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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예수님! 오늘도 오시는 거죵? 원문보기 글쓴이: 가톨릭그림자
블랙black / 한국어 자막 / 명대사/가톨릭대 학사의 감상문
미셸 - 내 이름은 미셸 맥날리 심라에 사는 영국계 인도 집안의 장녀예요. 이건 저와 제 선생님의 이야기 입니다. 신이 불완전하게 만드셨기에 불운한 운명과 싸워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두 사람에 대한... 저의 세상은 남들과 다릅니다. 소리는 침묵이 되고 빛은 어둠이 되는 곳, 그게 제가 사는 세상입니다.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죠 그 세상에 딱 맞는 이름은 바로 '블랙'입니다. 당신은 어둠 속에서 얼마나 살 수 있죠? 몇분? 몇시간? 아님 며칠? 전 40년을 이 어둠속에서 살았죠 지난 4년간 계속 졸업시험에 도전했고 12년 동안 일요일마다 성당에 갔습니다. 근데 그 일요일은 특별했어요. 드디어 그 기도가 이뤄질것 같았죠 제 기도는 오직 하나, 선생님이 돌아오시는 것이었습니다. 제 기도가 하느님께 닿는데도 그 분이 응답하시는데도 오래걸렸어요. 그날도 선생님을 찾지못하고 동생과 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사라 - 분수 대에 걸터 앉아 있는 한 남자 - 그 앞 벽에 커다란 십자가가 보이고 찻 속에 남아있는 미셀이 유리 창의 성애위에 손바닥으로 십자가를 그린다. 미셸 - 그날 선생님이 돌아오셨습니다. 12년이 흘렀지만 전 알아볼수 있었죠. ~ 하지만 선생님은 모든 걸 잊으셨어요. 저마저도 ~ 그분을 위해 이 글을 씁니다. 나의 선생님, 데브라지 사하이를 위해 맥부인 - 정말 아무것도 기억 못하나요? 의사 - 사하이씨는 알츠하이머 병입니다. 모든걸 잊었어요 맥부인 - 그럴리 없어요. 분명 기억하시는게 있을거예요. 안 그럼 12년만에 어떻게 집을 찾아오셨겠어요? 미셀을 잊으셨을리 없어요. 의사 - 지우개로 글씨를 지우듯 병이 사하이씨의 기억을 ~ 어떤 단어나 사건이 기억 일부를 자극할순 있으나 알츠하이머 병엔 치료법이 없어요. 미셸이 뭘하는거죠? 맥부인 - 점자로 쓴 자기 예기를 읽히고 있어요. 저렇게 하면 뭔가 기억이 날지도 모르니까요. 불가능은 저분이 미셸에게 가르치지 않은 유일한 단어죠, 박사님은 불가능하다 하셔도 미셸은 해내고 말거에요. 미셸 - 선생님은 제 운명이셨어요. 제가 2살때 제 인생이 암흑속으로 빨려들어간 그날 밤, 행복은 우리 가족을 떠났습니다. ~ 미셀이 선생님에게 자신의 성장과정에 대해 수화로 계속 말을 한다~전 짐승과 다름 없었습니다. 아이들은 내게 못된 장난을 쳤고 하느님도 그러셨죠, 아빠 - 예랑 계속 살면 우린 행복할 수가 없어, 시설로 보내야 겠어, 정신지체 요양원말야 집까지 태울뻔하고, 칼로 남을 해치고, 자신의 머리를 부딪히고, 8년간 매일 사고를- 이젠 지긋 지긋해! 나도 참을만큼 참았어 - 부모가 다투고 있는 사이에 미셸이 동생 사라의 요람을 뒤집고 아기가 자지러지게 울고 미셸은 웃는다. - 네어부인 - 이 편지, 심라에 사는 8살 소녀, 미셸,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데 부모도 통제를 못해요. 당신이 마지막 희망이에요. 안되면 애를 정신지체 요양원에 보낸다니까 그쪽은 최고의 교사가, 당신은 일이 필요하니 잘됐죠. 티 - 미셀이라고 했죠? 미셀~ 모든게 선명히 보여요. 아름다운 아침, 눈내린 거리에서 그 아이의 길 잃은 영혼, 제가 단어로 날개를 만들어 주겠어요. 나는 법을 가르치겠어요. 네어부인 - 자신도 어쩌지 못하면서 남의 삶을 바꾸겠다니 - 왜 그래요? 눈 아ㅏ요? 