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구, 또 나다.(정말 누군가 부담을 조금 느꼈으면 한다.)
눈 뜨자마자 창문을 열어 제쳤다. 먹구름이 잔뜩이다. 빗방울은 얼마 전 멈췄다.
이런 날, 정말 싫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 비는 적당히 오는 것으로 예보돼 있었는데 새벽에 내리던 비는 그게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침 6시에 잠을 깨자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멍게에게 전화 돌리라고 할까. 취소하고 각자 집에서 늘어진 토요일 오전을 보내는 게 낫지 않을까. 차라리 이틀 전에 생각한 대로 취소했어야 하는 건 아닌가.
그러다 한 시간쯤 뒤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그렇잖아도 사람들이 잘 꾀지 않는데 대장인 나마저 그러면 안된다고 스스로를 재촉였다.
아침을 성대히(우리 집 아침은 항상 성대하다. 여느 집 식탁보다 화려하다. 그렇다고 진수성찬은 아니고 반찬 7~8가지를 기본으로 깐다. 그러니 누가 뭐래도 난 우리 집 황제!) 먹고 오전 8시쯤, 이런 날씨에 집에 가만히 들어앉아 있지 뭐하러 가느냐, 비나 왕창 퍼부어라는 마눌님의 지청구 또는 저주를 들으며 자동차 시동을 걸었다. 자기가 차 쓰려고 했는데 가만 있다가 차 끌고 간다고 또 입술을 비죽거린다.
기분도 꿀꿀한데 말러나? 볼륨을 20 정도로 높였다. 말러 음악을 아는 분들은 짐작하겠지만 그의 음악만큼 진폭이 큰 유례는 없다. 어느 순간 잘 들리지도 않던 선율이 갑자기 극단으로 치닫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수시로 볼륨을 조정해야 하는데 이날 난, 15분의 짧은 드라이빙 동안 귀의 호사를 누렸다.
아무도 없다. 약속 15분 전이니 당연하다. 멍게가 도착했는데 뭐가 그리 피곤한 지 곧바로 차 안으로 들어가 푹 앉아버린다. 그리고 1분도 안돼 컴불 형의 형수가 운전하는 승용차가 멈추고 형이 손짓을 한다. 멍게는 여전히 의자에 그대로다.
회장님은? 그제야 휴대폰을 열어본다. 문자가 들어와 있다. 궂긴 일이 생겨 못 온다는 거였다. 희망과용기 형도 안 나타나네 할쯤 문자가 왔다. 방금 도착했다고.
이렇게 네 명이 차 안에서 구수회의를 했다. 서울 위, 동쪽으로 갈수록 비구름이 커진다고, 아예 한강 이남으로 내려가면 어떠냐는 얘기에 속리산도 떠올렸다. 하지만 너무 늦은 출발이란 지적에 이내 마음을 접고 검단산으로 방향을 틀었다. 매월대나 비둘기낭 폭포는 비가 들이칠 때에는 좋지 않다는 레저 담당의 조언을 새겨 들은 결과였다. 아무래도 빗속의 산행은 불쾌하다는 판단에 따라.
그렇게 검단산, 평소 엄청난 인파가 몰리는 그곳 입구를 그렇게 한적한 상태에서 찾기는 참 오랜 만이었다. 희망과용기 형도 멍게도 처음이라 했다. 이럴수가 있나 싶었지만 나름 의미 있겠다 싶었다.
9시를 조금 넘어 막국수집 마당에 차를 세우고 올랐다. 산은 그 자체로 먹먹했다. 비구름이 잔뜩 누르고 있어서인지 서늘함보다 칙칙함이 산에 그득했다. 5~6년 전 처남네 가족과 함께 올랐던 기억이 생생한데 그때는 초봄이었다. 모든 것이 푸릇했던 그때와 달리 이날은 마치 유럽의 어느 흑림(가보진 못했고 영화로 보았던)에 들어온 듯했다.
