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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에 의한 민족 수난기에 가장 규모가 큰 국외 한인 사회가 성립된 북간도는 우리 민족의 신천지였다. 일본의 식민통치가 시작되자 우리 민족은 이 지역으로 대거 이주하여 그 곳에서 교육운동, 종교운동, 무장 독립운동 등 놀라운 역사적 사건을 일으켰다. 그 북간도 지역을 오늘날 중국에서는 연변 자치주, 혹은 동북 삼성이라고 한다. 또한 그곳에 사는 우리 동포들을 연변 조선족이라고 부른다. 2014년 8월 출판사 ‘산과 글’에서 동북 지역 답사 안내서인 『독립운동의 성지 간도를 가다』를 발간하였다. 우리들이 중국 여행에서 가장 많이 가는 답사지는 백두산이다. 백두산을 갈 때는 자연히 연변 지역 수부가 되는 연길 공항에 도착하여 용정과 화룡을 거쳐 백두산에 오르게 된다. 이 책은 연길과 용정을 가는 사람에게 그곳 사적지에 대한 사건과 인물 및 우리 민족과의 관계를 알려주는 훌륭한 길잡이 자료다. 지금까지 이 지역에 대한 역사 유적 안내서는 많이 간행되었지만 책으로 엮은 『독립운동의 성지 간도를 가다』는 지금까지 국내에서 발간한 안내서와는 크게 다르다. 그 점에서 가장 두드러진 이유는 이 여행기를 지은 사람이 주성화, 최미란, 주향숙, 김태국, 김영춘, 김정석, 박초향, 양화 여덟 사람인데 이들 모두 연변 출신의 신진학자라는 점이다. 이들은 연령이 30대부터 40대에 이르는 젊은 소장학자로서 오늘날 연변지역의 정신문화를 이끌고 있는 지식인들이다. 연변 지방사 연구학자이며 교사와 활동가이기도 하다. 이들은 1974-1984년 사이에 태어나 중국과 한국 등에서 교육을 받고 성장한 조선족 출신의 청년들로서 그 중에는 한국에 유학 와서 학위를 받은 전문가도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단순한 여행안내서가 아니라 일제 강점기에서부터 오늘에 이르는 연변 지역의 역사, 문화, 인물에 대한 연구서라 할 수 있다. 남쪽과 북쪽으로 분단되어 있는 우리나라의 현재 상황에서 볼 때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 살고 있는 중국 국적을 가진 조선족들은 앞으로 우리 민족의 미래를 결정하는 데 있어 지렛대와 같은 역할을 담당하는 아주 중요한 지도자가 될 것이라고 판단된다.자본주의와 참여 민주주의, 세계화와 지구화의 시대가 진행되는 현실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민족 주체성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의 조상들이 일제 강점기에 북간도에서 어떻게 살았으며 그 고난을 어떻게 극복하였는지 그 역사적 사실을 알아야 한다. 『독립운동의 성지 간도를 가다』는 북간도 지역을 다닐 때 그냥 땅만 밟으면서 지나갈 것이 아니라 오늘과 내일의 역사적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인식을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의 저자들은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에서 중국 동북지역으로 이주했던 조상들과는 전혀 다른 역사적·사회적·경제적 환경 속에서 태어나 성장한 세대이다. 이들은 이념의 시대로부터 자유로우며 탈 민족의 포스트모던 시대를 살고 있다. 