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에 대하여
-신대원 신부-
주님의 친구인 라자로가 병이 들어서 앓다가 마침내 죽었습니다.
그는 죽음마저도 없애시는 주님을 만나지도 못한 채 죽음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라자로의 죽음을 보면서 울고불고 생난리를 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결코 당신의 친구를 버려두시는 분이 아닙니다. 죽음에 묶인
사람을 외면해 버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죽음 속에 머물러 있는
라자로를 불러내시고, 사람들에게 “그를 풀어 주어 걸어가게 하여라.”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라자로를 죽음에서 해방시키시고 자유의 몸으로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해방은 사람을 자유인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고, 자유는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은총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유는 방종이 아닙니다. 자유는 사람들이 진리, 곧 참된 행복만을 누리도록
어둠, 거짓, 죽음, 사기, 술수 등에서 풀어주는 ‘참된 해방’의 다른 이름입니다.
또 이 해방과 자유는 ‘사랑’의 다른 표현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신 이유이고 목적이며, 이것이 교회가 걸어가야 할 최고의
사명입니다. 우리는 오늘 누구에게 자유를 베풀고, 누구를 해방시켜 주었으며,
누구에게 사랑을 베풀었습니까? 혹시 자유를 준다고 하면서 오히려
‘옭아매려고’ 하지는 않았는지요?
단죄하지 않는 세상
- 김정택 목사-
지금 예수님은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위기에 처했습니다. 성경과 모세의 율법 문구 하나하나에 통달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만나 그들의 시험에 빠질 수밖에 없는 긴박한 상황에 처한 것입니다. 그들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자를 예수님 앞에 세우고 모세의 율법에 따른 판단을 내리라고 독촉합니다.
예수님은 잠깐 시간을 벌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예수님은 몸을 굽히고 땅에 글을 썼습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사람은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를 범하였다.” (마태 5, 27 – 28) 라고 썼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누가 음욕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 그러니 음욕은 처벌의 문제가 절대 될 수 없다.’ 고 말입니다. 그러고는 정리가 되자 단호하게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고 고요하면서도 힘 있는 말씀을 던졌습니다.
지금 세계적으로 선진국이라는 나라에서는 간통죄를 문제 삼지 않는 것이 추세이지만 종교나 관습의 문제라고 하면서 처벌하는 나라들도 있습니다. 결국 힘없는 사람, 대체로 여성들이 억울하게 처벌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이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고 하신 말씀이야말로 이 사건을 처벌의 문제로만 바라보지 않겠다는 최초의 선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음욕을 그대로 방치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여자한테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사람이 음욕을 관리하고자 하면 할 수 있다는 것이겠지요. 저는 내면보기 수련을 잠깐 한 적이 있습니다. 내 마음에서 음욕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한 자연스럽게 왔다가 사라지는 것도 보게 됩니다. 그러다보면 음욕에서 자유로운 나를 보게 됩니다.
완전한 분풀이, 용서
-김찬선신부-
신문에 나온 얘기들입니다.
“실직한 아들이 왜 머리에 물을 들였냐는 아버지의 말에 화가 나서
아버지 머리를 목검으로 때려 숨지게 하고 시신을 불태웠다.”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술집 앞을 지나던 30대 남자를
그냥 때리고 흉기로 목을 찔렀다.”
“2010년 대검찰청 범죄 분석에 따르면 전체 살인 중
2005년 32%에 불과하던 우발적 살인이 2010년 48%로 늘어났고,
전체 폭력 중 우발적 폭행이 41%, 우발적 치상은 76%였다.”
세상이 참 狂暴해져간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아무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고
별것 아닌 것을 가지고 아무하고나 싸우려 달려듭니다.
분노의 기운이 하늘을 찌를 정도로 안에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수평 폭력이란 이론이 있습니다.
분노가 생기고, 그것이 해소되지 않은 채 쌓이면 폭력으로 바뀌는데
그 분노가 안으로 향하면 자살로 나타나고
밖으로 향하면 폭행이나 살인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밖으로 향하는 폭력이
자신을 억압하는 근원을 향하여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보다 약하거나 비슷한 사람에게 표출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이론에 너무도 동의합니다.
우리말에 분풀이라는 것이 있는데
남산에서 뺨맞고 한강에서 성내는 것이나,
사람에게 혼나고 돌을 걷어차거나 동물을 학대하는 것이나,
시어머니한테 야단맞고 아이들한테 화를 내거나,
회사에서 꾸지람 듣고 술 먹고 들어와서는
아내한테 폭력을 행사하는 것 등이 다 이런 폭력입니다.
그런데 이 분노가 집단적으로 표출될 수도 있습니다.
사회 전체적으로 분노가 쌓이면 이렇게 되는 것이지요.
집단 히스테리의 일종인 셈이지요.
자신들의 고통과 불행에 대한 불만과 분노를
사회적 약자에게 함께 퍼붓는 것입니다.
제가 볼 때 오늘 복음의 간음한 여인이나 예수님은
이런 집단적 히스테리의 희생자들이 만난 것입니다.
한 여인이 간음했다고 많은 사람이 죽이려고
그렇게 집단적으로 덤벼들 필요와 이유가 뭐 있습니까?
예수님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그렇게 열렬히 환호하던 사람들이 졸지에 죽이라고 외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로마의 압제 하에 있던 이스라엘을 구원하리라 믿었던 예수님이
그럴 의지가 없거나 힘이 없다고 판단되자
집단적인 환호가 집단적인 분노로 바뀐 것이지요.
분노의 근원에 해당하는 사회, 정치,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에게 향하는 분노를 예수님께 향하게 만든 것이고요.
아무튼 집단적 분노의 희생자들이 만났습니다.
여인의 죄는 분노보다 작아도 너무 작은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작은 죄를 죽음으로 묶으려고 하였는데
예수님은 그 죄를 죽음으로부터 풀어줍니다.
죽어야 할 죄가 아니라 용서받아야 할 죄입니다.
작은 죄로도 죽이려드는 분노가 아니라
큰 죄로도 사람을 죽게 할 수 없다는
주님의 그 용서가 죄를 죽음에서 풀어준 것입니다.
죽이려고 몰려들었던 이들은
죄 없는 사람부터 돌을 던지라는 말에 물러날 것이 아니라
끝까지 예수님께서 어떻게 죄인을 용서하셨는지 봐야 했습니다.
그래서 분노는 분풀이를 통해서 풀리는 것이 아니라
용서를 통해서 풀리는 체험을 했어야 했습니다.
분노는 자신을 불행케 한 사람들에 대한 깊은 차원의 용서,
그들에게 무력했던 자신에 대한 용서를 통해서만 풀리기 때문입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가 그린 '최후의 만찬'이라는 그림에는 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 빈치는 그림을 구상하면서 유다 이스카리옷을 어떻게 그릴까 생각하다가 자기가 제일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의 얼굴을 그려서 유다 이스카리옷을 삼았습니다. 그리고 통쾌한 마음까지 가졌지요.
그리고서는 예수님의 얼굴을 그리려고 했는데, 아무리 노력을 해도 그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이유가 무엇인가를 오랫동안 생각하다가 자기가 미워하여 유다 이스카리옷으로 그린 그 친구를 찾아갔답니다. 그리고서 그에게 사과를 했습니다.
“내가 사실 자네가 너무나 미워서 당신의 얼굴을 유다 이스카리옷의 얼굴로 그렸다네. 그런데 문제는 나머지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거야.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자네를 미워하는 마음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지. 그래서 깊이 뉘우치고 당신께 용서를 청하기 위해 이렇게 왔다네.”
