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부터 서둘러야 했다. 어머니와 오붓한 시간을 보내기엔 복잡한 휴일보다는 평일이 좋겠다는 생각에서 잡은 일정이다.
부처님오신날이면 매년 어머니와 문경 봉암사를 찾았지만, 올해는 그러질 못해 사뭇 마음에 걸렸다. 시간이 더 지나기 전에 갔다 와야 한다고 마음먹은 일, 어머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선뜻 따라나섰다.
제법 볕이 따사로운 5월, 어머니는 진청색 블라우스에 접이식 양산과 작은 손가방을 들고 차에 올랐다. 차가 도심을 벗어나자 마음이 앞서 가속페달을 힘껏 밟았다. 모내기가 한창인 들판이 펼쳐졌다. 평생 농사를 업으로 살아오신 어머니에겐 낯설지 않은 풍경이지만 아련한 추억이 된 지 오래다. 아들과 단둘이 하는 나들이에 소녀 같은 설렘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 그저 고맙고 한편으론 미안할 뿐이다.
얼마를 달렸을까. 도로 표지판에 고딕체로 쓴 ‘부석사’가 보이자 어머니 얼굴엔 이내 생기가 돌았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에 왔다는 기대와 설렘이 묻어났다. 부석사(浮石寺)는 신라 문무왕 16년(676년) 의상대사가 창건한 화엄종찰이다. 한 시간 이상 달려오는 동안 무료할 법도 하건만 모처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매표소로 가는 길 한 쪽에는 갖가지 농산물을 파는 좌판이 늘어서있다. 파는 이는 7,80 나이 지긋한 할머니들이다. 어머니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좌판으로 다가가더니 “이건 무슨 나물이기에 이렇게 좋아”라고 말을 건넨다. 그러자 한 할머니는 직접 채취한 산나물이라고 응대하는 모양이 절친 대하듯 살갑게 느껴졌다.
어머니와 산나물은 인연이 깊다. 어머니는 마흔일곱에 남편을 여의며 힘든 삶을 살았다. 여남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시골에서 논밭뙈기 하나 없는 곤궁한 살림살이를 건사하기 위해 봄이면 문경새재로 산나물을 채취하러 다녔다. 나물은 삶아 햇볕에 말려 두고두고 먹거리로 활용했다. 이웃들에게 나눠줄 만치 인심도 후했다.
매표소에서 시작된 비탈길은 완만하게 일주문까지 닿아있다. 하늘을 찌를 듯 치솟은 1킬로미터 남짓한 은행나무 가로수 숲길을 두고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쓴 유흥준은 ‘조선땅 최고의 명상로’라고 말했다. 일주문을 거쳐 천왕문에 이르는 돌 반, 흙 반의 비탈길을 쉬엄쉬엄 오르면 요사채를 거쳐 범종루, 안양루를 지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인 국보 제 18호 무량수전과 만난다. 아홉 단의 석축 돌계단을 넘어야 한다.
이를 어쩌랴. 여든을 훌쩍 넘긴 어머니에겐 힘든 길임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초행길이라 비탈길의 경사를 제대로 가늠하지 못한 걸 자책했다. 어머니는 절 입구부터 연해 있는 가파른 길을 못내 힘들어하면서도 한 발짝씩 걸음을 옮겼다. 지나온 생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내가 너희 칠남매를 어떻게 키웠는지 잘 모르겠다.”
어머니는 곧잘 무용담처럼 이야기했다. 사는 게 너무 힘들고 고달파 멀리 도망이라도 가고 싶은 날이 많았노라고. 그럴 때마다 어린 자식들이 눈에 밟혀 차마 떠나지 못했노라고 토로할 때는 지난한 삶을 이겨낸 어머니가 들풀 같다고 생각했다.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 들풀은 가꾸지 않아도 저절로 나서 자라는 하찮은 식물로 여겨지지만 산천에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이기도 하다. 불편한 무릎으로 유독 많은 돌계단을 하나씩 밟고 올라가는 어머니의 허리 굽은 뒷모습이 유독 작아 보였지만, 앉았다 일어서는 견딤의 순간은 온갖 풍상을 견뎌낸 들풀을 닮았다.
어머니는 생전 처음으로 이날 영주를 찾았다. 사찰을 그리 오래 다녔음에도 부석사는 처음이라고 했다. 젊어서는 살아가는 게 힘들어서, 나이 들어서는 몸이 아파 여행다운 여행을 다니지 못했다. 힘이 들어도 힘들단 내색을 하지 못하는 속앓이를 누가 알까. 가끔 사진 찍는다고 포즈를 취하라고 하면 기꺼이 웃으며 적극적으로 임하는 모습이 새삼 놀라울 따름이다.
부석사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산사 7개 중 한 곳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집으로 꼽힌다. 어머니는 오랫동안 상주 남장사(南長寺)에 적(籍)을 두고 치성을 올렸다. 신라 시대에 창건된 고찰이다. 또 오랫동안 마음을 둔 문경의 봉암사(鳳巖寺)는 부처님오신날에만 개방하는 금단의 수행도량으로 이름난 곳이다. 불심이 남다른 어머니는 지고한 역사를 가진 두 사찰에 다니는 것을 나름 뿌듯해했다. 이제 어머니의 마음 한 곳에 부석사가 새롭게 자리해 있겠지 생각해본다.
절을 내려오기 전 무량수전과 안양루를 배경으로 어머니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희끗한 머리에 한낮의 햇살이 살포시 내려앉자 얼굴은 온화한 미소로 만개했다. 무량수전에서 바라본 소백산의 낙조는 그 어느 곳의 낙조보다도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해가 지면 어김없이 새날이 밝아오듯이 어머니의 남은 생도 꽃길만 있기를 바랐다.
