투신자살한 명동성당 교육관 옥상을 멀리서 가리키며 “조성만의 죽음으로 임수경, 문규현 신부, 문익환 목사의 방북 등 통일운동이 확산되었다”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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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린교회 정문 옆에는 '민주항쟁기념비'라는 표식이 동판에 새겨져 있었다. 물론 성공회성당에도 돌 표식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명동성당에는 어디에도 6월항쟁을 기념하는 표식이 새겨져 있지 않다. 혹시 명동성당은 사실상 자신의 '민주화운동' 경력을 부끄러워 하는 것은 아닐까? (사진/한상봉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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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한열 코스를 순례한 이들은 이한열의 죽음을 알리는 판화를 붙이고 있었다. (사진/한상봉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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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공회 성당 앞에서 6월 10일 당일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참석자들. 그늘에 앉아 편안한 마음으로 감동을 나누고 있었다. (사진/한상봉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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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록 순례단 방문에 맞추어 걸어놓은 알림판은 아니지만, 성공회는 1987년 6월에도 먼저 사람들을 맞이해 국민운동본부를 발족시켰다. (사진/한상봉 기자) |
이어 민주올레 참석자들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결성을 위해 사전모임을 했던 향린교회를 거쳐 대한성공회 대성당으로 향했다. 성당에는 이한열 코스를 돌아온 참석자들이 맞이해 주었다. 유시춘 씨를 통해 당시 상황을 들었는데, 6.10대회 당일에 지선 스님과 함께 종루에 올라가 “여러분, 우리는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호헌철폐 범국민대회를 주취하기 위해 모인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입니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온 국민의 이름으로 지금 이 시각 진행되고 있는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지명이 무효임을 선언합니다.”라고 스피커로 외쳤다. 유시춘 씨는 “그 순간 갑작스런 소리에 놀란 비둘기들이 진주처럼 창공에 흩어지는 것을 보고 이 날 일이 잘 되리라 직감했다”고 고백했다.
현재, 성공회성당은 6.10항쟁의 발상지로 명동성당은 민주화의 성지로 불리고 있지만, 애석하게 명동성당 측은 극구 이를 외면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명동성당을 떠올리면 아직도 많은 이들이 김수환 추기경을 함께 떠올린다. 6월 항쟁 당시 명동성당에서 농성하던 청년학생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공권력 투입이 잦았던 시점에서 김수환 추기경을 찾아온 정부의 고위 당국자에게 김 추기경은 이렇게 말했다. "성당 안으로 경찰이 들어오면 맨 앞에 내가 있을 것이고, 그 뒤에 신부들, 수녀들이 있을 것이오. 우리를 다 넘어뜨리고 난 후에야 학생들이 있을 것이오." 민주올레 참석자 중 한 사람은 "명동성당이 최근 보여준 태도는 김수환 추기경을 내세우면서도 '실질적으로' 김수환 추기경을 밀어내고 있다"고 안타까운 심정을 밝혔다. 이어 "혹시 이번에 발표된 명동성당 관광명소 특구 개발 문제와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는 말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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