티 - 아니, 눈이 아니라,,, 마음이 아파요, 가혹한 말을 들으니 아프군요... 정말 아파요! 이 학교에서 30년을 보냈는데 난 아이들에게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어요. 마지막에 학교를 떠나며 뒤돌아보니 애들이 엉뚱한 쪽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더라고요. 엉뚱한 쪽을 보면서요! 그게 너무 가슴 아파요. 마음이 아파요. - 다된 전구가 마지막 빛을 깜빡거리며 꺼져버리며 장면이 바뀐다. - - - - - - - 미셀 - 운명이 우리 둘의 영혼을 만나게 했습니다. 신의 미완성품과 전투에 지친 용사의 만남, 어둠 속에서 기다리던 내게 선생님은 꺼져가는 빛을 가져오셨습니다. 티 - 제가 마지막 희망이에요. 맥날리 부인, 제가 떠나면 얼마 후에 미셀은 정신지체 요양원에 보내지겠죠? 맥 - 제가 살아있는 한 절대 그럴 일 없어요. 아시겠어요? 스스로 그 딸을 정신지체요양원으로 끌고 가셨어요. 제 누이는 요양원 철문 뒤로 영영 사라졌죠. 미셀은 못듣고 못 볼 뿐이지 정신지체는 아닙니다! 단어들을 인지 해야 해요. 자기가 만지고 먹는 모든 것을에 이름과 의미가 있단걸요. 말하는 법을 가르칠겁니다. 수화로요, 그애를 감싸기만 하면 아무것도 못 배웁니다. 이 손가락들로요. 이게 장님의 눈이자, 벙어리의 목소리이고, 귀머거리의 노래죠. 이걸로 칼을 들 수도 있고 힘주어 주먹을 쥘수도 있죠. 밥을 먹기도 하고, 뺨을 때리기도 하죠, 신에게 누군가를 위해 주문하고, 나가라고 문을 가리키기도 하죠. 티 - 일어나 미셀, 누구나 이런 어둠을 지나가 이젠 어둠에서 나와 네가 살아온 그런 어둠... 빛속으로와 빛, 빛... 알파벳은 원래 abcd로 시작되지만, 너에게 black 로 시작 되지 넌 달라... 넌 다르다고, 네가 다른 걸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해 티 - 빛에 비하면 눈은 별거 아니네요. 어둠 속에서 눈은 무용지물이라는 걸. 엄마 - 가시밭길이 자기 운명인걸 알아야 할탠데... 티 - 예수님 머리의 그 가시관과 같은 가시란걸요. 그렇죠 부인 부인 - 네- 하면서 묵주를 들어 보인다. 티- 깨달음은 한순간에 오죠, 초에 불을 켜는 것처럼, 일단 불이 붙으면 온 집안이 빛으로 찰겁니다. 미셀 - 내레이션 전 서서히 '관계'를 이해해 갔어요. 가시와 아픔, 물과 갈증의 관계, 근데 단어와 의미의 관계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죠. 단어는 알지만 뜻은 모른다. 티 - 이해 하려고 노력해봐, 모든 단어엔 뜻이 있어 그걸 모르면 이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어 평생 빛을 못 보게 돼! 그럼 네게 이 종을 매달고 널 소라고 부를거야, 소! 넌, 짐승이 되는거야, 미셀... 널 정신지체 요양원에 가두겠지 티- 물이 뭔지 가르쳐주지 - 미셀의 손을 잡고 분수대로 데리고 가서 물속에 미셀을 집어던지며 이것이 물이야, 원터! 원터! 라고 손에 써준다. 미셀이 분수의 물방울을 손으로 받으면서 워터란 단어와 물의 관계를 알게되자, 미친듯이 분수대에서 뛰쳐나와 풀, 꽃을 만져보면서 단어의 뜻을 알아낸다. 이것을 본 티가 단어의 뜻을 깨우쳣다고 소리치며 부인을 부르자, 엄마 아빠가 달려나온다. 미셀이 엄마를 만져보고 마더라고 말한다. 아빠를 만져보고 파더라고, 마더와 파더의 의미를 알게 됀것을 확인한 후 팔을 허우적 거리며 미셀이 선생님에게 온다. 선생님의 얼굴에서 입술을 만진다. 티가 티쳐라고 발음해준다. 가족들은 함성을 지르며 부등켜안고 울면서 집안으로 들어고 티는 분수대에 앉아 운다. 그리고 자신이 알츠하머 환자란걸 알고 조용히 미셀의 곁을 떠난다. 학장 - 미셀같은 애가 일반대학에 입학한 사례가 있던가요? 