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러분은 평화를 위해 어떤 일을 하고 있습니까?” 2010년 케이프타운에서 열린 3차 로잔대회에 참석했을 때 소그룹을 이끌었던 영국인 리더 마틴이 멤버들에게 물었다. 대회 주제인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기와 화해케 하시는 하나님’(고린도후서 5:19, God in Christ, reconciling the world to himself)에 맞는 소그룹 지정 질문이었다. 내가 미리 준비해둔 답변과는 결이 다른 물음이었다. 나는 ‘캠퍼스와 교회 청년 공동체를 세우고 있으며, 총체적 복음주의 사회선교와 지성운동에도 관심을 두고 참여하고 있다’ 정도의 대답을 생각했다.
마틴은 다시 물어왔다. “지역교회가 평화를 만드는 공동체로 살기 위한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요?” ‘평화 만들기라….’ 평화와 화해, 다 성경에 나오는 말이지만, 모름지기 선교대회라면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디모데후서 4:2)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사도행전 1:8)처럼 전도나 제자 삼기와 관련한 간증, 헌신이나 뜻밖의 회심, 공동체 성장 및 선교 전략을 공유하지 않겠나 싶었다. 내 순서가 왔을 때, 나는 두 번째 질문은 모른 척했다. 첫 번째 질문에 겨우 답했다.
나는 교회에서 한창 청년 남녀 간 이해를 돕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당시 인기를 끌던 존 그레이의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내용을 나누며 그동안 남녀가 서로를 얼마나 오해해왔는지 알아가도록 했는데, 그것이 내가 진행한 화해 사역이 아닐까 한다고. 사실 속으로는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싶었다. 이런 안전하고 무해한 책 나눔을 평화 만들기라고 떠들다니. 차라리 그런 관점과 목표를 의식하며 사역해본 적 없다고 답했어야 했다.
‘화해의 여정’, 기독교 선교의 상상력
케이프타운 대회에서 나온 화해 논의는 르완다 인종 학살을 직접 경험한 성공회 주교이자 르완다 IVF 총무였던 안투완 루타이시어(Antoine Rutayisire)에게서 나왔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르완다는 전체 인구 중 가톨릭을 포함한 기독교인이 90%인 기독교 국가였다. 벨기에가 식민 통치를 할 때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부족 분열 정책을 시행했는데, 인구 구성상 소수인 투치족(Tutsi)에게 특혜를 주어 후투족(Hutu)을 통치하게 했다. 벨기에는 분열을 남겨놓고 떠났다. 1962년 르완다가 독립한 이후로 투치족은 후투족의 보복 대상이 되었다. 결국 수십 년 갈등이 누적되어 1994년 폭발했다. 개신교가 한창 성장하던 1994년 4월부터 3개월간 투치족이 학살되어 총인구 800만 명 중 100만 명이 희생되고 250만 명이 난민이 됐다. 가해자 중에는 목회자도 있었고, 교회는 학살 현장이 되기도 했다.1) 초유의 참극이었다.
