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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IST(Korea Advanced Institute of Science and Technology, 한국과학기술원)
과학 인재 양성과 국가 정책으로 추진하는 과학기술연구 수행을 위해 설립된 대한민국의 국립 특수 대학교. 대전광역시 유성구 대학로 291에 위치하고 있다.
영어 약칭은 KAIST(Korea Advanced Institute of Science and Technology, 한국과학기술원)로, 과거 과기원으로 주로 불렸으나 2008년부터는 공식명칭이 'KAIST'로 통일되었다. 그러나 법인명은 여전히 한국과학기술원. 보통의 국립대학교와 달리 대덕연구단지의 정부출연연구기관들과 마찬가지로 애초부터 별도의 법인으로 설립되었다.
한국과학기술원법에 의하여 관리되고 있다. 타 대학들과 달리 정부내 감독부서는 교육부가 아니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이다. 이에 따라 타 대학교들이 적용받는 수시 6회 제한 등이 없다. 카이스트를 교육부로 이관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과학기술계의 반발로 저지되었고, 이명박 정부 당시, 교육인적자원부와 과학기술부를 통폐합하여 교육과학기술부로 개편하면서 교육부 산하가 되었을 때에도 과학기술 담당 국장 산하에 소속되어 기존 교육부의 규제를 피하도록 해주었다. 그리고 박근혜 정부 들어 미래창조과학부가 설립되면서 과학기술 분야 조직과 함께 다시 이관되었다.
현재는 총 4개의 캠퍼스를 보유하고 있고 아래에 있듯 세종캠퍼스 입주가 시작되면 5개가 될 예정이다. 상기한 대전 유성구 구성동에 대덕캠퍼스, 대전 유성구 문지동에 문지캠퍼스, 그리고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회기동에는 서울(홍릉)캠퍼스, 강남구 도곡동에 도곡캠퍼스가 있다. 그리고 부설로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당감동에 위치한 한국과학영재학교(KSA)와 카이스트 글로벌영재교육원을 산하에 보유하고 있다.
약칭은 카이, 자조적인 별명으로 대전공대(이건 포스텍에서 놀릴 때도 쓴다)나 머전공머, 유성공대 등이 있다. 마치 서울대생들이 자조적으로 낙성대생이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한 맥락.
KAIST의 모태인 한국과학원(KAIS)의 설립은 두 트랙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1960년대 초 경제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산업발전에 필요한 과학기술 인력 수요도 점차 커지기 시작했고 정부도 이에 발맞춰 1961년, 경제기획원 내에 기술관리국을 설치하고 과학기술진흥 5개년 계획을 세웠다. 1966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가 설립되지만 목적은 학문연구보다는 국가 산업에 필요한 응용연구를 지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국내 이공계 대학교육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 KIST는 1969년 말 미국에서 공부한 인재를 데려다 연구를 수행하는 데 한계를 느끼고 'KIST 부설 이공계 대학원 설립안'을 제안했지만 문교부와 기존 대학 교수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혀 무산됐다.
KAIST 설립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정근모 박사다. 1969년 1월 말, 당시 뉴욕 브루클린 공과대학의 젊은 한국인 교수였던 정 박사는 미국 국제협조처 처장으로 취임한 해너(John A. Hannah) 박사를 만나기 위해 미 국무성을 방문했다. 해너 처장은 미국의 개발도상국 원조정책이 교육기관 투자 중심으로 변하고 있음을 설명하며 한국에 어떤 교육 원조가 필요한지 물었다. 정 박사는 즉각 '이공계 특수 대학원 설립'을 주장했다. 정 박사는 이를 토대로 그 해 10월 보고서를 작성해 해너 처장과 주미 한국대사에 제출했다. 이를 계기로 한국의 새로운 응용과학기술대학원 설립안이 본격적으로 추진된다. 이때 기존 대학교수들과 문교부 등은 새로운 교육기관 투자 계획에 대해 강하게 반발했다. 당시 KIST소장이던 최형섭 박사의 회고록을 보면 당시 대학교수들은 미국에 이 계획의 백지화를 요구하며 원조 중단을 요청하는 진정서까지 제출할 정도였다.
