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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달 한 마리를 보러 진주까지 갈 줄이야. 서울에서 KTX로 3시간 반 거리, 경남 진주에는 특별한 수달 ‘하모’가 산다. 진주시에서 캐릭터 공모전을 통해 뽑은 새로운 마스코트로 진주 남강과 진양호에 서식하는 수달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머리 위에 얹은 앙증맞은 조개껍데기와 커다란 ‘진주’ 목걸이가 포인트. “역대 지방자치단체 캐릭터 중 제일 귀엽다”는 평과 함께 2만5000명 선착순으로 무료 배포한 ‘하모’ 카카오톡 이모티콘은 20분 만에 매진됐고, 진주시청에 ‘돈 내고 살 테니 제발 이모티콘을 팔아 달라’ ’하모 인형 등 굿즈를 만들어 달라’는 요청이 쇄도했다.
진주 금산면 금호지에 대형 공공미술작품 '하모'가 전시돼 있다. 진주시의 새로운 마스코트 '하모'와 사진을 찍으려는 관광객이 늘자 전시 기한을 10월 말까지로 연장했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물의 도시에 뜬 수달 ‘하모’
서울 잠실 석촌호수 위에 떴던 공공 미술작품 러버덕(rubber duck)처럼, 진주 금산면 금호지에 가면 높이 19m, 너비 14m의 대형 ‘하모’ 캐릭터를 만날 수 있다. 전국 곳곳에서 관광객이 모여들자 7월까지 예정됐던 전시를 10월 말까지 연장했다. 금호지를 가로지르는 소망교에서 ‘하모’와 사진을 찍고 소나무가 우거진 금호지 둘레길을 한 바퀴 걸었다. 저수지를 따라 굴곡이 진 금호지 둘레길은 총길이 5㎞로 1시간 남짓 걸리는 평탄한 산책 코스. 직박구리, 무당개구리, 붉은머리오목눈이 등이 사는 금호지 생태공원과 놀이터가 있어 아이들이 뛰놀기에도 좋다.
금호지에서 바라보는 월아산 일출은 진주 8경 중 하나. 월아산의 장군대봉과 국사봉 사이로 동그란 해가 떠올라 금호지가 붉은빛으로 물드는 풍경을 볼 수 있다. 해돋이를 보러 온 사람들은 청룡의 기를 함께 받아간다고 하는데, 이는 금호지에 얽힌 설화와 관련 있다. 옛날 옛적 황룡과 청룡이 싸움을 벌이다 땅에 떨어진 청룡의 꼬리에 쓸려 생긴 큰 못이 금호지라는 것. 금호지 둘레길과 생태공원 곳곳에 그려진 청룡 캐릭터를 발견할 수 있다.
진양호 호반 전망대에 오르면 맑은 호수 뒤로 지리산 풍경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하모’는 금호지에 있지만, 진짜 수달은 진주 진양호와 남강 일원에 주로 서식한다. 특히 진양호에는 수달뿐 아니라 깨끗한 물에서만 산다는 쉬리, 꺽지 같은 물고기가 산다. 진양호 호반 전망대에 오르면 어마어마한 규모에 감탄부터 나온다. 진양호는 1970년 남강을 막아 남강댐을 만들면서 생긴 인공 호수로 면적 29.4㎢에 저수량이 3억t이 넘는다. 호수 뒤로는 지리산 천왕봉, 제석봉, 노고단과 봉명산, 금오산, 망운산까지 수많은 산봉우리가 첩첩이 솟아있다. 멀리 있는 봉우리는 물안개 때문에 음영이 짙게 져 한 폭의 수묵화 같은 풍경을 만들어낸다. 드라마 ‘60일 지정생존자’에서 급작스러운 테러로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주인공(지진희)이 고민에 빠져 노을을 바라보는 장면도 진양호 전망대에서 촬영했다. 저녁노을이 질 무렵 진양호를 찾는다면 진양호를 끼고 도는 일주 도로를 차나 자전거를 타고 한 바퀴 돌아봐도 좋다.