이렇게 용서를 청하고 나서 그린 그림이 그 유명한 ‘최후의 만찬'입니다. 남을 미워하고 시기할 때는 위대한 창조적인 일을 또 그러한 작품도 나올 수가 없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너무나도 나약하고 부족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 따라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시 생각하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면서 보복해야 한다는 마음도 가득하게 됩니다.
이렇게 용서해야 한다는 마음과 보복해야 한다는 마음에 각각의 발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특히 보복해야 한다는 마음은 늪과 같기에 한번 빠지면 좀처럼 나오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용서해야 한다는 마음에서 발을 떼어버리는 순간, 늪과 같은 보복해야 한다는 마음에 푹 빠질 수밖에 없고 그래서 더욱 더 힘들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다는 것을 잘 아시는 주님께서는 우리가 용서하기를 원하실까요? 아니면 보복하기를 원하실까요? 비록 지금은 억울하고 힘들겠지만, 용서해야 더 큰 일을 할 수 있고 또한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어떻게든 용서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생명에 관한 부분은 하느님의 영역에만 있는 것이기에, 남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 역시 사람의 영역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역에 있음을 강조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도 간음한 여인을 향해 돌을 던지려는 유다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이제까지 용서의 마음과 보복의 마음 각각에 발을 딛고 있었다면, 보복의 마음 쪽에 있는 발을 떼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복의 마음은 늪과 같아서 점점 깊숙이 빠질 수밖에 없지만, 용서의 마음은 마른 땅과 같아서 그곳에 양발을 딛는 순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어느 땅에 양발을 딛겠습니까? 진정한 행복이 있는 곳은 바로 용서의 마음이 있는 곳입니다.
용서란 판단이라는 말과 정 반대의 표현이다. 판단하는 것 보다 쉬운 것은 없고, 용서하는 것 보다 어려운 것은 없다. 하지만 용서보다 더 큰 축복을 받는 것도 없다.(에머슨 이게릭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양승국신부-
<어처구니없는 사랑>
날씨가 풀리면서 겨울 내내 기다리고 있었던 낚시꾼들의 마음이 설레기 시작합니다. 목표하는 물고기를 낚기 위해서는 여러 조건이 필요합니다. 좋은 낚싯대, 좋은 장소, 적당한 물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좋은 미끼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역시 낚시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란 대어(大魚)를 낚기 위해 별의 별 방법을 다 동원합니다.
그들이 예수님 앞으로 끌고 온 여인은 바로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한 미끼였습니다. 더 이상 좋은 수 없는 미끼인 그 여인을 잡기 위해 그들은 아마도 몇날 며칠 밤을 지새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 앞에 내팽개쳐져 고개를 푹 떨어트리고 엎드려있던 여인, 참으로 가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치 사냥꾼 앞에 선 힘없는 한 마리 노루와 같습니다. 이제 남아있는 것은 죽음뿐입니다.
마치 노련한 파파라치들처럼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작전이었기에, 워낙 촘촘한 그물망에 걸린 그녀였기에 아무리 애를 써도 달아날 방법이 없었습니다. 꼼짝달싹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공개처형만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녀도 어쩔 수 없는 상황 앞에 그저 체념하고 있었습니다.
그 여인입장에서 봤을 때는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순간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향해 던지는 말씀 한번 들어보십시오. 정말 기가 막힌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살기등등했던 적대자들에게 그야말로 KO 펀치 한방을 날리시는 멋진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죽음의 올가미에 갇혀 꼼짝달싹 못하던 여인에게 생명을 되찾아주는 구원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 끝에 사람들은 한 명 한 명 떠나가고, 결국 텅 빈 성전 마당에는 예수님과 여인 단 둘만 남게 됩니다.
회심의 대표주자 아우구스티누스 성인께서는 이 순간에 대해서 참으로 아름답고 적절한 주석 하나를 남겨주셨습니다.
“모두가 다 빠져나가고 오직 둘만 남았다. 우리 모든 인간을 대표하는 비참한 여인과 하느님의 자비 둘만 남았다.”
그 순간은 죄인인 우리와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이 온전히 합일하는 은총의 순간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은 늘 느끼는 바이지만 무한정입니다. 너무나 무한정이어서 때로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너무나 엄청난 사랑입니다. 너무나 바보같은 사랑입니다.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사랑입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하느님의 사랑에 힘입어 여인이 살아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바보같은 사랑으로 인해 우리가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똑같은 말씀을 우리에게 반복하고 계십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겠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인정하라-전삼용신부-
성격유형검사, 즉 MBTI를 두어 번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성격 유형검사는 내 자신의 성격이 어떤 유형에 속하는지, 즉, 내성적인지 외향적인지, 직관적인지 통합적인지, 수동적인지 적극적인지 등의 유형을 나누어 검사하며 자신을 더 잘 알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학교나 수도원 등에서도 이 검사를 하지만 어떤 때는 이런 검사가 사람을 잘못 판단해버리게 만드는 위험성도 있습니다.
즉, 윗사람이 그 결과를 보고, ‘저 친구는 내향적이고 소극적이어서 대인관계도 좋지 않아!’라고 판단해버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검사의 본질적인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것입니다.
성격유형검사는 나 자신을 이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게 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즉, 전문가들에 의하면 내가 나 자신조차 이해하기 힘든데 하물며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입을 모읍니다.
한 예로, 사람들에게 해운대를 한 번 설명해보라고 하면 자세히는 아니더라도 한 번 갔던 사람들은 대충 설명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자기 자신입니다.
그러나 이탈리아 해변도시인 바리를 설명하라고 하면 그 곳에 가보지 못한 사람들은 좀처럼 어떤지 설명을 할 수 없습니다. 해운대와 비슷하게 해변이 있을 것은 짐작이 가지만 구체적으로 어떤지는 설명을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자기가 경험할 수 없는 다른 사람의 내면입니다.
따라서 전문가들은 사람을 이해하려하지 말고 ‘인정’하라고 합니다. 나와 같지 않음을 ‘인정’할 때 ‘저 사람은 왜 저래?’라는 말은 나올 수 없다고 합니다. 인정하면 ‘내가 이렇듯, 그 사람은 저런 것입니다.’
오늘 사람들은 간음한 여자를 예수님 앞으로 데려와서 돌을 던지려합니다. 율법대로 하면 당연히 돌을 던져야합니다. 그러나 사랑과 자비만을 외치는 예수님이 율법을 따르라고 하면 당신의 가르침 모두를 스스로 저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돌을 던지지 말라고 한다면 율법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 돌을 대신 맞아야 할 상황입니다.
예수님은 그저 바닥에 무엇인가 쓰십니다. 아마도 돌을 들고 있는 사람들의 죄를 바닥에 썼다 지웠다 하셨을 것입니다. 혹은 ‘너희들 죄부터 먼저 인정하여라.’라고 쓰셨는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예수님은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죄인인 것부터 인정하라.’라고 촉구하시는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당신의 편지에서 ‘누구든 죄 없다고 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라고 씁니다. 예수님과 성모님을 제외하고 죄 없던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다른 사람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는 것은, 즉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바로 내가 죄가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란 뜻입니다.
오늘, 긴~ 독서, 즉 수산나의 이야기에서 수산나를 탐하려던 두 노인이 자신들의 계획이 통하지 않자 수산나를 재판에 끌어내어 그녀에게 누명을 씌워 죽이려고 합니다. 나중에 다니엘이 그것을 해결하게 됩니다. 그 두 노인이 본인들의 죄를 먼저 인정했다면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들의 목숨도 부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는 말이 있습니다. 또 오십보백보란 말도 있습니다. 즉, 전쟁에서 오십 보 도망친 사람이 백보 도망친 사람을 나무란다는 뜻입니다.