갖은 반대 끝에 1970년 4월 6일 월례 경제동향보고회에서 설립이 결정됐다. 정근모 박사는 이례적으로 보고회에 초청받아 고 박정희 전 대통령 옆 자리에서 회의를 참관했다. 당시 홍종철 문교부 장관은 타 대학들의 입장을 대변하며 강하게 반대했지만 대다수 장관의 찬성 분위기를 뒤집지 못했다. 이후 한국과학원의 설립을 본격화하라는 청와대 지시가 있고나서 과학기술 전문 교육기관의 설립 작업은 닻을 올리게 된다.
설립자금을 지원키로 한 미국은 한국과학원 설립 가능성을 검토하기 위해 실리콘밸리의 아버지로 알려진 스탠퍼드 대학 명예교수 터만(Frederick E. Terman) 박사를 단장으로 한 조사단을 파견했고 최종적으로 600만 달러의 교육차관을 제공키로 했다. 이렇게 1972년 2월 16일 KAIS가 설립되어 카이스트의 개교는 1972년이 된다. KAIS는 특별법으로 설치되었는데, 이 특별법은 수업료 무료, 자율성 보장 등의 파격적인 조항을 통해 재정 및 제도적 독립과 안정성을 강력하게 지원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제도적 뒷받침이 오늘날까지 카이스트의 분위기와 학풍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물론 교수들이 공부좀 하라면서 세금만 축내지 말고 연구를 해서 국가에 이바지하라고 한다.
1980년대 전두환 정권 시절 정부출연연구기관 설립이 붐이 인 뒤 다시 출연연 통폐합 방침이 나오면서 갈팡질팡 한국과학원(KAIS)과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의 통합이 추진된다. 일단 두 집 얹었다 '한국과학기술원 사반세기'를 보면 통합 당시의 사정을 보다 자세히 엿볼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교육기관과 연구소의 '이런 비합리적인 결합'이 이뤄진 데는 당시 전두환을 필두로 한 신군부의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다. 기록은 "자세한 내막을 밝히기는 어렵지만 몇 가지 추측에 따르면 사회적으로 인지도가 가장 높았던 KIST와 과학원 두 기관을 통합해 출연연 통합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효과를 얻었고 한국과학기술원의 설립자를 전두환으로 날치기 하이 맡으면서 통치자가 과학기술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정치적 제스처의 효과도 거뒀을 것이다"라고 남기고 있다. 사람들은 한국과학기술원 내 학사부와 연구부를 물과 기름에 빗댔다. 연구부는 1988년, 당시 노태우 대통령 당선자에게 과학기술연구부의 독립적 기능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학사부와 분리독립을 요청하는 진정서를 전달했고 제6 공화국은 이를 받아들였다. 결국 KIST는 1989년 6월 12일 한국과학기술연구원으로 출범함으로써 사실상 원상복귀 된다.
동시에 대덕연구단지에는 한국과학기술대학(KIT) 설립이 추진되고 있었다. 1983년, 노동부는 공업고등학교 출신 기능공에게 수준높은 교육 기회를 제공하고자 한국산업기술대학 설립을 추진했고 일사천리로 그 해 9월 문교부로부터 학교법인 설립을 허가받았다. 곧 공사가 시작됐다. 과학기술원도 이런 논의와 별도로 과학영재교육과정에 대한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었고 역시 대상지로 대덕연구단지가 거론됐다. 이 과정에서 5공 정권은 2개의 학교 설립을 '중복투자'로 판단했는지 통합키로 한다. 이후 1984년 12월 과학기술대학 설치를 위한 한국과학기술원법이 개정되고 이듬해 최순달 박사가 초대 학장으로 부임하면서 본격적인 조직 정비가 이뤄졌다. 앞서 언급한 과학기술원 내 학사부와 연구부 분리 문제는 연구부가 서울에 남아 연구기능을 담당하고 학사부는 대덕으로 이전해 과학기술대학과 통합하는 방식으로 가닥이 잡히게 된다.
