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마다 하는 실로암 초등학교 조회, Nursery부터 7학년이 함께 하는 시간이다.
8:30분에 종이 울리면 시작되는 조회인데 Nursery나 LKG 선생님들은 시작 2-3분 전부터 아이들 줄을 세운다.
종이 울리고 줄을 세우려면 조회 마칠 때까지 줄을 세워야 하기 때문이다.
꼬맹이들은 줄을 세워도 금방 흐트러지고 또 간격이 자꾸 좁아진다.
앞쪽으로 팔을 벌려 간격을 두어도 금방 간격이 좁아진다.
여기 꼬맹이들의 사회적 거리는 거의 제로인 것 같다.
여기는 어디든지 뭔가 나눠준다고 줄을 서라면 아이들의 줄은 등과 가슴이 닿는다.
팔을 벌려 간격을 유지해도 금방 또 간격이 좁아진다.
인구가 많은 후진국의 어떤 행사에서 종종 압사 사고가 많이 나는 이유 중 하나다.
또 인구가 많기 때문에 뭔가 한 번 양보하면 자기 순번이 수십 명 뒤로 밀릴 수 있기 때문이고 또 조금이라도 간격이 생기면 누가 밀치고 들어오기 때문이다.
운전을 해도 절대 양보가 없다.
나 때문에 온통 길이 막히는 걸 알면서도 양보를 안 한다.
특히 기찻길 건널목에서 차단기가 내려져 있는 동안 양쪽에 기다리는 차량을 보면 가관이다.
기다리는 차량이 전진 방향만 아니라 반대쪽에서 오는 차선도 점령해 버린다.
차단기 너머 반대쪽 차량도 마찬가지다.
차단기가 열린다고 해서 차량들이 바로 건너지 못한다.
내가 가는 길 건너편에도 이미 차량들로 꽉 막혀있기 때문이다.
차단기가 열리면 양쪽에서 중앙선을 침범한 차량 한두 대가 좁은 건널목 위에서 서로 자기 차선을 찾아가면 겨우 길이 열린다.
느리고 답답한데 빨리 가라고 하는지 계속 크락션을 울리며 지나간다.
기차는 10, 20초 내로 통과하지만 그런 건널목을 건널 때는 10분 이상을 기다려야 할 때도 많다.
서로 불편한데도 수십, 수백 년을 그렇게 살아간다.
차량이 밀리고 불편한데도 서로 양쪽 차선을 다 점령하는 것도 문제지만 건널목 간수는 기차가 오기 한 5분 전부터 차단기를 내려버린다.
한 1-2분 전에 내려도 될 것 같은데 일찌감치 차단기를 내려버린다.
차단기를 제 때에 내려도 미처 지나가지 못한 차 때문에 사고가 나면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다.
실제 차단기가 내려져 있어도 그걸 올리고 통과하는 오토바이, 앞차 때문에 미처 건널목을 다 지나가지 못해서 일어난 사고들이 있기 때문이다.
내 먼저고 내 일이 급하고 또 나 때문에 다른 이가 손해보고 사고 나는 것은 안중에도 없기 때문이다;.
또 사람들의 편의를 봐준다고 기차가 오기 직전까지 차단기를 내리지 않는다고 그것 때문에 감사하다는 사람은 없지만 일찌감치 내리면 사람들에게 욕을 먹기는 해도 최소한 사고는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그런 DNA가 있는 모양이다.
매일 아침 간격을 두고 줄을 세워도 잠시 후면 또 바싹 붙어있다.
아예 양보 DNA나 사회적 거리는 없는 걸까?
작년에 법원도서관의 어느 조사 심의관이 쓴 글에는 친밀한 거리는 약 46Cm 이내, 개인적 거리는 40Cm-120Cm, 사회적 거리는 120Cm-360Cm라고 한다.
물론 글쓰기 할 때 띄어쓰기를 잘 하면 글이 매끄럽고 완결성이 높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한 예시인데 문화인류학자인 에드워드 홀(Edward T. Hall)의 이야기니 어느 정도 객관성은 있는 것 같고 인간관계가 친밀해도 프라이버시나 지켜야 할 거리가 그만큼 있어야 한다는 뜻 같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은 가슴과 등이 거의 붙어서 줄을 서니 거의 10Cm 이내다.
조회 시간에 그 간격이 넓거나 좁다고 아무 이익이나 손해가 나지 않는데 우리 꼬맹이들은 모두가 그렇게 살아간다.
그 유명한 문화인류학자도 모르는 여기 아이들의 친밀도인 모양이다.
세상에서 가장 친밀한 관계일까?
이런 식으로 사고, 행동 또는 삶의 형식이 서서히 형성되어 문화가 만들어져 가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