먼저 내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깊이 묵상합시다. 그러면 저절로 다른 사람들이 하는 잘못들 앞에서도 너그러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너그러움으로 내 자신도 심판받게 될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그 기준으로 나도 하느님께 심판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마음이 생기기 시작하거든 주님의 이 말씀을 항상 기억합시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내 손에 쥔 돌
- 정명숙 수녀-
신문을 펼쳐들면 서로서로 고발하는 내용들로 가득합니다. 수많은
판단과 단죄의 내용들입니다. 서로의 잘못을 지적하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철저히 자기중심적입니다. 완고하고 경직되고 메마른
얼굴들이 정의의 수호자들처럼 펼쳐져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이들의 고발 내용은? 그 옛날 예수님께서도 다른 사람들을
죽이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
이 말씀으로 완고하기 이를 데 없는 그들의 마음 바다에, 예수님께서
거센 파문을 일으키십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단죄하면서 마치
정의로운 일을 한 것처럼 만족해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바라보도록
초대하십니다. 정직하게 자기의 진실과 직면하도록 하십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에 책임질 수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우리에게도 똑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손에 쥔 돌을 놓고 돌아서는 그들 마음에 일어나는 파문이 느껴집니다.
그 파문이 언제쯤이면 고요해질까 생각해봅니다.
내 안에서도 살며시 일고 있는 파문을 바라봅니다.
죄는 나이 현상?
-김찬선신부-
오늘 간음한 죄녀를 앞에 두고 벌이는
예수님과 고발자들의 실랑이를 보며
나이 현상에 대해서 생각해봤습니다.
죄 없는 사람부터 돌을 던지라 하시니
나이 든 사람부터 돌을 버리고 떠나갔다 했습니다.
이 얘기를 들을 때 우리는
유대 지도자들의 가증스러움이 탄로 남을 보고 통쾌해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얘기를 들으면서 어찌 통쾌해 할 수 있습니까?
이 얘기를 들으면서 자기를 반성하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통쾌해 할 수가 없습니다.
만일 통쾌해 한다면 우리는 유대 지도자만 못한 나입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그래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자기 죄를 봤습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죄를 많이 짖지요.
이것은 나이를 먹을수록 누적된 죄가 많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나이를 먹을수록 죄에 대해 무뎌지고 뻔뻔해지기에
죄의식 없이 죄를 많이 짓는다는 뜻입니다.
저의 경우 젊었을 때는 죄가 가시마냥 저를 콕콕 찔러
지금 생각하면 별 것 아닌 죄에도 너무 괴로워했습니다.
괴로워했을 뿐 아니라
죄지은 저를 용서치 못하고 학대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죄인인 저를 용서치 못함은 교만 때문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죄인인 저를 겸손하게 인정하고 용서하는 순간
저는 해방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것이
‘죄를 지을 수 있는 것 아니냐’하며
죄를 용인하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죄의 용서가 아니라 죄인의 용서이어야 하는데
저는 번번이 죄를 용서하고 있었고
죄인인 저를 용서함은
이제부터 다시는 죄 짓지 마라는 오늘 주님의 말씀처럼
죄에서 해방되어 새 삶을 살라는 것인데
저는 죄지은 김에 또 죄를 짓는 죄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깨끗한 곳에 함부로 쓰레기 버릴 수 없고
이미 지저분한 곳에 쉽게 쓰레기 버리는 듯이
죄를 용인하기 시작하니
금방 저는 죄의 쓰레기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지을 수 있다고 용인하는 것은
자기를 진정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자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가책의 고통을 피하는 대신 삶을 통째로 망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신경이 죽으면 통증이 없습니다.
신경이 죽으면 그러나
살이 썩어 들어가고 손이 불 속에 들어가도 모릅니다.
무감각이 고통에 대해서는 좋지요.
무감각은 그러나 기쁨도 뺏어 가고
행복도 뺏어 갑니다.
희망과 절망- 김혜경-
저는 특별히 여성주의자는 아니지만 오늘 복음을 묵상하자니 전부터 생각해 온 의문이 다시 고개를 듭니다. 잘났다는 율사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 단죄하는 장면에서 간음은 여자가 혼자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죄가 돌에 맞아 죽을 정도라면 적어도 상대가 된 남자한테도 어느 정도는 적용되어야 할 터인데 어째서 힘없는 여자만 끌고 와서 단죄하느냐는 것입니다.
마리아와 마르타의 일화나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나 예수님의 여성관은 율사들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간음한 여인을 구실로 주님까지 잡으려 드는 교활한 술수를 드러내는 그들을 간파한 주님은 참으로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래서 할 말을 잃고 바닥에 ‘너나 잘하세요.’라고 쓰지 않으셨을까 싶습니다. 그런데도 줄곧 물음을 던지는 염치없는 짓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주님의 대답은 예리합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오늘 복음에서 드러나는 예수님의 태도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단 한 사람도 책망하지 않으시는 자비로운 주님의 모습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율사들을 향한 서운했을 마음도, 여인에 대한 연민도, 가난한 백성에 대한 측은지심도 모두 그분의 인격 안에 녹아 있습니다. 주님의 눈에는 율사들도 똑같은 죄 많은 당신의 백성이었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자비로 비추시지만 그분께 대한 믿음이 우리 생활의 희망과 절망의 척도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인 것 같습니다. 은총의 생활은 그래서 필요한가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도 너를 단죄하는 않는다.”는 말씀이 죄로 물든 우리의 주눅 든 마음을 일으켜 세우는 듯합니다.
새벽을 열며
미국에 이민해서 살고 있는 한인 2세가 명문 대학인 콜롬비아대 의과대학에 지원했습니다. 이 학생은 워낙 공부를 잘해서 한국의 대학수학능력시험과 같은 SAT 시험에서도 만점을 받았지요. 더군다나 집안 형편도 부유해서 누구나 이 학생이 무난히 의과대학에 합격되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 학생에게 불합격 통지서가 날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통지서와 함께 다음과 같은 사유가 적혀서 왔다고 합니다.
“귀하의 성적은 아주 우수합니다. 가정형편이나 여러 조건들도 만족스럽습니다. 그런데 귀하의 서류 어디를 보아도 헌혈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남을 위해 헌혈한 경험도 없는 귀하가 어떻게 환자를 돌볼 수 있겠습니까? 귀하는 의사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이 글을 보다가 문득 하느님 나라를 지향하는 우리들의 조건은 과연 어떤 것일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리고 나의 지금 모습은 하느님 나라에 갈 수 있을까 싶더군요. 똑똑하다고 하늘 나라에 갈 수 있을까요? 집안 형편이 부유하다고? 능력과 재주가 많다고? 돈 많고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하느님 나라에 자신 있게 들어갈 수 있을까요?
아마도 이러한 자격을 가지고서는 “귀하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습니다.”라는 불합격 사유서를 받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나라는 이 세상의 판단 기준으로 평가되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맞게 사랑과 희생의 봉사를 철저하게 실천하는 사람들만이 환한 웃음과 함께 들어갈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들은 예수님에게 올가미를 씌우려는 예수님의 반대자들을 만납니다. 반대자들인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은 스스로 올바르다고 생각했고, 자기들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판단은 결코 올바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는 불합격 사유서를 받게 되는 행동이었지요.
예수님 시대에 유대인들의 사법기관인 산헤드린이라는 최고의회는 로마제국의 통치 밑에 있으면서 그들 자신이 직접 누구를 사형에 처하는 것을 금지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지도층은 율법을 어긴 죄인을 놓고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을 어긴 간음녀를 예수님께서 돌로 치는 사형에 처하라고 하면 민간인으로서 로마 행정령을 위반한 것이 되고, 반대로 풀어 주라고 하면 유대인으로서 율법을 어긴 셈이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라고 말씀하시지요. 그들은 돌을 도저히 던질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스스로 죄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율법에는 간음녀를 돌로 치기 전에 적어도 두 사람의 증인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증인도 없이 여인을 죄인으로 몰고 있으며, 그녀가 간음죄를 범했는지도 정확히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왜냐하면 간음을 혼자서는 할 수 없는데, 여인 한 사람만 죄인으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혹시 우리들도 남을 판단하고 단죄하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하지만 이 모습으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음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조건은 사랑과 용서 그리고 희생과 봉사의 나눔에 있습니다.
