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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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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또 새롭게 만난 이승만 박사
“한 국 전체가 적어도 완전히 한 세대 동안은 ”친공적“이었다. 일본이 한국을 합병한 1910년 이후, 소련은 한국의 민족주의자들에 유일한 친구처럼 보였다.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권’을 선포하고 있던 1919-1920년에도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는 그 어떤 조짐도 없었다. 1925년 서울에서 조선공산당이 창당됐다. 소련은 시베리아로 망명한 한국애국자들을 환영했고, 시베리아 및 만주로 망명한 한국인들을 지원했고, 소련만이 대일본 한국게릴라 및 사보타지 활동을 도왔다.”
“미국은 70세가 넘은 이박사의 나이를 고려해서 그가 명목상의 수반, 다시 말해서 그 이름과 명성을 자신들의 목적에 맞게 이용할 수 있는 상징적인 원로 정치가로 남아 있기를 원했다.”
“이승만의 반공정서가 미국정부의 대소 연립정책과 정면충돌했고, 한국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친공정서와도 정면 배치되어 이승만의 동지는 어디에도 없어 보였다.”
“국 내외에서의 독립운동은 대체로 소련을 종주국으로 하는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했다. 그리고 한반도에는 지하공산주의자 일꾼들이 없는 지역이 없었다. 공산주의자들은 그 일반적인 전술에 따라 신문과 영화관을 장악했고, 학교를 파고들었으며, 지역의 노동조합 및 농민단체와 긴밀히 협력했다. 이렇기 때문에 이 박사는 한국에서 반공주의가 당연하게 받아들여 질 수 없다는 것을 절감했다”
“미 국은 소련과의 연정수립에만 관심이 있어 1950년까지도 공산당을 합법적인 정당으로 인정했다. 1945년 11월 21일, 이 박사는 한국의 라디오 방송을 통해 공산주의를 격렬하게 비판했다. 하지중장은 매우 당황했다. 드디어 12월 27일, 모스크바에서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 시행방침이 미소 양측에 의해 발표됐다. 29일, 이 박사는 신탁통치에 반대하며, 한국인들은 이런 결의를 보여야 한다고 호소했다. 이 호소를 들은 한국인들은 총파업을 단행했다. 중앙청 난방이 끊기고 수도관이 파열되고 쓰레기가 쌓여 공공기관들에 오물이 넘쳐났으며 전국 주요 도시에 데모의 물결이 넘쳤다. 그러자 하지 중장은 한국인들이 좀 더 협조만 하면 신탁통치는 필요치 않을 수 있다며 한발 물러섰다.”
“1 월 3일, 한국의 공산주의자들은 모스크바의 지령에 따라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신탁통치를 지지하고 나섰다. 이에 따라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이승만 세력이 곤경에 처하게 됐다. 그동안 소련을 친구 국가로 생각해오던 도시와 지방 사람들이 친소 정서를 더욱 확산하기에 이르렀다.”
“막 다른 골목에 몰린 이 박사는 매일 여러 차례씩 반공연설을 했다. 공산주의는 무서운 콜레라와 같다. 공산당과는 타협이나 협력이 불가능하다, 유일한 선택은 공산주의를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그들과 싸울 것인가 이 하나 뿐이다. 신념에 찬 이런 연설들이 공산주의로 치닫는 물결을 되돌리는 계기가 되었다. 점점 더 많은 국민이 반공으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상은 소련과의 신탁통치 이행을 약속했던 미국 관리들의 분노를 샀다.”
