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붕을 고치며
손광성
사람이 늙으면 병이 잦게 마련이다. 낡은 집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잔손이 탄다. 자고 나면 담장에 금이 가고, 한 달이 멀다고 하수구가 막힌다. 지난 가을에 손을 봤는가 싶은데, 장마철만 되면 천장에 흉하게 얼룩이 지는 것이 낡은 집의 생리인가 한다.
이런 허술한 집에 사는 사람에게는 그래서 언제나 심심찮은 일요일이 기다리고 있게 마련이다. 막힌 하수구를 뚫고 아궁이를 고치고, 지붕 위에 올라가서는 금이 간 기왓장을 갈아내야 한다. 물론 자질구레한 일이다. 하지만 이 자질구레한 일이 말처럼 그렇게 수월한 것은 아니다. 더구나 지붕 위에 오르는 일은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성급하게 덤비다가는 긁어 부스럼 내는 격이거나, 잘못 되면 낭패를 보는 수도 없지 않다.
지붕에 오르려면 우선 일기와 계절을 고려해야 하며, 세심한 주의력과 침착성이 따라야 한다. 그리고 체중이 60Kg을 넘는 분이라면 아예 삼가는 것이 서로를 위해서 좋다. 그 정도의 무게를 감당하기에는 낡은 시멘트 기와란 너무 부실하기 때문이다.
장마철에 지붕을 고치지 않는다는 것은 상식으로 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삼복염천에 오를 일도 못된다. 물기를 머금고 있는 기와란 그야말로 눈만 흘겨도 깨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달아오른 기왓장은 마치 달구어 놓은 철판 같아서 내뿜는 열기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게다가 시야마저 몽롱해져서는 엉뚱한 놈을 갈아 끼우기 십상이다. 겨울은 겨울대로 또 겨울대로 어려움이 있다. 추위는 고사하고라도 얼어 버린 기왓장이란 마치 마른 과자처럼 바스러진다. 지붕을 고치기 제일 알맞은 때는, 그러니까 한식을 전후한 청명한 봄날이 아닌가 한다.
이런 계절이라면 비록 낡은 기와라 하더라도 물이 오른 나무처럼 탄력이 생겨서 제법 탄탄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봄빛이 내리쬐는 지붕 위는 평지보다 한결 따뜻해서 작업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조심할 것은 서두르지 말라는 것이다. 아주 느긋한 기분으로 차근차근 금이 간 기왓장을 찾아내면 된다. 이 때 자세는 될 수 있는 대로 낮추는 것이 바람직하다. 지붕 위에서의 고자세는 금물이다. 일상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최초로 무릎을 깨고 콧등에 상처를 입었던 것은 겸손하게 네 발로 기어 다니던 시절이 아니라, 두 발로 걸어 보겠다고 욕심을 부리면서부터 시작된 것이라는, 어느 철학자의 말을 상기해 둘 필요가 있다.
이렇게 엉금엉금 기어 다니다가 드디어 발견하는 금이 간 기왓장! 이것이 지난여름 나의 서재의 천장을 더럽히고, 나의 마음을 항상 울적하게 하던 놈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면 소리가 나도록 밟아 주고 싶은 충동을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낭패다. 옆에 맞물려 있는 성한 기왓장까지 깨져 버리는 불상사가 생기기 때문이다.
기둥을 치면 대들보가 울리는 법. 세상 모든 것이 그러하듯이 하찮은 기왓장 하나도 홀로 독립된 하나가 아니라 서로 맞물려 있는, 구조 속의 하나라는 사실을 명심해 주는 것이 좋다. 게다가 조금만 생각을 돌리고 보면 사실 화풀이나 하자고 지붕 위에 오른 것은 아니지 않는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우선 깨진 기왓장부터 조심스럽게 모셔 낼 일이다. 다음은 여벌로 놓아두었던 기와를 가져다가 아귀를 잘 맞추어서 갈아 끼운다. 이 때 잘 들어가지 않는다고 무리한 힘을 가한다거나, 망치 같은 것으로 툭툭 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리고 무릎에 지나친 힘이 쏠리는 것은 삼가야 한다. 자칫하다가는 모르는 사이에 무릎 밑에서 성한 기왓장이 비명을 지를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한 가지 일에 열중하다 보면 예기치 않은 방향에서 낭패를 보는 것이 우리네 세상살이가 아닌가.
가파른 지붕 위에서, 게다가 부자연스러운 자세로 일을 하다 보면 쉬 피로해지기 마련이다. 이런 때는 잠시 휴식을 취하는 것이 좋다.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다 보면 담배 생각이 나기 마련이다. 지붕 위에서 피우는 담배 맛은 각별한 데가 있다. 공기는 상쾌하고 담배 연기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유유히 피어오른다. 마음도 따라서 한가로워진다. 담배 연기와 아지랑이 너머로 내려다보이는 마을 풍경이 아름답다. 시야가 미칠 수 있는 곳까지 아득히 물결치는 가지가지 모양의 지붕들.