다른 이를 판단하려 할 때 생각합시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져라.”
빠다킹신부
자비하신 하느님
-전광진 신부-
예수님 시대 당시 유다는 로마총독이 모든 권한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유다의 권력자들은 사법권이 없었기에 율법을 어긴 사람을 처벌하려면
총독에게 고발해서 총독이 처벌하게 하였습니다. 유다의 권력자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올가미를 씌워 예수님을 죽이려는 빌미를 찾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예수님께 묻고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여자를 돌로 쳐 죽이라고 하면, 돌로 쳐 죽일 수 있는 권한이
로마 총독에게 있기 때문에 로마제국에 도전하는 것으로 고발되고,
돌로 쳐 죽이지 말라고 하면 유다의 율법을 어기는 것으로 고발되는
진퇴양난의 순간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참 지혜롭게 대답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러자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하나씩 자리를 떠납니다. 오늘 복음의 핵심은 모든 인간의 삶과
죽음의 권한이 하느님 손 안에 있고, 하느님은 우리를 용서하시는 자비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고,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용서와 자비’의 은총을 청해야겠습니다.
주위를 둘러보세요
-김영수 신부-
우리 삶에서 변화와 성장을 기대할 수 있는 계기는 아마도 ‘만남’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스승과 제자의 만남을 생각해 봅니다. 불가에서는 깨달음을 얻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것이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스승을 만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한계 가운데 하나는 가르침은 많아도 그 가르침을 실천하고 이끌어 주는 스승을 만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수영에 관한 이론을 100시간 들었다고 해서 수영을 잘하는 것은 아닙니다.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배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대 지식사회에서는 모든 것을 머리로만 배우려고 합니다.
만일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그들은 평생 어부와 세리로 살았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칠판을 갖다 놓고 교과서를 제자들 손에 쥐어주고 가르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국어·영어·수학을 가르치는 선생님은 많습니다. 그런데 배려·인내·용기·사랑·믿음·행복·만족·감사는 어디서 누구에게 배워야 할까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여인과 그 주위에 돌을 들고 서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 새로운 배움과 변화의 기회를 얻게 됩니다. 그전 같았으면 백 번이라도 돌을 던졌을 상황일 테지만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얻고 돌을 버릴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여인 또한 다시는 죄짓지 않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우리도 주위를 둘러보면 이렇게 가르쳐 주실 분이 있지 않을까요?
돌로 쳐라!
-오상선신부-
가끔
어떤 형제나 자매가
나에게 와서
<들었어?...거기 있잖아, 그 형제 말이야...
.... 하다던데... 웃기지도 않어...
지 꼬라지도 모르고, 아직도 정신 못차리고 있어...>
등의 말을 들을 때가 있다.
<그래?!> 하고 응답하고 말지만
씁쓸하기가 이루 말할 데가 없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도대체 누가 죄인이고 누가 죄인이 아니란 말인가?>
라는 질문을 던져주고 있다.
우리가 죄인이라고 단죄하는 사람이
수산나처럼 무고한 사람일 수 있고
우리가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의외로 흉악한 모리배들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간음하다 잡힌 여인처럼
그 누가봐도 죄인이라 단정할 수 있는 사람에게조차도
같은 죄인인 주제에 단죄할 수 없다고 가르치신다.
죄인이 죄인을 단죄한다는 것은
도토리 키재기일 뿐이 아닌가?
동병상린이라고
죄인이 죄인을 보면
그 죄를 함께 아파하고 위로해 주고
기도해 주어야 할텐데,
어찌된 일인지 우리네 인간들은
죄인이면서도 죄인을 바라보면
자기 꼬라지를 보는 것 같아서인지
몰아부쳐 완전히 매장시켜 버리고자 하는
지독히 악한 생각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인간은 죄인일 수밖에 없는가 보다.
성 프란치스코는
우리가 죄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이렇게 권고한다:
<하느님의 종은 죄 외에 어떤 일도 못마땅해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누가 어떤 죄를 지을 경우라도 하느님의 종은
이 죄를 보고 사랑이 아닌 다른 이유로
흥분하거나 분개하면 그 죄를 판단할 하느님의 권한을
자기 것으로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 때문에도 분개하거나 흥분하지 않는 하느님의 종은
진정코 아무 소유도 없이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리면서
자기에게는 아무것도 남겨 두지 않는 사람은 복됩니다.>
나는
혹 누구의 죄 때문에
흥분하거나 분개하고 있지는 않은가?
드러난 죄와 드러나지 않은 나의 죄 중에
어떤 것이 더 큰 것인지
겸허히 생각해 보자.
드러난 누구의 죄가
정말 감추어져 있는 나 자신의 죄보다도
무겁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돌로쳐라!
예수님의 가르침은 지엄하시다...
“죄 없는 자가 먼저”
-유수일 신부-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 8, 1-11로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혀 온 여인을 예수님께 끌고 와 이 여인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두고 예수님을 시험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 인들로부터 공격의 의도를 지닌 시험을 여러 번 당하셨는데, 이 번에는 정말 크고도 어려운, 아니 정말 잔인한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한 사람을 죽이느냐 살리느냐의 기로에 서게 만든 시험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스승님”이라는 존칭어를 쓰며 말하지만,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면서 이 여인을 죽이고자 하는 사악한 의도를 지닌 채, 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요 구원자라고 말하며 다니는 이 예수라는 사람이 어떻게 대답할지를 놓고 긴장의 순간이 흐릅니다. 이는 어떤 대회에서 1등 2등 3등을 뽑는 행복의 긴장된 시상식 분위기가 아닌, 한 사람을 죽이느냐 살리느냐의 숨 막히는, 잔인한 순간입니다.
모여 든 모든 군중의 시선이 예수님께로 향하고 있습니다. 바리사이 인들은 아마도 속으로 이 사람이 이 번에는 꼼짝 못하고 당할 거라고 결과를 미리 예측하며 웃음을 지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실 뿐 대답을 안 하십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이 독촉하듯 줄곧 물어댔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마침내 몸을 일으키시며 그들에게 이르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예수님의 이 한 말씀은 당당하던 그들의 오만을 일순간에 땅에 떨어뜨려 버렸습니다.
주님의 말씀 “죄 없는 자가 먼저”- 이 짧은 한 마디가 그들을 침묵 속에 떨어지게 했고, 마침내는 아무 말도 못하고 수치 속에 그 자리를 뜨게 만들었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쉽사리 남을 판단하고 단죄합니다. 판단하고 단죄하는 순간 자신의 약점들과 죄들을 잊거나 생각하지 못하고 자신을 의인의 위치에다 갖다 놓습니다. 저도 여기서 예외가 아닙니다.
주님의 이 말씀 후에 무슨 일이 벌어졌습니까?
아주 흥미로운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고 잡혀온 그 여인과 예수님만 남게 된 것입니다. 이 결과는 우리에게 중요한 두 가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나이가 많아질수록 겸손해질 가능성이 크다는 것과 죄녀에게 자신 있게 돌을 던질만한 그런 무죄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교훈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행실이 더 나빠질 수도 있지만, 그래도 긴 세월 많은 세파를 겪으며 살아오다 보면 잘한 일도 많겠지만, 잘못한 일이나 죄도 많게 되는 법입니다. 이래서 자신도 모르게 겸허해질 수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의욕이 상실되고 자꾸 연약해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나도 과거에 잘못한 것, 죄지은 것이 많다.”라고 뉘우치면서 겸손해지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그리고 “하나씩 하나씩 떠나가고 그 여인과 예수님만 남게 되었다.”는 사실은 무죄한 이는 없다는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제가 볼 때,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죄는 자신에게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죄라고 봅니다.
