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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era 'Lucia di Lammermoor' 도니체티 / 오페라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Gaetano Donizetti 1797∼1848 Beniamino Gigli, Tenor |
구성 : 전 3막
작곡 : 게타노 도니제티(Gaetano Donizetti)
대본 : 살바토레 카마라노
원작 : 월터 스콧의 소설 <람메르무어의 신부(The Bride of Lammermoor)>
초연 : 1835년 9월 26일 이탈리아 나폴리 산 카를로 극장
엔리코 아스톤 공은 점점 기울어져 가는 가세를 바로잡기 위해 그의 누이동생인 루치아를 돈많은 아르투로의 아내가 되게 하려고 계획한다. 그러나 루치아는 선조대대로 원수지간인 에드가르도와 이미 사랑하고 있는 사이였다. 이 관계를 눈치챈 엔리코는 에드가르도로부터 오는 사랑의 편지를 가로채고, 이 사실을 모르는 루치아는 마음이 변한 에드가르도를 원망하며 아르투로와 약혼하고 만다. 결혼식 직후 뜻밖에도 에드가르도가 나타나 루치아의 마음을 돌아서게 한다. 에드가르도는 성에서 쫓겨나고, 루치아는 비관하여 절망한 나머지 그만 신랑을 찔러 죽이고 자신도 자살하고 만다. 에드가르도 또한 이 비극에 상심하고 괴로움에 못 이겨 루치아의 무덤에 가서 자결하고 만다.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이탈리아어: Lucia di Lammermoor, 프랑스어: Lucie de Lammermoor)는 가에타노 도니제티가 작곡한 3막의 서정 비극(tragedia lirica), 또는 비극 오페라이다. 월터 스코트 경의 소설, 《래머무어의 신부(The Bride of Lammermoor)》를 기초로, 살바토레 캄마라노가 이탈리아어 대본은 작성하였다. 1835년 9월 26일 나폴리의 산 카를로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대표적인 벨칸토 오페라 중의 하나로, "Opera America"에 따르면, 북미에서 13번째로 자주 공연되는 오페라이다.
등장인물
1. 루치아 Lucia : 에드가르도를 사랑하는 엔리코의 누이동생 (소프라노)
2. 에드가르도 디 라벤스우드 Edgardo (테너)
3. 엔리코 아스톤 Enrico : 람메르무어의 여주, 루치아의 오빠
4. 라이몬도 Enrico : 람메르무어의 목사이며 루치아의 가정교사
5. 아르투르 Arturo : 루치아의 약혼자 / 알리사 : 루치아의 시녀
6. 노르마노 Normanno : 람메르무어의 대장
7. 알리사 Alisa : 루치아의 시녀
<줄거리>
제 1 막 : 엔리코 집의 성 앞 뜰
합창이 벌어지는 가운데 사냥을 알리는 경쾌한 전주로 레이븐스우드 성의 지치관 노르만도와 사냥복을 입은 신하들이 나타난다. 신하들은 말을 탄 이상한 기사가 산림에 숨어 있는 것을 의심하여 그 주변을 수색하기 위해 숲속으로 달려간다. 성주인 엔리코가 루치아의 가정교사인 라이몬드를 데리고 등장한다. 엔리코는 정치적인 야심으로 음모에 가담했기 때문에 자신의 정치적인 야심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전부터 루치아를 사모하고 있는 아르투로와 정얄 결혼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엔리코는 라이몬드에게 루치아가 아르투로와의 결혼을 울면서 거절했다고 화를 내므로 라이몬드는 루치아가 지금까지도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변명한다. 그 소리를 듣고 있던 노르만도는 무서운 비밀이라 하면서 루치아는 대대로 원수인 에드가르도와 비슷한 기사와 비밀리에 만난다고 사실을 폭로한다.
엔리코는 이 말에 '너는 무서운 꿈에도 있을 수 없는 일로 내 가슴의 눈을 뜨게 했도다 (Cruda funesta smania)'하며 격문한다. 바로 이때 부하들이 돌아와 산림에 들어온 괴상한 기사는 에드가르도라고 하여 앞서 노르만도가 한 말을 증명한다. 엔리코는 라미몬드의 만류하는 말도 뿌리치고 신하들과 함께 그의 피로 내 사슴의 분노를 씻어라 하면서 복수할 것을 맹세한다. 장면은 바뀌어 레이벤즈 성 안의 조그만 공원 옆 입구에 시간은 달 밝은 밤이다. 루치아는 시녀 알리사와 함께 에드가르도를 기다린다. 비밀을 알고 있는 알리사는 그 사랑은 위험하다고 말하지만 사랑에 취해 있는 그녀에게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다.
