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살고싶은 곳 - 사대부들의 지적 활동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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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4.01.07. 19:13조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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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부들의 지적 활동공간
예로부터 빼어난 자연경관을 배경으로 지어진 누정과 정자를 찾아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시를 읊고 그림을 그리는 등 풍류생활을 즐겼다. 이곳들은 이른바 문화와 예술 활동의 무대였던 셈이다.
관직생활을 하다가 77세에 담양으로 내려와 면앙정에 은거하면서 가사 「면앙정가」를 지은 송순은 91세로 세상을 마무리할 때까지 이곳에 머물렀다. 면앙이란 땅을 굽어보고 하늘을 올려다본다는 뜻으로, 아무런 사심과 꾸밈이 없이 너르고 당당한 경지를 지향한다는 뜻이다. 그는 또 수많은 시조들을 남기기도 했는데, 다음은 그중 하나이다.
십 년을 경영하여 초려 삼간 지어내니
나 한간, 달 한간에 청풍(淸風) 한간 맡겨두고
강산을 들일 데 없어 둘러두고 보리라.
가난한 선비가 십여 년을 두고 노력해서 세 칸짜리 초가집을 지었으나 자신과 달 그리고 청풍이 집을 차지하고 나니 강산을 들일 데가 없어 둘러두고 본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의 삶은 가난함이나 청빈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알려져 있다. 자녀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상속한 기록인 그의 「분재기(分財記)」를 보면 장녀에게는 노비 41명과 전답 153두락, 차남의 아내에게는 노비 40명과 전답 142두락을 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면앙정 주위의 죽림 등과 함께 여덟 명의 자녀들에게 상속해준 토지가 약 2천 석에 이르렀으니 재산이 얼마나 되었는지 짐작해볼 만하다.
당시 이곳을 찾았던 학자들은 김인후, 임억령, 고경명, 정철, 임제, 양산보, 김성원, 기대승, 박순 등으로 호남 제일의 가단(歌壇)을 일구어냈다. 이처럼 누정은 근래에 사르트르나 시몬느 보부아르 같은 지성들이 만나 토론을 벌이던 파리의 생 제르맹데프레(Saint-Germain-des-pres′)와 동일한 문화ㆍ예술의 활동공간으로서 그 역할을 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누정에서 만나 풍류를 즐기며 시정을 나누고 당면한 정론과 경세문제(經世問題)를 거침없이 주고받았다.
그리고 송강 정철도 식영정을 배경으로 가사작품인 「성산별곡」을 지었고 백광홍(白光弘)은 서도지방의 관리로 나가 그곳의 정사를 보살피면서 「관서별곡(關西別曲)」을 지은 적이 있다.
한편 당시의 지식인들은 각박한 정세와 인심을 피하여 산수가 아름다운 자연 속으로 들어가기를 좋아하였다. 그곳에서 정신적 즐거움을 찾았고, 자연을 통해 삶의 지혜를 배우는 삶의 방식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지금도 면면히 흐르는, 우리 민족이 간직한 삶의 멋과 여유 그리고 자연에 순응하는 사고는 그런 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소개된 전국의 누정은 모두 553동인데 조선 정조 때 편찬된 편자 미상의 『동국여지비고』등 다른 기록을 참고해본 결과 ‘누’는 416동, ‘정’은 365동, 그리고 ‘당’은 45동, 나머지는 대, 헌, 각, 관 등이었다. 그러나 그때 이후 몇백 년의 세월이 흘렀으므로 지금은 누정들이 얼마나 남았는지 정확하게 알 길이 없다.
송강정
당시의 지식인들은 산수가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삶의 지혜를 배우고자 하였다. 우리 민족이 간직한 삶의 멋과 여유, 자연에 순응하는 사고는 그런 점에서 비롯되었다.
가사문학관 가사는 조선에서 시조와 함께 유행했던 문학 양식이다. 가사문학으로 장르를 형성하고 있으며 처음에는 노래로 불렸고 양반 여자들 사이에서 유행했다. 16세기 시인 정철의 가사는 완성도가 높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담양 소쇄원 옆에 가사 [네이버 지식백과] 사대부들의 지적 활동공간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1 : 살고 싶은 곳, 2012. 10. 5., 신정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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