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412 가해 부활2주일
사도 2:14, 22-32 / 1베드 1:3-9 / 요한 20:19-31
상처에서 치유까지
혹시 트라우마(Trauma)라는 단어를 들어 보신 적이 있나요? 이 말은 '상처' 또는 '뚫리다'라는 뜻으로 그리스어 '트라우마(τραῦμα)'에서 유래했습니다. 원래 이 말은 신체적인 '외상(外傷)'을 뜻했지만, 현대에는 주로 심리적인 충격을 지칭하는 데 쓰입니다. 1980년 미국 정신과 학회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줄여서 PTSD라고 명명하면서 트라우마를 질병으로 인정하였습니다.
변화가 거의 없거나 있어도 비교적 천천히 일어나서 어느 정도 대비할 수 있었던 옛날과 달리 현대인의 삶은 날이 갈수록 숨이 찰 만큼 빨라지고 있어서 그만큼 급격한 변화도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사건, 사고도 수시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갑작스러운 폭격으로 전쟁이 일어나 무고한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는 굵직한 사건부터 시작하여 길을 가다가 또는 일터에서 사고를 당하거나, 학교에서 왕따당하고, 믿었던 사람한테 배신이나 사기를 당해 큰 충격을 받기도 하며, 심지어 인생을 비관해 극단적 선택을 하는데 이르기까지 우리 주변에서 이런 일들이 얼마나 허다하게 일어나고 있습니까? 현실이 이러한 데도 우리는 대개 트라우마가 나와는 상관없는 남의 이야기인 것처럼 살짝 외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무관심과 외면은 트라우마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는데 오히려 방해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어떤 증상으로 나타날까요? 하나는 큰 충격에 대하여 완전히 무기력해지고, 두려움을 회피하려고 의식을 둔감하게 만드는 마비증상으로 나타납니다. 또 하나는 이와 정반대로 사소한 자극에도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충격적 기억이 자주 떠오르는 극단적 흥분상태로도 나타납니다. 이렇게 서로 상반되는 증상이 반복되면서 심한 우울증, 약물중독, 폭식 등으로 점점 트라우마를 입은 사람의 영혼은 피폐지면서 주변과 단절되고, 마침내 자살이란 극단적 비극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저는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을 방금 언급한 관점에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라는 충격을 받은 제자들, 그 중에서도 특별히 토마 사도가 예수님을 다시 만나서 자신의 트라우마를 어떻게 극복했는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다음날 이른 아침에 무덤을 찾아간 막달라 마리아에게 처음으로 발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에 두번째로 발현하셨는데, 요한복음은 그 시간을“안식일 다음날 저녁에”라고 정확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발현이 같은 날 연이어 일어났다는 뜻입니다. 또한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두번째 발현하기 직전 제자들의 상태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어떤 집에 모여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다.”(요한 20:19) 아마도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했듯이, 자신들도 증오하고 모욕하며 죽일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당일 아침에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한 예수님을 만났다고 한 소식을 접하고도 여전히 십자가 사건의 충격 속에 있었습니다. 제자들의 이런 모습은 앞서 언급했던 전형적인 트라우마 증상이라 하겠습니다.
이처럼 외부와 단절하고 무기력함과 극도의 공포 속에 사로잡힌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그들 한 가운데에 서시며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요한 20:19)하고 인사하십니다. 그런 다음, 못에 찔린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주십니다. 그제서야 그들은 예수님이 진짜로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고 기뻐합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만나서 자신들의 트라우마를 치유 받았습니다. 이제 그들은 무기력에서 벗어나 생기를 되찾았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예수님의 제자인 토마는 없었습니다. 그것은 토마가 여전히 트라우마 중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예수님을 목격한 제자들은 놀라움과 기쁨에 가득차서 토마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요한 20:25)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런 말을 할수록 토마의 상처는 더욱 증폭되기만 했습니다. 아마도 그들이 못에 찔린 손과 옆구리도 봤다고 했을 때, 토마는 골고다 산에서 벌어졌던 그 끔찍한 장면이 떠오르고, 그 비명이 다시 들리면서 극단적으로 흥분하기 시작했습니다. 토마에겐 그들의 말은 마치 트리거(Trigger), 즉 총의 방아쇠를 당기는 것과 같은 자극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급기야 토마는 “나는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보고 또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요한 20:25)라고 반발했던 것입니다. 그의 이러한 반응은 단지 믿음이 약해서라기 보다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이 그 충격적 사건을 다시 떠올리며 그 상처에 고통스러워 울부짖는 절규일지도 모릅니다.