한편 이 답사팀을 지도하고 있는 최근갑 옹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연변 지역의 민족 문제 활동가이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은진학교를 졸업하였고 동북 지역에서 중국의 정세 변화와 역사적 변혁기를 모두 경험한 지식인이다. 최근에 그는 북간도 지역에 산재한 민족 독립 운동의 사적지를 복원하면서 한중 관계를 돈독히 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일제에 저항하여 우리 민족이 남긴 문화 유적을 연변 조선족과 한국의 연고자들과 함께 연합하여 복원하고 전승하는 일에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의 노력으로 그동안 3·13 국제 학술대회를 개최해 오기도 하였다. 이 지역을 중국에서는 동북 삼성이라고 부르지만 우리는 역사책에서 두만강 건너를 북간도 또는 동간도라 부르고 압록강 건너를 서간도라 부른다. 북간도라는 명칭은 안수길의 소설 제목 『북간도』로 이미 우리에게 익숙해 있다. 일반적으로 북간도 지역에는 함경도 사람들이 이주하였고 서간도 지역은 평안도 사람들이 이주하였다. 한말 1860년에 대 흉년이 들자, 우리나라 변경 지역 농민들은 봉건정부의 탐학을 피해 북간도와 서간도 등으로 이주하였다. 그 뒤인 1905년 을사늑약 이후부터 1910년 합방으로 인한 정치적인 이유로 독립 운동가들이 서북간도 지역으로 망명하기 시작했다. 이때 망명한 독립 운동가들은 이 지역의 이주 한인들과 함께 간민회, 한족회, 부민단 등의 사회 조직을 형성하였다. 서북간도 지역에는 종교운동, 교육운동 등이 이주한인 사회를 기반으로 발전하였고, 그 후 3·1운동을 계기로 무장 독립전쟁을 전개하기도 했다.이 책은 2010년부터 이뤄진 토요 답사를 통해 용정과 명동을 거쳐 청산리까지의 공간을 민족 선열들의 자취를 따라 그 현장을 찾아가 직접 땅을 밟고 경험하며 역사적 현실과 마주하고 있다. 책에 소개된 장에 따라 그 내용을 따라가 보자.
제1장 용정으로 이주한 한인들의 삶
북간도 용정은 19세기 후반부터 이주한 한인들의 역사적 근거지였다. 용정은 또한 일제의 간도 침략의 거점이기도 하였다. 그 때문에 용정에는 많은 민족 운동의 사적지가 남아있으며 또한 일제의 만주 침략의 흔적이 남아있다. 동북 지역 한인들의 근대 민족 교육의 시작은 이상설 선생이 설립한 서전서숙이다. 서전서숙은 신민회를 이끌던 독립운동 세력이 국외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면서 시작된 교육운동의 터전이었다. 용정은 용두레 우물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기도 하지만 ‘많은 인재들을 배출한 땅’이라는 해석도 있다. 이주 초기에 용두레 우물을 중심으로 이주 한인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이곳은 북간도 문화가 잉태된 곳이기도 하다. <선구자> 노래 가사에 나오는 해란강, 비암산, 용주사, 일송정은 모두 이주 한인들의 문화와 정서가 담긴 사적지다. 일송정으로 가는 길에는 이곳에 와 살면서 작가의 길을 걸었던 강경애의 문학비가 있다. 용정 영사관을 향하여 있는 대포산은 용정 지역 수많은 학교들이 철마다 방문하는 학생들의 소풍 명승지이기도 하다. 용정에서 명동촌 가는 길에는 ‘15만 원 사건’의 철혈광복단 의거지가 있다. 또한 승지촌에는 5·30 간도공산당 활동의 진원지와 함께 조선혁명 군정 학교를 졸업하고 항일 투쟁의 길을 걸었던 주덕해의 혁명 사적지도 볼 수 있다.
오늘 우리 시대는 민족주의와 공산주의라는 틀을 넘어서서 항일 투쟁을 전개했던 우리의 모든 역사를 우리 민족의 자산으로 인식할 수 있다는 역사의식을 공유해야 할 필요가 있다.