티 - 아뇨, 하지만 곧 생기면 좋겠네요. 학장- 강의를 어떻게 이해하겠어요? 티 - 제가 옆에 앉아 수화로 전달할 겁니다. 글자 하나 빠짐없이 학장 - 이건 이사회와 상의해야 티 - 선행을 베풀기회는 흔치 않습니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마세요. 면접 - 사하이씨도 아시다 시피 여긴 정상인을 위한 대학입니다. 허나 당신의 미셀에 대한 믿음과 당신이 훌륭한 교사란걸 고려해 두 사람을 모르는 특수교사를 모셨으니, - 왜 공부를 하려는 거죠? 미셀 - 제가 공부하려는 이유는 당당하고 자립적으로 살아가기 위해 섭니다. 면접 - 지식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죠? 미셀 - 지식은 전부입니다. 지식은 정신이고, 지혜, 용기, 빛, 소리예요, 성경이자 하느님이고, 나의 선생님입니다. 합격 - 자신이 알츠하머 환자란걸 알고 지팡이를 합격 선물로 준다. - 미셀에게 홀로서기준비를 시키는 암시- 수업시간 교수 - 자궁에서 생겨나든, 땅에서 생겨나든, 그 생명의 시작과 끝은 모두 어둠이다. 언젠가 우리는 이 어둠을 헤치고 빛에 당도할 것이다. 티 - 낙제야, 축하해! 미셀 - 사람들은 성공을 축하 하지만 우린 실패를 축하했죠.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거미 이야길 해 주셨어요. 수없이 실패한 후에야 집짓기에 성공한다고 겨국 실패는 성공을 향한 첫 걸음이라고 근데 저의 그 첫걸음은 영영 끝나질 않았어요. 졸업 - 학장의 소개말 오늘 이 자리엔 용기와 의지의 모범이 된 자랑스런 학생이 있습니다. 불가능은 없다는 걸 몸소 보여준 그녀는 우리 대학의 긍지 입니다. 특별한 성취를 이룬 소감을 들어보고자 합니다. 미셀 멕라니입니다. 미셀 - 몇 번을 떨어져도 다시 올라간 거미는 결국 집을 지었습니다. 개미가 산을 넘고 거북이가 사막을 건넜습니다. 오늘, 미셀 맥날리가 드디어 졸업이 됐습니다. 근데 여러분과 전, 한가지 차이가 있어요. 여러분은 20년 걸렸지만 전 40년이 걸렸답니다. 그래도 결국해냈어요. 어릴때 항상 누군가의 뒤를 따라다녀야 했어요. 부모님도 절 부끄러워하셨죠. 매년 집에 전화해 "엄마, 또 낙제야"했었지만 오늘은 말할수 있어요. "엄마, 나 합격했어" 제가 당신들 딸이라고 온 세상에 자랑하실 부모님, - 땡큐, 마마, 파파 - 어릴 때 전 항상 뭔가를 찾아 헤맸어요. 하지만 매번 손에 잡히는건 어둠뿐이었습니다. 어느날 어머니가 절 낮선사람 품에 안겨줬죠. 세상 누구와도 달랐던 그는 마법사였습니다. 그분이 어둠에서 빛으로 절 이끌어 주셨어요. 하느님 앞에선 우리모두 장님입니다. 아무도 그분을 보거나 들을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전 그분을 만지고 그 존재를 느껴봤어요. 전 그분을 '티'라고 부릅니다. 제겐 모든게 블랙이었습니다. 근대 티님이 블랙의 새의미를 찾아주셨습니다. 블랙은 어둠과 갑갑함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블랙은 성취의 색이자 지식의 색이고, 졸업가운의 색 오늘 모두가 입고있는 바로 그색, 근데 여러분과 난 한가지 차이가 있어요. 여러분은 오늘을 위해 졸업가운을 입었지만 전 입지 않았어요. 졸업가운을 입은 제 모습을 제일 먼저 보셔야 할분은 선생님 이시기 때문입니다. 매년 졸업식 날마다 절 이리로 데려와 저 문가에서서는 제 손에 이렇게 적으셨죠. '언젠간 저 위에있는 널 보고싶구나, 미셀' 선생님의 꿈을 이루는데 40년이 걸렸습니다. 오늘 난생처음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쉽습니다. 꿈을 이룬 저를 자랑스럽게 지켜보시며 저기 서계실 선생님 모습을 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병원 - 졸업까운을 입고 지팡이로 앞을 더듬으며 들어오는 미셀을 보는 티 천천히 닥아와 미셀의 졸업까운을 만져보며 눈물을 흘린다. 