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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우리가 다시 찾아야 할 영혼들(1)”
+ 본 문 : 누가복음 15장 11절 - 32절 (신약 121쪽)
* 봉독 할 구절 / 누가복음 15장 25절 - 32절
11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서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하대,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아멘!
+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서로 인사합시다. / ‘건강하세요. 행복하세요.‘
'내 안에 계신 주님이, 당신 안에 계신 주님께 문안 인사를 드립니다.‘
2차 대전 당시, 일본군 후방기지 병원에 미군 포로들의 인체 실험하는 일을 맡았던,
로데라는 의사가 있었습니다. 사람이 오장육부의 일부, 즉 허파 얼마를 잘랐을 때,
얼마 동안이나 살 수 있는가? 간의 얼마를 남겼을 때 얼마를 살 수 있는가? 하는,
잔인한 실험을 매일 계속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로데라는 의사는 미쳐버리고 맙니다.
양심의 가책 때문에 미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이토록 끔찍한 실험을,
매일 반복하는 가운데 그는 양심의 고통을 잃어버려가고, 거기서 오히려 묘한,
쾌감과 재미를 느껴가고 있는 자신의 잔인한 모습을 보고 미쳐버린 것입니다.
그런 그의 마지막 절규는 “나의 양심의 고통을 다시 돌려주세요.“ 였습니다.
엔도 슈사꾸의 단편 소설인 “바다와 독약” 이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 소설의 작가는 현대인들의 “무관심의 질병” 을 크게 책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생명의 소중함을 망각한 잔인한 인간성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엔도 슈사꾸가 말하고 있는 독약 - 즉, 무관심의 독약,
한 영혼 한 영혼의 소중함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독약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정말 중요한 것을 잃고, 자칫 껍데기만 붙들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소백 기자라고 기억됩니다만, 오래 전에 단편 한 권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일간 신문사의 기자였던 이 사람이, 야간에 사옥을 지키는 숙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추운 겨울날 홀로 사옥을 지키려고 하니 심심한 생각이 들었던지, 동네 슈퍼마켓에서,
소주 한 병을 사다가 홀짝 홀짝 안주도 없이 마십니다. 그러나 술에 취해,
찬 바닥에 잠이 들어버렸습니다. 새벽에 잠을 깨고 보니 설사를 만났네요.
두 손으로 배를 움켜쥐고, 화장실로 달려 들어갑니다. 그런데 수위 아저씨가,
화장실 문을 잠그고 퇴근해 버렸습니다. 얼마나 급했든지, 철조망 담을 넘어,
동네에 있는 공중변소를 갑니다. 한참이나 볼일을 보고 앞의 벽을 바라보았더니,
화장실 벽에 새까맣게 낙서가 되어 있는데, 그 낙서들이 얼마나 재미가 있는지,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갑니다. 가운데쯤 왔을까요? 굵직한 글씨로 한 줄 크게,
쓰여 있었습니다. 「오른쪽을 보시오!」 호기심에 얼른 오른쪽을 봅니다. 이번에는,
「왼쪽을 보시오!」 얼른 왼쪽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번에는 「뒤도 돌아다보세요!」
묘한 자세를 하고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위도 쳐다 봐!」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하여 천장을 쳐다보았더니, 매직글씨로 「뭘 봐 똥이나 싸지!」
“그래 똥이나 싸자.” 그러면서 그 사람이 가만히 생각하니 그게 진리입니다.
그 자리에 앉으면 그 자리에 앉아서 해야만 하는, 볼일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때마다 생각이 나서 글을 썼는데, 한 권의 수필집으로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 이름을 뭐라고 정할까? 생각하다가 화장실에서 인생을 깨달은 것이니,
변소철학이라고 하자, 그래서 수필집 이름이 「변소철학」입니다. 참 재미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그 자리에 앉으면, 그 자리에 앉아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목사가 되었으면 목사로서 할 일이 있고, 대통령이 되었으면 대통령으로서 할 일이 있고,
선생님이 되었으면 선생님으로서 할 일이 있듯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교회로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될 가장 중요한 할일 - 사명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에 대해 월로크릭 교회의 빌 하이블스 목사님은 단언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한 손으로는 교회공동체를 가족으로 세워 가는 일이요. 다른 한 손으로는,
예수님을 믿어야 할 불신자를 구원하는 일이다.“ 지금 세계교회는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이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였고, 그래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첫째는, 주님의 신부된 성도는 가족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두 가족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교회의 모든 조직의 구성원은 가족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앞으로 우리교회 교인이 될 모든 사람들은 우리의 확장된 가족입니다. 믿습니까?
