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의 약 500년 역사동안 폐위(廢位)된 왕은 2명입니다(폐위된 후 그의 사후에 복권된 단종(端宗)을 포함한다면 3명입니다.)
<연산군(燕山君)>은 무오사화(戊午士禍)와 갑자사화(甲子士禍)를 일으키며 갖은 폭정을 일삼았다는 이유로, 그리고 <광해군(光海君)>은 당시의 복잡다단한 국내외 정치상황에 대해 확고한 외교술과 정치노선으로 대응해 나갔으나 끝내 반대세력으로 부터 폐모살제(廢母殺弟)등의 이유로 반정을 통해 - 중종반정(中宗反正)과 인조반정(仁祖反正) - 폐위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2명의 왕중 <연산군>은 그의 삶이 파란만장 했고, 광기에 휩싸인 모습을 보여서인지, 유독 TV 드라마와 영화, 그리고 연극으로 수없이 반복해서 우리 곁에 극(劇)으로 찾아오고 있습니다.
물론 그때마다 작가와 연출가의 관점에 따라 폭군(暴君)으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 때문에 나락(那落)에 빠져버린 한 남자로, 이상 성격의 소유자로 그려지고는 합니다.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위치에서 이성과 절제를 잃어버린 왕(王)의 모습처럼 오늘날 관심과 흥미를 끄는 인물도 참 드물것 같습니다.
때마침 이번에 연극과 영화로 찾아온 [이(爾)]와 [왕의 남자]는 <연산군>을 주인공으로 하여 그가 아끼고 사랑했으며, 심복이라 여겼던 광대 <공길>과 그의 동료이자 친구, 연인관계였던 광대 <장생>, 그리고 <연산군>의 애첩 <장녹수>... 이 4명의 애증관계가 얽히고 설켜 펼쳐내는 이야기 입니다.
연산군일기 60권 22장에 [배우 공길이 논어를 외워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 임금이 임금답지 않고 신하가 신하답지 않으니 비록 곡식이 있은들 먹을 수가 있으랴"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연극 [이]와 영화 [왕의 남자]는 이 기록을 토대로 하여 <연산군>이 <공길>을 사랑하였고, 광대극을 즐겼을 것이라는 상상을 하여 만든 가상의 역사극인 것입니다.
따라서 허구의 내용들이 대부분 이지만, 실제 인물과 사건을 토대로 한 내용이기에 상당한 설득력과 진지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조선(朝鮮)의 10대 왕이었던 <연산군>은 아버지에 대한 콤플렉스와 - 변방의 토벌로 북방의 야인들과 남방의 왜구들을 관리하고 지배하여 국경지대를 안정시켰고, 조선의 최고 법전인 경국대전의 완성, 그리고 성리학자들을 정계에 진출시켜 학문과 정치를 하나로 묶은점등은 <성종>의 업적으로 말하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합니다. 따라서 <성종>이 왕위에 있을 때는 어느 정도 태평성대의 시절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듯 합니다... ^^ - 어려서 어머니를 타의에 의해 강제로 잃게 된 서러움, 그리고 천성이 포악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원래 곱지만은 않았으리라 생각되는 그의 성격은 자연스레 그를 희대의 폭군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광대 <공길>은 왕과 <장생>의 사이에서 갈등하고, <장녹수>는 자신만을 바라보는 왕을 원했으나 <공길>에게 점점 빠져드는 <연산군>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공길>을 제거할 결심을 하고 음모를 꾸미게 됩니다.
또한 <장생>은 광대놀음이 한판 끝날 때마다 피바람이 부는 현실과 <공길>을 <연산군>에게 빼앗기게 되는 상황에 환멸을 느껴 궁(宮)을 떠나려 합니다.
그러나 이들 4명은 결국 파국(破局)을 맞이하게 되고 비극적 결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연극 [이]와 영화 [왕의 남자]는 이런 기본적인 줄거리는 같으나 보여주는 '형식' 면에서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의 구애를 받지 않는 특성을 갖고 있는 영화는 <장생>과 <공길>이 궁에 들어오기 전의 사연부터 비극적인 결말부분까지 순차적으로 보여주면서 연극에서 '대사'로 묘사한 부분들과 언급하지 않았던 부분들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연극에서는 <장생>과 <공길>이 궁에 어떻게 들어올 수 있었는지, 그들의 관계가 어느 정도의 관계인지, 그리고 천한 광대가 어떻게 왕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는지 약간은 애매하게 표현되지만 영화에서는 그런 장면들을 직접 보여줌으로써 관객들에게 직접적인 설명을 해주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보다 화려하고 역동적인 화면을 통해 관객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힘이 조금 더 크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영화의 서론 부분을 빼버린, 광대 <공길>이 <연산군>의 마음을 이미 빼앗아버린 후부터 시작되는 연극 [이]는 관객과 직접 호흡을 같이 할 수 있다는 연극의 최대 장점을 살려 '소학지희(笑謔之戱)' 장면들에 중점을 두고 관객들과 웃고 떠들며 한편의 '마당놀이'와 같은 장면들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다소 진지함과 묵직함으로 일관된 영화 [왕의 남자]와 달리 연극 [이]는 신명나게 웃고 떠드는 한판의 코미디와 어둡고 음울한 <연산군>의 독백 장면 등을 통해 관객의 감정을 극단적으로 오르락내리락 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또한 영화는 <연산군>과 <장생>의 대립구도를 통해 광대 <장생>을 부각시켰지만, 연극은 <연산군>과 <공길>의 애증관계를 위주로 하여 만들어져 상대적으로 광대 <공길>이 부각되어 연출자의 시각이 상당히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내용은 거의 엇비슷하지만 이런 점들은 영화와 연극을 다르게 볼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요소들인 것 같습니다.
<정진영>은 정말 제대로 미친 왕의 역할을 너무나 제대로 표현해 내어 절정의 연기력을 과시하였으며, <감우성> 또한 광대 역할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은 듯이 보이는 절묘한 줄타기 솜씨를 뽐내며 혼신의 연기를 펼쳐 보입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연극에서의 <연산군>이었던 <이남희>는 감정의 완급조절이 다소 미흡해 보여 정작 마지막 장면에서의 절규가 그리 와 닿지 않아 상당한 아쉬움을 자아내었습니다.
어쨌든 훌륭한 연극을 토대로 빼어난 수작의 영화를 만들어 낸 점은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라 생각되며, 좋은 작품들이 계속 해서 우리에게 다가오기를 소망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