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파 내부에서도 ‘自由民主主義’의 기본이 무너지고 있다.
조갑제기자가 ‘자유민주주의의 기초’를 모른다는 의심이 생길 때마다, 조갑제기자는 김대중 전대통령 비판의 글을 계속 썼다. 1980년대 전대협 민주주의자들이 자신들의 결백성을 입증하기 위해서, 전두환대통령을 추악하게 그리는 것의 변화 양상이란 의심이 적절하다. 자유민주주의의 기초를 몰랐으며 그것으로 우파 내부를 혼란을 진척 시켰다는 솔직한 시인이 그렇게도 어려운가 싶어진다. (*. ‘곽대중 비판’으로 개별 의견으로 축소하려는 시각에 동의할 수 없다. 그렇게 못 믿을 사람을 어떻게 누구의 보증으로 픽업 했단 말인가? 이러한 호들갑은 무엇을 감추기 위한 것인가?)
4.19는 정치사(사건사)적으로는 의미있어도, 5.16 군사혁명 이후에 경제 개발 프로젝트의 야심찬 추진 때부터가 역사의 분기점이 될 만큼, 중장기적 현대사 시각으로서는 의미가 퇴색된다. 1950년대 말기의 봉건 귀족주의 정치나 4.19 공간의 북한에 끌려다닌 데모 정치나, 결국은 ‘국민’은 안중에 없는 권력자 마음대로의 정치였다.
친북좌파 정치에 영혼까지 빠진 이들은, 경제 개발 발전을 명분하여 군사정부도 권력자 마음대로 시기가 아니었던가 주장한다. 그러나, 사회에서 분명한 ‘법칙’과 ‘원칙’이 살아있던 때였기에 분명히 ‘권력자 마음대로’는 아니었다.
대다수의 386세대(정확히는 전대협 초기 창립 멤버들이 영원히 잘났다 할 수 있도록 짜여진 세대망)들은 <요식행위>로서의 선거와 ‘기간 내내’의 그들 마음대로 정치를 기억한다. 한국의 ‘자유민주주의 선거판’이어야 할 선거 문화에서, 한나라당의 선거문화가 급속도로 ‘전대협 총학생회장’선거 문화를 닮아가고 있다.
1961년 생 오세훈 법학박사님께서는 전대협 초기의 총학생회장 선거문화를 기억할 수 있는 세대이다. ‘전대협’ 그물망을 살리기 위해서 ‘비운동권’을 깨야 한다는 책임감만을 가지고 자원하여 결단하는 그들의 ‘생생한 영웅 신화’는 아직도 선명하다. 어떻게, ‘초단기적’으로 선거에 뛰어들어서, 어떻게 포퓰리즘적으로 단기에 지지표를 획득하였는가와, 그 이후에 어떻게 그들 마음대로 했는가는 너무 기억에 선명하다. 오세훈박사님이 ‘전대협’ 초기 총학선거를 기억할 수 있는 세대였다는 것은, 원희룡계보의 기반으로 이명박에 줄을 서서 홍준표씨를 경쟁하여 팽시키는 전략으로 선거전을 치르려는 야망에서, 한나라당에 ‘쌈지를 튼’ 초기 전대협 멤버들의 흉계를 넉넉히 바라보게 된다.
오세훈 법학박사님께서 녹색을 상징으로 내세우셨지만, 녹색은 고은시인을 최고 친북인사로 꼽은 어느 삐라에서 환경운동단체 책임자 이름을 같이 올린 경우에도 있듯이 서구에서는 맑스주의를 대변하는 기호로 쓰인다. 강전장관께서 ‘보라색’이란 ‘빨강’+‘파랑’의 색을 내세운 것과 함께 노란색에서 ‘빨강색’을 향해서 달려가는 과도기적 색깔을 선명하게 내세웠다.
오세훈 법학박사님께서는 오늘로써 구체적으로 한나라당 지지자의 의사를 반영할 의사가 전혀 없다는 것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오직, 이명박 시장의 무조건적 집권을 바라는 ‘권력 만능주의’에 빠진 반민주적 후진 국민들의 헛된 기대만이, 사실이 아닌 헛된 기대만을 낳을 뿐이다. 한국 사회는 정보가 늘어나도 꼼꼼이 보는 능력이 저하되면서 ‘이미지’가 돋보이는 상황이 되었다.
