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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을 준비하신 하나님
창 22: 9~14
9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2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창26:5
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1)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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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아브라함은 이삭과 함께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땅에 도착합니다. 8, 9절부터 읽겠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이 말씀에서 흔들리지 않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어떤 위기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은 성공할 때 뿐만 아니라 실패할 때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이 잘 되거나 상황이 좋으면 하나님을 찬양하고 잘 믿습니다. 그러나 위기에 부딪히거나 절망에 빠지면 쉽게 흔들립니다. 그리고 믿음을 쉽게 포기하려 합니다.
자기의 아들을 죽여야 하는 엄청난 이 사건 앞에서 아브라함은 인간적으로 흔들릴 수 밖에 없었고, 당황할 수 밖에 없었지만 오늘 8, 9절 말씀을 보면 의외로 아브라함은 너무나 당당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렇다고 그에게 아버지의 사랑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참된 믿음이 생기면 죽음 앞에서도 담담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8절을 다시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준비해 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고 준비해 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정신력이 아닙니다. 믿음은 자기 의지도 아닙니다. 믿음은 막연한 미래에 대한 기대감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신앙을 갖게 되면 두 가지의 모습을 보입니다. 한 쪽으로 보면 너무나 잘 되고, 한 쪽으로 보면 너무나 일이 안됩니다. 그래서 당황합니다. 아예 잘 된다든지, 안 된다든지 하면 빨리 이해를 하겠는데 어떻게 보면 다 잘 될 것 같고, 어떻게 보면 되고 있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무엇을 의지할 것인가? 아무 것도 없는 현실을 믿을 것인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믿을 것인가?’하는 갈등을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지시한 곳에 도착합니다. 도착하자마자 아브라함은 단을 쌓았습니다. 나무를 벌였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생각할 점이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작업을 아브라함 혼자서 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삭이 나무를 지고 갑니다. 아브라함은 한 손에는 불을 들고, 한 손에는 칼을 들고 갑니다. 장소에 도착했습니다. 단을 만들어야 합니다. 자리를 잡은 후 이삭이 지고 온 나무를 차곡차곡 쌓습니다. 이러한 것을 과연 아브라함 혼자서 했을까요?
아닙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브라함과 이삭이 함께 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자리는 이삭은 죽어야 하는 자리고 아브라함은 죽여야 하는 자리였습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신앙은 이성적으로 이해되고 경험적으로 확인되고 누가 봐도 다 좋은 것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기에 너무나 부담스럽고, 결정하기에는 너무나 고민스러운 일이지만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단 위로 올라간 이삭
아브라함은 나무 단을 만들어 놓고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나무 위에 놓아야 했습니다. 나무를 쌓는 일은 했다 하더라도 아들을 자신의 손으로 묶어야 했습니다. 젊은 아들과 늙은 아버지입니다. 아들이 마음만 먹으면 아버지는 묶을 수 없습니다.
소나 돼지를 끌고만 가도 힘이 듭니다. 닭을 잡아보신 경험이 있으십니까? 닭 한마리를 잡으려 해도 난리가 납니다. 하물며 사람이 싫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삭이 반항하면 이 일을 어떻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묶었다 하더라도 나무 단 위에 어떻게 올리겠습니까? 이삭이 스스로 올라가 줘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자기는 죽어야 하고 아버지는 죽여야 하는 이런 절박하고 기막힌 현실 앞에서 담담하게 행동하는 두 사람을 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너무나 값싸게 생각하고 감상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에는 고통과 대가가 없습니다. 희생이 없습니다. 믿음을 가지면 모든 것에 형통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치뤄야 할 믿음의 행위에 대해서는 너무나 인색합니다. 그래서 가끔 하나님에 대해서도 원망하고 현실에 대해서도 불평을 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원리를 발견합니다. 믿음은 순종이란 것입니다. 순종은 대가를 치르는 것입니다. 아픔을, 고통을 지불하는 것입니다. 대가없는 순종이 없고, 순종없는 믿음은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대가를 치르십니까?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데 어떤 대가를 치르셨습니까? 돈 몇 푼, 시간 조금 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얼마나 생색을 냅니까? 그것 한 번 하는데 얼마나 묵상을 하고, 얼마나 주저합니까? 쥐꼬리 만한 헌신을 하면서 엄청난 헌신을 하는 것인양 착각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가난한 자를 도와주고 하나님의 일을 다 한 것처럼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 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러고도 하나님은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으십니다. 자신이 얼마나 고통스러웠고 아팠는지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자식들에게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고 고통스러웠는지 아느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자식은 부모의 고통을 알지 못합니다.
