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펜 서울문학 탐방 - 운현궁 외
일시:2017년 6월 22일 목요일
장소:김수영 문학관, 운현궁, 익선동골목길, 한양의원터(문인사랑방), 박인환서점터(마리서사터), 탑골공원
* 김수영 문학관
국제펜 서울문학 탐방이 금년 오늘로써 7회째다. 이제 7월 6일 1회만 남았다. 우리 부부는 오늘도 참가했고, 다음 마지막에도 참가할 것이다. 문학에 대한 유적을 탐방하며 문학역사와 시대에 따른 문학 현실 등 많은 것을 보고 배우는 아주 보람되고 뜻깊은 시간이다. 먼저 여의도 오성빌딩 국제펜 사무실(11층) 바로 앞에서 고려관광 버스를 타고 도봉구에 있는 김수영 문학관에 갔다. 버스 1대로 40여 명 회원과 사무국 직원 등 43명이 간다. 1시간 정도 소요되었다. 김수영(1921년~1968년) 시인은 성대에서 시창작 공부를 할 때 성찬경 교수님으로부터 그의 '풀'에 대하여 공부했다. 도로변에 있는 김수영 문학관에 들어서니 1층에 그의 시 '풀'이 있다. 1층과 2층 전시실을 관람하고 4층 강당에서 사무총장으로부터 좀 더 자세히 설명을 들었다. 그는 서울에서 장남으로 출생이다. 선린상고 졸업 후 연희전문 영문과에 입학하였으나 중퇴했다. 1956년부터 시작활동을 하며 김경린, 박인환 등과 함께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간행하여 모더니스트로서 주목을 끌었다. 초기에는 모더니스트로서 현대문명과 도시생활을 비판했으나, 4·19혁명을 기점으로 자유와 저항정신을 바탕으로 한 참여시를 썼다. 현실의 억압과 좌절 속에서 일어서고자 하였다. 1960년대의 대표적인 시인의 한 사람으로 현실참여에 충실했다.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강력한 영향을 미친 시인이라 할 수 있다. 1958년 제1회한국시인협회상을 수상했다. 죽은 뒤 출판된 시집으로는 <거대한 뿌리>(1974),<달의 행로를 밟을지라도>(1976)와 산문집 <시여, 침을 뱉어라>(1975), <퓨리턴의 초상> 등이 있다. 김수영은 1968년 6월 16일 사망하였다. 그 전 날인 6월 15일 밤에 문인 3명과 종로에서 술을 마시고 귀가 중 서대문 집 근처 서강 정류장에서 밤 11시경 하차하여 인도를 걷다가 버스가 들이받아 서대문적십자 병원으로 옮겼으나 다음날 오전 8시 50분에 세상을 떠났다. 유작인 마지막 시 '풀에 이르기까지 200여 편의 시와 시론을 발표하였다. 민음사에서는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김수영문학상'을 제정하였다. 그 전 해인 1967년에는 유치환 시인이 대구에서 교통사고로 운명을 마감했다. 문인들의 안타까운 사망이다. 문학관에서 김수영 시인에 대하여 많은 것으 보고 배웠다.

* 운현궁
운현궁은 한국시인협회 사무실이 가까이 있어서 종종 왔던 곳이다. 한국시인협회에서 지방으로 탐방을 갈 때는 이곳 운현궁 앞에서 버스가 출발했다. 오늘은 국제펜에서 서울문학 탐방으로 여기 왔다. 1977년 11월 22일 사적 제257호로 지정되었다.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인 고종(재위 1863∼1907)이 출생하여 12세에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성장한 잠저다. 철종(재위 1849∼1863)의 뒤를 이어 고종이 즉위하자 생부 이하응은 흥선대원군이 되었고, 생모 민씨는 여흥부대부인의 봉작을 받았다. 이곳에서 대원군은 서원철폐, 경복궁 중건, 세제개혁 등 많은 사업을 추진하였다. 고종 19년인 1882년 임오군란 때 운현궁에서 중국 청나라 톈진으로 납치되었다. 흥선대원군의 한옥과 양관을 모두 사적으로 지정하였다. 원래는 궁궐에 견줄 만큼 크고 웅장하였다고 하며, 대원군이 즐겨 쓴 아재당은 없어지고, 한옥은 사랑채인 노안당(老安堂), 안채인 노락당(老樂堂)과 별당채인 이로당(二老堂)만이 남아 있다. 또한 대원군의 할아버지 은신군과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사당도 있었으며다. 고종이 창덕궁에서 운현궁을 드나들 수 있는 경근문과 대원군 전용의 공근문이 있었으나 모두 헐리고 없어졌다. 노안당과 노락당은 가운데에 큰 대청을 두고 좌우에 온돌방이 있는데, 노안당은 초익공 양식을 이루고 노락당은 칠량집으로 우물천장이다. 운현궁의 양관은 본래 대원군의 손자인 이준의 저택으로 1912년 무렵에 건립되었는데, 1917년 이준이 죽은 뒤 순종의 아우인 의친왕의 둘째아들 이우가 이어받았으나 지금은 덕성여대 의 건물 일부로 쓰인다. 한낮의 햇살이 뜨거워서 노안당과 노락당 마루에 앉아서 사무총장의 설명을 들었다. 노안당은 대원이 거처하던 곳이다. 노안당 글씨는 추사 김정희 글씨다. 노락당은 고종과 민비 명성왕후가 혼례식을 올린 곳이다. 사람을 가고 없는데 여전히 건물과 나무와 마당은 남아서 그날을 부른다.