미셀이 티의 손을 잡고 '우리가 해냈어요' 수화를 한다. 티 - 팔을 쳐들고 주춤주춤 하며 춤추는 흉내를 낸다. 창밖에 비가 오는것을 본 티, 미셀을 데리고 창문을 열며 바른손에 받아 "워터" 라고 미셀이 처음 배운 단어를 발음한다. 미셀- 편지를 쓴다 네어부인께, 빛을 찾았단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오늘 선생님이 첫단어를 기억해 내셨어요. '워터' 불가능은 없다는 걸 다시 한번 증명하시고, 타인을 위해 사는 행복을 가르쳐 주신 선생님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신 스승입니다. 오늘은 선생님의 학교 첫 날이에요. 그분의 알파벳도 저처럼 ABCD가 아닌 BLACK로 시작 돼겠죠 - 블랙 영화 블랙에 대한 정확한 평(네티즌 펌) *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에 의한 리뷰임을 우선적으로 알려드립니다. 글쓴이는 현재 대신학원을 다니고 있는 가톨릭 신학생입니다. 항상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이 지극히 종교적인 것들이죠. 그 점 이해하실 수 없는 분은 읽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세상 가장 위대한 스승이 인도하는 빛의 가르침 - 블랙(BLACK)
살아오면서 나름대로 많은 영화를 보고 또 그만큼 많은 생각을 했다. 마음에 와 닿는 영화를 보고 한동안 긴 여운에 사로잡혀 있기도 했고, 그것을 정리해보고 싶었던 욕심도, 의지도 있었다. 하지만 정작 제대로 된 리뷰는 한 번도 쓰지 않았다. 몇 번 시도는 해봤지만 항상 그 필요성에 대한 의심과, 그로 인해 생기는 큰 기회비용이 그 의지를 약하게 했다. 하지만 이번만큼 그 욕구와 의지가 컸던 적은 없었다. 이것은 무언가에 의한 이끌림, 심지어 의무감으로마저 느껴진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드는지는 모르겠지만, 두 번밖에 보지 않은 이 영화는 나를 완전히 매료시켰다. 영화를 첫 번째 봤을 때의 감동은, 슬픈 영화를 봐도 좀처럼 감정조절에 실패하지 않았던 나를 무너지게 했다. 몇 번이고 가슴 깊숙이 부터 벅차오르는 감동을 억제할 수 없었고, 영화가 끝날 때쯤엔 눈가가 촉촉히 젖어 있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때의 감동은 그저 영화의 내용과 의도적인 장치(음악이나 연출)에 의한 것이었던 것 같다. 사실 이 영화에는 그리 특별한 것이 없다. 어쩌면 너무도 진부하고 뻔한 이야기(이미 우리가 헬렌켈러를 통해 접한 이야기)이고, 극적 긴장감도 신선함도 찾아보기 힘들다. 보는 이로 하여금 당연한 연민과 슬픔을 느끼게 하고, 극적 연출에는 그 감동을 극대화 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하지만 내가 두 번째로 이 영화를 보며 함께 보았던 신학생들이 나와 같이 감동하고 말하는 것을 보고, 그 속의 특별한 공통분모를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은 내가 영화를 보며 느꼈던 바로 그것이었다. 두 번째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마치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모든 것이 그분과 나의 관계에 대입되어졌다. 소소한 에피소드까지 예수의 모습과 인간을 연상케 했고, 나 자신을 돌아보게 했으며, 전체적인 구성은 인류의 구세사를 통찰하게 했다.