제2장 명동촌의 한인들
1910년대 북간도의 민족운동은 기독교 운동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 대표적인 사적지가 장재촌에 있는 명동교회, 명동학교, 명동촌이다. 명동이라는 말은 동쪽을 밝힌다는 뜻으로 독립운동을 한다는 말이다. 이 지역을 이끈 사람은 김약연 목사다. 김약연 목사의 가장 탁월한 제자가 문재린 목사다. 명동촌에서는 민족시인 윤동주와 통일 운동가 문익환 목사를 배출했다. 민족시인 윤동주 말고도 황포 군관학교까지 가서 혁명교육을 받았던 송몽규 열사도 있다. 명동학교를 졸업한 나운규와 윤봉춘은 민족의 정서를 표현한 영화 『아리랑』을 만들었다. 이처럼 특별한 지역인 탓에 명동이라는 말은 일본 고등 문관시험에도 출제되었다고 한다.
당시 명동교회, 명동학교는 해방구 명동촌의 구심처였다. 명동촌 사람들은 처음에는 유학을 신봉하였다가 독립운동을 위하여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온 동리가 집단 입신하여 기독교 신앙 공동체로 전환하였고, 학전이라는 제도를 만들어 명동촌의 자녀들을 국외로 유학시키고 독립운동가로 양성하였다. 서전서숙의 맥을 잇고 근대 민족학교로 성장한 명동학교의 교육에는 이동휘와 전도사 정재면의 기독교 민족주의 이념이 있었다. 명동학교는 도산 안창호, 몽양 여운형 등과 기맥을 통하였다. 북간도 지역에서는 이주 한인사회의 지도자였던 구춘선 장로와 함께 하여 삼국 전도회 활동을 벌였다. 북간도 명동교회의 지도자들은 독립운동, 교육운동, 종교운동을 모두 함께 하였다. 그들의 독립운동과 교육운동의 경전은 성서였다. 성서를 근거로 무장운동까지 벌였던 그들은 기독교 복음을 현실 참여 해방 운동으로 승화시켰다.
1900년대 초 처음 명동촌을 건설한 집안은 김약연, 문지청, 김하규, 남위언 등의 네 가문이었고 후에 윤하현이 합류하였다. 명동촌에 가면 김약연 목사의 묘소도 있고 이 지역과 관련있는 윤동주, 송몽규, 문익환, 문동환, 김창걸 등의 유적지가 많이 있다. 무엇보다도 선바위 문안골 등은 안중근 의사가 할빈 의거를 준비하였던 역사적 장소이다. 동서가 십리 남북이 오리였던 사자산 오봉산이 둘러싼 명동촌은 백두산 서록에 위치한 우리 민족의 해방구였으며 두만강 건너 이주 한인들과 독립 운동가들이 언제라도 찾으면 쉴 수 있는 동북 지역 한인 문화의 발상지였다. 김약연 목사는 동북 지역 이주 한인들의 대통령으로 추앙받았다. 또한 윤동주, 문익환, 송몽규는 모두 시인이다. 이들이 시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명동촌의 아름다운 자연 환경과 함경도의 방언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다. 이들이 받은 명동학교의 민족주의 교육을 설명하자면 그 구체적인 사례는 너무도 많다. 이 책에서 중요한 내용으로 다룬 5·30폭동 기념비와 주덕해, 민중의 목소리 민성보, 향토 문학의 별 김창걸, 우리 민족의 걸출한 화가 한낙연, 주덕해의 고향마을 승지촌 이야기, 강경애의 간도 문학 등은 우리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주제일 수 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문학이나 그림, 사상 등에 뛰어난 인물일 뿐만 아니라 누구보다도 항일 운동에 매진한 이들이기에 연변 조선족 사회에서는 그들의 업적을 높이 평가한다. 또한 그들의 노력으로 동북 지역에는 연변 조선족 자치주가 성립될 수 있기도 했다. 중국의 피카소라 불리는 한낙연은 청산리 전투에 무기를 조달한 천재적 화가인데, 어려운 환경에서도 프랑스로 유학을 가 그림을 공부하기도 했다. 우리가 잘 모르는 주덕해와 김창걸의 사적도 살펴보자. 주덕해의 본명은 오기섭이다. 1911년 러시아 연해주에서 태어난 그는 8세 때인 1920년, 두만강을 건너 화룡현 승지촌에 정착하였다. 승지촌은 용정에서 16리 가량 떨어진 산간 마을인데 그는 이곳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주덕해는 화룡현 공립 소학교를 다녔지만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학교를 4학년까지만 마치고 곧바로 고된 농사일을 해야 했다. 