1984년 KIT가 대전에 설립되었으며, KAIST와의 차이는 연구보다는 엔지니어 양성에 중점을 둔 것이었다. 이 시기 KAIST가 학부과정 설치 준비를 하고 있었고 위에 기술한 통합작업으로 인하여 KIT는 설립되자마자 KAIST와 합쳐지게 되고 1986년에 KAIST 최초의 학부 신입생들이 입학한다. 좀 더 엄밀히 따지자면 KAIST가 서울에서 대전으로 이전하면서 두 단체가 실질적으로 합쳐진 것으로 1989년으로 공식연혁에 남아있다. 이제 세집 그런데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이쯤해서 KIST와 KAIST간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이로 인하여 KIST와 KAIST는 각각 연구부와 학술부로 분리하였다. 통합 이후인 1991년 기사에 실린 혼란상 및 KAIST의 혁신적 교육제도
카이스트는 그 시작부터 한국의 산업화에 기여하기 위해 설립된 것이어서 실용적 학문의 전통이 강하고, 전반적으로 다른 우리나라 대학들보다 그나마 탈권위적인 분위기가 강하다. 초기의 카이스트의 연구주제들을 보면 "양조간장의 대량생산방법 연구", "한글자모의 컴퓨터 자판배치 연구", "한국식 온돌의 현대주택에의 적용" 등 매우 실용적인 연구들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영향은 교육 과정과 연구 풍토에 영향을 미치고 있어 커리큘럼상 다른 공대에 비해 실험과 실습 등이 매우 강조되어 있고, 산학협동연구의 역사 또한 길며, 규모에 비해 특허 출원 숫자도 많은 편이다. 기초과학 분야까지도 응용분야 위주로 발전해왔다. 대한민국의 벤처 붐을 카이스트 출신들이 이끌었다는 점도 카이스트의 실용적인 학문적 풍토가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된다. 자율적인 카이스트의 창업 신화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카이스트를 중심으로 발전해온 한국 과학이 기초과학부문에서 약해진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학생들이 모두 캠퍼스에서 함께 생활하고 있는 덕분에 대학원생과 학부생 사이의 벽이 높지 않아 학부 시절부터 연구실을 접할 기회가 많고, 연구생활에 대해 보다 친근하게 여기는 것 또한 특징이다. 대학원생이 된 이후에도 학부 동아리에 꾸준히 얼굴을 비추는 경우도 많고, 교수들도 학부생들이 연구실에 찾아오는 것을 귀찮게 여기지 않는 편이다. 다만 덕분에 밤샘 실험, 주말 저녁 보충 강의가 이뤄지기도 하는 폐해가 심하다.
하지만 기숙사 생활 특성상 면학 분위기도 좋으며 공부도 열심히 한다. 사실 놀고 싶어도 놀 만한 게 별로 없다. 술 먹는 것만 빼면 고3 수험생 생활의 최소 4년 연장이다.
위의 이유들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교수의 독특한 시험문제 사례들도 카이스트가 가장 많다.
학과마다 차이는 있지만, 역사가 오래되지 않은 만큼 교수들 사이에서도 탈권위적인 분위기가 강해서 서열이 절대적인 권력으로 작용하는 경향이 적은 편이다. 초기에 외국 각지에서 활약하는 젊은 한국인 연구자들을 데려와 만든 기관이어서 서열이 중요하지 않았고, KIT 설립 이전까지는 대학원만 있었기 때문에 선후배 사이의 권위적인 문화가 자리잡지 않았다. 이런 문화가 전반적으로 지배하고 있어서인지 학부가 생긴 이후에도 여전히 수평적인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따라서 동시에 개인주의적인 문화도 강한 편이다.