이 여인을 단죄했던 바리사이들 그리고 모여든 군중은 하나씩 다 사라지고 예수님과 이 여인만 남게 되었습니다. 간음죄라는 중죄를 범하다 붙잡혀 한없이 수치스러운 처지에만이 아니고 돌팔매로 사형당할 공포의 처지에 떨어졌던 이 여인은 예수님을 이렇게 홀로 만나는 은혜를 입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하나의 단죄자가 되지 않으시고 단지 이렇게만 말씀하십니다: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이 말씀은 죄 용서의 말씀이요 회개생활에로의 부드러운 요청의 말씀입니다. 참 기이한 사태로 예수님 앞에 서게 된 이 여인은 죽음을 면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하느님의 아드님 구원자 예수님을 만나 죄의 용서와 더불어 새 삶을 시작하는 말로 다 표현 못할 은혜와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 거룩한 사순시기에 내가 지금 어떤 상태에 있든, 깨끗한 상태에 있든 죄스런 상태에 있든, 이 여인처럼 예수님 앞에 홀로 있는 시간을 더 가지면서 내적 변화의 은혜를 청하도록 합시다.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양승국신부-
<일으켜 세우시는 하느님>
오늘 복음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 예수님의 등장으로 인해 자신들의 지저분한 바닥을 낱낱이 세상 앞에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속에 든 것도 없이 괜히 무게만 잡던 자들이었기에 진리이신 예수님 앞에 전혀 게임이 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만날수록 그들은 자신들의 아집, 위선, 추하고 완고한 마음을 하나하나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영혼이 다 빠져나가 버리고 껍데기만 남아있는 비참하고 허탈한 거짓 종교인의 모습을 스스로의 눈으로 확인해야만 했습니다. 얼마나 분통터지는 일이었겠습니까?
자신들이 목숨처럼 여겨왔던 계명과 율법, 예물봉헌규정, 안식일 규정 등등, 자신들 삶의 기반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예수님 앞에서 그들은 억장이 무너졌습니다. 예수님 이름만 들어도 분통이 터졌습니다.
이런 사연으로 인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시선은 오로지 예수님에게로 향하게 됩니다. 눈에 불을 켜고 예수님의 언행 하나하나를 바라봅니다. 조그마한 건수라도 생기면 즉시 예수님에게 올가미를 씌우고, 고발하고, 죽음으로 몰고 가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찾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예수님 앞으로 데려온 이유도 예수님의 고견을 경청하기 위한 것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궁지에 처한 여인이 어떻게 될 것인가는 큰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 여인은 그저 하나의 도구였습니다. 예수님에게 올가미를 씌우고, 예수님을 골탕 먹이고, 결국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갈 도구로 여인이 선택된 것입니다.
한시라도 빨리 당혹해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보고 싶었던 그들, 조금이라도 빨리 올가미에 걸려 허둥대는 예수님의 모습을 직접 보고 싶었던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 빠른 대답을 강요합니다.
진정 절대 절명의 순간이었습니다. 그 절박한 순간에 보여주신 예수님의 대응은 참으로 독특합니다.
“몸을 굽혀 땅바닥에 무엇인가를 쓰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행동은 다분히 의미심장하리라 여겨집니다. 많은 학자들이 예수님의 이 행동에 대해 깊이 묵상하고, 진지하게 탐구해왔지만 정확한 개념파악은 아직 미흡합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땅바닥에 글을 쓰시며 심사숙고하셨을 것입니다. 잠시 침묵 가운데 상황을 파악하고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준비하셨을 것입니다. 짧은 순간이지만 침묵하시면서 하느님 아버지께 이 난관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지혜를 청하기 위해 간절히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이윽고 고개를 드신 예수님, 안쓰럽고 안타까운 표정으로 여인과 율법학자들을 바라보시던 예수님께서는 단 한 마디 말씀을 던지십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간단한 한 마디 말이지만 이 말씀은 한 여인을 죽음에서 구하시는 생명의 말씀이었습니다. 적대자들을 한 순간에 물리치시는 승리의 말씀이었습니다.
죽음을 향해 걸어가던 한 여인, 완전히 갈 때 까지 간 여인, 더 이상 어떻게 해 볼 수 없었던 속수무책이던 여인, 그 여인을 다시 한번 일으켜 세우시는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해방자 예수님, 새 인생을 되찾아주시는 예수님, 단죄가 아니라 위로와 격려만을 주시는 예수님, 모든 사람이 다 포기한 인생에게 조차도 희망을 두시는 예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단죄가 아니라 구원’ 때문이라는 사실, 얼마나 감사해야 할 일인지요.
오늘도 죄 많은 여인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제 인생의 짙은 어두움을 바라봅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다 도토리 키 재기입니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그 여인이나 저나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마치 밥 먹듯이 지어온 숱한 죄와 과오 속에 살아온 제 지난날을 돌아봅니다. 물론 정말 부끄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으로 인해 다시금 희망을 갖습니다. 우리의 죄가 진홍빛 같을지라도 죄질이나 죄 값은 뒷전이신 예수님, 오직 우리들의 해방, 구원, 영원한 생명에만 관심이 지극하신 자비의 예수님 때문에 오늘 다시 한번 힘을 내야겠습니다. 힘차게 일어서야겠습니다..........◆◆◆
하느님의 용서의 사랑
-이재만 신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제 계절은 새 생명의 화려한 축제로 들어서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 마음을 포위하는 황홀한 생명속에서 온 우주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체험하게 됩니다. 사실 우리들이 조금만 눈을 더 크게 뜨고서 바라보면 여름, 가을 그리고 죽음의 계절로 여겨지는 겨울까지도 우리에게 하느님 생명을 느끼게 해 줍니다. 오히려 추운 겨울속에 잠겨있는 겨울의 생명들이 더욱더 생생하게 하느님 생명의 신비를 느끼게해 줍니다. 이렇듯이 모든 계절은 하느님 생명, 하느님 신비를 체험하도록 우리 눈을 깨워줍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죄에서 구원해서 하느님의 생명을 되찾아 주시는 역사를 구세사라고 합니다. 이 구세사에서 하느님은 당신 자비, 사랑으로 인간을 당신 생명으로 이끌고자 하십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던 구약에서는 예언자들의 각가지 가르침으로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통해서, 다양한 모습으로 하느님의 생명, 사랑이 지닌 그 뜻을 말려주셨습니다.
마치 온 계절이 하느님의 생명의 신비를 우리에게 일깨워 주기 위해서 각가지 모습으로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인을 돌로 쳐라.” 라는 멋진 말씀으로 하느님 사랑, 생명이 무엇인지를 일깨워 줍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는 구세사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구세사에 임하는 마음, 자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구세사는 한마디로 죄를 지은 인간들을 계속 용서해 주시는 역사입니다. 아담 화와의 범죄에서 벌을 내리시지만 구세주를 약속하시고, 아브라함이 죄를 짓자 용서하셨습니다. 다윗, 솔로몬의 죄를 용서하시면서 유다가문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 후 바빌론 귀양살이에서 해방을 시켜주셨습니다.