왜 신학생인 우리가 이 영화를 보며 그러한 공통분모를 가질 수 있었을까. 이 영화는 인도영화다. 하지만 이 영화의 인물과 배경이 인도라는 점은, 굳이 찾아내지 않는다면 찾기 힘들 정도로 꼭꼭 숨어 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영화가 차분하고도 철저하게 담아내고 있는 것은 바로 가톨릭의 정서이다. 미셀이 차창에 그리는 성호, 배경 곳곳에 걸려있는 십자가, 아이를 맡기고 내내 묵주를 쥐고 있는 어머니, 사라의 혼인성사, 심심찮게 등장하는 하느님의 이름과 성호. 감독의 의도가 무엇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이 영화는 의도적으로 가톨릭의 정서를 배경으로 이야기를 전개시키고 있는 것이다. 지금부터는 최대한 압축하고 간소화해서, 내가 한 동시다발적인 묵상을 앞서 언급한 관점에서 정리해보겠다. ...우선 마치도 짐승 같았던 농맹아와 평생 동안 그 곁을 지키며 헌신적인 가르침을 주는 선생님이라는 설정은 매우 중요하다.
‘하느님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모두 맹인입니다. 여러분 중 누구도 그분을 보지도, 듣지도 못했기 때문이죠.’
영화 마지막쯤에 깔리는 이 대사는, 사실 영화 전체의 전제가 되며 함축적으로 주제를 담아내고 있는 말이다. 사실 주인공이 농맹아라는 설정은, 잠들어 있던 우리를 깨어있게 한다. 모든 것을 보고 듣지만, 실제로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우리 자신을 깨닫게 한다. 영화는 시작과 함께 그 세계를 보여준다. 한 점의 빛도 없는 어둠과 침묵. 그것이 우리가 겪고 있는 참된 세계, 블랙이다. 그 장면을 통해 우리는 블랙의 세계로 들어간다. 누구나 알지만, 너무도 쉽게 놓치고 사는 그 어둠의 세계를, 우리는 영화를 보는 내내 체험하게 된다. '가시밭길을 타고난 운명이라는 것을 배워야 돼요.' '예수님 가시 면류관의 바로 그 가시죠.'
미셀의 어린 시절은 그 어둠속을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다.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고 가는 곳 마다 말썽을 일으키고, 부딪히고 다치고, 아무것도 배우지 못해 짐승처럼 욕구에만 충실히 움직이는 그 모습은, 철저히 어둠속에 갇혀 헤매는 우리의 모습을 대변한다. 어둠은 인간에게 태생적으로 주어진 운명이다. 부모는 그런 자식을 두고 어찌할 줄을 모른다. 그의 눈과 귀가 되어 빛을 주고 싶지만, 결국 허리에 방울을 채우고 쫓아다니며 안아주는 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이다.(여기서 말하는 부모는 우리를 낳고 기른 부모님을 말하는 게 아니라, 그 부모의 모습 역시 우리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정은 사회의 축소판이다. 이 세상 전체로도 볼 수 있다.) 빛 없는 어둠 속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그런 미셀을 빛으로 인도하겠다며 다가온 사하이 데브라이 선생(이하 선생)은, 미스 나이어와의 대화를 통해(또 미셀의 어머니에게 누이이야기를 하는 데에서) 누군가를 책임지고 가르치기에는 부족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눈 수술을 받았다는 점, 주정뱅이라는 점, 태연히 사직서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 등에서 말이다. 하지만 그 부족한 모습은 그가 삶을 통해 겪어온 아픔과 고통역시 암시한다. 누이의 이야기를 통해 그가 왜 그런 일을 하고 있는지, 왜 그토록 미셀의 삶에 집착하는지 짐작케 한다. 많은 실패를 겪었을 수도, 더 이상 그 일의 의미를 잃어버린 삶을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릴 적에, 전 항상 뭔가를 찾았습니다. 하지만 결국 찾은 것은 어둠뿐이었습니다.'
‘자신을 위해선 아무것도 못할 테니까 다른 이의 인생을 바꾸러 나서라구요.’
‘넌 내 마지막 희망이야. 미셀, 미셀...’