강금실을 깬다면서 오세훈에 배팅을 하면 할수록, 강전장관과 오박사가 어깨걸고 세뇌하는 ‘과도기적 좌경 색깔론’에 오염된다. 이러한 방식은 ‘양김씨’가 오랫동안 써먹은 것이다. 김대중은 김영삼을 욕하면서 비슷한 주장을 하고, 김영삼은 김대중을 욕하면서 비슷한 주장을 한다. 예외적 순간을 제외하고서는 한없이 싸우면서 비슷한 주장만을 되뇌이는 두 사람이 된다. 자신들을 대변해줄 것이란 헛된 기대를 가지면서, 한쪽에 깊이 동화될 수록 어느 쪽을 선택하나, 김영삼 김대중의 최대 공약수인 이데올로기에 빠지게 된다. 강금실과 오세훈 어느 쪽을 선택하나 결과도 마찬가지이다.
조갑제기자는 ‘휴전선’을 기점으로 현실의 대한민국 체제가 되었다는 주장을 소외되게 하기 위해서, 사회과학 이치상 납득하기 어려운 99% 이상의 지지를 얻을 수 밖에 없는 김정일 공산독재국가의 주민다수는 깨끗하다는 차원의 엉뚱한 경계선을 제시했다. 김대중지지세력의 ‘휴전선’ 자체를 제거방향으로 이끌어가면서도 ‘괜찮아’ ‘괜찮아’ 하는 민사상의 ‘사기꾼’들의 어법으로서, 국민들의 머릿속에서 ‘휴전선’을 지우는 다른 방향이면서도 사실상 동일한 목소리이다. (이러한 의심을 받는 조갑제기자는 오늘 ‘조갑제닷컴’에 얼마나 많은 김대중 비판 기사를 올릴 것인가? 전대협 운동권 스타일로 순백을 입증하는 어법은 참으로 지겹다.)
한나라당 지지자는 ‘안정’ 속에 경제발전을 이루며 국민의 지지를 반영하는 후보를 뽑는다. 말 몇몇 어구가 마음을 후련해 주는 수준을 넘어서서, 주된 방향의 신조가 투명하게 다수의 마음을 울리도록 하는 방향을 말한다.
조갑제기자와 코드를 같이 하여 ‘권력 숭배 이론’에 젖은 사람은, 결국은 국민 모두의 자유를 인정하게 되니 ‘역사변혁’을 인간의 손에 전적으로 좌우하게 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하고 씩씩 거릴 수있을 것이다. 그러한 순간에, ‘국민 모두’가 자유로운 입장은 하나님의 섭리가 대한민국을 지켜주는 선이며, 어떠한 방향에서도 주님의 뜻에 맡기는(투명한 이성적 법칙에 복종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바탕을 善으로 보는 입장에서, 북한공산독재집단이 공산당 마음대로의 정치를 한다는 비판이 되는 것이다.
박사모 가족은 ‘원내대표’ 선거전의 교훈을 생각해야 한다. 박근혜대표와 동일시될 수 있는 후보를 결코 ‘원희룡(이명박)’과 동일시 될 수 있는 후보에 패배하게 만들어선 안된다. 박근혜대표와 동일시되는 후보에서 박대표 마음대로를 하기 위한 전제 조건완성이라 볼 수 없다. 조갑제기자처럼 ‘권력 숭배론’을 가진 전대협 초창기 신화를 이끌어간 원희룡 계보들은 ‘대의 정치’를 할 능력이 선천적이면서도 후천적으로 결여되었다. 지지하게 되도록 이념을 외부에서 주입하면 된다는 사고관일 것이다.
‘선거 승리 가능성’에 앞서서, 한나라당 정체성 사수를 향해서 서울시장 경선을 의미있게 지켜봐야 한다. 지자체 서울 달성은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대선’까지의 행보에 국민 다수의 의사가 대변될 수 있도록, 안정적인 한나라당의 운영이 가능할 상황일 것이다.
첫댓글 예 맞습니다.박대표님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 지 아실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