신약에 예수님은 죄인들을 용서 해 주심으로서 하느님의 자비,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렇듯이 하느님의 거대한 구원의 역사는 온통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마치 끝없이 연결된 사슬처럼 자비와 사랑의 사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느님의 끊임없는 사랑, 자비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끊임없이 나를 용서해주시는 사랑, 자비만 좋아하고 인정할 뿐 나 자신이 하느님의 사랑, 자비를 본받아서 이웃 죄인에게 베푸는 데에는 인색합니다. 이것은 우리들 자신의 이기심, 교만, 미움 때문에 이웃을 벌하고 제거해야 직성이 풀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의 무자비한 마음과 다른 사람의 죄, 둘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더럽겠습니까? 나의 무자비한 마음은 몸안에서 생기고, 이웃의 죄는 나의 몸밖에서 생깁니다. 예수님은 “음식처럼 밖에서 몸안으로 들어가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없고, 사람에게서 나오는 악한 생각이 사람을 더럽힌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무자비한 마음이 더 나쁘고 더럽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하느님의 본바탕에 더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우리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우리들은 우선적으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본 받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하느님의 가장 핵심이 되는 자비와 사랑을 본받지 않는다면 자녀로써 제일 중요한 본분을 잊어버리는 것이 됩니다.
우리들이 이토록 중요한 자비, 사랑을 본받도록 해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죄인들을 용서 하시고, 사랑하시고, 그들과 식사를 하시며 친교를 하셨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반대와 미움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죄인들에게는 당연히 벌이 내려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 자신들이 선한 사람이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죄인에게 벌을 내리고자 한것은 자신들만 선한 사람인양 내세우는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그들은 이 교만의 튼튼한 성에서 살았지만 예수님이 그들의 가짜 착함을 벗겨 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미워하게 되고 예수님에게 올가미를 씌우기 위해서 돌에 맞아 죽을 죄를 지은 여자를 데리고 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없는 사람이 먼저 여자를 돌로 쳐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의 용서의 사랑을 베풀기 위함이고, 모든 사람은 죄를 짓기 때문에 하느님 자비 사랑을 본받아서 이웃에게 용서의 사랑을 베풀어야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행복하여라! 하느님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 품안에 살게 되리니."............
<독서강론> : 죽음 앞에서도 하느님의 법에 충실한 수산나
-경규봉 신부-
신심 깊고 아리따운 수산나는 어릴 적부터 율법에 따라 충실한 교육을 받아 주님을 경외하며 살았다. 그런데 백성의 원로이며 재판관인 두 사람이 수산나의 미모에 반해 수산나와 정을 통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하느님을 굳게 믿고 율법에 충실한 수산나는 이들을 물리치고, 이들로부터 모함을 받아 사형당할 운명에 처한다.
이 때 ‘하느님께서 심판하신다.’는 뜻의 이름을 가진 다니엘이란 청년이 이들의 음모를 밝혀내고 수산나의 결백을 증명한다. 그리하여 수산나는 죽음에서 구해지고 수산나를 모함했던 두 원로는 사형에 처해진다.
이국땅인 바빌론에서 귀양살이를 하는 이스라엘 백성은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온갖 수모와 멸시를 당하고 갖은 압박과 제재를 견디며 살아야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교도들 가운데에서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지키며 율법을 충실히 지키며 사는 것이 힘들었다.
두 원로는 미모의 수산나를 보고 바빌론에서 행해지던 악습에 따라 음욕을 품고 수산나에게 접근했다. 그러나 율법에 충실한 수산나는 오직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죽음을 불사하며 율법에 충실하며 그들을 물리친다.
비록 그들이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고, 자신이 죽음을 당할 위험에 처해있음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하느님과 율법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치려는 굳은 각오로 원로들을 물리친다.
그리하여 그녀는 그들의 모함을 받아 사형선고를 받고 사형장으로 끌려가지만 하느님께 자신은 온전히 맡긴다. 비록 자신이 죽더라도 정의의 심판관이신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올바르게 판결해주실 것을 믿고, 하느님께 자신의 목숨을 의탁한다. 이러한 그녀의 기도를 하느님께서는 외면하지 않으시고 응답하시어 다니엘을 보내시고, 다니엘에게 지혜를 주시어 진실을 가리도록 해주신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당신께 도움을 청하는 무죄한 이들을 결코 저버리지 않으시는 하느님이시다. 당신께 의탁하는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이시다.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주님께 충성하는 이들을 어여삐 여기시며, 그들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이시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마태 16,24-25)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의 복도 백 배나 받을 것이며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마태 10,29-30)하고 말씀하셨다.
수산나는 자기를 버리고 하느님과 하느님의 법을 충실히 따랐다. 그녀는 자신의 현세적 이익을 쓰레기처럼 생각하며 오직 하느님께 충실했다. 그로 인하여 그녀는 하느님의 영광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하느님의 법에 충실한 의로운 여인으로 기억되게 되었다.
참 신앙이란 자신과 자신의 상황을 보고, 그 상황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느님을 바라보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그의 기준은 세상에 있지 않으며, 오직 하느님만이 그의 기준이 된다. 비록 자신의 힘으로 헤쳐나갈 수 없는 상황일지라도 온전히 하느님께 맡기고 하느님께 충실한 삶을 사는 것이 참된 신앙이다.
그러므로 오늘 독서의 수산나를 보면서 하느님께서는 죽음을 각오하며 당신께 충실한 이들이 부르짖는 기도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점을 굳게 믿자. 자신의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고 간구하는 신앙을 갖자. 무엇보다도 하느님께 충실하며, 하느님을 위해서 자기를 버릴 수 있는 신앙인이 되자...............◆
진짜 죄인
-배미애 수녀 -
문제가 있을 때 찾아가고 싶은 사람은 누구인가? 나를 판단하지 않을 사람,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줄 사람일 것이다. 나에게 그런 사람이 있는가? 나는 사람들에게 그런 사람일까? 비단 상담뿐만 아니라 일상생활 안에서 문제가 있을 때 우리는 신뢰할 만한 누군가를 찾아간다.
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간음하다 잡힌 여자를 끌고 예수 앞으로 왔다. 그들이 예수를 신뢰했기 때문에 찾아왔던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고발할 구실을 찾기 위해서다. 예수님은 그러한 그들에게 자기 직시를 하도록 돕는다. 그리고 함께 온 여인에게는 최고의 상담자가 되신다.
예수님은 상당히 통제된 감정표현으로 자유로운 분위기를 유도하면서 물으신다. “그들은 다 어디 있느냐? 너의 죄를 묻던 사람은 아무도 없느냐?” 아무런 선입견 없이 수용하면서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도우신다.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 여인은 그 누구도 자기에게 돌을 던질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발견한 것이다.
사도직 안에서 만나게 되는 가난하고 소외된 여성들, 특별히 성적으로 상처받은 여성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을 때 나는 내 안에 돌 든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만난다. 복음이 보여주는 예수님의 무비판적 수용 태도는 내가 만나는 사람들과 해야 할 관계의 실천 원칙이다.
진짜 죄인
-김훈일 신부-
어느 성서 주석가는 간음한 여인을 앞에 두고 예수님께서 땅바닥에 무엇을
쓰셨을까 연구하다가 아마도 돌을 들어 치려는 사람들의 죄를 쓰고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습니다. 어느 사형수의 독백입니다. ‘나도 좋은 가정에서 자랐다면 사형수가 되지 않았을 겁니다. 아버지는 늘 음주와 폭행을 일삼았고 어머니는 집을 나갔습니다. 어려서부터 사람들로부터 무시와
차별을 당했습니다. 세상이 미웠고 사랑을 배우기 전에 이미 미움과 증오가
내 일상이었습니다.’ 그에게 사랑을 전해 주고 세상이 아직 따뜻하다는 것을
말해 줄 우리가 그를 무시했고 그를 차별했습니다. 즉 우리가 돌을 던진 것입니다. 한 사람이 용서받기 힘든 죄를 지었을 때 그것은 그의 죄가 아니라 우리의
죄입니다. 요즘 사형제도의 폐지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고 있습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오늘 간음한 여인뿐 아니라 돌을 놓고 돌아간 이들도
구원을 받았습니다. 누가 먼저 돌을 들었을까? 아마도 그 여인과 간음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서 그 여인이 죽어야
했겠지요. 그 사람도 예수님의 말씀에 회개하고 돌을 내려놓습니다. 우리도 우리 마음에 있는 미움과 증오의 돌을 내려놓고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을 배워 봅시다. 하느님이 아니면 지워지지 않는 우리의 죄가 하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철학자이자 가톨릭 신앙인이었던 파스칼이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의인, 위인, 성인 이런 말은 믿지 않는다. 이 땅에는 오직 한 종류의
사람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죄인이다.”