루치아는 분수를 바라 보며 예전에 한 시녀가 성주를 연모하다 뜻을 이루지 못해 저 물에 몸을 던져 죽었는데 그 여인의 흔드는 손이 보인다 하면서 '깊은 침묵은 밤을 덮는다 (Regnava nel silenzio)'라는 아리아를 부른다. 알리사가 그녀를 위로하자 루치아는 사랑하는 사람이 오면 무섭지 않을 것이라면서 노래하자 에드가도르도가 탄 말이 가까이 오므로 알리사는 먼저 안으로 들어간다.
깊은 침묵은 밤을 덮는다 / 주위는 고요한 침묵 속에 잠기고
Montserret Caballe (몽세라 카바예, 1933~ ), Sop.
말을 타고 나타난 에드가르도는 늦은 이유를 말한다. 그리고 오늘밤 정치적인 특별 임무를 띠고 프랑스로 떠나는 것을 그녀에게 알릴 때 루치아는 오빠와 화해하고 두 사람의 결혼을 부탁하자고 해도 에드가르도는 아버지를 죽이고 성마저 빼앗은 엔리코와 화해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가지고 온 결혼 반지를 끼어 주며 분노를 진정시키고 영원히 변함없이 사랑하리라는 사랑의 2중창을 부른 후 급히 떠난다.
제 2 막 : 람메르무어 성 안의 넓은 방
엔리코와 그의 심복인 노르만도가 루치아를 설복시키기 위해 한 꾀를 꾸며낸다. 그것은 프랑스로 간 에드가르도가 사랑을 끊겠다는 뜻의 거짓 글을 보낸 것처럼 그 편지를 루치아에게 주자는 내용이었다. 바로 그 때 루치아가 여윈 얼굴로 들어 오자 엔리코는 몸조심하라고 말하지만 그녀는 근심 띈 얼굴로 '소름끼치는 창백한 빛이 내 얼굴을 덮고 있습니다. (Il pallor funestoorrendo)'라고 마음의 고통을 오빠에게 호소한다.
엔리코는 오히려 에드가르도와 사랑을 끊으라고 하나 루치아가 듣지 않으므로 엔리코와 노르만도가 만든 거짓 편지를 그녀에게 준다. 루치아는 사랑을 배신한 그 편지를 보고 '눈물에 젖어 괴로움에 시달리면서 희망도 생명도 사랑에 걸고 있었는데 (Soffri va nel pianto)'하면서 비통한 소리로 쓰러져 운다.
이 틈을 탄 엔리코는 루치아에게 궁정의 세력가 아르투로와의 결혼을 거절한다면 나의 정치적 생명을 잃으며 사형을 당하게 된다는 말로 설득시킨다. 그래도 그녀는 듣지 않고 에드가르도와의 결혼을 탄원하므로 엔리코는 거절하면서 나가 버린다. 이 광경을 숨어서 본 라이몬드가 근심어린 빛으로 나와 루치아에게 급히 간다. 그리하여 그는 에드가르도에게서 온 답장을 도중에서 빼앗긴 듯하다는 소식을 전해 주며 이제는 양보할 수 밖에 없다고 루치아에게 권한다.
장면이 바뀌어 람메르무어 성 안의 호화로운 홀에서 벌어지는 파티 장면. 기사와 귀족들이 합창으로 아르투로를 환영하는데 그는 '비통의 그늘을 사라지고 별빛은 빛난다. (Per pocofrale tenebre)'라고 대답한다.
루치아와 아르투로의 결혼식이 열린다. 신부의 몸차림을 한 루치아가 시녀 알리사와 가정교사인 라이몬드의 부축으로 울면서 나오다가 쓰러진다. 이 광경에 당황한 엔리코는 그녀의 탄식은 죽은 어머니 때문이라고 하면서 루치아는 오빠가 처해 있는 어려움과 결혼서약서에 서명할 것을 강요한다. 루치아는 서명해 버리는데 엔리코는 이에 만족해다.
