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리산국립공원 남쪽 끄트머리이자 법주사 서쪽에 나지막하지만 속리산 8봉 가운데 하나인 수정봉(水晶峰)이 있다.
지형도상의 ‘수정봉(568.5m)’은 그저 밋밋한 봉우리지만 200여m 떨어진 ‘561.9m봉’은 암봉으로 이루어져 있고 가까이에 전망이 좋은 너럭바위가 있어 ‘작은 수정봉’이라 명명하였다.
이는 지형도를 따랐기 때문.
‘작은 수정봉’ 암벽엔 ‘水晶峯’이라는 각자가 새겨져 있고, 유산(遊山)을 한 시인묵객들의 이름이 새겨졌다.
그렇다면 예전엔 이 바위 봉우리가 수정봉이었을 테지만 조금 더 높은 봉우리에 이름을 양보했으리라.
더욱이 이 봉우리 옆 커다란 너럭바위에 ‘거북이’가 목을 쳐들고 있어 한눈에 봐도 심상치 않아 보이는 길지임이 분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속설(俗說)이 전하고 있다.
‘보은 속리산사실기비(報恩俗離山事實記碑)’에 의하면 어느날 중국의 술객(術客)이 찾아와 ‘거북바위’가 중국의 재화(財貨)를 실어내갈 영물(靈物)이라하여 거북바위의 머리를 깨뜨리고 등 위에 10층탑을 세워 기운을 진압했다.
수정봉 정상의 흙이 붉은 것은 그때 흘린 거북이피 때문이라는 것.
‘수정봉’이 법주사 서쪽 산이라면 ‘남산(633.7m)’은 말그대로 남쪽 산인 것.
우리는 이 두 산을 이어탈려고 하였으나 산의 위세(?)에 눌려 남산은 뒤로 미루고 말았다.
암릉으로 이루어진 산세에 소나무가 있어 한 폭의 동양화를 수놓고 있고, 암봉에 올라서면 주위 키높은 산들이 오히려 머리를 조아린다.
거기다 발밑에는 포실포실 마사토가 땅의 기운을 받치고 있으니 氣가 뿜뿜 살아있는 산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어쩌랴, 비탐(非探)구역인 것을~
비산(非山)을 유산(遊山)하였으니 그 찜찜한 느낌은 어쩔 수가 없다.
‘법주사(사적 제503호,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는 553년에 의신 조사가 창건했으며,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석련지(국보 제64호)·사천왕석등(보물 제15호)·마애여래의상(보물 제216호) 등이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코스: 법주사 소형주차장-산제당-물탱크-암봉 전망대-암봉 우회-수정봉-작은 수정봉-거북바위(너럭바위)-법주사-금동미륵불-일주문-매표소-속리산 터미널(6.5km,4시간)
약 6.5km에 4시간.
고도표. 순수 산행거리는 3.5km 남짓이고, 나머지는 법주사 탐방과 이동구간.
<산길샘>
<월간 산> 클릭하면 원본크기.
<월간 산>
이동중 차에서 급히 쓴 표지기와 현장에서 급조한 '小水晶峰561.9' 표지기.
버스는 13년 전 들머리인 상주군 '속리산화북분소'에서 산꾼들을 토해 낸 뒤 법주사 주차장으로 이동을 한다.
이동거리(32km, 38분)가 의외로 길다.
버스가 '소형주차장'까지 올라와 B팀들을 내려준다. 이는 속리산터미널(대형주차장)에서 이동하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함인 것.
좌측으로 소형주차장을 안내하고, 우리는 거기까지 내려온 능선자락에 올라 탈 것이다.
소형주차장을 지나며 화장실에 들어갔으나 겨울철 동파관계로 폐쇄되었다.
능선 자락이 소형주차장으로 뚝 떨어진 곳에서...
모퉁이를 살짝 돌자 산자락 언저리에 산제당이 보인다.
문은 굳게 잠겼고...
빛바랜 안내판만 카메라에 담는다.
'보은 사내1리 산제당(報恩 舍乃一里 山祭堂, 충북 민속문화재 제19호)'은 전통양식이 남아있는 산제당으로 현재도 매년 정월에 산제를 지내고 있어 마을 공동체 신앙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산제당에서 들머리를 찾기 위해 고개를 쳐드니 가파른 산자락에 버티고 선 우람한 바위가 앞을 막는다.
그래서 우측 산사면을 비스듬히 돌아...
능선에 바로 붙는다. 오늘의 안내는 열공을 한 아흔이 다 된 권형님.
능선에는 커다란 수조가 있고...
조금 더 오르자 다시 커다란 바위를 우회하게 된다.
뭔가를 닮은 듯한 이 바위를 '한덤'님은 작은 문장대라고 한다. 닮긴 닮았네.
바위 전망대에서 내려다 보는 조망. 건너 광대수산이가?
암봉의 위용을 느끼자 예사롭지 않을 산세임을 직감한다.
산 아래에 수정초등학교와 속리산면.
수정초등학교 뒷산 하늘금에 예사롭지 않은 바위가 있어...
당겨 보았더니 무언가를 닮긴 닮았는데, 열공한 권형님이 '주먹바위'라고 한다. 그렇다. 주먹을 불끈 쥔 모습이다.
능선 끝자락과 속리산면 시설지구.
부리가 잘린 수리매바위.
암봉 아래의 수정초교 모습.
별로 위험하지는 않는 산세에...
크고작은 바위가 흩어져 있다.
푸르른 소나무.
암릉을 올려다 보다...
건너 수정산을 짚어본다.
그러다 둥그스름한 암봉에 올라...
정수리의 금샘(?)을 들여다 본다. 금정산의 금샘엔 금빛 고기가 유영을 했다하고, 어떤 바위샘에선 올챙이가 노닐고 있었는데.