이렇게 낙엽송이 많았나. 완벽한 계획조림의 음덕으로 빼곡한 낙엽송이 반기고 있었다. 코스 난이도는 아주 쉽지도 않고 어렵지도 않았다. 습한 기운에 땀이 비오듯 하는 것이 문제였다. 술독이 빠지면서 땀으로 셔츠가 흥건해졌다. 30분 정도 걸으면 약수터가 나오는 점이 특이한 정도.
희망과용기 형이 준비해온 매실 용액으로 갈증을 씻었다. 형은 대접받고 산다는 부러움반 시샘반이 넘쳐났다. 형은 정상에서 정성껏 준비해온 간식거리를 꺼내 놓으며 "고매한 인격에 감화된 것이라고나 할까"라고 말했다. 거의 매일 밤늦게 귀가하면서도 집안에서 대접 받는 비결은 나중에 각자 들으시도록.
11시도 채 못돼 정상을 밟았다. 팔당댐과 두물머리, 그 아래 남한강 쪽이 설핏 얼굴을 내비쳤다가 구름에 다시 가려지곤 했다. 오늘 뷰(전망)가 없는 날이다. 간만에 이곳을 찾았다는 컴불 형은 등산로가 너무 정비돼 예전의 정취를 느낄 수 없다고 했다. 컴불 형은 정상에서 서쪽으로 뻗은 유길준 묘소 쪽으로 내려가는 길이 능선 높낮이에 따라 다른 한강 풍경을 만끽할 수 있다고 했지만 그런 전망 자체가 쉽게 나올 날씨가 아니었다. 이런 날은 눈을 뚝 감아야 한다.
내려오는 길은 약간 거칠었다. 컴불 형의 미련 때문에 우회할까 말까 망설이다 남들이 다 버린, 좁고 거친 길을 따라 내려오다 아주 편한 고속도로 같은 하산길로 내려왔다. 희망과용기 형이 부쩍 속도를 낸다 싶었는데 내려와서 보니 손 안의 길쭉한 물건 때문이었다.
들머리에 다시 내려오기 20분 전부터 한두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중간에 우산을 폈다. 배낭커버를 써본 분들은 알겠지만 이 정도 비라면 그냥 가벼운 우산 쓰는 게 제일이다. 판초 우의는 덥기만 하고 안경에 습기를 채우는 문제가 있다.
막국수집에 주차해 놓은 차 옆에서 옷도 갈아입고 신발도 갈아 신었더니 상쾌해졌다. 그리고 음식점 안에 들어가 막걸리잔을 기울이자 억수 같은 빗줄기가 퍼부었다. 컴불 형은 술맛 난다고 신나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음식점에 들어가자 엄청난 비가 쏟아진 것이다.
그림 나오죠? 컴불 형과 희망과용기 형은 얘기꽃을 피우고 운전해야 하는 난 어쩌다 한 잔을 찔끔거리고 멍게는.
오후 2시에 끝난 술자리. 빗줄기는 여전했지만 중부고속도로 거쳐 외곽순환고속도로에 들어서자 하늘이 얌전해졌다. 정말 거짓말같다. 우리는 어떻게 이런 날씨 행운이 계속 따라붙지? 컴불 형은 한 술 더 떴다. "내가 산에 가면 언제나 날씨가 좋다."
무슨 이런 신성모독이 있나 싶었다. 그래도 형이 몽블랑 가 있는 동안 날씨가 배반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은 들었다.
오랜만에 큰 마음 드시고 나온 희망과용기 형은 내내 아쉬운 모양이었다. 공덕동 궁중족발 가서 한잔 더? 어쩌구 했다.
헌데 아무래도 시간이 너무 이르다. 재로라도 있으면 옳다 좋다 하면서 따라붙을텐데 우린 너무 어엿한 가장이니까. 아이 학원에서 데려오고 저녁도 사먹이며 오랜만에 아빠 노릇을 해야 하니까.
이날 술자리에서 배운 건배사가 정말 유효하다. '빠삐따'. '빠삐용'의 변용으로 보이는데 짐작할 수 있듯이
빠지지 말고
삐지지 말고
따지지 말자
다. 술자리 초입에 멍게가 했던 얘기가 떠오른다. "끝까지 가보는 거다. 누가 나오지 않아도 원망하지 않고 기다리면서, 두명이든 세명이든 매달 셋째주면 산에 가는 거다."