어느새 시간을 훌쩍 오후 2시를 넘겼다. 애초 인근 식당에서 점심을 하기로 했지만 서둘러 차를 몰아 가닿은 곳은 예천 용궁면의 한 식당이었다. 막창순대로 제법 유명한 집이다. 몇 해 전 여름휴가를 맞아 일곱남매가 함께 식사한 적이 있어 내려오는 길에 그 집을 찾은 것은 어머니의 희망사항이기도 했다.
뚝배기 순댓국에 밥을 말아 막창순대와 맛나게 먹었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했던가. 값나가는 놋그릇도, 밥맛을 오롯이 간직한 돌솥도 아닌 것이 제대로 된 음식 맛을 내는 것은 투박한 뚝배기가 가진 푸근함이 아닐까. 뚝배기처럼 볼품이 없어도 깊은 맛을 우려내는 그릇도 흔치 않다.
어머니 곁에서 맏이로 사는 것은 마치 뚝배기와 같다고 생각한다. 뚝배기는 그 생김이 투박하고 하찮아 귀한 상차림에는 쓰이지 않으나 일상에서는 흔히 상용하는 생활자기이다. 늘 제 쓰임에 묵묵히 소임을 다할 뿐 따로 신분 상승을 바라지 않는 평범함 그 자체이다.
내친김에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우리나라 사찰 7곳을 올해 어머니와 함께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답사하리라 다짐해본다.
□ 『에세이스트 2019년 11-12월호(통권 88호)』 신인상 당선 소감/ 김철희
누구나처럼 소싯적부터 꿈은 작가였다. 그 소망은 고등학교 때까지 한 번도 변하지 않았다. 꿈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아버지의 부재가 몰고 온 여파였다. 마흔일곱에 별이 된 아버지를 원망할 새도 없이 집안의 살림살이를 건사해야 하는 것은 오롯이 장남의 몫이었다. 생활정보지 회사를 14년 경영해 오면서 책을 한 권도 사지 않았던 것은 ‘나와의 약속’이었다. 결코 옆길로 가지 않겠다는 성공에 대한 집착이었다. 글을 쓴다는 것도 경제적인 여건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을 너무나 이른 나이에 깨달은 것이다.
참으로 오랫동안 기자(記者)라는 레테르를 달고 생활해왔다. 이 또한 순전히 경제적인 이유에서였다. 직업이 작가이기를 바라던 소년이 선택한 최상의 방법, 팩트를 생명으로 하는 기사를 줄곧 써오면서 문학의 길로 회귀할 수 있었던 것이 ‘수필’이었다. 내 깜냥으로는 소설가로 등단할 수 없다는 현실을 쿨하게 받아들이기도 한 것이다.
수필의 세계를 탐구하기 위해 창작아카데미를 찾았다. 그곳에서 만난 분들은 대개가 ‘많은 열매’를 갖고 계셨다. 자고로 글은 인생을 녹여내야 한다고들 하신다. 프랑스의 비평가 알바레스 교수는 수필은 지성을 바탕으로 한 정서적, 환상적 이미지의 문학이라고 정의했다. 수필은 창작이 아니라 인생이라는 바다를 항해하는 길임을 비로소 되새긴다. 사소한 일과 사물을 통해서 새로운 관념으로 남이 이루지 못한 의미화로 승화시키는 작업이 어디 아무나 하는 작업인가. 나는 지금 이 길에 막 들어서려고 한다.
아직은 미숙함이 묻어나는 글을 ‘당선작’이라는 격려로 손잡아 주신 심사위원님께 머리 숙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 또한 소중한 인연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사회에 겨자씨만 한 보탬이 되도록 독자의 마음에 정신적 그린벨트를 만들어주는 수필을 써야겠다는 각오를 다져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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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희
· 경북 상주 출생(53세)
· 아시아뉴스통신 대구경북 취재부장
· 상주문협 회원, 한국수필작가회 회원
· 수필과 지성 창작 아카데미 수료(26기)
· 민주평통 자문위원(19기)
< ‘에시이스트 2019년 11-12월호, 통권 88호(에세이스트사 편집실 간)’에서 옮겨 적음. (2019.12.03. 화룡이) >
첫댓글 에고.. 이 글을 죄다 타이핑 하셨네요
머리숙여 감사드리며 아울러 죄송함 전합니다.
신인상 이라는 문구가 쑥스럽긴 하지만 수필에서는 젊은 나이에 속한답니다.
여자분들은 30대부터 수필을 쓰는 분이 많지만 남자분들은 정년 퇴직 후 쓰는 분들이 많지요
어머니와 함께 한 잔잔한 설렘이 제게도 전해져 오는 듯 합니다.
희끗한 머리에 한낮의 햇살이 살포시 내려앉자 온화한 미소로 만개한 어머니의 얼굴이 한 번도 뵙지 않았지만 보이는 듯 합니다.
행복한 동행이 부럽습니다.
언젠가 꼭 저 또한 친정 엄마의 손을 잡고
함께 짧은 여행이라도 다녀오리라 나 자신과 약속해봅니다.
결코 옆길로 가지 않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킨 굳은 마음에 마음이 짠해옵니다.
수필은 창작이 아니라 인생이라는 바다를 항해하는 길이라는 말 제 가슴 속에도
깊이 새겨 두겠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쓰시길 응원합니다.
타이핑 하시느라 애쓰신 회장님께도 감사한 마음 전합니다.
'여행기'를 이렇게 착 갈앉은 분위기로도 쓸 수 있구나!' 하는 생각에 작가의 필력이 믿음을 줍니다.
작품의 전편에서 얼비치는 어머니에 대한 존경과 사랑 또한 감동으로 물결져 오네요.
앞으로도 좋은 작품들 자주 접할 수 있길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