이 때 테라스를 통해 검은 망토를 입은 기사가 나타나는데 바로 그가 프랑스에서 돌아온 에드가드로도였다. 그는 이 밤의 결혼식을 방해하고 루치아를 데리고 가려 한 것이었다. 기사들은 이에 분개하여 에드가드로를 에워싸고 칼을 뽑자 라이몬드가 조용히 해결하자고 하면서 말려도 엔리코와 에드가르도가 듣지 않고 서로 칼을 뺀다.
그 순간에 '나를 붙드는 것은 누구인가 (Chi mi frena in tal momento)'로 시작하는 그 유명한 6중창이 벌어진다. 라이몬드는 이 위기를 피하기 위해 결혼서약서를 에드가르도에게 보여준다. 그는 루치아의 서명을 보고 배신함을 저주하면서 반지를 돌려 보낸다. 두려움과 놀라움에 넋을 잃은 루치아도 자기 손에서 반지를 빼자 에드라르도는 그것을 빼앗는다. 이 때 에드가르도는 격분한 나머지 자기의 반지를 마루에 집어 던지고 칼을 빼들며 루치아와 그녀의 가족들을 저주하며 퇴장한다.
Sextet (6중창) 'Chi mi frena in tal mimento? (나를 붙드는 것은 누구인가)'
Bruno Ribeiro, Florin Estefan, Laura Parfitt, Jurgita Adamonyte, Phelham Andrews, Gergely Nemeti, Serendipity, Cor Caerdydd
Conductor: Andrew Greenwood, Cardiff Millennium Centre
Dennis O'Neill - A Career Tribute - November 2007
제 3 막 : 에드가르도의 레이븐스우드 성 안의 옛 성주의 방
밖에는 무서운 천둥이 치는 폭풍우의 밤이다. 막이 열리자 램프불 아래 에드가르도가 앉아서 실연을 회상하며 슬픈 운명을 비탄하고 있다. 그 때 결혼식 침입에 대해 격분한 엔리코는 망토를 입고 찾아와 내일 해 뜰 무렵에 레이븐스우드의 묘지에서 결투할 것을 신청한다.
장면은 다시 결혼식의 밤으로 바뀐다. 신부와 신랑이 퇴장한 후에도 피로연에 참가한 많은 사람들이 즐겨 마시며 축하의 합창이 계속 이어진다. 그 곳에 라이몬드가 참담한 모습으로 나타나 루치아가 침실에서 아르투로를 칼로 찔러 죽였다는 것을 알린다. 바로 그 때 흰 잠옷을 입은 루치아가 머리를 흐트려 뜨리고 죽은 사람과 같이 창백한 얼굴로 나타난다.
여기서 유명한 광란의 아리아인 '님의 목소리 내 마음 속에 스며서 감도네 (Il dolce suono micolpi)'를 부른다. 그녀는 노래를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동정을 갖게 하였고 오빠인 엔리코도 후회하는 빛을 보인다. 그도 루치아의 '사랑의 눈물이 흘러 세상 위에 넘치네 (Spargi d'amaro pianto)'라는 애절한 말을 듣고 그 정경에 괴로워한다.
장면은 다시 묘지로 변하여 깊은 밤중. 에드가르도는 '내 조상의 무덤이여! 불행한 집안에 남겨진 최후의 이 몸도 들여 보내주서서 (Tombe degliavi miei)'라면서 엔리코의 칼에 죽는 것을 각오하고 있다.
계속해서 '세상과 마지막 작별이오. 저 무덤은 나를 맞아주고 덮어주리라 (Fra pocoa me ricovero)'라는 아리아를 부른다. 성에서 나온 기사들이 지나가며 루치아가 죽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에드가르도는 루치아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보러 가려는데 라이몬드가 와서 그녀의 죽음을 알린다.
그는 자기의 얕은 생각이 이같은 불행을 낳게 되었다고 슬퍼하며 '날개를 펴고 하늘로 간 그대여 (Tu che Dio spiegasti)'를 노래한다. 그리고 애인의 죽음과 자신의 비운을 탄식하며 자결하고 만다. 이에 에드가르도의 죄를 용서하라는 일동의 합창이 끝난 후 막이 내린다.