어떤 것은 물체가 가파른가 하면 어떤 것은 완만해서 아주 편안한 느낌을 준다. 맞배지붕이 나란하고, 붉은 기와지붕 파란 슬레이트 지붕을 보고 있으면 거기에 누워서 밀린 잠이라도 자고 싶어진다. 곱게 갓 칠한 지붕을 보고 있으면 공연히 기쁘다. 그런 지붕 밑에서는 인형처럼 예쁜 아이들이 젊고 건강한 엄마랑 함께 단란하게 살고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칠이 벗겨지고 잔모래가 내비치는 낡은 지붕이라고 해서 마음을 쓸쓸하게 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런 지붕은 일을 많이 해서 털이 빠진 늙은 소를 생각나게 하고, 가족을 위해서 몸을 돌볼 겨를이 없었던, 등이 굽은 어느 가장을 연상시킨다. 행여 바람을 맞을세라 어린 자식들을 덮어 주고 감싸 주던 우리들의 허약한 아버지들, 하지만 우리에게는 언제나 따뜻한 이불이요 튼튼한 지붕이던 것을......
어떤 집의 정원에는 목련이 우아하고 또 어떤 집 뜰에는 개나리며 진달래가 한창이다. 장독대 위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항아리 위에 햇살이 부서지고, 빨래를 널고 있는 여인의 맑은 이마 위에 잠시 봄빛이 머문다.
누가 이렇게 아름다운 선율로 봄을 연주하는 것일까? 상아빛 건반 위로 물결치는 희고 긴 손가락의 움직임이 보이는 듯, 보드라운 선율이 어느 집 창문을 흘러 나와 온 대기에 가득 찬다. 이런 때 비록 우리는 심한 음치라 하더라도 콧노래쯤은 흥얼거려도 괜찮을 것이다. 아, 아름다운 봄! 지금 우리는 봄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것이다. 아니, 생의 한가운데 서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붕을 고친다는 핑계로 남의 사생활을 훔쳐보는 일이 있어서는 아니된다. 누군가 지붕같이 높은 곳에서 우리들 몰래 훔쳐본다고 가정하자. 비록 그가 지고하신 신일지라도 그것은 결코 유쾌한 일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기와를 갈아 끼우는 일이 끝나면 내려가기 전에 한 번쯤 홈통을 살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지붕이란 그저 조용한 곳으로만 알고들 있지만 실은 그렇지 못하다. 우리는 모르는 사이에 온갖 잡동사니들이 떨어지기 마련인데, 이런 것들이 바람과 빗물에 쓸려서 모이는 곳이 홈통이다. 바람이 빠진 공이 있는가 하면 배드민턴공이 있고, 장난감 화살이 있으며, 헬리콥터의 프로펠러 모양의 플라스틱 바람개비 같은 장난감들이, 지난해 가을에 떨어진 낙엽과 함께 홈통을 메우고 있기 일쑤다.
이런 장난감을 보고 있으면 문득 삼십 년이나 또는 그보다 더 오래 전에 가졌던 동심으로 되돌아갈지도 모른다. 가오리연처럼 마냥 높이 날아오르고 싶던 그 시절은 우리 모두가 어쩌면 아름다운 동화 속의 왕자였는데... . 하지만 이제 모두 잊어야 하고 버려야 한다. 그것은 이미 시위를 떠난 화살이요, 우리의 귀여운 아이들의 몫으로 돌려주어야 할 꿈인 것이다. 우리가 맡은 배역은 이미 퇴색해 버린 꿈의 잔해들을 쓸어버리고, 어린것들의 앳된 꿈이 빗물에 얼룩지지 않도록 틈틈이 지붕을 고칠 일이요, 이불깃이라도 여며 주면서 그 해맑은 얼굴을 보석을 보듯 가끔씩 들여다보는 기쁨일랑 뺏기지 않도록 마음을 쓸 일이다.
이제 홈통을 치우는 일이 끝났으면 천천히 내려갈 준비를 해야 한다. 위태로운 지붕이란 오래 지체할 곳이 못된다. 어디까지나 우리 생활의 터전은 평탄하고 안정된 평지일 수밖에 없으니까 굽었던 허리를 펴고 떨리는 다리에 새 힘을 더한다.
등을 감싸 안은 사월의 따스한 햇볕, 말고 투명한 대기는 하루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 낸다. 교회당 종탑에서 울려오는 종소리의 파문에도 몸은 꽃가루처럼 흩날릴 것만 같다. 이 홀가분한 기분과 느긋한 안도감, 이것이 낡은 집에 사는 번거로움에 주어지는 조그만 보상이라고나 할까.
아궁이를 고친 날 저녁은 등이 따스워 좋고, 막혔던 하수구를 뚫은 날은 묵은 체증이라도 내려간 듯 속이 후련해서 좋다. 지붕을 고친 날은 기분이 상쾌하다. 이런 날 밤은 홈통에 듣는 빗소리조차 오붓하게 들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