화해를 말해야 할 교회는 학살 주동자가 되고 말았다. 안투완은 이렇게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첫째, 복음의 메시지가 사회문제와 무관하게 전파됐다. 부족·계급이 얽혀있는 사회적 갈등을 도외시하고 개종·문명화에 주력하다 보니, 부족 정체성이 짙고 적개심을 품는 그리스도인이 증가했다. 둘째, 아프리카 특유의 전통적인 일원론적 세계관을 무시한 선교 정책으로 조상의 권위 아래 기독교 신앙을 갖는 혼합적 형태가 유지되었다. 셋째, 복음 전도자들이 분열했다. 르완다에서 선교 기득권을 가진 가톨릭 선교사들이 개신교 선교를 방해하면서 교단 사이에 적개심이 깊어졌다. 넷째, 교회가 이익을 위해 정치권력과 관계를 맺으면서 예언자적 사명을 수행하지 못했다. 대량 학살의 충격이 있었는데도 르완다에서의 교세가 2002년 94%로 증가했다. 교회는 지난 과거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인종 간 화해를 말하는 일을 정치적 사안으로 간주했다. 안투완 자신도 화해를 말할 때마다 예수와 정치를 섞지 말라는 충고를 듣는다고 했다.2)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비슷한 역사적 불화가 떠오른다. 남북 평화통일을 추구하려 했던 김구, 조봉암 선생은 일찍이 죽임을 당했다. 6·25 전쟁으로 남북한 총인구 2,500만 명 중 500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다른 전쟁과 비교했을 때 민간인 희생이 매우 컸다. 좌익으로 의심된다는 이유로 2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남한 사람들이 공권력에 의해 전국 곳곳에서 학살되는 보도연맹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3) 그 외에도 남과 북을 오가며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었다. 한국 사회는 화해를 말하기엔 너무 참혹한 동족 살상의 기억이 무의식 아래 남아있다. 남아공의 ‘진실과 화해 위원회’(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ttee, TRC)를 모델로 삼아, 2005년 한국에서 출범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6·25 전쟁 당시 학살의 규모를 부분적으로 확인했다. 화해의 한 단계로서 과거를 있는 그대로 대면하는 일이 사회적으로 일어난 셈이다.
이 근본적 불화 사건은 메시아 탄생 소식에 겁먹은 헤롯에게서 자식을 잃은 이스라엘 여인들이 위로받기를 거절했다는 말씀(마 2:18)처럼 화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조건으로 작동한다. 인공지능과 스마트폰만 있으면 모든 일이 가능할 것만 같은 과학기술 시대이지만 화해는 여전히 난망해 보이는 과제다. 보수와 진보, 영남과 호남, 서울과 지방, 2030과 4050, 20대 남성과 여성이 서로 끓고 있다. 근원적 갈등 당사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승부가 70년 넘도록 끝나지 않았다. 남과 북은 정전 상태이다. 불화를 감수하고 화해를 회피하는 역사적 습관이 일상 곳곳에 배어있다. 제국주의가 조장한 르완다 내 갈등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우리나라는 다른 부족 사이에서 벌어진 갈등이 아닌 동족 내부 갈등이기에 어쩌면 더 비참하고 심각하게 느껴질 수 있다.
로잔운동은 그럼에도 화해를 말한다. 가해와 피해의 악순환 속 문자적 정의를 실현하려면, 다 죽는 길만 남는다는 사실을 복음주의 지도자들도 알고 있다. 로잔에서 화해 분과 의장을 맡았던 크리스 라이스(Chris Rice)는 이렇게 강조한다. ‘화해는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선교의 핵심이자, 그리스도인이 삶의 여정에서 요구받는 소명이다.’4) 그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불의와 타협하고 원수를 억지로 용서하는 이벤트에 참여하는 일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피해의 참상을 모조리 기억해내고, 절체절명의 순간에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고 탄식하며 의례적 위로를 거절하면서, 기약이 없어 보이는 화해의 여정을 걸어가야 한다는 말이다.
케이프타운서약도 1부 신앙고백 마지막 10항 ‘우리는 하나님의 선교를 사랑한다’에서 ‘교회는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변혁하시는 선교에 참여하기 위해 존재하며, 우리의 선교는 하나님의 선교에서 나오고, 선교 대상은 창조세계 전체이며, 그 중심에 십자가의 구속하는 승리가 있다’고 서약했다.5) 이를 근거로 2부 행동 요청 B항 ‘분열되고 깨어진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평화를 이루기’에서는 “하나님과의 화해와 이웃과의 화해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정의를 추구하는 근거이자 동기”라고 진술하고, 교회는 지속적 화해를 위해 과거와 현재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며 용서를 주고받을 뿐 아니라 폭력과 억압의 피해자에게 보상을 제공하는 일에 헌신해야 한다고 말한다.6) 이처럼 서약의 지향은 분명하다. 하나님의 선교를 수행하는 교회의 총체적 선교가 화해적 행동으로 드러나야 함을 구체적으로 진술하고 있다.7)
화해 여정에 나설 수 있는 이들은 사회적으로 습득된 정체성에 고착되지 않고 새로운 정체성을 고백하는 사람뿐이다. 세상이 부여한 정체성에 고착된 사람은 가해 상대를 도무지 용서할 수 없다. 새로운 정체성을 옷 입은 사람만이 민족·계급·세대 정체성에 매인 집단과 개인을 성찰할 수 있다. 이 관점은 열정적 선교자 바울이 선포한 말씀에서 비롯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17).” 우리는 여기서 더 나아가, 18절에 나오는 내용을 주목해야 한다. “우리를 자기와 화목(reconcile)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the ministry of reconciliation)을 주셨으니” 화목은 곧 화해이다. 새로운 피조물로서 전도하고, 제자 삼고 헌신하라는 표현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바울은 거듭 ‘화해’를 말한다.