그 일이 있은 지도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제자들은 다 모여 있었고, 마침 도마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은 여전히 잠겨 있었습니다. 일주일 전과 마찬가지로 부활한 예수께서 다시 들어오셔서 그들에게 평화의 인사를 하십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도마에게 다가 가셔서 당신의 상처를 보여주시며 보고 만지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도마는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요한 20:28)이라고 고백하며 예수님을 믿습니다. 참으로 영혼이 다시 살아나는 감동적인 치유사건입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사순절 마지막 주일에 우리는 성지가지를 흔들며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그리고 수난복음에 참여해서 성난 군중들의 목소리로 예수님의 처형을 외쳤습니다. 그리고 부활대축일에 예수님 부활을 경축했습니다. 이제 전례력으로 수난시기는 지나가고, 꽃이 만발하는 봄처럼 부활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례적으로 마치 제3자처럼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기념할지도 모릅니다. 그 이유는 어쩌면 우리는 2000년 전 그 당시 그 현장에 없었기에 토마를 비롯한 다른 제자들처럼 그토록 심한 트라우마를 겪지 않아서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는 십자가의 고통도, 부활의 놀라움도, 그들처럼 강렬하게 느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일종의 과거의 사건을 다시 재현하는 하나의 종교적 세레머니(Ceremony)라고나 할까요? 그렇지만, 우리 각자의 삶을 들여다보면, 거기엔 크건 작건 각자 나름의 트라우마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야’, ‘난 불행한 사람이야’ 등의 자책감을 갖거나, ‘나는 안전하지 않아’, ‘나는 아무도 믿을 수 없어’와 같은 불안한 마음이 들거나, 아니면 ‘난 나를 조절할 수 없어’, ‘난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등의 무력감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영혼의 상처들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부활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당신의 상처를 보여주시고 만지게 하셨다는 점은 하나의 큰 통찰(Insight)을 주고 있습니다. 즉, 토마와 제자들은 상처하나 없이 멀쩡하게 나으셔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그 상처를 그대로 가진 채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그 상처를 보고 만지며 자신들의 상처도 치유 받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받은 영혼의 트라우마는 오직 똑 같은 상처를 입으신 분과 만나야만, 온전히 이해되고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이 죽음의 세계에 내려가셔서 죽은 영혼들을 만나셔서 그들을 구원하신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한 토마의 말은 자신의 영혼 깊숙한 곳에 박힌 상처를 온전히 공감해 주고, 치유 받은 사람이 내뱉는 ‘기쁨의 고백’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고백은 단지 부활한 예수님을 믿냐, 안 믿냐 하는 차원을 넘어서 우리 모두의 내면 깊숙이 존재하는 트라우마를 치유 받을 때 나오는 ‘환희의 탄성’일지도 모릅니다. 교회는 이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트라우마로 인해 상처받은 깊은 죄책감과 무기력, 단절과 고립으로 굳게 닫힌 문을 열고 나올 수 있습니다.
이제 부활하신 주님이 여러분 영혼 한 가운데에 오셔서 “평화가 있기를!”하고 인사하시고, 당신의 상처를 내 보이십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뒤로 물러서지 말고, 과감히 예수님께 나아가 그 상처를 만지십시오. 그러면 예수님의 상처를 통해 여러분의 상처도 치유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 영혼 안에는 구원이라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것이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기쁜 소식입니다.
십자가의 상처를 지니고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