내가 그 선생의 모습에서 하느님을 떠올리게 된 것은, 빛이나 선생이라는 단어 때문이 아니라, 미셀을 향한 절실하고도 간절한 그 모습 때문이다. 부모의 강한 반발과 모욕에도 불구하고 그가 끝까지 미셀에게 매달리는 것은, 명예도 돈 때문도 아니다. 그는 미셀을 자신의 마지막 희망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미셀의 삶에 빛을 주고자한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각오가 되어있었고, 실제로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게 된다. 자신의 빛을 조금씩 어둠으로 묻어가며, 미셀의 어둠에 빛을 주고자한다. 하지만 선생은 한 번도 미셀에게 빛을 비춰준다는 표현을 하지 않는다. 철저히 인도한다, 이끈다는 표현으로 일관하고 있다. 빛으로 들어오라고 말한다. 빛을 비추어주는 일은 대상을 수동적으로 만든다. 비추임을 받는 대상은 그저 비추어 질뿐이다. 반면 선생은 미셀 스스로가 빛으로 걸어 나올 수 있도록 인도하고 길을 가르쳐 줄 뿐, 그렇게 참된 스승의 역할을 잘 알고 있다. ‘일어나... 미셀 맥날리. 이 어둠을 뚫고 지나갈거야. 네가 살아온 이 어둠을. 그 어둠속에 남아있지 마. 빛 속으로 들어와! 빛, 빛 말야. 그래! 그렇지! 빛 말야!’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이다. 그분께 있어 우리는 마지막 희망이다. 마치 미셀과 선생이 인생의 끝자락에서 서로를 꼭 붙잡고 있을 수밖에 없는 운명의 고리에 묶인 것처럼. 서로에게 유일한 빛이 될 운명인 것처럼, 그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다. 당신의 모든 것을 바치시면서 우리를 빛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셨다. 가장 낮고 비천한 모습으로 오셨고, 인간은 아무도 그 빛을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분은 끝까지 매달리신다.
그분의 가르침은 그렇게 헌신적이고 필사적이지만, 직접적이지는 않다. 보이는 빛을 향해 마냥 앉아 있어서만은 빛의 세계로 갈 수 없다. 우리가 해야만 한다. 일어나 가야한다. 그 분께서 아무리 손을 뻗고 발버둥 쳐도, 우리는 그것을 얼마든지 뿌리칠 수 있다. 어둠속에 머무를 수 있는 의지마저도 그분께서 직접 주신 선물이다. 미셀의 블랙이 결정적으로 빛의 세계로 밝혀지는 장면에서 우리는 물과 함께한다. 2살 때 미셀은 극도의 공포로서 물놀이를 해야 했다. 미셀과 선생은 서로 한 번씩 얼굴에 물을 주고받기도 했다.
블랙의 세계에서 물이란 어떤 의미일까. 사실 물은 정상적인 인간에게도 큰 두려움의 대상이다. 미셀 스스로가 물 한 방울도 자신에겐 대양이라는 말을 한 것도 진부한 대사만은 아니다. 손끝에 느껴지는 그 차갑고 시린 감촉은 농맹아에게 어떤 이미지로 그려질까. 물은 그런 의미에서 공포와 고통, 두려움과 시련 등의 의미로 극대화되는 상징이다. 분수 물에 손끝만 닿아도 비명을 지르고, 부모역시 미셀은 물을 무서워한다고 말하지만, 선생은 결국 결정적인 순간에 그 물속에 미셀을 내던져 버린다.
물은 죽음과 생명을 동시에 상징한다. 가톨릭교회는 세례성사를 통해 입문하게 되는데, 그 절차가운데 가장 상징적인 표징이 물이다. 그 물로 인해 인간은 세속의 자신을 죽이고 빛의 자녀로 새로이 태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미셀에게 있어서 물은 단순히 죄를 씻어내고 태어나는 의미를 넘어 자신이 견뎌낼 수 있는 가장 큰 시련과 고통, 그 물속에서 쓰러졌다 다시 일어나는 것은 그것을 극복하고 일어서는 일종의 통과의례를 의미한다.
그렇게 그분의 가르침은, 참된 진리는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한 순간에 촛불이 켜져 방 전체를 밝히듯 오는 깨달음은, 아무런 대가 없이 절대 주어지지 않는다. 그냥 주어진다고 하는 것은 참된 것이 아닐 것이다. 한번 생각해보라. 인간이 신적 존재를 찾게 되는 것도 그렇다. 인간이 그저 살기 편하고 만족을 느낀다면, 굳이 의지할 절대자를 찾지 않는다.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찾든 안 찾든 진리는 진리다. 아무리 떼놓고 흔들고 해쳐놔도 진리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그 영원불변의 절대자는 이 변화무쌍한 세상에서 어떻게든 길을 제시하고 빛의 여지를 준다.