기독교 선교의 상상력이 더 이상 전도와 사회참여 논쟁을 맴돌고 있어서는 안 된다. 이 때문에 긴장이 이어진 지 반백 년이 흘렀다. 사막에 샘이 넘쳐흐르고, 사자와 어린양이 뛰놀며, 어린아이와 뱀이 함께 뒹구는 화해의 세상이 오래된 현실이었다는 믿음이 필요하다. 이 상상은 지금부터 우리 태도와 훈련 가운데 구현하여 다음 세대가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아니, 공감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힘을 합쳐 하나님의 ‘화해의 선교’가 한국 복음주의 기독교인의 사명으로 진술돼야만 한다.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총체적 선교
누군가는 묻는다. 로잔을 앞세우던 복음주의 진영은 그동안 어떻게 이 행동 요청을 구체화했느냐고. 사실 하나님의 선교, 하나님의 화해는 우리 손에서 완성할 수 없다. 변변한 평가 척도도 없다. 그럼에도 화해의 선교를 중심에 두지 않았음을 인정한다. 그렇다면 다음 세대 복음주의 신앙인은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을까? 로잔의 총체적 하나님의 선교 관점, 화해 운동의 요청 관점에서 30세 전후 청년들 이야기를 들어봤다. 그들에게서 선교적 움직임이 보였다. 선배들이 손 놓고 있는 사이, 선교의 영이신 성령께서 직접 인도하셨던 것 같다.
이주노동자를 정기적으로 만나는 백성은 씨(29)의 증언이다. 신학대를 나왔지만 목수로 일할 필요를 느껴 주택을 짓고 있다. 2년 전 캄보디아 노동자 사망 사건을 접하고 교회분들과 포천 이주노동자센터를 방문한 후로 지금까지 매달 한 번 토요일 오후에 이주노동자들과 식사 교제를 나누고 있다. 야채 농장 기숙사로 초대받아 그들의 모국 음식을 먹기도 한다. 식사 중 자연스럽게 친해지면서 힘든 사정에 공감하게 되었다. 주로 산업재해 판정을 받도록 도와주거나, 퇴직금을 받도록 고용주와 노동자 사이를 중재하기도 했다. 성은 씨와 함께 봉사하러온 한 집사님은 퇴직금을 받아야 하는 필리핀 노동자를 대신해 사장을 설득하여, 그가 11년 노동한 대가를 받고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왔다. 그 돈은 노동자의 자녀들 학자금으로 쓰였다.
성은 씨는 자신이 하는 일에 담긴 선교적 의미를 알고 있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일이 내게 한 일’이라는 주님의 말씀(마 25:40)을 새기면서. 우리 사회의 지극히 작은 자는 이주노동자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도움이 그저 도움으로만 그치지 않았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동료 노동자들도 서로서로 도움의 손길이 되어주고 있다. 이런 사역을 궁금해하던 한 무슬림 노동자는 성경 공부를 시작하고 교회도 나왔다. 자원봉사의 선순환 속에 선교적 결과까지 내고 있는 모습이다.