그는 이처럼 어려운 환경 속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내야 했다. 주덕해는 1929년 요정 일대의 혁명 활동에 참가하여 공청단과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게 된다. 그 뒤 1936년 흑룡강성 영안 밀산 일대에서 항일 구국투쟁을 하였고, 1937년에는 모스크바 동방 노동 대학에서 학습을 받기도 했다. 1943년에는 연안 조선혁명군 군정학교의 총무처장이 되었다. 1945년 할빈에서 조선 의용군 3지대의 정치위원으로 활약하였으며 후에는 동북행정위원회 민족사무처 처장이 되었다. 1949년 중국 연변 지역 전원 공소에 전원 직무를 담당하였고 1952년 연변 조선족 자치주정부 주장 겸 서기가 되었다. 동북 지역에 조선족 자치주가 세워진 것은 주덕해와 같은 인물이 중국 혁명에서 큰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연변의 조선족들은 동북 항일 연군의 일원으로 혁명 사업에 매진하여 사회주의 건설에 공헌하였던 것이다. 1987년 주덕해의 이러한 혁명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승지촌 옛 집터에는 그의 유적 기념비가 세워졌다. 김창걸은 1911년 함북 명천에서 태어나 7세 때 용정시 지신사 명동촌에 이주하여 명동학교를 다녔으며 1926년에는 용정에 가서 은진중학교를 다녔다. 1927년 맑스주의에 영향을 받고 대성중학교로 전학하였으며 그 후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되어 지하 혁명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문필가로 잡지 「맑스주의 선봉」 등을 간행하였으며 1934년 용정에 돌아와 농사를 지으면서 민족적이며 향토색이 짙은 소설을 집필하였다. 수많은 시와 소설을 남긴 그의 대표작으로는 『암야』가 있다. 그는 연변대학에서 소설과 희곡 등 문학을 가르쳤으며 중국작가협회 회원으로 연변작가협회를 조직하였고 사회주의 문학을 이끌었다.
제3장 항일 무장 투쟁의 터전
연변의 민족운동 전개과정에서 1910년대와 1920년대를 가르는 큰 분수령은 1919년 3·13 반일운동이다. 3·13반일운동은 용정 해란강 강변의 뚝방과 서전대야 벌판에서 전개되었다. 이날 조선 독립 선언을 축하하는 조선 독립 포고문이 발표되었고 연변 각지에서 2만 명 이상의 조선족들이 정의 인도를 내걸고 서전대야에 모여들었다. 이때 이들을 이끈 지도자는 김영학, 구춘선, 이봉우, 고용환 등이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서전대야에 모일 수 있었던 것은 1910년대의 민족교육운동과 이주 사회의 형성 운동에 있었다. 두만강 건너 자동 개산툰에는 정동학교가, 와룡동에는 창동학교가, 장재촌에는 명동학교가, 왕청현에는 대종교학교가, 대원리와 나자구에는 무관학교가 각각 설립되어 독립 전쟁을 준비하면서 국제 정세의 변화를 기다리며 세웠던 기회론이 중요한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1910년대에 명동촌의 김약연 목사는 구춘선 장로와 함께 북간도 이주 한인 사회에 기독교회를 세우는 등 전도 운동에도 매진하였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3·13만세 시위는 북간도 독립운동의 방략을 독립 전쟁론에 의거한 무장투쟁으로 전환된 사건이다. 북간도 각 지역에서는 그 사회의 종교 세력과 토착 이주 한인 세력을 중심으로 무장 단체가 조직되었고 북간도의 가장 큰 세력인 대한 국민회의 주요 활동은 교육 운동에서 독립 전쟁으로 발전하였다. 그들에게는 무엇보다도 무기를 구입할 군자금 수합과 모집이 가장 중요했다. 철혈광복단으로 동량리 어구 버들방천에서 15만원 탈취 사건을 일으킨 최봉설, 윤준희, 한상호, 임국정, 박웅세, 김준 등은 명동학교, 창동학교, 나자구 무관학교 출신의 청년 지사라 할 수 있다. 그들은 1920년 1월 4일 15만 원 탈취사건을 일으켜 노령에 가서 체코 군단의 무기를 구입하고자 러시아 무기상과 거래하기 위하여 신한촌에 갔던 것이다.