습관된 투사
-이재욱 신부-
◆사람은 자기 얼굴을 볼 수가 없다. 기껏해야 거울이나 물에 비춰볼 뿐이다. 내가 내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사실인가? 그래서 옛말에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지 말고 사람들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라고 했나 보다.
얼마 전 수도회 전 회원이 모인 자리에서 장상 신부님 한 분이 강론 중에 재미있는 진리 한 가지를 말씀하셨다. 공동체의 장상들은 회원들이 타인에 대해 어려워하는 갈등이나 문제점을 지켜보면서 계속해 “그게 그러니까 네 거야, 네 거!”라고 하면, 그 회원은 “그건 내 것이 아니야, 아니야!”라고 끝없이 항거한단다. 참 재미있지 않은가? 또 다른 이야기는 수도자가 수도생활을 한 10년 정도 하고 나면 뒤통수에 ‘너는 이러이러한 사람이다’ 하고 꼬리표가 하나 붙는데, 다른 사람은 그것을 다 보는데도 정작 본인은 그것을 보지 못한단다. 그리고 한 20년 수도생활을 하게 되면 앞이마에도 꼬리표가 하나 더 붙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다 보는데 본인은 그것마저 보지 못한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되새겨 보면서 나의 모습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다들 보고 있는데 나만 보지 못하는 내 모습은 무엇일까?
복음에서 두 사람이 위기에 봉착한다. 위기에 처한 두 사람은 간음한 여인과 예수님이다. 왜냐하면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고 있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간음한 여인의 죄를 비난하고 처단하는 동시에 눈엣가시 같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고자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혜로운 주님은 남을 비난하는 그들의 손가락을 그들 자신에게 향하게 만드신다.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 그들은 그 말에 자신들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마침내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하나하나 가버렸다고 한다. 스스로 의인으로 여기고 남의 죄를 비난하던 사람들이 자신부터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심리학 용어에 투사(project)라는 말이 있다. 자신이 받아들일 수 없고 거부하는 내적인 문제를 무의식적으로 외부로 투사하는 것이다. 자신의 문제점은 스스로 보지도 못하고 받아들이지도 못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서 드러나는 문제는 누구보다 쉽게 발견하고 분개하며 비난하게 되는 것이 그 좋은 예다. 나의 습관화된 무의식적인 투사의 형태를 스스로 깨닫는 것은 내 성장의 한 열쇠가 될 것이다. 나는 타인의 어떤 점에 대해 남들보다 특히 불편해하고 있는가?
자비와 용서의 마음
-강영구신부-
새로운 한 주간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이 한 주간 내내 당신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가깝게는 가족들과 형제들을 만나고, 이웃과 친지들을 만나고, 낯선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당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당신의 자비롭고 따뜻하고 아름답고 향기로운 마음 때문에 생명의 기운을 얻고 행복해지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아침 당신의 가슴을 한번 들여다보시겠습니까?
아무도 모르는 당신만의 비밀 창고에 자비와 사랑, 관용과 용서, 맑고 밝고 향기롭고 아름다운 보석이 많이 쌓여있기를 바랍니다. 만일 당신의 가슴에 이런 보석들이 들어있다면 이 한 주간 내내 당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당신으로부터 풍겨 나오는 생명의 기운을 얻고 행복해 할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당신 가슴 속에 탐욕, 미움과 증오, 원한과 원망, 편견과 아집, 심판과 단죄의 돌멩이들이 쌓여있다면, 이 한 주간 동안 당신이 만나는 사람들은 그 돌멩이 세례를 받고 피를 흘리게 될 것입니다.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은 돌멩이를 움켜쥐고 노려보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 앞에서 살벌한 살기殺氣를 느낍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움켜 쥔 돌멩이는 그들의 가슴에서 나온 것입니다.
자신을 향해 던져야 할 돌멩이를 여인을 향해 던지려 했던 사람들은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부끄러워하며 흩어집니다.
여인은 사랑과 자비, 관용과 용서의 사람 예수 앞에서 새 삶을 찾습니다.
지금은 사순절입니다. 사순절은 자신의 가슴 속에 쌓인 돌멩이와 쓰레기들을 깨끗이 치우고 청소하는 시간입니다. 깨끗이 비워진 당신만의 비밀 창고에 사랑과 자비, 용서와 관용, 향기롭고 아름다운 마음의 보석을 담기 바랍니다. 당신도 행복해지고 당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들도 행복해 할 것입니다.(一明)
죄를 대하는 요령
-정호신부-
예수님의 수난이 다가올수록 복음 속에서 점점 주님을 잡으려는 엄청난 음모들이 눈에 가깝게 들어옵니다. 어떤 이유에서건 예수님이 율법을 어기는 말씀이나 행동이 있으면 언제든 그분을 고발하여 없앨 궁리를 하며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혈안이 됩니다. 그 수단이 하느님이든 무엇이든 이유가 닿기만 하면 예수님을 잡을 심산으로 그들은 수도 없는 그물을 칩니다.
오늘 예수님은 누구나 다 인정하는 죄인을 앞에 두고 시험을 당하십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 그것도 현행범이기에 그녀의 죄는 움직일 수 없게 드러났습니다. 장애를 지닌 사람과 같은 이유를 모르는 죄인의 경우 주님은 ‘네 죄는 용서받았다’와 같은 말로 그가 하느님 앞에서 죄인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주시고 고쳐주셨지만 이 여인은 상황이 많이 다릅니다.
그녀는 분명 예수님이 보기에도 죄가 있는 여인입니다. 그것도 사람들이 자신들의 부정을 벗기 위해서라도 돌로 쳐서 죽여야 하는 마땅한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당연히 그녀를 처벌하기 위해 모여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상황이 예수님껜 시험의 대상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 여인의 운명은 이미 정해졌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생각을 묻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시험하는 사람들은 어차피 죽을 여인이지만 이 여인에게 이 사람은 어떻게 말하는가에 초점을 모읍니다. 그래서 그 대답이 하느님의 말씀에 조금이라도 어긋난다면 그들은 덤으로 예수님까지 처리할 수 있다는 잔인한 기회를 노립니다.
그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무엇을 생각하셨을까요? 그동안 사람들이 잘못된 죄에 대한 생각을 잡아오셨지만 지금 이 상황은 진짜 죄인을 어떻게 할 것인가입니다. 그냥 죽여라고 하면 당신이 지금껏 사람들에게 가르쳐오셨던 사랑을 거절하는 것이 되고, 단순히 죽이지 말라고 말하면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무시무시한 죄에 빠져드는 상황입니다.
예수님은 결국 이 사건을 단 한마디로 정리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
그리고 사람들은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하나하나 가버리고 여인만이 남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죄인인 우리를 하느님께서 어떻게 대하시는가, 그리고 우리는 그런 죄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를 배웁니다.