아버지의 고통
아브라함과 이삭이 제단을 만들고 있었던 것은 마치 온 인류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때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협력한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예수님을 억지로 세상에 보냈고 억지로 십자가에 달리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십자가를 제가 져야 합니까?’라고 고민하셨습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로마 군인들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있는 곳에서도 예수님은 당당하게 흔들리지 않았으며, 사람에게 재판을 받았지만 그는 입을 열지 않으셨고, 당당하게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향하여 갔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기도는 무엇입니까?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저들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고통스러울 때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하셨으며, 목이 마를 때는 ‘내가 목 마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를 원망하거나 누구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않았습니다.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래서 인류를 위한 화목제물은 드디어 그런 고통과 아픔과 순종을 통하여, 침묵을 통하여 구원을 이뤘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변화되길 원합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변하길 원합니까? 그렇다면 누군가 고통을 겪어야 하고 누군가 대가를 치뤄야 하며 누군가 순종을 해야 하고 침묵으로 현실을 받아 들여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에 수 천년동안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계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계속 이것을 생각하시고 연습하셨습니다. 그 첫 번째가 아벨의 제사였습니다. 양으로 드리는 아벨의 제사로부터 창세기 3장 15절의 말씀 등 지속적으로 ‘내 아들을 줄 것이다’, ‘내 아들을 보낼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특별히 구약을 보면 선지자들을 통하여 ‘메시야가 태어날 것이다’, ‘내 아들을 보낼 것이다’, ‘너희 죄를 용서하기 위하여 내 아들을 보낼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7장 14절 말씀을 보면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메시야가 태어날 장소와 때와 환경을 준비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출생할 여자는 동정녀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태어날 땅은 베들레헴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다윗과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유다 지파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태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알려진 이야기 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 문제로 끊임없이 생각하셨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죽이는 것을 결정하는데 3일이 걸렸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식을 위하여 한 달 정도는 고통을 받을 수 있지만,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의 아들을 죽여야 한다는 것으로 인해 수 천년 동안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받은 구원입니다.
믿음의 칼을 들다
10절을 보십시오.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라는 말을 통해 칼을 잡은 아브라함 팔이 높이 들린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라는 말씀을 통해 우리는 아브라함이 아들을 죽일 것을 결정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칼을 내리치고 있었을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멈출 수 없고, 어느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순간이었습니다.
믿음은 한 번 해보는 것이 아닙니다. ‘해 놓고 결과를 보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하기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후회가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도 마찬가지 입니다. 십자가란 예수님이 가상적으로 지신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관념이 아니라 실제였습니다. 십자가는 의미가 아닙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저녁에 잤다가 아침에 깨는 것이 부활이요, 계절이 바뀌듯 겨울이 오고 봄이 오는 것이 부활이 아니냐고 합니다. 부활의 실제를 믿기 어렵기 때문에 부활의 의미만을 가지고 해석하고 철학을 만듭니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죽으셨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도 진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진짜로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그분의 부활이 진짜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분의 부활이 관념적이고 종교적인 의미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내 신앙도 내 구원도 관념에 불과할 것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립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주 놀라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은 꼭 필요할 때 결정적인 순간에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직도 여러분에게 찾아오시지 않은 이유는 아직은 괜찮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더 이상 가면 안 되겠다’ 싶은 상황이 되면 즉시 나타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칼을 쥐었을 때도 오지 않으셨습니다. 찍어 내리는 순간에 오셨습니다.
우리는 창세기 12장 이후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장면을 수 없이 보았습니다. 창세기 12장 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갈대아 우르를 떠나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15장 1절에서 10년 동안 아브라함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그에게는 갈등과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포기하려고 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하늘의 별들을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처럼 많은 자손을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런데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17장에 가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18장에 나타나셔서 사라가 임신할 것을 알려주십니다. 그래도 아브라함은 믿지 못하다가 사라가 임신을 한 뒤에야 믿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매우 재미있는 사실을 또 발견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흔들렸습니다. 마치 우리들처럼 말입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흔들려도 야단치지 않았습니다. 그냥 지켜 봐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수준에 맞춰주셨습니다.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들도 수준에 맞춰 주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조상이 될 때까지, 자기의 아들을 포기하는 믿음이 생길 때까지 하나님은 끊임없이 맞춰 주십니다.
그저 교회만 꾸준히 나올 수 있는 것도 복입니다. 담배 피우고 술 마셔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이 끌고 가실 수 있도록 끈만 잡고 계십시오. 나이를 먹고 고난을 겪으면서 군더더기를 빼기 시작하십니다. 우리 안에 있는 헛된 것, 잘못된 것을 깨닫고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12절을 보십시오.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나님의 메시지는 ‘네 아들을 죽이지 말라’는 단 한 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이삭을 죽이는데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순종을 보기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순종을 보기 원하십니다. ‘너를 포기하는 것을 넘어서서 네 아들까지 포기할 수 있느냐?’는 것이 하나님의 관심입니다. ‘네가 나를 어느 정도까지 신뢰할 수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너는 네 자신을 어느 정도까지 포기할 수 있느냐?’하는 것을 물으십니다.