히끄무레한 산 아래로 법주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 뒤로 속리산 천왕봉이 우뚝하고, 우측 골짜기에 태봉이 자리할 것.
바위 봉우리에 선 권형님과 한덤 님.
그리고 나.
속리산국립공원이 높고길게 스카이라인을 그리고, 우측 골짜기엔 태봉이 솟아 있을 것.
암릉구간을 좌측으로 우회하며...
올려다 본다.
그러다가 다시 오른 바위 전망대.
권형님의 유산(遊山)은 알 만해.
암릉구간을 우회하다...
올려다 보는 모습.
송진채취는 우리 민족의 생존수단.
거대한 바위를 이고...
다시 능선에 붙는다.
다산(多産)을 상징하는 다지송(多枝松)이 사방으로 팔을 뻗는다.
바위가 무리지어 있는 곳.
그곳에 지형도 상의 수정봉이 있다.
수정봉엔 육각정자가 있었던 듯 6개의 주춧돌과 길다란 디딤돌이 있고...
허물어진 정자의 잔해가 한곳에 모아져 있다.
표지기를 걸었다.
이제 200여m 떨어진 '작은 수정봉'을 찾을 차례.
작은 수정봉은 암봉이었고, 그 암벽에 '水晶峯'각자가 새겨져 있다.
그 아래 너럭바위에...
거북이가 고단한 몸을 쉬고 있다.
이 거북바위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고 있다.
중국 당나라 태종이 세수를 하는데, 대야에 큰 거북 그림자가 비쳐 도사를 불러 물으니 “동국 명산에 큰 거북이 머리가 당나라를 향하고 있어 재물과 인재가 동국으로 들어가게 됐다. 당장 사람을 보내 거북이 머리를 없애라”고 했다.
동국땅을 샅샅이 뒤진 당태종은 속리산 수정봉에서 돌거북을 발견해 목을 자르고, 그 위에 10층석탑을 쌓아 거북의 정기를 눌렀다고 한다.
1653년 효종 때 이 사실을 알게 된 목천군수 이두양이 거북 머리를 찾아 붙혔으나 목을 이은 흔적은 그대로 남게 됐다고 한다.
또한 1655년 병마절도사 민진익은 거북 등에 놓여 있던 석탑마저 허물어 버렸다고 한다.
너럭바위 거북이의 몸통엔 석탑의 잔해인 커다란 석물이 나딩굴고 있고, 거북바위 아래에는 당시 허물어 버린 석탑 부재들이 남아 있다.
너럭바위 끄트머리는 깎아지른 단애로 이루어져 있어 위험을 알리는 금줄이 쳐져 있다.
바위에 파여진 홈은 오래전 안전난간을 설치한 흔적인 듯.
10층 석탑은 허물어져 버렸지만 그 석탑의 잔해인 듯한 석물은 이렇듯 나딩굴고 있다.
거북바위·너럭바위에서 내려다 보는 법주사.
살짝 당겨본 모습.
당태종이 우리 땅의 정기를 끊기 위해 거북목을 쳤다는 전설이 서린 거북바위. 목부분에 이어 붙인 흔적이 뚜렷하다.
다시 작은 수정봉으로 돌아와 급조한 '小水晶峰'표지기를 매달았다.
하산길에서 밧줄난간 좌측으로 벗어나면 석문(石門)을 지나 문장대로 이어지는 길.
조금 들어가 슬랩바위 전망대에서 속리산 주능선을 올려다 보다 되돌아 섰다.
내려오며 올려다 보니 거대한 암반으로 이루어진 산세다.
뒤돌아본 모습.
법주사로 내려가는 길에서...
법주사가 내려다 보인다.
법주사 '금동미륵대불'의 뒷모습.
산자락을 내려서자 거대한 암벽에 각자들이 숱하다.
그 정수리엔 콧날이 날카롭고 이목구비가 선명한 무엇이 내려다 보고 있다.
그 아래엔 장삼이사들의 이름과 네모 반듯하게 깎은 비석이 암벽에 끼워져 있다.
'보은 법주사 자정 국존비(충북 유형문화재 제79호)'이다.
상단부에 가로로 '속리산 법주사 자정 국존비(俗離山法住寺慈淨國尊)'라는 제액이 전서로 음각되어 있다.
비문은 이숙기(李叔琪)가 짓고, 글씨는 전원발(全元發)이 해서로 썼는데 부분적으로 안진경(顔眞卿)의 골격을 지닌 유려한 필치이다.
비문에 의하면, 국존은 경상북도 구미 출신으로 속성은 김(金)씨, 법호는 자안(子安)이었으며 뒤에 미수로 고쳤다.
13세에 출가, 19세에 승과 합격, 29세에 삼중대사(三重大師)에 올랐고, 충렬왕 말년에서 충선왕·충숙왕 때 자은종(慈恩宗) 종사(宗師)로서 승통(僧統)의 지위에 올라 오교양종(五敎兩宗)의 승정(僧政)을 도맡았으며, 교학(敎學)에서도 활약했다.
웅신사(熊神寺)·장의사(莊義寺)·법주사(法住寺)·중흥사(重興寺)·유가사(瑜伽寺)·민천사(旻天寺) 등을 거쳐 대구 동화사(桐華寺) 주지였을 때 국존의 칭호를 받았고, 말년에 법주사에 머물다 입적하였다. 시호는 자정(慈淨), 탑명(塔銘)은 보명(普明)이다.<자료>
석물들이 흩어져 있는 곳.
금동미륵대불 뒷편에...
'미륵불상조성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 속리산 법주사 답사기
첫댓글 수고했습니다.
행복한 불금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