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6월 12일 토요일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성모 성심에 대한 공경은 17세기 프랑스 노르망디 출신의 요한 외드 성인의 노력 등으로 점점 보편화되었다. 성모 성심에 대한 신심은 예수 성심을 공경하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이 신심은 별도로 날을 잡아 기념하던 19세기 전까지는 예수 성심 미사에서 기억하는 형태로 전례 안에 들어왔다. 1942년 비오 12세 교황은 성모님의 파티마 발현 25주년을 맞아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께 세상을 봉헌하고, 이 기념일을 온 교회가 지내도록 하였다. 처음에는 8월 22일이었으나 1996년부터 예수 성심 대축일의 다음 날로 옮겨 지내고 있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41-51
41 예수님의 부모는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면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다.
42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도 이 축제 관습에 따라 그리로 올라갔다.
43 그런데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았다. 그의 부모는 그것도 모르고,
44 일행 가운데에 있으려니 여기며 하룻길을 갔다. 그런 다음에야 친척들과 친지들 사이에서 찾아보았지만,
45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를 찾아다녔다.
46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그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47 그의 말을 듣는 이들은 모두 그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하였다.
48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49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50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51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누가 불효자인가?
요즘 세대에 효자나 불효자에 대해서 떠들고 다니면 아무도 귀도 기울이지 않습니다. 자신이 먹고 살기도 힘들어서 전전긍긍하는데 어떻게 부모를 챙길 수 있느냐고 생각하기 일쑤이고, 또 그렇게 효성이나 효도에 대한 얘기 자체는 낡은 얘기라고 아예 치부하고 들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얘기를 나이를 먹은 우리끼리 하면서도 자신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우리가 과연 효자답게 살았는가 하는 것은 말할 입장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세상의 온갖 욕망과 세속의 욕망에 휩싸여서 가난과 싸우면서 어떻게 이럭저럭 살다보니 칠십이 넘었고, 또한 잘 산 인생도 아니었기에 그리고 날마다 자신을 변명하고 살지만 아무도 효자로 산 사람은 없고 모두 불효자로 산 것만 같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불효자’라는 중압감입니다. 무엇이 불효자인지 많이 생각해 보면 자식이 부모님이나 조상님들께 잘 못 살고 불효한 것을 더 많이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말 불효자는 부모님께도 자기 자식에게도 잘못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가 제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아무런 노력이 필요치 않으나 자식이 제 부모에게 잘 해드린다는 것은 많은 노력을 해야 가능한 것입니다. 내가 자식을 낳아 기르면서 자식을 생각하는 것처럼 부모에게 잘해드리지 못한 것이 괴롭습니다. 사실 나는 자식들에게도 잘 해준 것이 없지만 부모님에게는 잘못한 것만 기억에 남습니다. 누구든지 제 자식에게 해주는 것의 십 분지 일이라도 자기 부모에게 한다면 아마도 효자 소리를 들을 것입니다.
제나라 사람 광장(匡章)이라는 사람은 부친의 노여움을 사서 처자와도 별거하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가 불효자라고 비방하였지만 맹자는 그와 교분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 예의를 갖추어 깍듯이 그를 대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맹자의 제자인 공도자(公都子)는 스승의 행동이 납득되지 않아 스승 맹자에게 질문하였다고 합니다. “광장은 온 나라 사람들이 다 불효자라고 하는데, 스승께서는 그와 함께 교유하시고, 또 상종하시면서 예모를 갖추시니 왜 그렇게 하시는지 감히 여쭈어봅니다.” 그러자 맹자는 제자의 질문에 소위 세속에서 말하는 다섯 가지의 불효에 대하여 가르쳤다고 합니다.
‘세속소위불효자오, 타기사지, 불고부모지양, 일불효야, 박혁호음주, 불고부모지양, 이불효야, 호화재, 사처자, 불고부모지양, 삼불효야. 종이목지욕, 이위부모륙, 사불효야, 호용투흔, 이위부모, 오불효야.’
(世俗所謂不孝者五, 惰其四支, 不顧父母之養, 一不孝也, 博奕好飮酒, 不顧父母之養, 二不孝也, 好貨財, 私妻子, 不顧父母之養, 三不孝也. 從耳目之欲, 以爲父母戮, 四不孝也, 好勇鬪很, 以危父母, 五不孝也.)
1. 게을러서 일을 하지 않아 빈곤해져 부모를 보살펴드릴 수 없을 때 그것이 첫째가는 불효이다.
2. 장기나 바둑 또는 노름을 좋아하고 술 마시기를 즐겨하면서도 부모를 돌보지 않는 것을 이르는 것이다. 잡기를 즐기는 데는 시간과 돈을 쾌척 하면서도 늙고 병든 부모를 돌보지 않는 것은 큰 불효라는 뜻이다.
3. 돈을 많이 벌어서 풍족하게 살면서도 제 부모를 모르는체하고 처자식에게는 돈을 아끼지 않고 쓰면서도 부모에게는 인색하게 군다면 그 역시 큰 불효라고 했다.