Il dolce suono, "The Mad Scene"(Lucia) 오페라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3막 중 '광란의 장면 (The Mad Scene)'
아, 행복한 오늘! 마침내 나는 당신의 것, 그대는 나의 것(Oh, lieto gio
rno! Alfin son tua, alfin sei mio), 크레센도로 솟구치는 노래는 광란
의 장면 아리아 중에서도 극적 생동감으로 요동친다.
도니제티의 오페라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3막에서 주인공 루치아가 미쳐서
노래하는 광란의 장면(The Mad Scene)은 오필리아의 아리아 등 숱한 광란
의 아리아를 통틀어 최고 명장면으로 꼽힌다.
원치 않는 남자와의 결혼날 신방에서 남자를 칼로 찌른 뒤 하객들이 담소
하는 축하연에 나타난 루치아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에드가르도의 환영
(幻影)을 좇으며 20분 가까이 부르는 절창(絶唱)이다.
Il dolce suono mi colpi di sua voce!
달콤한 소리가 나를 때린다, 그의 목소리!
Ah, quella voce m'e qui nel cor discesa!
아, 그 목소리가 나의 마음으로 내려온다!
Edgardo! io ti son resa, Edgardo, mio!
에드가르도여! 나는 당신에게 굴복합니다, 나의 에드가르도!
fuggita io son de tuoi nemici.
도망쳤소 나는 당신의 적으로부터.
Un gelo me serpeggia nel sen!
한기가 올라와요 나의 가슴으로!
trema ogni fibra!
떨려요 온몸이!
vacilla il pie!
흔들려요 다리가!
Presso la fonte meco t'assidi al quanto!
샘 가까운 곳에서 내옆에 잠시 앉아요!
Ohime, sorge il tremendo fantasma e ne separa!
아아, 솟아오른다 무서운 유령이 그리고 갈라놓는다 우리를!
Qui ricovriamo, Edgardo, a pie dell'ara.
여기서 피난처를 찾아요, 에드가르도, 제단의 아래에서.
Sparsa e di rose!
뿌려져 있어요 장미가!
Un armonia celeste, di, non ascolti?
천상의 하모니가, 들리지 않아요?
Ah, l'inno suona di nozze!
아, 결혼 축가 소리가 들리네!
Il rito per noi s'appresta! Oh, me felice!
예식이 우리를 위해 곧 치뤄져요! 오, 나에게 행복을!
Oh gioia che si sente, e non si dice!
오, 쾌락을 느끼지만,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네!
Ardon gl'incensi!
향을 피우네!
Splendon le sacre faci, splendon intorno!
찬란하고 성스러운 횃불이, 비춘다 주변을!
Ecco il ministro!
여기에 목사님이 계시네!
Porgime la destra!
내게 줘요 당신의 오른 손을!
Oh lieto giorno!
오, 즐거운 날!
Al fin son tua, al fin sei mia,
마침내 나는 당신의 것, 당신은 나의 것,
a me ti dona un Dio.
나에게 당신을 주었어요 하느님께서.
Ogni piacer piu grato,
모든 쾌락은 더욱 감사하고,
mi fia con te diviso
내가 당신과 함께 누리게 해요.
Del ciel clemente un riso
온화한 하늘이, 웃음을
la vita a noi sara.
우리의 삶은 그렇게 되어요.
Natalie Dessay (1965.4.19~ , France)
Il dolce suono, Mad scene - Part 1 - English Subs
Il dolce suono, Mad scene - Part 2 - English subs
Il dolce suono, Mad scene - Part 3 - English Subs
Tu che a Dio spiegasti (날개를 펴고 하늘로 간 그대여)
Jose Carreras
도니체티 (Domenico Gaetano Maria Donizetti, 1797년 - 1848년)
이탈리아의 오페라 작곡가. 그가 작곡한 많은 이탈리아어와 프랑스어 오페라는 로시니와 베르디를 연결하는 오페라의 발전에 다리를 놓았다. 작품들 중 특히 〈람메르무어의 루차 Lucia di Lammermoor〉(1835)·〈연대의 딸 La fille du r?giment〉(1840)·〈라 파보리테 La favorite〉(1840) 등이 유명하다. 그의 오페라세리아(:비극적 혹은 기타 진지한 주제에 의한 이탈리아 정통 오페라)에는 독특한 극적 중량감과 감정적 내용이 잘 표현되고 있으며, 희가극에서도 특유의 재치와 명랑함이 돋보인다.