카이스트의 전신인 KAIS 설립을 두고 논의할 때 당시 관료들은 서울대 공대에 산업기술 연구개발 목적의 부설 대학원을 설치할지, 새로운 기관을 만들지를 가장 심각하게 고민했다고 한다. 새로운 기관 설치로 결정하게 된 주된 원인으로 정근모는 (1) 당시 서울대가 지나치게 이론 중심적이고 권위적이어서 적합하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와 (2) 서울대를 정점으로 하는 기존의 교육제도에 충격을 주고자 하는 의도를 꼽았다. 즉, 오랜 역사와 권위에 기댄 기존의 대학들이 교육제도적 측면이건 학문적 측면이건 새로운 실험을 주저할 때 카이스트가 먼저 나서주어 경쟁적 요소를 도입하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카이스트는 한국과학기술원법이라는 특별법으로 설립되고 주관기관도 교육정책 주관 부처가 아닌 과학기술정책 주관 부처여서 다른 대학들에 비해 높은 자율성을 누리고 있다. 실제로 카이스트는 한국 교육제도에 충격을 던지는 역할을 충실히 해왔다. 특히 2000년대 후반과 2010년대 초반에 걸쳐 로버트 러플린 총장과 서남표 총장이 잇달아 취임하며 내놓았던 대학교육 방안은 그 평가를 떠나 우리나라 대학교육의 패러다임 자체를 흔들어 놓기도 했다. 당시 화제가 됐던 제도는 교수 테뉴어 제도, 입학사정관제, 100% 영어강의 실시 등이 있다. 최근에는 현 강성모 총장 등이 이공계 여성 인력 확대와 육성에 신경 쓰는듯 하다. 또, 대학원생들에게 논문 대신 벤쳐기업 창업시 석박사 학위를 수여하기도 하고 플립 러닝(Flip learning)시스템 도입, 무료 공개 강좌 도입, 중소기업 애로 해결 프로그램 등 최근에도 도전적인 시도도 계속 되고 있다.
이러한 실험들이 가능한 이유는 특수 국립대학이라는 법적 지위와 기업을 중심으로 한 학교 바깥의 우호적인 여론의 덕으로 여겨진다. 특히 산하 영재학교인 한과영 역시 개혁적이고 항상 새로운 시도를 하는 학교로 알려져 있다. 선행학습이 된 아이들보다는 탐구력, 자기주도력, 인내력, 창의력 등의 가치를 영재평가의 기준으로 정의하고 이에 적합한 학생들을 입학시킨다.
카이스트는 연구 중심 대학으로 창립 이후 지금까지 학부보다 대학원 중심이고 규모도 대학원이 학부보다 커서, 외부 인력의 대학원 유입이 언제나 필요한 구조이며 다른 여타 대학보다 학부 순혈주의가 심하지 않다. 학부 역사가 짧아 본원 출신 교수 비중이 낮은 탓도 크며 전공별로 기존의 역사 깊은 다른 학교 출신들도 많다. 물론 학부 역사가 점차 길어지면서 카이스트 학부 출신 교수들도 점점 늘고 있다. 대학원의 경우, 학사를 본원에서 받은 학생들이 많으나 여러 학교에서 학부과정을 마친 학생들도 다양하게 존재한다. 사실 공과대학의 특성과 거의 전원이 함께 기숙사 생활하는 특성상, 서로 안 친해지기 힘들고 힘든 학업 과정에서 서로 위로하며 격려하며 학업에 몰두한다. 또한 벤처 사업가 출신들과 대학원 출신 등으로 뭉친 과기회는 우리나라 최대의 이공계 인맥이며, 이들은 후배들의 벤쳐창업을 독려하고 고문과 지원을 해준다.
이런 면모들 때문에 대한민국 대중들에게 '카이스트'라고 하면 "괴짜 천재들이 모이는 곳", 카이스트 학생은 "범상치 않은 정신세계를 갖춘 이공계 인재들" 정도 취급을 받는다. 이게 장점인지 단점인지는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 어쨌든 대외적으로 '카이스트 출신'이라는 브랜드는 나름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잘 어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