로잔운동도 주목하는 디지털 시대 선교적 대응 모델이 될 만한 사례도 있다. 인공지능 스타트업 커뮤니티매니저로 일하는 남궁예린 씨(27) 이야기다. 그는 인공지능 서비스에 존재하는 데이터 편향성, 가짜뉴스, 혐오 언어를 전문적으로 필터링하기 위해 영어 사용자들로 구성된 피드백 커뮤니티를 만들고 있다. 그는 자율주행 자동차 실험에서 가장 많이 사고를 당하는 대상은 흑인 여성이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인공지능 서비스에서 나오는 음성의 기본값이 젊은 여성이라는 사실도 신경이 쓰였다. 인공지능이 백인 남성의 편견이 많이 담긴 인터넷 텍스트를 학습한 결과물이었다. ‘창의성’이라는 고유 영역까지 위협하는 압도적 성능을 지닌 인공지능이지만, 사람의 가치관이 개입할 여지를 발견했다. 이에 잘 대응하기 위한 방법을 기독교인의 윤리적 감수성에서 찾을 수 있다는 데 주목하면서 그 분야 연결고리가 되고자 한다. 기술 언어 이슈에 관심 있는 예린 씨는 내년 한국에서 열리는 4차 로잔대회에도 참여할 예정이다.
사회복지사 채영은 씨(25)는 원주에서 정신장애인의 사회 적응 지원 사업을 해왔다. 장애인과 함께하는 삶에 주님의 부르심이 있다고 믿고 장애인 사회복지 영역으로 들어왔다. 지금은 ‘서초열린세상’에서 정신건강 사회복지 전문요원 과정을 1년째 수련하고 있다. 사회복지사로 주로 만났던 분들은 조현병, 우울증 등을 가진 정신질환자였다. 이들을 만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조현병을 가진 노인에게 스토킹당했고, 성격장애를 가진 분에게 60건 넘는 악성 민원에 시달리기도 했다. 어머니에게 정서적 학대를 당해 여성을 혐오하게 됐다는 사연에 긍휼의 마음이 생겼다. 평생 컨테이너나 지하 원룸을 전전하던 60대 노부부가 지상의 주택으로 이사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적도 있다. 전세 보증금 300만 원을 지원하자 생긴 일이다. 아내는 다리가 불편한 조현병 환자이고 남편은 알코올의존증이었다. 부부는 고마워했고, 지금까지 건강하고 화목하게 살고 계신다는 소식을 들었다.
영은 씨는 정신장애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들의 꿈과 특기를 보았다. 이야기를 나눌수록 자신의 어려움도 회복되어갔다. 이런 변화는 내가 아닌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는 확신이 깊어졌다. 정신장애는 약 처방뿐 아니라 안전한 공간과 안전한 관계가 동반돼야 한다. 정신질환 당사자와 함께 회복의 길로 나아가고 싶은 사회복지사로 자신을 기억해달라고 했다. 직업 영역에서 하나님의 치료 능력을 인정하며 장애인을 긍휼히 여기고 있으니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은 물론이고 자기 사랑의 명령까지 직업에서 구체화하는 사례가 아닌가 싶다.
금융 스타트업 ‘오프널’(openul) 사장 박성훈 씨(31)는 기독 창업자 커뮤니티에 관심이 많다. 미국 대학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하고 돌아와 창업했다. 교회에서는 동역자를 찾기 어려워 기독 경영인 모임을 살펴보았지만 어울리기 어려웠다. 그러나 캐나다에 있는 단체 페이스테크를 만났다. 세계의 기술 산업체 사람들이 함께 큐티도 하면서, IT 서비스로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협력하는 모임이다. 한국에서 페이스테크 모임을 주도적으로 시작하려 했으나 코로나로 멈춘 상태다.
그는 평범한 모태신앙인으로, 전도 여행 중 사랑이 넘치는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선교의 필요성을 깨달았다. 이런 마음은 사업에도 반영되었다. 신용이 없는 대학생들에게 의미 있는 경험을 할 수 있도록 20만 원 내외 할부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는 비즈니스 모델이다. 일반은행 대출과 달리 대출 이력이 남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사용자들 구매 이력을 흥미롭게 해석한다. 20만 원으로 고성능 이어폰이나 원하는 신발을 산다. 이것은 그들에게 사치가 아니다. 자존감을 끌어올리는 데 필요한 소비이다. 단돈 만 원도 분할 납부할 만큼 금융의 주도권을 쥐고 싶어 한다. 기성세대는 잘 이해할 수 없는 청년들의 소비 형태를 잘 이해하며 분석하고 있었다. 성훈 씨는 정부 규제가 너무 많은 스타트업계에서 청년들에게 따뜻한 마음을 전하는 사업을 하려고 고군분투 중이다.