이런 무서운 인간을 봤나. 내가 십년 전 들었던 얘기잖아. 노조 위원장으로 일하던 어느 날, 사무장으로 일하던 후배가 그러는 거다. "선배같은 사람이 제일 무서워요. 빚을 잘 받아내는 사람이 선배 같은 사람이잖아. 아무말 없이 신문만 보며 눈물을 그렁거리는 거다. 그러면 아무리 지독한 채무자라도 빚을 갚는 거다."
그래서 우리 산악회는 앞으로 그런 조직이 될 것 같다는 허튼 생각을 해본다.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으며' 빚을 다 받아내는...
첫댓글 알아, 사실은 니가 젤로 무섭다~~ 야야, 독한 대장이 있응께 약졸도 강한 군사가 되는기지...너무 띄우나? 이러다가 떨어지면 아플낀데..ㅎ 나는 그날 못가서 미안하고, 지금은 엄마 병원을 오가느라 바쁜 몸이여. 다음주에 퇴원시킨 뒤에는 친구따라 미쿡에 좀 댕기온다. 29일에 나가서 8월7일 들어온다. 서울 비울 동안 잘 지켜라. 근데, 정작 나도 아즉 검단산을 못가봤잖아...언제 가봐야 할텐데 인연이 없네. 사진보니까 그래도 꽤 깊어보이더만...
좋으시겠다. 서부 쪽으로 가시면 제가 가볼 만한 데 추천할텐데.그라고 컴불 형 돌아오면 번개 한번 때릴려고 했는데...그럼 8월 둘째 주에. 서부인지 동부인지 중부인지 좀 알려주세요.
뭐가 무서운 조직인지 잘 모르겠지만 알대장이 나자빠지지않으면 좋은 조직이여.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매달 셋째주 토요일을 기다리자구.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해주는 산행이란 보약을 먹는 날이니까.^^
무서버라! 끝까지 가본다는 말이 쭈욱 지켜 보겠다는 거지? 무서움을 떨쳐 내는 길은 커밍아웃 뿐인데...
오랜 만입니다. 잘 지내시죠. 8월 둘째 주에 뵜으면 합니다. 그리고 봉규 형님도 한 번 보자고 하시는데 제가 게을러서 약속을 못 잡고 있네여.
정말로 내가 대접받고 사는 줄 착각하겠다. 겨우 쫓겨나지 않고 월급 갖다주는 대신 몸만 의탁해 붙어 살고 있구만. 그날도 거기서 그치지 않고 더 마시고 갔으면 앞으로 산행에 따라 나서기가 힘들 뻔했다. 술자리를 복기해보면 딱 그만두면 좋았으면 때가, 당시 그 자리에서는 딱 더 마시고 싶을 때더라.
알 너하고 멍게가 진짜 무서운 놈들인 거는 진작에 알아 봤었다...둘 중 누가 더 무서운 놈인가는 잘 모르겠고...알의 글이 조금 더 뭐랄까...그 동안의 글보다 유쾌해졌달까,가벼워졌달까...그래서 나는 더 좋네...음악도 좋고...나는 이 노래나 이소라 노래처럼 노래하는 사람의 숨결까지 느껴지는 음악이 좋더라구...
'빠삐따' ... 이 중에서 저는 산행 일정이 빡센지, 아닌지 늘 '따져봐야' 하는 입장인데... ㅎ~
둘째 삐는 삐질거리지 않을지...명예훼손으로 걸릴라~~ㅎ
우찌 아셨어요? 제가 요새 얼굴도 화끈거리고, 땀은 삐질거리게 나고, 무릎도 시큰거리고..... 아무래도 갱년기이행증후군인 것 같어요. 몇 달 후면 저도 이제 오십이다 보이....몸은 그짓말을 안 하는 듯.... 에고
미쿡, 건강하게 다녀오세요.^^ 오래 전에 데스밸리에서 사다 주신 작은 가죽 소품, 아주 귀한 용도로 잘 쓰고 있는데.... 아, 이번에도 또, 모 사오시라는 거는 절대로 아이고요....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