인간은 그것을 아무리 듣고 가르침 받아도 쉽게 깨닫지 못하는 완고한 존재다. 특히나 요즘 인간들은 저마다 너무도 강해지고 똑똑해져서, 더더욱 그렇다. 반면 교회에는 그만큼 나약한 인간들이 많다. 교회가 죄인들의 공동체라 했던가. 하지만 죄인만이 회개할 수 있고 약자만이 의존할 수 있으며 강해질 수 있다. 어둠만이 빛을 빛나게 하고 존재케 하는 것은 이 블랙이 가지고 있는 힘이다. 우리는 미셀과 같이 물을 통해 빛으로 나왔지만, 끊임없이 어둠을 향한다. 빛을 겪고 알게 되었지만, 어둠의 매력에 빠져 쉽게 헤어 나오지 못한다. 예수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어둠과 빛의 기로에 서서 빛을 향해 나아갔다. 그것은 당신의 부재를 겪을 우리를 준비시키기 위한 또 하나의 가르침이었다.
그렇게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온 미셀의 곁에는, 항상 선생이 함께 한다. 자신의 모든 것을 일찌감치 포기한 그는, 여생을 미셀에게 다 쏟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약속된 때는 점점 다가온다.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은 선생 스스로가 미셀의 독립을 준비케 한다. 그가 겪는 알츠하이머라는 상징적인 병은 아주 소소한 기억부터 선생을 지배하여 순식간에 어둠으로 집어삼킨다. 자신의 빛을 미셀에게 전부 쏟아낸 그는 극도의 어둠을 겪게 된다.
‘앞으론 절대 날 잊지 말아요...’ ‘약속할게... 절대 널 잊지 않을게’ ‘제게 여자의 품격을 주시려고... 당신은 선생님으로서의 모든 품위를 잃으셨습니다’
미셀은 선생과 겪어보지 못한 선생의 부재에 큰 두려움을 느끼고, 다시금 어둠이 밀려옴을 느낀다. 마치 때가 왔다는 듯이, 미셀에게는 지팡이가 쥐어지고, 선생은 점점 더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하지만 그 어둠과의 전쟁가운데서도 선생은 절대 미셀을 잊지 않겠노라고 약속한다. 선생이 보여주는 스승으로서의 위대함은 미셀과의 키스장면을 통해 절정으로 치닫는다. 그것은 마치,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가장 낮은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시어, 갖은 모욕과 수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모습과도 같다. 동생 사라를 통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높은 차원의 사랑을 느끼게 되지만, 그것을 이룰 수 없는 미셀을 위해 선생은 자신이 가질 수 있는 마지막까지도 제자를 위해 포기했다. 그것은 스승으로서 누릴 수 있는 마지막 자존심이요 명예와 맞바꾼 마지막 가르침이었다. 선생은 그렇게 모든 것을 내어주고 조용히 미셀의 곁을 떠난다.
"난 떠난다. 네 지팡이처럼 절대 한 가지도 잊지마. 어둠이 필사적으로 널 집어 삼키려 할거야. 하지만 넌 항상 빛을 향해 걸어가야 돼 희망으로 가득한 네 발걸음이 날 살아있게 할거야, 미셀"
하지만 미셀은 결국 그들의 꿈을 이루어 낸다. 그녀는 끝없는 실패와 선생의 가르침을 발판으로, 지팡이를 짚고 독립하는 법을 배웠다. 그녀가 꿈을 이루어내는데 걸린 40년이라는 상징적인 숫자는 그 의미를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 우리가 이 세상 가운데서 그분의 뜻을 이루게 되는 그날. 그분께서 그분의 뜻을 이루실 그 날이 바로 광명의 날이 될 것이다. 더 이상 등불이 햇빛이나 필요 없는, 완전한 빛의 세계가 이루어 질 것이다.
‘ 생의 시작이 어머니의 자궁이든 대지이든... 그 여정은 어둠에서 시작되어 어둠으로 끝납니다. 우리 모두 언젠가는 이 어둠을 지나서 광명에 이를 것입니다.’
우리는 오랜 기간 동안 예수의 부재를 겪고 있다. 혹자는 그분께서 우리를 칠판지우개로 칠판을 지우듯 이미 오래전부터 잊고 계시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분께서는 절대 우리를 잊지 않으신다. 그분은 모든 것을 가르쳐주고 떠나셨지만,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분의 가르침은 전적으로 우리와 함께 있기 위함이다. 스스로 설 수 있기 위한 가르침이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운명적으로 사랑하시고 지금도 끊임없이 우리를 빛으로 인도하고 계신다.