4. 눈으로 보고 싶은 욕망, 귀로 듣고 싶어 하는 욕망에만 쫓아서 부모에게 수치와 욕됨이 돌아가게 한다면 그 역시 큰 불효라는 것이었다. 이는 부모가 가고 싶어 하고,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전혀 생각 해 보지도 않고 제가 하고 싶은 것만 추구하는 것 역시 불효라는 뜻과 같은 것이다.
5. 용맹한 것을 좋아하여 싸움을 잘 하고 부모를 위태롭게 한다면 이 역시 불효라는 뜻이다.
맹자는 이어서 ‘광장(장자)은 이 다섯 가지의 불효에 해당하지 않는다. 광장은 부자간에 서로 무엇이 옳은 것인지 서로 논쟁하다가 뜻이 맞지 않았던 것이다.’라고 광장을 두둔하고 있습니다.
맹자의 세속 다섯 불효자에 사실 내가 들어있지 않아서 불효자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서 가슴이 아픕니다. 나는 세속의 불효자는 아니라고 혼자 자만하면서도 사실은 세속의 불효자가 고스란히 하느님께도 불효자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하느님을 흠숭하는 데에 게을러 미사참례도 항상 미루고, 세상의 모든 놀이와 잡기에 빠져서 살기도 하고, 이런 저런 일로 주님을 잊고 살 때가 더 많습니다. 돈을 벌어서 풍족하게 쓰고 있으면서 사랑을 실천하고 이웃을 돌보는 데에는 인색하답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들리는 세상의 유혹에 빠져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복음을 전하고, 거룩한 삶을 본받지 아니하고 세상의 재미에 맛 들려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과 이권과 권세에 다툼을 하느라고 주님을 언제나 욕되게 하고, 죄를 짓고도 뉘우칠 줄 모르고 살고 있으니 내가 어찌 불효자가 아닐 수 있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와 효자의 관계로 사시고자 아버지의 집에서 계시며, 돈독한 부자관계를 유지하시고 성모님과 요셉 성인에게도 순종하시며 효자로 사십니다. 예수님께서 효자로 사신 삶을 성모님은 가슴에 깊이 간직하시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성심을 묵상하면서 성모님의 그 신심을 가슴에 새롭게 새깁니다. 그리고 효자로 살아야 하겠다는 다짐을 다시 해 봅니다.
정말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모든 사람들 앞에서 빛나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효자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성령의 은총으로 우리는 효경(孝敬)을 배웁니다. 그래서 우리가 당신의 자녀로 떳떳하게 살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 다음 날로 옮겨 지내고 있는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입니다. 성모 성심을 닮아 우리도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님의 성심을 닮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61,9-11
내 백성의 9 후손은 민족들 사이에, 내 백성의 자손은 겨레들 가운데에 널리 알려져
그들을 보는 자들은 모두 그들이 주님께 복 받은 종족임을 알게 되리라.
10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신랑이 관을 쓰듯 신부가 패물로 단장하듯
그분께서 나에게 구원의 옷을 입히시고 의로움의 겉옷을 둘러 주셨기 때문이다.
11 땅이 새순을 돋아나게 하고 정원이 싹을 솟아나게 하듯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민족들 앞에 의로움과 찬미가 솟아나게 하시리라.
축일 :6월 12일 성 에스킬 (Eskil)
신분 :주교, 순교자
활동 지역 :스웨덴(Sweden)
활동 연도 :+1080년경
같은 이름 :에스낄
잉글랜드(England) 출신 수도승인 성 에스킬은 스웨덴의 사도로 존경받는 성 지그프리드(Sigfrid, 2월 15일)의 스웨덴 선교 때 그를 수행한 세 명의 일행 중 한 명이다. 성 지그프리드에 의해 선교사 주교로서 스웨덴 남동부 쇠데르만란드(Sodermanland) 지방의 멜라렌(Malaren) 호수 주변으로 파견된 그는 스톡홀름(Stockholm) 서쪽에 있는 투나(Tuna)라는 마을에 첫 번째 선교 교구를 설립하고 인근 지역으로 복음을 전하는 데 힘썼다. 그러던 어느 날 스트렝네스(Strangnas)에서 복음을 전하던 중 어떤 우상 숭배 축제를 강력히 반대하다가 흥분한 군중들로부터 돌에 맞아 순교했다. 그의 유해는 제자들에 의해 투나의 수도원으로 모셔 안장되었다. 그 후 스트렝네스 사람들도 그리스도교로 개종했고, 성 에스킬이 투나에 설립한 첫 교구는 오늘날의 스트렝네스 교구로 발전했다. 그래서 성 에스킬은 스트렝네스 교구와 쇠데르만란드 지방의 수호성인으로 큰 공경을 받고 있다. 특히 그가 묻힌 투나 마을은 오늘날의 에스킬스투나(Eskilstuna)라는 도시가 되었는데, 이는 성 에스킬로 인해 생긴 도시명이다. 교회 미술에서 그는 주교 복장을 하고 세 개의 돌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오늘 축일을 맞은 에스킬 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과 은총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