중요한 두 번 째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영혼들을 찾아 구원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영혼들을 찾아 구원하는 일은, 우리 그리스도인들 모두의,
지상과제입니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사명, 복음 전도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 우리가 찾아야 할 영혼들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들어 있는 누가복음 15장에는 유명한 비유 셋이 나옵니다.
일찌기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는 “신구약 성경 가운데 단 한 장을 선택하라면,
나는 누가복음 15장을 선택하겠다. 왜냐하면 누가복음 15장 말씀만 있으면,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정확히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누가복음 15장 말씀에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잃은 양의 비유, 잃은 돈의 비유,
잃은 아들의 비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잃은 양은 무지해서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잃은 돈은 환경 때문에 잃어버렸습니다. 잃은 아들은 자기 판단에 집을 나갔습니다.
공통된 점은 모두 “잃은 자” - 곧 ‘하나님을 배신하고 떠난 자’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떠난 자가 돌아오면, 그때 봐서 용서를 결정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이미 용서해 놓고 기다리시는, 아버지시라는 것입니다.
자녀들을 양육하다 보면, 어느 날부턴가 자녀들이 부모의 속을 썩이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한 번 두 번 반복되면 부모는 결심합니다. “내가 다시는 용서하지 않겠다.”
그러나 용서하지 않기에는 너무나 큰 사랑이 이미 부모의 가슴속에는 있습니다.
이미 용서해 놓고 기다리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우리 하나님도 그런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늘 손해만 보시는 하나님의 짝사랑 이야기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잃은 양 한 마리 찾았습니다. 동리 사람들을 다 불러다 놓고,
잔치를 벌입니다. 바보 같은 양 한 마리 찾아놓고 멀쩡한 양 몇 마리 죽였습니다.
이런 손해를 보는 장사가 어디 있습니까? 동전 하나 찾아놓고 벗들과 잔치를 합니다.
동전 하나 놓고 동전 몇 닢은 사용했을 겁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영혼을 찾는 일,
복음을 위하여 헌신하는 일, 신앙생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주판알 굴려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손익계산을 따질 일도 아닙니다. 전자계산기 두드려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중요한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는데, 온 천하에 사랑할 대상이라고는,
나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나를 사랑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은 우리가, 이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가출한 청소년을 상담하면서, 탕자 비유를 들어 설명했습니다.
이제라도 아버지에게 돌아가면, 새 신발을 사주고, 금가락지를 끼워주고,
송아지를 잡아 환영해 주실 것이라고, 설득해서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몇 주 후, 목사님이 그 소년을 만났습니다. “너 아버지에게로 돌아갔구나.” “예.”
“그래, 아버지가 신발을 사 주시든?” “아니요. 발바닥이 터지도록 맞았는데요.”
“아버지가 금가락지는 끼워주셨겠지?” “아니요. 내 지갑까지도 다 빼앗겼는데요.”
“송아지는 잡아 주셨니.” “아니요. 나를 잡아 송아지에게 먹이려고 하시던데요.”
인간의 사랑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사랑엔 한계도 끝도 제한도 없습니다.
그래서 내 모든 허물보다 하나님의 사랑은 더 크고, 내 실수보다 하나님의 용서는,
더 크고, 내가 지은 모든 죄악보다도, 하나님의 구속의 보자기는 더 큽니다.
아들이 집을 나갈 때와는 달리 거지꼴하고 터덜터덜 힘없이 걸어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한눈에 그 아들이 자기 아들임을 알아보고 달려 오셨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자식인 아들이 아버지를 불렀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집을 나간 아들이 아버지를 먼저 알아보고서, 달려왔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먼저 아들을 알아보았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먼저 불러주셨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의 눈이, 아들의 회개보다 빨랐습니다.
하나님의 용서의 가슴이, 달려오는 우리의 발걸음보다 더 빠름을 기억하십시오.
아버지는 모든 것을 보고 계셨습니다. 자식의 실패와 고통으로 지새우고 있는,
수많은 밤을 아버지의 눈은 보고 있었습니다. 거리에서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방황하던 아들을 아버지의 눈은 뒤쫓고 있었습니다. 돼지우리에 주저앉아서,
자기의 신세를 한탄하며 절망에 빠졌던 그 모습을 아버지는 보고 계셨습니다.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야지, 아니야 돌아가도 아버지가 용서하시지 아니 할거야.”