◇무기 마니아라면 진주박물관으로
남강을 따라가다 보면 진주의 대표 문화재인 진주성 촉석루가 보인다. 진주성(입장료 2000원)에 들어가 남강을 바라보며 오른쪽으로 걷다 보면 국립진주박물관(월요일 휴관)을 만난다. 한국 건축 1세대 거장인 김수근(1931~1986)이 설계한 국립진주박물관은 주변 경관을 따라 낮게 지은 지붕이 인상적이다. 지붕 여러 겹을 층층이 겹쳐 얹은 듯한 형태로 우리나라 전통 탑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진주성 안에 위치한 국립진주박물관. 조선 최초의 시한폭탄 '비격진천뢰' 등 국보급 무기를 전시해 '밀리터리 덕후'들의 눈길을 끈다. 오른쪽은 조선 중기에 제작된 서양식 청동제 화포 '불랑기'.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국립진주박물관
1984년에 개관 후 1998년 임진왜란 특화 박물관으로 단장한 국립진주박물관은 문화재 중에서도 국보급 무기들이 집대성돼 있다. 명나라, 조선, 왜군의 무기들을 한번에 비교할 수 있어 ‘밀리터리 덕후(군사 마니아)’라면 눈이 반짝할 만하다. 임진왜란에서 큰 위력을 발휘했던 총통, 천둥 같은 소리를 내며 날아가는 조선 최초의 시한폭탄 ‘비격진천뢰’,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에서 좀비들을 죽일 때 썼던 화약 무기 ‘오연자포’ 등을 전시하고 있다. 가상으로 무기를 조립하고 완성해볼 수 있는 ‘전통 무기 만들기’ 스크린과 5~10분 내외로 임진왜란의 역사를 담은 영화를 상영하는 영상관도 인기다. 손은주 학예사는 “박물관에서 조선의 무기들을 소개하는 유튜브 채널 ‘화력조선’을 운영하고 있는데, 유튜브를 보고 찾아오시는 ‘밀덕(밀리터리 덕후)’들도 꽤 있다”고 했다.
남강의 지류인 영천강 산책로와 이어져 있는 진주시립이성자미술관(입장료 2000원)도 온라인 예약 후 관람이 가능하다. 한국 최초 여성 추상화가인 이성자(1918~2009) 화백은 남편과 이혼 후 세 아이를 남겨두고 서른셋의 나이에 프랑스로 떠나 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미술관의 규모는 크지 않지만 화사하고 부드러운 색채에 한국적인 미를 담은 추상화가 고즈넉한 도시 진주와 잘 어울린다.
'수복빵집'에서 맛볼 수 있는 팥 소스를 부은 말랑말랑한 찐빵과 옛날식 팥빙수.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70년 넘은 노포로 ‘빵지순례’
진주를 즐기는 또 다른 방법은 오랜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노포 탐방이다. 70년 넘게 한자리를 지켜온 수복빵집은 전국 유명 빵집을 방문해 인증하는 ‘빵지순례(빵+성지순례)’의 필수 코스 중 하나다. 투박한 간판에 나무 발로 가려진 문을 열고 들어가면, 체리색 나무 탁자마다 보리차가 담긴 주전자가 놓여 있다. 자그마한 찐빵(3000원)에 걸쭉한 팥 소스를 부어주는데, 팥이 과하게 달지 않고 은은하게 계피 향이 난다. 여름철 인기 메뉴 팥빙수(6000원)에도 수정과를 부어 계피 맛이 진하게 퍼진다. 다른 토핑도 없이 얼음에 팥만 올렸을 뿐인데 보기 좋게 쌓아올린 과일 빙수들과는 다른 투박한 멋이 느껴졌다.
3대째 진주비빔밥을 팔고 있는 '천황식당'. 낡은 지붕과 간판에서 세월의 흔적이 느껴진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3대째 90년 넘게 이어온 노포 천황식당도 유명하다. 일곱 가지 색상의 아름다운 꽃 모양으로 ‘칠보화반’이라 불리는 진주비빔밥(1만원)을 맛볼 수 있는 곳. 밥 위에 소고기 육회를 올리고 선짓국을 곁들이는 것이 특징이다. 낡은 목조 기와집 안을 들어서면 재래식 메주로 빚은 간장, 고추장 등 장독대가 마당을 메우고 있다. 1982년 문을 연 진주 최초의 카페 다원은 저녁 7시부터 문을 연다. 오래된 LP판이 벽면을 가득 메운 공간에서 알코올 램프와 유리구를 이용해 커피를 추출하는 사이폰 커피(5000원)를 즐길 수 있다.
◇철길 옆 동네에서 커피 한잔
여행에서 만난 진주 시민들은 “작은 도시라 별거 없지예” 하다가도 말을 이어나가다 보면 “양반의 도시” ”문화·예술의 도시“ ”물과 공기가 깨끗한 청정 도시”라는 자부심을 드러냈다. 예로부터 비옥한 토지에 지리산, 남해안과 가까운 위치 덕분에 각종 곡물과 해산물, 임산물이 모여들었다. 남강을 따라 돈과 음식과 사람이 모여들며 예술과 풍류의 도시로도 이름났다.
그래서일까. 서울 못지않게 세련된 감각의 카페나 식당들이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을지로 거리를 걷다 뜻밖의 곳에서 마주치는 가게들처럼 구도심의 오래된 건물이나 빈 주택을 개조한 젊은 카페들이 하나둘 늘고 있다. 철길이 지나가는 낙후된 동네였던 망경동은 이런 가게들과 함께 젊은 층이 유입되면서 마을 분위기가 한층 밝아졌다.
망경동의 카페 은안재는 1954년에 지어진 한옥 주택을 개조해 만들었다. ‘은안재’는 은혜롭고 편안한 집이라는 뜻. ‘ㅁ’자 형태의 한옥 가운데 동백나무, 에메랄드골드 나무가 심겨진 작은 마당이 있고, 마루에 걸터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며 커피를 마실 수 있다. 남은숙(32) 사장은 “조용하고 정감 가는 동네에 낡은 집이 주는 평안함이 좋아 자리를 잡게 됐다”면서 “최근에 철길과 구도심 재생 프로젝트와 맞물려 젊은 사장님들이 많이 들어오고 있다”고 했다.
