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나라 말기에 고죽국 서부에서는 영지(令支), 동북부에서는 산융의 세력이 대두해 고죽국의 국경을 위협하게 되었다. 말기의 고죽국의 영역은 서쪽은 난하, 청룡하, 북쪽은 현재의 만리장성, 동쪽은 산해관, 남쪽은 발해만으로 그 세력 범위가 축소되었다. 기원전 664년(주 혜왕 13년), 산융이 연으로 출병하면서 연은 제에 구원을 요청했고 이에 제 환공은 연을 구원하기 위해 군사를 산융에 출병하였으며 산융 정벌과 동시에 고죽국도 멸망시켰다.
고죽국은 은의 제후국이 아니라 단군조선의 제후국이였다.
"고죽국은 조선(족)에서 갈려 나간 분계(分系)이다."-《조선상고사》.신채호
고죽국의 개국 시기는 《사기·백이열전》의 주(注)에서 인용한 <색은(索隐)>에 “孤竹君是殷汤三月丙寅日所封”이라는 기록은 '고죽국(孤竹国)'을 의미한다. 은허 갑골 복사문(卜辞文) 중에도 '죽후(竹侯)'라는 글자가 나온다. 이 때가 대략 상商나라 탕(湯)왕 18년이므로, 고죽국의 개국시기를 商왕조와 같은 시기인 B.C.1600년으로 보아야 한다.
좌현왕 서우여에게 황위를 넘겨 주기 위해서 5가 공화정의 화백제(만장일치)를 무시한 편법을 동원하려는 소태 단제의 국정운영에 대해 저항권을 발동하였으나, 소태 단제가 듣지 않자 쿠테타로 권력을 장악한 색불루 단제의 반정은 정당했다고 본다. 어차피 소태단제와 한편이 된 서우여 세력과의 정치적 충돌은 불가피했으니까 말이다.
결국 고리KOREA족 출신의 색불루는 권력투쟁에서 승리했고, 8조법을 제정하여 살인자들은 사형에 처하고 예의없는 자들은 군대에 보내게 하는 등 국가기강을 바로 잡고, 은나라의 침략에도 적극적으로 공격하여 아들 아홀 단제 때에는 양자강과 황하강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백성들을 이주시켜 남국.여국.엄국 등의 제후국가들이 세워지게 되어 단군조선의 강성함을 중국대륙에 떨치게 하였으니 치우천황 이후 민족의 영광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색불루 단제의 즉위에 불복하여 중국 동해안 지역에서 농사짓다가 죽은 고죽국의 왕자들인 백이.숙제는 당시 중앙정치 상황를 너무도 몰랐던지 아니면 소태 단제나 서우여 사람들이 아니였나 생각된다.
번조선의 제후국-기후국.고죽국
제나라에 망한 고죽국
제나라(齊國, 기원전 1046년 - 기원전 221년)는 춘추시대의 춘추오패이자, 전국시대의 전국7웅 중 하나로, 근거지는 현재의 산동지방이다. 수도는 임치였다.
주(周)의 문왕(文王)이 나라를 건국할 때 재상 태공망(太公望) 강태공은 주나라의 무왕을 도와 은나라를 무너뜨린 공으로 제나라의 초대 왕으로 임명되는 인물이다. 제나라는 동이족의 나라인 셈이다.
기원전 665년 주나라의 제후국인 제나라 환공 21년에 관중과 함께 연나라를 도와 영지국(令支國)과 고죽국(孤竹國)을 정벌하였다 그리고, 기원전651년 제나라 환공 35년에 다시 산융, 이지(離支), 고죽국을 정벌하였다.
고죽국은 단군조선의 삼한 중 번한의 관경 내에 있던 군국(君國)이다. 그 후 전상이 제나라 간공을 죽였을 때, 고씨, 국씨의 일족을 모두 죽였다. 전상의 증손자 전화에 이르러서야 스스로 제나라 위왕이 되었다.
당나라 시절에 이정기는 지나지역의 소금과 철 생산의 중심지 산동지역에서 '제나라'을 세우고 왕이 되었다. 고구려 유민의 나라 제나라는 고구려 풍습을 따랐다. 이정기는 왕이 되기 전에 당나라 영주 절도사였다. 냥야 등의 서주 지역을 중심으로 청주, 광릉 까지 세력을 넓혔던 제나라였다.
제는 당시 해상 무역과 소금 생산 등의 중심지였던 청주의 경제력과 토지는 비옥하고, 백성은 많았다. 춘추전국시대에서 이어 왔기 때문에 제나라 국민의 대다수는 고조선 유민들이다.고구려 유민 이정기가 제나라를 세울 수 있었던 기반이 되었다.그러나 한국 사학자들은 제나라의 역사를 우리나라의 역사로 인정하지 않는다.
[후한서(後漢書)]에 “예와 옥저, 고구려는 본래 모두가 옛 조선 지역”(東夷列傳濊)이라 했고, [수서(隋書)]에는 “고려(고구려)의 땅은 본래 고죽국이었다”고 했다(裵矩傳). [구당서]는 “고려는 본래 고죽국이다. 주나라가 기자를 봉하여 (번)조선이라 했다.”(“高麗本孤竹國 周以封箕子爲朝鮮,” 舊唐書裵矩傳)고 한다. 즉 수·당 시대에는 ‘고죽국=번조선=고구려’로 파악하고 있다. 고죽국은 현재의 베이징 동부 지역이므로 고구려는 번조선의 옛 땅에서 시작된 것이다.
번조선을 기자조선이라 불리우는 이유는 은나라에서 번조선땅(서화)으로 망명한 기자의 후손 중에 기후라는 자가 연나라의 침략을 의병을 모아 물리친 후에 진조선 단제의 승인을 받아 번조선 단군에 즉위하니 이 때부터 기자조선이라 불리우는 것이고, 중국은 난하지역까지 단군조선의 서쪽영토였기 때문에 조선이라 기록한 것이다.
[한단고기/고구려국본기]기록에 해모수의 출신은 고리국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고리국은 부여의 동명성왕 고두막 칸이 한나라의 부여침략을 물리치면서 회복한 서요하 지역으로 한나라가 위만조선이 멸망한 후에 설치한 현도군의 치소가 있던 고구려현이다. 고죽국을 고구려의 옛땅이라고 기록한 이유는 고리국이나 고죽국이나 모두 고리족의 나라들이기 때문이다.
이들 고리족은 위만집단이 기자조선을 멸망시키고 한나라가 부여을 침략할 때 만주지역으로 대거 이주하여 압록강지역(환인)에서 일어난 고추모의 고구려 재건세력이 되었고, 선조의 땅인 고리국과 고죽국을 포함한 고조선의 서토회복을 위한 다물국시에 충실하여 마침내 광개토태왕 시기에 고구려를 부모국으로 삼고 자치권을 부여하는 통치방식으로 고조선의 영토를 모두 회복하게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