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사정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 4월을 보냅니다.
주일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게 하옵소서.
4여신도 교제 모임 위에 은혜를 내려 주옵소서.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죄악 된 세상 속에 살지만 죄에 대해 늘 민감하게 하옵소서.
오늘도 십자가 보혈을 의지하오니 오염된 영혼을 정결케 하옵소서.
성령님, 말씀을 조명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6. 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되 다윗이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니
17. 그 집의 늙은 자들이 그 곁에 서서 다윗을 땅에서 일으키려 하되 왕이 듣지 아니하고 그들과 더불어 먹지도 아니하더라
18. 이레 만에 그 아이가 죽으니라 그러나 다윗의 신하들이 아이가 죽은 것을 왕에게 아뢰기를 두려워하니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아이가 살았을 때에 우리가 그에게 말하여도 왕이 그 말을 듣지 아니하셨나니 어떻게 그 아이가 죽은 것을 그에게 아뢸 수 있으랴 왕이 상심하시리로다 함이라
19. 다윗이 그의 신하들이 서로 수군거리는 것을 보고 그 아이가 죽은 줄을 다윗이 깨닫고 그의 신하들에게 묻되 아이가 죽었느냐 하니 대답하되 죽었나이다 하는지라
20.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왕궁으로 돌아와 명령하여 음식을 그 앞에 차리게 하고 먹은지라
21. 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는 그를 위하여 금식하고 우시더니 죽은 후에는 일어나서 잡수시니 이 일이 어찌 됨이니이까 하니
22. 이르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거니와
23. 지금은 죽었으니 내가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24. 다윗이 그의 아내 밧세바를 위로하고 그에게 들어가 그와 동침하였더니 그가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25. 선지자 나단을 보내 그의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이더라
26. 요압이 암몬 자손의 랍바를 쳐서 그 왕성을 점령하매
27. 요압이 전령을 다윗에게 보내 이르되 내가 랍바 곧 물들의 성읍을 쳐서 점령하였으니
28. 이제 왕은 그 백성의 남은 군사를 모아 그 성에 맞서 진 치고 이 성읍을 쳐서 점령하소서 내가 이 성읍을 점령하면 이 성읍이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을까 두려워하나이다 하니
29. 다윗이 모든 군사를 모아 랍바로 가서 그 곳을 쳐서 점령하고
30. 그 왕의 머리에서 보석 박힌 왕관을 가져오니 그 중량이 금 한 달란트라 다윗이 자기의 머리에 쓰니라 다윗이 또 그 성읍에서 노략한 물건을 무수히 내오고
31. 그 안에 있는 백성들을 끌어내어 톱질과 써레질과 철도끼질과 벽돌구이를 그들에게 하게 하니라 암몬 자손의 모든 성읍을 이같이 하고 다윗과 모든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니라
(본문 주해)
15~23절 :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낳은 아이를 하나님께서 치셨다. 그러자 다윗이 금식하고 밤새도록 아이를 위하여 기도하지만 칠 일만에 아이가 죽는다.
다윗의 신하들이 아이가 죽은 것을 왕에게 고하지 않는다.
아이가 아플 때에 금식한 왕이었으니, 죽었다면 더 상심할 것 같아서 고하지 않았는데 다윗이 신하들의 수군거림을 보고 알게 된다.
아이가 죽은 것을 확인한 다윗이 씻고 음식을 차리게 하여 먹는다.
신하들이 의아해하자 다윗은 ‘아이가 살아 있을 때는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아이를 살려 주실까 하여 금식하였지만 이제 죽었으니 어찌 금식하겠느냐’고 하며 아이의 죽음을 받아들인다.
회개했다고 해서 죄의 흔적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런데 아이는 아무 죄가 없는데 왜 아이를 치신 것일까?
하나님은 다윗을 용서하시는 대신 당신의 공의를 이루며 영광을 회복하시기 위해 다윗의 죄의 열매인 아이를 데려가신 것이다.
아이를 살려달라고 기도하는 모습 속에서 아버지 다윗을 본다. 그러나 하나님이 데려가신 후에는 하나님의 결정, 그 공의의 심판을 받아들인다.
죄 짓지 않는 인생은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럴 때 회개하고 돌이키는 일이다.
경건한 그리스도인이란, 죄 짓지 않는 자가 아니라, 회개하는 자이다.
24~25절 : 다윗이 밧세바를 위로하고 동침하니 다시 아들을 주신다.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짓는다.
그런데 다윗과 밧세바 사이의 자녀는 시므아, 소밥, 나단 그리고 솔로몬으로 솔로몬은 넷째이다.(삼하5:14, 대상3:5) 하지만 본문에는 솔로몬이 마치 죽은 아이 다음에 태어난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그 이유는 여호와께서 솔로몬을 특히 사랑하셨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과 장차 다윗을 이어 왕이 될 솔로문을 부각시키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밧세바의 경우 불륜으로 남편 우리아를 죽게 만들었고, 첫아들의 죽음으로 그 죗값에 치른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녀를 불쌍히 여겨 그 태를 축복하신 것이다. 그 태에서 차기 왕 솔로몬이 나왔다는 것은 밧세바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보내셔서 ‘여호와께 사랑을 입었다’는 뜻의 여디디야라는 이름을 솔로몬에게 붙여주신다.
26~31절 : 죄를 자복하고 회개함으로 새 출발한 다윗은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 받는 다윗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것은 암몬 족속을 정복하고 승리함으로 하나님께서 다윗을 다시 존귀하게 하신 것이다.
요압이 오랫동안 공략한 암몬의 랍바를 점령한다.
그런데 요압은 랍바 성을 빼앗고는 또 다윗에게 랍바 성을 점령해 달라는 청을 넣는다.