사랑하는 아들의 망설이는 모습을, 충혈 된 눈과 굶주린 창자를 보고 계셨습니다.
이 사랑은 인류전체를 향한 사랑이 아니라, 우리 한 사람 각자를 향한 사랑입니다.
동전을 찾습니다. 돈을 찾을 때까지, 끝까지 찾는 것이 여인의 마음입니다.
잃은 양을 찾아 나섰습니다. 내가 아침저녁으로 이름을 부르던 바로 그 양,
상처났을 때 어루만져 주던 그 양, 젖을 짜던 그 양을 찾을 때까지 찾습니다.
아들 하나가 집을 나갔습니다. 그러자 고아원에서 나이가 비슷한 아이 데려다 놓고,
이제 됐다. 그러면서 웃을 수 없는 게 부모의 마음입니다. 내 핏줄을 타고난 그 아들,
옹아리를 하고, 걸음마를 할 때, 내게 기쁨을 주던 그 친 아들을 찾을 때까지,
대문을 걸어 잠글 수 없어, 24시간 항상 열어놓는 게 바로 부모의 마음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얼마나 귀하게 사랑하시는지, 우리 예수님은,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생명과 우리를 맞바꾸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 피로 산, 잃었다가 찾은 양이 바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들입니다. 믿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입니까? 교회가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
교회가 복음을 위하여 헌신하는 일에, 영혼을 건지는 일에, 교회의 모든 조직과,
우리교회의 모든 사역과 프로그램은 집중시켜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 정신이요.
복음적인 목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의 심장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찬양하잖아요. “주의 심장 가지고 이제 우리 일어나,
주 따르게 하소서.“ ”구원함을 얻은 기쁨 세상에서 제일이라.“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세 비유의 공통단어가 있습니다. "휴레카. I found it.
내가 찾았다.” 하는 단어입니다. 성경이 기록될 당시 ‘휴레카. I found it’ 이라는,
단어는 너무나 유명한 단어였습니다. 어떤 임금이 순금 왕관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이 순금 왕관이 진짜 순금인지 아닌지 무게와 부피를 정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르키메데스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아르키메데스가 너무 골치가 아파서,
세라큐스 공중목욕탕에 갔습니다. 물이 철렁 철렁 흘러넘치고 있는데 사람들이,
마침 아무도 없습니다. 풍덩! 몸을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물이 출렁하고 넘칩니다.
“아! 물이 흘러넘친 만큼 부피가 되겠구나. 그만큼 무게가 가벼워지는 것이구나.”
“I found it. 휴레카! 휴레카!” 그는 옷을 입는 것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길거리로,
뛰쳐나가 “휴레카! 휴레카! - 내가 찾았다. 네가 찾았다.” 고 외치고 다녔습니다.
바로 이 유명한 단어를 오늘 본문 말씀에 기록함으로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다.
이것이 먼저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인 우리 그리스도인의 마음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교회가 추구해야 할 방향이라.“ 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예수 복음을 위해 살아가기로 다짐하십니까?
이제 예수님을 위해 살기로, 이제 예수님 때문에 행복하기로 작정하십니까?
이제 예수님과 더불어서 살아가다가, 예수님과 함께 죽기로 각오하십니까?
오늘날 현대교회에 주어진 지상과제, 우리교회에 주어진 지상과제도 분명해졌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영혼들을 찾아 구원하는 일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지상과제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영혼들을 찾아내서 구원하는 일입니다.
간구하는 마음으로 선포합니다. 한없이 부족한 이 종을 통하여, 여러분을 통하여,
우리교회를 통하여, 치유의 역사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영혼들을 바라보는 눈이 열려가고 있습니다. 주님이 원하는 교회로 세우기 위해,
함께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이 일을 통해 앞으로 더욱 크게 우리교회가 쓰임,
받게 될 줄로 믿습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로 발돋음 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나아가 지역을 살리고, 한국을 살리고, 세계를 살리는 교회가 될 줄 믿고 선포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잃어버린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던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는 우리가 예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서 찾아야 할,
잃어버린 영혼들이 있습니다. 그 영혼들을 생각하며, 찾아가 복음전하기를 다짐하면서,
함께 “주여! 주여! 주여!” 하고 세 번, 손을 들고 외친 후 기도하겠습니다. / 통성기도
+ 마무리 기도 /
+ 다함께 찬양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