구도심을 걷다 보면 우뚝 솟은 옛날 목욕탕 굴뚝들을 마주치게 된다. 루시다는 목욕탕 건물을 고쳐서 만든 카페 겸 갤러리. 사진전이 열리는 전시실에는 목욕탕 천장 타일이 그대로 남아있다. 갤러리의 이수진 관장은 “남강 근처다 보니 옛날부터 목욕탕이 많았는데 그중 하나인 진주 최초의 목욕탕 ‘해운탕’을 개조해 카페를 만들었다”면서 “굴뚝도 아까워서 헐지 못하고 그대로 남겨놓고, 목욕탕 타일도 밝은 조명과 잘 어우러져 전시에 활용하고 있다”고 했다.
시원한 바람이 부는 남가람공원의 대나무숲 산책로. 대나무잎 사이로 촉석루와 진주성이 보인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망경동의 아기자기한 골목을 둘러봤다면 맞은편으로 촉석루가 보이는 남가람공원을 걸어보자. 강변을 따라 대나무숲 산책로를 조성해놔서 바람에 대나무잎이 스치는 소리를 들으며 산책할 수 있다. 밤이 되면 은은한 조명으로 빛나는 촉석루와 진주성을 볼 수 있는 야경 명소이기도 하다.
해 질 무렵, 남강을 따라 남가람공원을 걸으면 맞은편 촉석루와 진주성의 야경을 즐길 수 있다. 곳곳에 벤치를 마련해 놓아 잠시 쉬며 '물멍(물 보면서 멍 때리기)'하기 좋다. /백수진 기자
뜨거운 인기 덕분인지 공원이나 카페 안내문에도 마스크를 쓴 ‘하모’가 등장한다. 진주시는 ‘하모’를 소개하며 “코로나로 힘든 일상을 보내는 시민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이름도 ‘그럼!’ ’당연하지’라는 긍정의 뜻이 담긴 진주 사투리 ‘하모’에서 따왔다. 늦여름, 진주를 찾아 ‘물멍(물 보며 멍 때리기)’ 하기 좋은 남강과 진양호를 걸어보면 어떨까. 어느새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으며 하모를 따라 외치게 될지 모른다. “하모, 다 잘될 끼다!”
“냉면에 와 겨자를?” 콩국수·밀면까지 육수가 진국인 이 도시의 ‘면면’진주 누들로드를 아십니까?
“핫도그도 아이고 와 냉면에 겨자를 뿌려 먹습니꺼.”
택시를 타고 냉면집에 가 달랬더니 냉면학개론이 펼쳐졌다. “북에는 평양냉면, 남에는 진주냉면”이라 할 정도로 진주냉면은 예로부터 유서 깊은 음식이었다. 평양처럼 진주에도 교방 문화가 성행하면서 양반들이 해장 음식으로 즐겨 먹던 냉면이 발달했다고 한다. 평양냉면이 소고기 육수를 주로 쓴다면 진주냉면은 해산물로 육수를 내고, 계란 지단과 육전 등 고명을 푸짐하게 올려낸다.
계란 지단과 육전, 배, 오이 고명을 듬뿍 올린 '황포냉면'의 진주냉면.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1945년 부산식육식당에서 출발해 한동안 명맥이 끊겼던 진주냉면을 되살린 하연옥이 가장 유명하지만 현지 주민들은 황포냉면도 자주 찾는다고 했다. 계란 물을 입혀 부친 육전, 아삭아삭한 배, 계란 지단 등 듬뿍 넣은 고명에 눈부터 즐겁다. “식초와 겨자 양념을 넣지 말고 본연의 맛을 즐겨달라”는 안내문에서 육수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처음 마셨을 땐 심심하게 느껴지지만 맑고 담백한 맛 때문에 자꾸 들이켜게 된다. ‘특미냉면’을 시키면 명태회 무침이 올라간 비빔냉면과 물냉면을 함께 즐길 수 있다. 물냉면 9000원, 특미냉면 1만원, 소고기 육전 1만2000원.
50년 전통의 진주냉콩국수를 맛보려면 시간을 잘 맞춰야 한다. 오전 11시부터 재료가 다 떨어지기 전까지만 콩국수(9000원)를 판매한다. 오이나 깨 같은 고명도 없이 노란 면과 콩물만 내놓는데, 강원도에서 나는 황태콩을 갈아 만든 고소하고 진한 콩물이 일품이다. 새콤달콤한 맛을 느끼고 싶다면 한들밀면을 추천한다. 한약재와 계피, 마늘 등을 달여 만든 육수는 깊은 맛을 내고, 즉석에서 뽑는 면은 쫄깃하면서 부드럽다. 밀면 6000원, 비빔밀면 7000원.
출처: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