1920년대의 역사 무대는 용정이었다. 용정에는 천도교의 동흥학교, 공교의 대성학교, 기독교의 은진학교, 명신학교, 영신학교 등이 설립되었다. 간도에 진출한 일본인들은 광명학교, 광명여학교를 운영하여 이주 한인 사회에 민회를 조직하여 친일 세력을 부식했다. 바야흐로 용정을 중심으로 민족주의 세력과 일본 세력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민족주의 세력을 대표하는 학교로 은진, 동흥, 대성 등이 있었는데 은진은 캐나다 선교부를 배경으로 하는 기독교 세력이었고 동흥, 대성은 새롭게 발전한 만주 지역의 사회주의·공산주의 이념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1920년대부터 1930년대 용정 지역의 사회주의·공산주의 이념 단체들은 반일운동에서 항일운동으로 전환하였고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항일세력의 주도권을 갖게 되었다. 영국덕 제창병원, 은진학교, 명신학교, 용정중앙교회, 동산교회 등은 캐나다 선교사 박걸, 민산해, 부두일 등의 후원을 받으며 1910년대 이후 북간도 각지에 전파된 교회를 기반으로 하는 북간도 국민회 삼부조직과 활동을 함께 하였다. 1920년대의 가장 중요한 역사적 변화는 용정이 역사 무대의 중심에 섰다는 것이며, 동만 공산 청년동맹 맑스주의 연구회 등의 출현이라 할 수 있다. 그 결과 1927년 연변에서 발행된 가장 진보적인 신문 「민생보」가 출현하게 된다. 「민생보」를 이끈 관준헌은 일제의 특권을 폐지하며 관세 자주권을 쟁취하고자 일제에 항의하고 민족의 평등을 천명하였다. 용정은 치외법권 지대로서 외세가 만주와 중국을 침략하며 한민족을 식민지화하는 일제의 침략 본부였던 것이다. 용정촌 신안거리를 민성거리라고 부르는 것은 이 시기에 가장 치열하게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했던 세력이 민성보를 중심으로 하는 공산주의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민성보는 72열사 순국 기념행사를 전개하였는데 이러한 힘들이 모여 1930년 5·30 간도 공산당 사건을 일으키게 되었다. 일제의 간도 침략과정에서 봉건적 중국 지주와 외세가 결탁하여 소작농 및 이주한 조선 농민을 수탈하였기 때문에 5·30사건은 계급 운동이면서 민족 독립운동이라는 뜻이다. 3·1운동 이후 북간도 지역에서는 많은 무장 운동세력이 출현하였다. 그 중 대한 군무 도독부의 최진동은 봉오동을 중심으로 가장 먼저 북간도에 이주한 한인 사회를 기반으로 무장 대오를 꾸렸다. 최진동 부대는 연해주에 근거를 둔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과 이범윤의 광복단 세력과 연합하여 국내 진공 작전을 전개하였다. 왕청현, 춘화양, 봉오동 일대는 온성 대안 지역으로서 이들은 장덕동 월성 풍교동을 지나 수차례나 종성, 경원, 온성, 회령 일대의 일본 경찰서와 국경 수비대를 습격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삼둔자 전투 봉오동 전투라는 만주 무장 독립 전쟁의 신호탄을 올리게 된다. 하마탕에는 대한 국민회군의 본부가 있고 의란구 백초구 태평령 나자구 일대는 독립군 부대의 근거지가 되었다. 서일 총재가 이끄는 북로 군정서의 본부는 덕원리에, 대한 광복단은 대감자에, 의민단은 가야허에 자리를 잡았다. 왕청현, 춘화향에는 김규면의 신민회가 성리 교도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이처럼 많은 지역이 독립 전쟁의 근거지가 되었던 것이다. 결국 일제는 청산리 전투에서 대패 후 1920년 10월 간도 출병을 일으키게 되었고 2만 명의 일본군대가 간도에 쳐들어와 경신 대 참변을 일으켰다. 청산리 전쟁, 장안촌 참살 사건은 이 시기에 벌어진 가장 중요한 민족 운동의 주제이다.