"그분은 이 세상 최고의 선생님이십니다. 선생님은 다시 한 번 보여주셨어요. 세상에 불가능이란 없다는 것을 누군가를 위해 산다는 것이 수많은 행복을 준다는 걸 알려주셨어요."
세상 가장 위대한 스승이신 예수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빛을 비춰주시기 보다는, 우리가 빛을 찾고 갈망하며 스스로 선택하여 당신께로 회개하여 나아갈 수 있도록 필요하다면 더 큰 어둠도 주실 것이다. 그렇게 블랙이라는 이름은 역설적으로 빛의 가르침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가장 위대하고도 숭고한 가르침이다. 가장 큰 사랑이고 배려이며, 참된 가르침이다. 미셀이 말했듯 우리는 그 어둠에서 그분의 새로운 가르침을 찾고 배울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도 마지막 희망을 찾아 다시 돌아온, 자신의 침대마저도 기억 못 하면서도 끝까지 빛을 가르치고자 떨어지는 물방울 밑으로 받쳐주는 그 따뜻한 스승의 손을...남겨진 것은 우리의 몫이다. 다시오실 예수를 기다리며, 이제는 우리가 어둠속에서 받은 그 가르침을 빛의 자녀로서 실행하고 전해야 할 때이다. '그날 제 어둠과의 첫 전투에서 선생님께서 승리하셨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기억 못하시죠. 이젠 제가 선생님의 어둠과 싸우겠습니다. 내게 알려주신 모든 것을 선생님께 알려 드리겠습니다.'
이 영화는 내게 있어 여느 가톨릭 성인전이나 영적 미디어보다도 영적이었고 신앙적이었으며 많은 감동과 묵상거리를 제공해주었다. 이 영화를 본 후 나는, 마치 맛있는 요리를 위한 멋진 재료를 얻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 영화는 정말 좋은 자료로 피정이나 교리교육 등 많은 곳에 쓰일 수 있을 것이고 또 직접 쓸 것이다. 내가 묵상한 내용들 뿐 아니라 충분이 다른 방향으로, 또 완전히 새로운 것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열린 텍스트이다. 나는 그저 그 한가지의 방향을 제시해 본 것이다.
최근 인도영화의 발전이 눈에 띈다. 적어도 이 영화는 내가 그동안 가지고 있던 인도영화에 대한 편견이나 선입견을 불식시키기에 충분했다. 최근 아카데미를 휩쓴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인도를 배경으로 했던가. 조만간 그것도 챙겨봐야겠다.
* 써놓고 대충 읽어보니, 제가 마치 세상이 어둠이며 악 인양 말하는 것처럼 됐는데 본 의도는 그게 아니라 하느님으로 인한 빛의 세계에 반한 어둠이라는 상징적 표현일 뿐입니다. 영화가 말하고자하는 블랙이라는 세계죠, 아직 빛을 모르고 체험하지 못한 상태... 빛을 존재케 하고 전제하는 긍정적인 상징입니다.
** 물론 이 영화가 다른 리뷰에서 언급되는 것처럼, 이렇게 높은 평점을 받고 관심을 받는 것이 부당하게 느껴지는 분들의 심정도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저도 현대인의 정서를 가지고 있고, 멋지고 재밌고 화려한 영상을 즐겨봅니다. 저처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정말 이 영화가 지루하고 답답하게 느껴질 만도 합니다. 하지만 매체와 미디어는, 모두에게 열려있는 만큼 그 각자에게 이렇듯 천차만별의 느낌으로 어필할 수 있는 것이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말을 괜히 덧붙이는 것은, 좋든 안 좋든 이러한 영화를 보고 그것을 따지고 들고 왈가왈부하는 것이 필요한 일인가 싶어서입니다. 정답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자신이 보고 느낀 그것이 답입니다. 한사람이 어떤 시각에서 어떤 장소에서 어떤 상황에서 보느냐에 따라, 또 다를 수 있는 것이 영화입니다. 그래서 저는 영화를 좋아합니다. 이렇게 뜻밖의 답을 얻기도 하기 때문이죠...
나름 바쁜 일과시간 와중에 떠오르는 생각을 두서없이 급히 쓴 글이라 지적할 부분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긴 글 읽어주신 분 감사합니다.
[출처] 영화 블랙에 대한 정확한 평(네티즌 펌)|작성자 jts1802 2009.09.14. 06:42 http://blog.naver.com/jts1802/8009055143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