랍바성은 크게 두 개의 성으로 되었다. 한 성은 암몬 왕이 있던 왕성이고, 또 한 성은 그 왕성에 물을 대는 수원지가 있는 성, 이른바 물의 성이다.
그래서 랍바 성은 난공불락의 요새였는데 현재 요르단의 수도 암만이 바로 그곳이다.
요압이 결정적인 순간에 다윗으로 하여금 이 성을 공격하도록 하여 다윗의 이름으로 성을 함락시킨다.
요압의 이러한 행동에 대한 해석이 있다.
첫째는 원정군 사령관에게는 상식적인 일로서 당연히 마지막 점령은 본국의 왕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점령지의 재산을 사적으로 탈취하지 않고 당시 나라와 나라의 규례에 따라 합법적으로 인수하기 위한 것으로서, 왕이 나서야 나라가 접수되는 결과가 된다는 것이다.
셋째는 요압의 개인적인 소신이나 야망에서 나온 행위로 보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의 군대장관이라는 위치를 강화하고 그 직책을 오래 유지하기 위해 왕에게 아부했다는 것이다.
다윗이 그 성을 함락시키고 그 왕의 쓰던 보석 박힌 금 면류관을 쓴다.
금 면류관의 무게는 금 한 달란트로서 약 34Kg이다. 거기에 무수히 보석이 박혔다고 하니 값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물건이다. 다윗이 이 왕관을 썼다는 것은 실제로 머리에 썼다기보다는, 큰 기쁨을 나타내는 말이다.
랍바성의 정복과 금 면류관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용서하시고 다시 존귀하게 하셨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의 묵상)
죄를 지어도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용서해 주시기 때문이다.
타락한 인간은 누구나 넘어질 수 있고 실수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구나 다윗처럼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회개하고 돌아오는 다윗을 하나님께서 받으셨다.
징계를 받아도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를 새롭게 해주시기 때문이다.
다윗은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다.
그러나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첫아들이 죽는다.
이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고 다윗은 이를 겸손히 받아들인다.
나는 이것을 장사복음이라고 배웠다.
다윗이 앓고 있는 아이를 위해 칠 일 간을 금식하고 기도하였지만 아이가 죽어버리자,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버둥대지 않고 잠잠히 하나님의 그 결정을 받아들인다.
언제나 옳으신 하나님의 심판에 순응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용서는 때때로 무덤의 시간을 요구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다.
며칠 전 서울에서 돌아오는 길에 이 장사복음, 무덤의 시간에 대해 남편과 대화를 나누었다.
주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이에 이 무덤의 시간이 있었다는 것, 십자가 복음과 부활 복음 사이에 이 장사 복음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그 무덤은 나 혼자 있는 곳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거하며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받아 먹는 곳, 무너진 나를 새롭게 세워주시는 곳, 새 성전으로 나를 세워주시는 과정이니 어찌 귀하지 않을까?
무덤의 시간을 보낸 다윗과 밧세바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다.
다윗에게는 랍바성을 함락시키게 하시고 어마어마한 금면류관을 선물로 주시니, 이는 다윗을 예전처럼 존귀한 왕으로 회복시키셨음을 보여준다.
밧세바는 더 이상 ‘우리아의 아내’가 아니라, 다윗의 아내가 된 것이다.
‘다윗이 그의 아내 밧세바를 위로하고’(24절)
그리고 그들 사이에 태어나 차기 왕이 될 솔로몬에게 ‘여디디야’라는 영광스러운 별명까지 주시니 얼마나 감사할까?
나는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 태어난 솔로몬이 다윗을 이어 왕이 된 것에 대해 불만을 가졌었다.
간음한 사람들, 우리아를 죽인 사람들....비록 그들 사이의 첫 아이는 죽지만....그들이 사는 내내 고통을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사이에 태어난 솔로몬에게 다윗의 왕위를 이어가게 하시다니......아니, 그 전에 이미 ‘여디디야’ 라니!
하나님의 완전한 용서를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하나님의 그 완전한 용서 때문에 지금 내가 영생을 누리고 있는데도 말이다.
자신이 얼마나 큰 용서를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한참 둔감한, 참으로 뻔뻔한 존재가 바로 나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완전한 용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이다.
그리고 그 십자가는 무덤으로 가는 길로 이끈다.
그 무덤에서 새 성전으로 새롭게 세워주시는 주님이 손길을 누리며 부활의 기쁨을 노래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완전한 용서를 받고 무덤의 시간을 지난 다윗과 밧세바, 그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참 홀가분한 마음으로 묵상한다.
‘여디디야’는 하나님의 완전한 용서와 사랑을 보여주시는 이름이구나!
(묵상 기도)
주님,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용서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것처럼
저는 다윗과 밧세바가 싫었습니다.
첫아이를 잃었지만 후에 그들이 누리는 평안에 의아함을 가졌습니다.
주님의 용서와 사랑을 저 자신이 받고 누리면서
그것은 당연하게 생각하고
남들에게는 더 엄한 잣대를 들이대는 기가 막힌 존재였습니다.
여디디야라는 이름에 늘 불만이었는데
오늘 그 이름 안에 담긴 주님의 완전한 용서와 사랑을 보며 내밀었던 입을 오므립니다.
무덤의 시간을 온전히 주님과 함께 지낸 이들에게 주시는 은혜입니다.
복음을 알아가며 영생을 살아가니 저도 주님의 사랑을 입은 자입니다.
여디디야가 바로 제 이름임을 생각하며 머리를 조아립니다.
이 사랑을 받은 자,
이 땅의 삶을 주님 안에서 완주하게 하옵소서.
성령님, 의지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