“1946 년 6월 3일, 나는 하지 중장과 부사령관 겸 남한 군정장관 아서 L. 러치 장관과의 미팅에 참석했다. 그들은 이박사가 과대망상증으로 정신이 나간 사람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하지 장군은 이박사에게 은밀히 정신과 의사와의 만남을 주선하기도 했다. 그들은 이박사와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누면 아주 쾌활하고 좋은 사람이지만 대중 집회에 나가면 극도로 과격해지고 소련과 한국공산주의자들을 비난해서 자신들의 입장을 곤란하게 만들고 있다고 했다. 하지장군은 나에게 진지하게 말했다. 이박사를 진정시켜 주세요. 당신이 그렇게 못 하면 이 박사는 끝장입니다. 우리는 소련과 합의하여 한국을 통일시켜야 하는데 이박사로 인해 이미 망쳤을지도 모릅니다. 공산주의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는 한 이박사가 한국에서 설 자리는 없습니다”
“1946 년 6월 23일, 나는 가이징거 소령과 앤더슨 대령과 함께 차를 몰고 서울에서 80km 떨어진 개성에 갔다. 이박사가 주최하는 군중대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대회 시작 3시간 전인데도 이박사를 환영하기 위한 군중들이 길에 늘어서 있었다. 나는 두 사람에게 이 박사 말고 이런 군중을 모을 수 있는 다른 한국의 지도자가 있는지 물어보았다. ‘단연코 없습니다. 그럴만한 지도자는 없어요’. 지난해 12월, 이박사가 영향력을 적극 발휘하고 있을 때, 아놀드 장군이 이박사에게 자중해줄 것을 요구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 당신은 단지 한국인들 중 한 사람일 뿐이오. 당신은 그 누구도 대표하지 않고 있소’. 이 말을 들은 이 박사는 즉시 서울시민에게 호소했다. ‘나라의 명절을 꼭 지켜서 쉬십시오’. 이 호소에 접한 서울시민들은 3일 동안 일하지 않았다. 화부가 석탄을 실어가 버려 불을 지필 수도 없었다. 호텔과 사무실의 라디에이터는 얼어붙었다. 남대문에서 중앙청까지 3km 거리를 시민들이 가득 매워 시위행진을 했다. 아놀드 장군은 깜짝 놀라 이승만에 항복하고 도움을 청했다.”
“군 정은 최근 한국 지도자들에 대한 여론조사를 했다. 70%의 국민이 이 박사를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이런 결과는 군정의 뜻과 배치되기 때문에 그린은 러치 장관의 명에 따라 보고서 내용을 조작해 이박사의 지지도가 과반수에 못 미치는 것으로 보고했다. 여러 지방에서 지방행정 직에 대한 선거가 있었는데 공산당은 21%의 지지를 받았고, 공산당 후보는 15% 미만이 선출되었다. 이 뉴스 역시 차단됐다. 소련을 달래기 위해 공산당을 50:50 비율로 인정해주자는 것이 군정의 정책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비밀을 지키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이 박사에는 이런 말 하지 않았다.”
“46 년 7월 19일, 역시 비밀회의 내용이었다. 군정은 왜곡되고 역설적인 견해를 전개시키고 있다. 군정 지휘관들은 이 박사가 진정한 한국의 대표자라는 것을 확신하면서도 동시에 소련에게는 이 박사가 집권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약속을 계속해 왔다. 그가 강력하게 공산주의를 비판해 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군정지휘관들은 이 박사가 한국인들의 지지를 받고 있지 않다는 것을 소련에 보여주어야 하는데 그게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었다.”
“7 월 20일, 오늘 변영태 교수를 만났다. 그와 나는 군정지지자들의 부류에 대해 토론한 결과 다음과 같이 분류했다. 1) 공산주의자와 소련 동조자: 이들은 군정 하에서 언론과 행동에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 실제로 군정은 이들의 숫자에 합당하지 않게 더 많은 안정과 자유가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한국정부가 수립되면 활동이 위축되지 않을까 우려한다. 2) 친일 부역자: 일본 지배 하에서 그 정도가 지나치게 열심히 일했던 한국인들, 이들은 한국정부가 수립되면 보복을 받을 것을 우려해 군정의 종식을 걱정한다. 3) 친미주의자(아첨꾼): 일부 한국인들은 미군정 하에서 기대이상의 훨씬 높은 지위를 향유했다.”
“미군정에게 한국은 일본보다 훨씬 열등하고 훨씬 덜 중요했다. 일본문제가 다 해결된 다음이라야 한국문제를 다룬다. 서울의 미군정이 갖고 있는 정서는 ‘한국의 순번은 늘 꼴찌에 있다’는 것이다.”
“8 월 1일, 오늘 저녁 이 박사 댁에서 저녁을 했다. 김구씨와 김규식씨 내외분도 동석한다. 내 경험으로 볼 때 이승만은 언제나 주인 역할을 잘 했다. 편안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기분이 밝았다. 오늘은 무용담과 충절에 대한 고사들을 이야기 했다. 남의 말을 경청하며 상대방 말에 맞장구를 쳐주기도 하고 상대방이 농담을 할 때는 기분 좋게 웃어주었다. 김구는 내내 무덤덤한 표정으로 조용히 있었으며, 김규식 씨는 이박사가 이야기를 계속하도록 공손하게 기분을 북 돋아 주었다.”
이상은 건국과 나라수호를 위한 이승만의 대미투쟁 상권 69-102쪽에 있는 내용들이다.
2014.2.2. 지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