제3장과 제4장, 제5장은 이 책에 수록된 사적지와 역사 탐방의 주제들이다. 주제를 살펴보면 그 내용이 어떠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간략하게 소제목만 옮겨본다.
제3장 항일 무장 투쟁의 터전
명동 은진 중학, 제창 병원과 동산교회, 용정 3·13 반일시위, 중국의 피카소 한낙연, 청산리 전쟁 유적지, 청파호 마을과 대종교 삼종사, 북로 군정서 총재 서일, 장암동 노루 바위골의 대학살, 실종된 동아일보 기자 장덕준.
제4장 용정 한인들의 교육과 종교
용정 명신여학교, 히다카와 광명학원, 용정 중앙교회, 대성중학교, 용정 총영사관과 개척의학원, 간도 유일의 진보적 신문 민성보.
제5장 연길과 도문에서
연길 감옥, 와룡동의 창동 학원, 용정 동흥 중학교, 용정의 시인 심연수, 봉오동 전투와 홍범도 장군, 장암촌 참사와 최근갑옹 정동서숙과 두만강, 개산툰의 한인 마을. 물론, 이 책에도 수정해야 할 내용이 보인다. 41쪽을 보면 15만원 탈취 사건의 주인공들의 사진이 나오는데 거기에 따른 사진 설명은 위쪽 맨 왼쪽으로부터 시계방향으로 임국정, 한상호, 윤준희, 김준, 전홍석, 박웅세가 옳다. 1910년대 북간도 이주 한인사회에서 가장 큰 사건은 간민교육회와 간민회의 활동이다. 또한 광성학교 길동 소학교를 세웠던 이동휘, 김하석, 개봉우는 김약연 목사와 함께 간도에서 제외할 수 없는 역사적 사건이고 인물이다. 또한 훈춘 대황구에 설립되었던 북일학교, 황병길 선생, 훈춘 연통라자, 해란강과 함께 부르하통하, 가야허, 국자가, 연길 교외의 감만자, 적암평, 왕청현 백초구, 하마탕, 나자구 등의 유적은 간도사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찾아보아야 할 역사 유적지로 판단된다. 이 답사팀이 계속 활동하여 찾아보지 못했던 독립운동의 사적지를 발굴해 『독립운동의 성지 간도를 가다』의 제2권, 제3권이 계속 발간되기를 기대한다. 간도 독립운동사는 민족사의 항일 운동사이면서 중국 인민과 함께 중국의 항일 투쟁에 참가한 조선족의 중국항일 투쟁사도 된다. 한중 관계가 어느 시기보다도 중요한 이 시점에 일본 제국주의와 싸웠던 이러한 기록은 우리에게 중요한 역사적 자료가 되리라는 판단이다. 다시 한번 이 책의 출간을 축하하며 기쁨을 나누고 싶다. 동북 지역을 여행하는 사람이나 기독교 선교에 뜻을 둔 이들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책이라 판단되어 필독을 권하는 바이다.
서굉일 | 교수는 고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와 인하대학교에서 각각 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한신대학교 국사학과 교수와 ‘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의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성남시사편찬위원회 상임위원, 한신대학교 명예교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