축구를 좋아하는 김선호 씨(31)는 최근 축구 커뮤니티 ‘온사이더스’(onsiders)를 만들었다. 그는 주로 스타트업 지원 사업으로 경력을 쌓아온 취업 준비생이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축구를 매개로 온라인 커뮤니티를 만들어 멤버를 모았다. 축구 팬들 사이에는 상대 팀을 비하하는 문화가 있어 늘 문제라고 봤다. 자신이 만드는 커뮤니티는 어느 팀의 팬이든지 자유롭고 건강하게 대화하는 공간이길 바란다. 함께 축구도 하고 온/오프라인으로 경기 관람도 같이하는, 재밌고 안전한 모임을 지향한다. 커뮤니티의 지속가능성은 기술 언어 정신인 ‘탈중앙화’에 달렸다고 본다. 선호 씨는 동호회를 넘어 비즈니스 모델로 커뮤니티를 전환할 계획도 있다.
MZ세대의 직업과 봉사, 취미 이야기였다. 선교적 관점에서 보이는 게 있었다. 표현이 신학적으로 정교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다. 이들에게 로잔의 선교 정신을 소개했을 때 자신이 하는 일이 지지받는 것 같고, 개념적으로 선명해진다는 반응도 있었다. 문제는 각자 발견하는 깨달음이 자기 안에 있을 뿐이라는 점. 새로운 그리스도인 정체성을 가진 이들의 광범위한 연결, 선교적 사명을 다시 강조하는 일은 기성세대 몫이다. 이미 독립적 사유와 행동을 시작한 이들에게 기성 복음주의자들은 그들보다 더 가진 것을 나눠야 한다. 재정과 인맥, 신학적 지식 등. 나이 많은 사람이 경험 말고도 더 많은 것을 갖고 있음을 인정하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한 새로운 정체성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을 연결하는 공통점이다. 이것은 화해의 직분을 받을 자격이 된다. 여기에 전도 우선성이나 총체적 선교 논의는 방법론일 뿐이다. 이미 청년 그리스도인들은 총제적 하나님의 선교에 직관적으로 발을 디뎠다. 나름의 문제의식으로 경험을 쌓아가고 있다. 서로 상관하지 않으면 각자의 길로 흩어지는 것뿐이다. 로잔 한국 개최와, 케이프타운이 제시한 화해의 선교 정신 덕분에 모든 복음주의 진영의 현재를 대면하고 다음 세대와 소통할 기회가 열리고 있다.
■ 주
1) Antoine Rutayisire, 《The Church and The Message of Reconciliation, The Lausanne Movement A Range of Perspectives》(Regnum books international, 2014), 242쪽.
2) 앞의 책, 242-245쪽.
3) 박태균, 《한국전쟁》(책과함께, 2012), 326쪽.
4) 에마뉘엘 카통골레·크리스 라이스, 안종희 옮김, 《화해의 제자도》(IVP, 2013), 13쪽.
5) 로잔운동, 최형근 옮김, 《케이프타운 서약》(IVP, 2014), 60쪽.
6) 앞의 책, 79쪽.
7) 물론 3차 대회 주제가 ‘화해’라고 해서, 화해 사역만 합심해 결의한 것은 아니다. 대회 장소가 인종차별 극복의 역사적 현장인 케이프타운이었지만 본 무대에서는 이런 역사가 언급되지 않았고, 화해 사역 관련 참가자들이 공개적으로 유감을 표명하기도 했다. 1974년 1차 대회 때도 급진적 제자도 그룹이 별도 의견을 낸 것처럼. 로잔운동에서는 일정한 긴장과 다양한 논의가 오간다. 필자는 화해의 선교 관점에서 로잔운동을 정리하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