* 익선동 한옥마을
나는 익선동이라는 이름도 골목도 처음 듣고 처음 와 보았다. 아주 좁고 허름한 골목길에 옛날 그대로의 한옥들이 마을을 이루고, 현대의 요즈음 사람들이 생활하는 곳이다. 서울에서 이런 곳이 남아있다니 놀라운 일이다. 어쩌면 우리 나라도 이런 오랜 유적을 더 많이 남겼으면 훌륭한 유산이 되고, 외국 관광객에게도 명소가 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그 당시 정세권(1888~1965)이라는 사람이 은 북촌과 익선동, 봉익동, 성북동, 혜화동, 창신동, 서대문, 왕십리 등 서울 전역에 한옥단지를 건설했다. 골목길을 걸어나오며 그 옛날 선조들의 생활상을 체험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 한양의원 터(문인사랑방 터
익선동 한옥마을 골목길에서 나와 도로를 걷는데 도로변에 한양의원 터가 있다. 종로3가 전철역 주변이다. 지금은 음식점 건물이지만 한때는 한양의원 건물로 문인들의 사랑방이었다. 우리나라 근대 초창기의 양의로 한성의사회 회장과 조선의사협회 초대 간사장을 역임한 박계양이 운영하던 병원 터다. 홍명희, 정인보, 최남선과 같은 당대 문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였다. 길가에 표석이 남아서 그날을 기리고 있다.

* 박인환 시인 서점 터(마리서사 터)
종로 3가 전철역 근처에 박인환 시인이 운영하던 마리서사 터가 있다. 지금은 대한보청기라는 상호가 걸려있다. 박인환은 평양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가 8·15광복으로 학업을 중단하였다. 그 뒤 상경하여 마리서사(茉莉書肆)라는 서점을 경영하면서 많은 시인들을 알게 되어 1946년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해 12월 국제신문에 '거리'를 발표하면서 시인으로 데뷔하였다. 지난번 탐ㅁ방에서는 그가 살았던 터에 가 보았다. 서점 앞 진입로 길은 송해길이라고 안내 간판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길 건너편에는 국일관 건물이 우뚝 솟아있다. 우리 부부가 황희 문학상을 받았던 건물이다. 문인들의 족적을 따라 훈훈한 탐방이다.

* 탑골 공원
오늘의 마지막 탐방지다. 두 아들을 기를 때 교육상 데리고 왔고, 다 성장 한 후에도 우리 가족이 여러 번 왔던 곳이다. 서울 종로구 종로에 있는 한국 최초의 공원이다. 탑골 공원 건너편에는 김수영 생가 터가 있다. 이 곳은 종로2가로 시인 김수영(1921~1968)이 태어난 곳이다. 시간 관계로 건너가 보지 못했지만 그 건물을 조망하였다. 탑골 공원에 들어서니 의암 손병희孫秉熙 동상이 크게 서 있다. 1966년에 건립한 동상이다. 1967년에 건립한 한용운 기념비도 있다. 원래는 원각사 절 터인데 지금은 그 유적만 조금 남고 공원이 되었다. 3.1 운동의 최초 발상지인 팔각정 정자 그늘에 앉아서 설명을 들었다. 곁에는 원각사지 10층 석탑이 투명보호막에 싸여 오롯하다. 그래서 이 공원을 탑공원이라 부르기도 했다. 탑동공원, 파고다 공원이라고도 한다. 파고다는 탑이라는 뜻이다. 1991년 사적 제354호로 지정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사찰 흥복사가, 조선시대 전기(1464)에는 원각사(圓覺寺)가 그 자리에 있었는데, 연산군이 원각사를 폐사하고 중종 때 건물이 모두 철거되면서 빈터만 남아 있었다. 1897년 영국인이 설계하여 공원으로 꾸며졌다. 1919년 3.1의 발상지로 더욱 유서깊은 탑골공원은 현재 시민의 휴식광장으로 공개되어 있다.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던 팔각정을 중심으로 국보 2호인 원각사지 십층석탑, 보물 3호인 대원각사비 등의 문화재가 있다. 1980년에 제작 ·건립한 3·1운동기념탑과 ·3·1운동벽화도 있다. 서울시에서는 그 동안 공원의 북서쪽 둘레에 있던 파고다아케이드가 임대기간 만료로 철거됨에 따라 1983년 그 자리에 투시형 담장을 설치하고, 서문과 북문 등 사주문을 복원하였으며, 공원 부지도 확장·정비하여 조상의 독립정신을 기리는 사적공원으로 면모를 일신시켰다. 1992년 이곳의 옛 지명을 따라 파고다공원에서 탑골공원으로 개칭하였다. 여기서 국제펜 서울문학 탐방은 끝나고 헤어졌다. 우리 나라의 역사와 문학에 대하여 많은 것을 배운 소중한 문학탐방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