부르심에는 구원에 대한 부르심이 있고 포기에 대한 부르심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다 주십니다. 그리고 포기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포기하라고 하실 때 굉장히 힘들어 합니다. 여러분은 아들을 포기하라고 하면 하시겠습니까? 그냥 헌금 몇 푼하고 봉사 조금 하고 마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정도로 여러분을 내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포기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것이 탐나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보기 원하시고 순종을 보기 원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을 때 챙길 것 다 챙기고 가질 것 다 가지면서 믿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 포기하라고 하십니다. 신앙의 현실은 순교입니다. 포기입니다. 여기까지 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프리카를 위하여 C.T. 스터드라는 사람을 사용하셨습니다. 1백년전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캠프리지 7인이며 크로켓 선수며 영국인의 가장 촉망받는 지성인이었습니다. 그의 가문은 훌륭하였고 큰 저택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대학에 있을 때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아프리카로 들어갑니다. 그 사람의 전기를 보면 재미있는 사진이 있습니다. 영국에 있는 그의 저택과 아프리카에 있는 움막집입니다. 움막이라고도 할 수 없는 것이 나무 기둥만 있는 천막이었습니다. 그는 그곳에 뼈를 묻었습니다.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것이 사실이라면 나의 희생과 헌신은 헌신이라고 할 수 없다. 나는 이렇게 사는 것에 대하여 감격할 뿐이다.”
인도를 위하여 윌리엄 캐리는 자신의 생애를 불태웠습니다. 중국을 위하여 허드슨 테일러는 자신의 청춘을 불태웠습니다. 한국을 위하여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청춘을 포기하고 이국 땅에 와서 그의 인생을 보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하여 우리를 부르십니다.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사 6:8)
하나님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가 똑 같으십니다. 몇 천년 전에 부르셨던 하나님은 지금도 이사야와 같은 사람을 찾으시고 예레미야, 바울 같은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그 한 사람은 역사와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과 우리를 부르고 있고, 북한 땅이 우리를 부르고 있고, 질병이 많고 가난하고 가까이 하기 힘든 아시아가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낌없이 죽이기로 결정한 아브라함을 보면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여러분의 순종입니다.
대속물을 예비하신 하나님
13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하나님의 방법은 너무나 놀랍습니다. 하나님은 이삭을 죽이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순종은 먼 훗날 메시야가 이 땅에 태어나고 순종을 통하여 구원받은 많은 사람들을 생각했기 때문에 이 그림을 아브라함에게 보여준 것입니다.
수 양의 뿔이 수풀에 걸려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연’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섭리’라고 말합니다. 예수믿지 않는 사람들은 우리가 기도에 응답받았다고 말하면 재수가 좋은 거라며 웃습니다. 그런 일은 얼마든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할 때마다 우연이 자꾸 생긴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곳에서 기적을 베푸십니다.
13절 말씀에서 굉장히 중요한 것을 봅니다. 하나님이 ‘이삭을 죽이지 말라. 네 죄가 사하여졌다’라고 말씀하시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고 번제를 받으셨습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번제가 없이는 죄가 없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삭을 죽이지 않으려면 이삭 대신에 죽어야 할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양은 잘못한 일이 없지만 죽어야 합니다. 이것이 대속입니다. 죄가 없으신 예수님도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 ‘죄가 없는 걸로 하자’라고 하셨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죄는 일단 발생하면 그 죄를 치울 때까지 계속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은 죄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보혈로 씻기 전까지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이 죄를 없애기 위해서는 누군가 대신 죽어야 합니다. 이것이 대속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1년에 한 번씩 양이나 소를 잡아서 피를 흘리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양과 소를 태웠습니다. 사람들이 그 연기를 보게 했고, 냄새를 맡게 했고, 피를 보게 했습니다. 네가 죽어야 하는 대신에 이 양과 소가 죽었다는 것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반복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제사, 영원한 제사를 준비하셨습니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죄인은 죄인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죄인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은 죄가 없어야 합니다. 세상은 죄인이 죄인을 재판합니다. 들킨 죄인가 들키지 않은 죄인가에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다 죄인입니다. 누가 누구를 정죄할 수 없습니다. 성인으로 칭송을 받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들이 구원할 수 없는 것은 그들도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분은 죄가 없으신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동시에 인간이어야 합니다. 육신을 가진 인간이어야 인간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이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지구상에 수 많은 종교가 있지만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인간이신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이삭 대신 하나님은 양을 준비하셨습니다. 그 어린 양은 먼 훗날 우리의 죄를 지고 가신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분이 여러분의 구원자 이십니다.
하나님은 이 어린 양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여호와이레, 즉 ‘준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출처/저자| 하용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