여인은 분명 죄입니다. 사람들이 물러 갔다고 해서 그녀가 무죄가 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은 홀로 남은 여인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그들은 다 어디 있느냐? 너의 죄를 묻던 사람은 아무도 없느냐?' 라고 말입니다. 죄는 있지만 그 죄를 벌한 사람이 있었느냐는 질문입니다. 그러므로 나이 많은 사람들부터 여인을 둔 채 하나 둘 씩 떠났다고 해서 여인의 행동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여인은 분명 죄인이지만 자신들의 부족함을 생각해볼 때 그 부족함을 단죄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그들은 물러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이 여인과 사람들의 본모습을 통해 서로 부족함 때문에 서로를 섣불리 판단하지도 단죄하지도 못하게 사람들을 마비시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여인에게 하느님조차 그녀의 잘못된 삶에 책임을 묻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도 죄인에게 쉽게 단죄하시거나 벌하시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결과 여인은 죄를 지닌 채 살게 되었습니다. 분명 죽을 죄를 지었지만 그녀를 죽음에서 건져 낸 것은 하느님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우리의 나약한 모습이 누구에게나 있음을 인정해서 나온 기적입니다. 스스로의 죄를 어쩌지 못하는 사람들이 서로의 죄를 바라보고 하느님과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했기에 그녀는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녀는 그 순간을 절대 잊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세상에 죄인은 많습니다. 그러나 그 죄인조차도 하느님은 돌아오기를 기다려주시고 억지스러움이 아닌 서로의 부족함 때문에 누구나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세상의 모든 죄는 사람을 못나게 만들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님을 떠날 구실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 기적을 통해 발견하고 믿어갑시다.
여인에게 남겨진 죄, 그러나 그것이 없애지지 않는다는 것은 그녀의 앞으로의 평생이 이 잘못에 대한 보속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러나 더 인상적인 것은 별말씀도 없이 당신 죽음의 위기와 죽은이를 배려하심을 모두 배울 수 있어서 기뻤던 것 같습니다.
-신장호 신부 -
온 백성이 모인 가운데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자를 데리고 나와 예수님께 판결을 요구합니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그런데 이 질문에는 예수님을 꼼짝 못하게 하려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숨겨진 의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로마제국의 통치아래 있었는데 로마제국은 식민지하에 있는 예속 국가들의 사형권을 박탈하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 스스로 직접 누군가를 사형에 처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간음한 여인을 율법대로 돌로 치는 사형에 처하라고 하면 로마법을 어기는 것이 되고, 반대로 풀어주라고 하면 유대인으로서 율법을 어기는 셈이 됩니다. 결국 그 질문은 예수님을 딜레마에 빠뜨리려는 그들의 간교한 속임수였던 것입니다.
이와같은 상황 속에서 예수님은 참으로 지혜로운 말씀을 하십니다. 모든 시선이 간음한 여인에게 쏠려 있는 가운데에서 예수님은 그 시선을 각자 자기 자신에게 돌이키십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러자 나이 많은 사람들부터 하나씩 하나씩 그 자리를 떠납니다. 마침내 예수님만 남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형제 자매 여러분
때때로 우리는 어떤 사건이나 일로 인해 책임을 논할 때 자기 자신의 잘못보다는 상대방의 탓을 크게 탓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남을 험담하고 남을 비방하기도 합니다. 자기 자신은 옳고 상대방이 틀렸다고 상대방이 잘못되었다고 얘기를 하게 되지요. 그래서 자기 자신은 심판관이 되고 상대방은 죄인이 되게 됩니다.
오늘 진정한 심판관이신 예수님은 단죄하기 보다는 용서를 처벌보다는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라고 권고 하십니다. 우리 교회에는 예수님의 그러한 권고에 따르는 오랜 전통으로 내려오는 아름다운 미덕이 있습니다. “네 탓이요 네 탓이요 네 큰 탓이로소이다” 누군가를 탓하기 이전에 자기 자신을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 일으켜 세우시는 하느님 †
--양승국 신부-
오늘 복음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 예수님의 등장으로 인해 자신들의 지저분한 바닥을 낱낱이 세상 앞에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속에 든 것도 없이 괜히 무게만 잡던 자들이었기에 진리이신 예수님 앞에 전혀 게임이 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만날수록 그들은 자신들의 아집, 위선, 추하고 완고한 마음을 하나하나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영혼이 다 빠져나가 버리고 껍데기만 남아있는 비참하고 허탈한 거짓 종교인의 모습을 스스로의 눈으로 확인해야만 했습니다. 얼마나 분통터지는 일이었겠습니까?
자신들이 목숨처럼 여겨왔던 계명과 율법, 예물봉헌규정, 안식일 규정 등등, 자신들 삶의 기반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예수님 앞에서 그들은 억장이 무너졌습니다. 예수님 이름만 들어도 분통이 터졌습니다.
이런 사연으로 인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시선은 오로지 예수님에게로 향하게 됩니다. 눈에 불을 켜고 예수님의 언행 하나하나를 바라봅니다. 조그마한 건수라도 생기면 즉시 예수님에게 올가미를 씌우고, 고발하고, 죽음으로 몰고 가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찾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예수님 앞으로 데려온 이유도 예수님의 고견을 경청하기 위한 것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궁지에 처한 여인이 어떻게 될 것인가는 큰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 여인은 그저 하나의 도구였습니다. 예수님에게 올가미를 씌우고, 예수님을 골탕 먹이고, 결국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갈 도구로 여인이 선택된 것입니다.
한시라도 빨리 당혹해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보고 싶었던 그들, 조금이라도 빨리 올가미에 걸려 허둥대는 예수님의 모습을 직접 보고 싶었던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 빠른 대답을 강요합니다.
진정 절대 절명의 순간이었습니다. 그 절박한 순간에 보여주신 예수님의 대응은 참으로 독특합니다.
“몸을 굽혀 땅바닥에 무엇인가를 쓰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행동은 다분히 의미심장하리라 여겨집니다. 많은 학자들이 예수님의 이 행동에 대해 깊이 묵상하고, 진지하게 탐구해왔지만 정확한 개념파악은 아직 미흡합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땅바닥에 글을 쓰시며 심사숙고하셨을 것입니다. 잠시 침묵 가운데 상황을 파악하고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준비하셨을 것입니다. 짧은 순간이지만 침묵하시면서 하느님 아버지께 이 난관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지혜를 청하기 위해 간절히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이윽고 고개를 드신 예수님, 안쓰럽고 안타까운 표정으로 여인과 율법학자들을 바라보시던 예수님께서는 단 한 마디 말씀을 던지십니다.
“너희들 가운데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은 저 여인을 돌로 쳐라.”
간단한 한 마디 말이지만 이 말씀은 한 여인을 죽음에서 구하시는 생명의 말씀이었습니다. 적대자들을 한 순간에 물리치시는 승리의 말씀이었습니다.
죽음을 향해 걸어가던 한 여인, 완전히 갈 때 까지 간 여인, 더 이상 어떻게 해 볼 수 없었던 속수무책이던 여인, 그 여인을 다시 한번 일으켜 세우시는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해방자 예수님, 새 인생을 되찾아주시는 예수님, 단죄가 아니라 위로와 격려만을 주시는 예수님, 모든 사람이 다 포기한 인생에게 조차도 희망을 두시는 예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단죄가 아니라 구원’ 때문이라는 사실, 얼마나 감사해야 할 일인지요.
오늘도 죄 많은 여인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제 인생의 짙은 어두움을 바라봅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다 도토리 키 재기입니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그 여인이나 저나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마치 밥 먹듯이 지어온 숱한 죄와 과오 속에 살아온 제 지난날을 돌아봅니다. 물론 정말 부끄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으로 인해 다시금 희망을 갖습니다. 우리의 죄가 진홍빛 같을지라도 죄질이나 죄 값은 뒷전이신 예수님, 오직 우리들의 해방, 구원, 영원한 생명에만 관심이 지극하신 자비의 예수님 때문에 오늘 다시 한번 힘을 내야겠습니다. 힘차게 일어서야겠습니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