초기생애
도니체티는 1797년 11월 29일 시(市) 전당포 관리인의 세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나 바이에른의 신부 요한네스 지몬 마이어(베르가모의 주요한 성당인 산타마리아 마지오레의 음악감독이자 성공적인 오페라 작곡가)에게 음악을 처음 배웠다.
합창단원으로서는 그다지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지만 그의 잠재된 음악 재능을 높이 산 마이어 신부가 그를 볼로냐에 있는 리체오 필라르모니코 음악원에 입학시켰다.
이곳에서 푸가와 대위법을 철저히 공부했으며, 아버지의 소원대로 교회음악 작곡가가 되기 위해 상당히 많은 양의 종교음악을 작곡해보기도 했지만 천성은 오페라 등 극음악에 적합했다.
최초의 성공작은 〈보르고냐의 엔리코 Enrico di Borgogna〉로 1818년 베네치아의 테아트로 산 루카 극장에서 초연되었으며, 이후 12년 동안 작곡한 31개가 넘는 오페라들은 대부분 나폴리에서 공연되었는데 현재 거의 공연되지 않는 상태이다. 1830년 〈안나 볼레나 Anna Bolena〉를 밀라노에서 공연함으로써 전 유럽 도시와 이후 대서양을 넘어 미국에까지 그의 명성을 떨치게 된 계기가 되었다.
2년 후 그는 당시 최대의 극작가 펠리체 로마니의 대본에 의한 매력적인 희가극 〈사랑의 묘약 L'elisir d'amore〉으로 또한번 대성공을 거두었다. 역시 로마니가 대본을 쓴 〈루크레차 보르자 Lucrezia Borgia〉(1833)가 또다시 성공하면서 밀라노의 라 스칼라 가극장 등 이탈리아 여러 곳에서 명성을 굳혔다. 오페라 작곡가 로시니와 벨리니가 그보다 먼저 파리로 간 것처럼 그 역시 이탈리아에서 성공한 후 파리로 갔다. 파리에서 공연한 〈마리노 팔리에로 Marino Faliero〉는 실패작은 아니었지만 몇 주 전에 발표된 벨리니의 〈청교도 I Puritani〉로 인해 그늘에 가린 감이 없지 않다. 이후 그는 뛰어난 비극 오페라 〈람메르무어의 루차〉(1835. 9. 26)를 작곡하기 위해 나폴리로 돌아갔다.
1828년 로마의 한 친한 친구의 누이 비르지니아 바셀리와 결혼했고, 나폴리에서 가정을 꾸몄다. 1837년 그녀가 아들을 사산하고 죽자 아내를 무척 사랑했던 그는 평생 동안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3명의 자식이 태어났으나 1명도 살아 남지 못했다는 사실에 더욱 고통스러워했다. 가족들의 사인은 매독이었는데, 이 병은 훗날 도니체티에게도 죽음을 가져다주었다.
파리에서의 성공
도니체티는 나폴리에서 계속 작품활동을 하다가 1838년 시 검열관들이 〈폴리우토 Poliuto〉의 공연을 금지하자(그리스도교 순교를 다룬 이 작품은 종교적 주제가 공연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금지되었음) 다시 파리로 갔다. 파리는 벨리니가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로시니가 은퇴한 후였기 때문에, 도니체티에게 있어 좀더 활동하기 쉬운 무대가 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몇 가지 성공작을 재공연했지만 빅토르 위고의 희곡에 바탕을 둔 오페라 〈루크레차 보르자〉는 위고의 반대로 공연되지 못했다. 〈폴리우토〉는 외젠 스크리브의 프랑스 대본으로 〈순교자 Les Martyrs〉라는 제목으로 공연되었고, 이보다 2개월 앞서 오페라 코미크 〈연대의 딸〉이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이 작품의 인기는 수년 동안 계속되었고, 예뉘 린드, 아델리나 파티, 마르첼라 젬브리히, 엠마 알바니 등 당시의 뛰어난 소프라노 가수들이 주역을 맡았다. 같은 해에 파리 오페라 극장은 도니체티의 첫 그랑 오페라 〈라 파보리테〉를 공연했다. 〈마리아 파디야 Maria Padilla〉는 도니체티의 동료이자 제자였던 바르톨로메오 메렐리가 라 스칼라 가극장과 빈의 케른트네르토르 극장의 감독으로 일하면서 후원한 작품이며, 1841년 베르디의 〈나부코 Nabucco〉가 초연되기 불과 몇 주 전에 공연되었다. 역시 메렐리가 빈의 케른트네르토르 극장에서 공연할 생각으로 후원한 〈샤모니의 린다 Linda di Chamounix〉는 1842년에 공연되었고,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안나 황후에게 헌정되었다.
