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제57회 현충일입니다. 현충일의 유래는 1956년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건"(대통령령 제1145호) 및 "현충 기념일에 관한 건"(국방부령 제27호, 1956년 4월 25일)에서 "현충 기념일"로 제정되었으며, 1965년 3월 30일 "국립 묘지령"(대통령령 제2092호) 제17조에 의거 연1회 현충식을 거행하면서 시작됐습니다. 6월6일이 왜 현충일이냐면, 6월6일이 24절기 중에서 망종(芒種)에 제사를 지내던 우리나라 풍습에 따른 것입니다.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죽었던 수많은 영혼들을 기억하며 지내던 현충일을 앞둔 지난 5월25일,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한 김관진 국방장관은 서울 공항에서 12구의 국군전사자 유해를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이 국군전사자 송환을 마냥 기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 안에 우리가 모르는, 그리고 방송과 언론에 나오지 않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현충일을 맞아, 국군전사자 유해 송환에 담긴 부끄러운 우리의 역사를 생각해보겠습니다.
'과연 이들은 국군전사자였을까?'
이번에 송환된 국군 전사자 유해 12구는 1950년 12월 함경남도 장진호 전투 등에서 전사한 군인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국군 편제에서 전사한 군인들이 아닙니다. 모두 미군소속이었습니다. 즉 한국군으로 입대했지만, 카투사 등으로 미군에 배속되어 미군과 함께 전투를 치르다가 전사했다는 사실입니다.
돌아온 유해 12구 중에서 신원이 확인된 사람은 미 7사단 15전차대대에 배속된 카투사 김용수일병과 이갑수 일병입니다. 나머지 10구는 신원이 아직 확인되지 못해, 당분간 현충원 유해봉안소에 안치되었다가, 나중에 신원이 확인되면 가족에게 통보하고 현충원 묘역에 안치될 예정입니다.
카투사도 한국군이었으니 국군이지 그것이 무슨 큰 문제이냐고 따지느냐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 유해 송환은 1953년 정전협정이 체결된 이후 처음 송환된 국군 전사자 유해라는 사실입니다. 당연히 국군이니 한국에 인도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 좋겠지만, 이 유해는 어쩔 수 없이 송환된 케이스입니다.
이번에 한국에 돌아온 국군전사자 유해는 국군으로 한국에 돌아 온 것이 아닙니다. 국군은 북한으로부터 한 번도 전사자 유해를 돌려 받은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북한과 한국은 한국군 유해 발굴 송환 규정을 체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번 국군전사자는 사실 북한과 미군이 체결한 미군유해발굴 사업 협약에 따라 미국 합동전쟁포로실종자사령부(JPAC)가 지난 2000~2004년 북한 함경남도 장진호 주변 격전 지역에서 발굴했던 유해들과 함께 하와이 감식부대로 보내졌고, 전사자 유전 감식을 한 결과 한국인으로 발견돼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결국, 실제 이들은 미군 소속이었기에 한국에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지, 한국군 소속이었다면 수십 년 세월 동안 북한에 머무는 수백 명의 국군 유골들처럼 돌아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 경기도 파주군 적성면 답십리에 위치한 북한군과 중공군 '적군묘역'
현재 한국은 북한군 유해를 발굴해 경기도 파주군 적성면에 묘역에 안치했지만, 북한은 이런 유해를 돌려받기 원하지도 않고, 한국이 원하는 한국군 유해 송환에도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는 형편입니다.
미군은 북한과 함께 자국의 군인들을 발굴해 유족의 품으로 돌려보내고 있지만, 전쟁의 당사자인 북한과 한국은 미군과 다르게 수백의 영혼들이 그저 이름 모를 산골짜기에 어떻게 버려져 있는지 아무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 부끄러운 전쟁의 역사:어린 학도병 카투사'
이번에 송환된 유해 중에는 유독 18세의 나이에 전쟁에 참전하여 죽은 김용수 일병이 왜 어린 나이에 한국군도 아닌 미군 소속으로 전사했는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한국 전쟁 당시 18세 어린 나이의 한국 군인은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당시 병역법은 만 20세 이상이 입영대상이었고, 미군과 체결된 협약에 따라 한국군은 10만 명 이상의 군인을 보유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18세,17세,16세 어린 나이의 학생들은 학도 의용군이나 학도병이라는 명목으로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어린 나이의 학생들이 미군에 배속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미군이 한국 전쟁에 참가할 당시 병력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맥아더 사령관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한국군 신병을 미군에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고, 이에 따라 총을 멘 상태에서 총을 질질 끌지만 않으면 무조건 입대시켰습니다.
▲ 일본에 위치한 미군'후지캠프'에서 훈련을 받고 있는 카투사들
여기에 고등학생 (당시는 6년제 중학교)은 그나마 학교에서 영어를 조금이나마 배웠기에 미군과 소통을 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미군 카투사로 배속됐고, 이들 대부분은 미 7사단에 배속돼 일본에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이 당시 카투사 인원만 해도 총 8600여 명에 달하기도 했습니다.
전쟁이라는 매우 급한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어린 학생들이 한국군도 아닌 낯설은 미군들과 함께 거친 전투를 치르고 전사했던 역사는, 우리의 부끄러운 전쟁 역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 나이 17살에 학도병을 거쳐 미군 2사단에 38연대 유격중대에 배속된 이용만 전 재무부 장관
어린 나이에 카투사에 입대해 전쟁을 치렀던 학생들이 영어를 하면 얼마나 했겠습니까?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잘 알아듣지 못하는 영어 때문에 죽은 이들도 숱하게 많았다고 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러니 '종북'의 위험과 안보가 중요하다는 주장만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한국군 송환이나 미군에 의존하지 않은 '자주국방'의 중요성과 대비책은 고민하지 않고 있습니다.
전쟁은 다시 일어나지 말아야 할 끔찍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전쟁을 막기 위해서는 말로만 되풀이하는 주장과 시위는 필요가 없습니다. 정작 필요한 군사 조약이나 우리 스스로 우리를 지킬 수 있는 자주국방력을 키워야 합니다.
현충일 아침에 어린 나이에 전사하고 미군의 도움으로 겨우 유족의 품에 돌아온 이들을 기억하며,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창피함을 알고 다시는 이런 슬픈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