이미 오스트리아 총리 메테르니히의 소개로 황제 페르디난트 1세의 관심을 끌고 있던 상태였고, 로시니의 〈슬픈 성모 Stabat Mater〉를 황제 앞에서 지휘한 적도 있었던 도니체티는 이제 오스트리아의 궁정 작곡가로 임명되기에 이르렀다. 이 자리에 있으면서 그는 1년 중 6개월을 빈에서 보내고 나머지 6개월은 자유롭게 작품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궁정작곡가로 임명되던 때와 거의 같은 시기에 그는 로시니로부터 볼로냐에 있는 리체오 필라모니코 음악원의 원장직을 의뢰받았으나, 그 일을 감당하지 못할 것으로 판단해 자신이 좋아하는 오페라 창작작업을 계속하기로 마음먹었다. 로시니는 파리에서 언제나 도니체티의 인기를 북돋워주었고, 볼로냐에서 자신이 작곡한 〈슬픈 성모〉를 초연하도록 했다. 도니체티는 파리로 돌아와 테아트르 이탈리앵 극장에서 흥겹고 재치넘치는 희가극 〈돈 파스콸레 Don Pasquale〉를 공연했다.
신체의 쇠약
그러나 도니체티는 이미 치명적인 질병에 걸려 있었다. 1843년에 스크리브의 대본으로 만든 최후의 걸작 오페라인 〈동 세바스티앙 Dom S?bastien〉이 파리 오페라단에서 공연되던 당시에 이미 만성 두통과 이따금의 정신발작증으로 시달리던 상태였다.
그는 갑자기 늙어갔고 빼어난 용모와 마음의 평정도 잃었다. 〈동 세바스티앙〉은 신문에 의해 시시한 작품으로 평가되었지만 실제로 오페라 청중에겐 성공적인 호응을 얻었다.
나머지 생애 동안 그는 절망적인 정신착란의 늪으로 더욱 깊숙이 빠져들어갔다. 그는 파리 근처의 개인 정신병원에 환자로 입원해 있으면서, 프랑스 경찰과 의사들을 애먹였다. 결국 그의 조카 안드레아(맏형의 아들)가 그를 고향 베르가모로 데려왔고, 그곳에서 삶을 연명하다가 1848년 4월 8일 죽었다.
그는 의지력·언어능력·신체조절능력이 상실된 채 대개의 매독환자처럼 정신발작 후유증의 제물이 되었다. 벨리니와는 달리 다른 작곡가들의 성공을 시기하는 법이 없이 언제나 넓은 아량을 지녔던 명랑하고 잘생긴 그에게는 너무나도 잔인한 최후였다. 그는 프랑스의 작곡가 엑토르 베를리오즈가 〈주르날 데 데바 Le Journal des D?bats〉지에 자신의 음악에 대해 혹독한 평론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빈으로 떠난다고 하자 아주 기꺼이 총리 메테르니히 앞으로 소개장을 써줄 정도로 아량이 넓은 사람이었다.
도니체티는 언제나 평론가들보다는 청중에게 더 많은 사랑을 받았다. 평생 동안 그가 거둔 성공은 대단한 것이었고,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상을 받았다. 도니체티의 인기는 19세기가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지만, 1914년경부터 베르디와 리하르트 바그너의 걸작들의 빛에 가려져 그의 오페라는 연주 레퍼토리에서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1950년대에 와서 도니체티의 작품에 대한 관심이 다시 일게 되었고, 이후 〈람메르무어의 루차〉·〈사랑의 묘약〉·〈돈 파스콸레〉와 같은 몇몇 오페라는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의 사랑을 널리 받고 있다.
오페라 작곡가로 잘 알려진 도니체티는 50년 조금 넘는 생애를 살면서 600여곡의 작품을 썼던 다작 작곡가이다. 그중 오페라는 10% 정도, 나머지 90% 는 피아노 작품과 현악 사중주, 실내악, 종교 음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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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편안하게 마물다 갑니다
고운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