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없이 조용하게 움직입니다
1열왕 19,9-16; 마태 5,27-32 / 연중 제10주간 금요일; 2024.6.14.
세상이나 인생을 움직이는 힘은 무엇일까요? 그 힘은 보이지 않게 작용하는 것으로서, 세상에는 철(鐵)이고 인생에는 성(性)입니다. 독서와 복음에서 들려오는 오늘 미사의 하느님 말씀도 그러합니다. 조용하게 부드럽게 그러나 철저하게 하느님의 섭리를 관철시킵니다.
먼저 몇 년째 극심한 가뭄으로 나라 전체가 메말라가던 북이스라엘 왕국에서 일어난 사태를 살펴보겠습니다. 가뭄도 심각한 사태였지만 바알신 우상에 빠져 야훼 하느님을 전하던 예언자들을 학살하던 이제벨 왕비의 폭정도 아주 심각한 사태였습니다(1열왕 18,2.4 참조). 그래서 엘리야는 카르멜산에서 450명의 바알 예언자들과 맞서 격렬한 대결을 치루었습니다. 가까스로 승리를 거두었지만, 곧바로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이제벨 왕비의 군대에 쫓겨 호렙산까지 가서 숨어야 했습니다. 하느님의 크신 권능을 타오르는 불이나 하늘에서 내리는 비로 이끌어낼 정도로 위풍당당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죽기를 간청하며, “주님, 이것으로 충분하니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1열왕 19,4ㄷ) 하고 빌었습니다.
그러자 더할 수 없이 초라해진 그의 모습을 보다 못한 하느님께서 엘리야 앞에 나타나기로 작정하시고는 엘리야에게, “나와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1열왕 19,1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산을 할퀴고 바위를 부술 정도로 크고 강한 바람이 먼저 불어왔지만 하느님께서는 바람 가운데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바람이 지나간 뒤에 지진이 일어났지만 지진 가운데에도 계시지 않았습니다. 지진이 지나간 뒤에 불이 일어났지만 불 속에도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 느끼지 못할 정도로 잔잔한 바람이 불어왔는데, 그 미풍을 타고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런데 그 소리 속에 담긴 하느님의 말씀은 이왕 벌어진 상황에 정면으로 대결하라고 엘리야의 등을 떠미는 세찬 소리였습니다. 하나는 님시의 손자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아합의 자리를 대신할 후계 임금으로 세울 것과, 다른 하나는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후계 예언자로 삼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엘리야로 하여금 정치적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주도하라는 뜻이고, 또한 그는 이제 소명을 다 마쳤으니 이제 그만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하라는 뜻이었습니다. 첫째 분부는 자칫하면 정치적 반역자로 몰려 죽을 수 있는 위험한 분부였고 둘째 분부 또한 예언자 역할을 그만하고 물려주라는 엄중한 분부였습니다. 이 분부를 내리시기 전에 바람과 지진과 불의 표징을 보내신 이유는 더 이상 격렬하게 소명을 수행할 필요가 없으며, 조용하고 부드럽게 소명을 추진하라는 뜻이었습니다. 이것이 엘리야가 만나 뵈온 하느님의 얼굴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 복음에서는 미혼이든 기혼이든 이성(異性) 간에 일어나는 죄가 열거되어 나오는데, 특히 성적인 욕망으로 인한 간음 행위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신체가 건강한 사람들이 생존의 본능에서 나오는 욕구가 있음을 예수님께서 모르시거나 무시하신 것이 아닙니다. 욕구 자체는 죄가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욕구를 발산하는 행위가 막상 구체적인 행동에로 번지고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기본질서를 파괴하는 지경이 되면 그것은 욕구의 범주를 넘어선 욕망이 된 것이어서 철저하게 다스려야 한다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자체로는 가치 중립적인 인간의 자유가 죄로 기울어져서 결과적으로 하느님을 떠나는 불행을 자초하지 말라는 당부입니다. 산상설교 안에서 십계명을 대치하는 사랑의 계명을 가르치고 계신 예수님께서는 이 성의 질서에 있어서도 철저하게 사랑의 진리성을 관철하라는 요구이기도 합니다.
이제 오늘 독서와 복음의 말씀을 종합하여 묵상해 보겠습니다. 이를 위해 저는 철(鐵)의 비유를 들어볼까 합니다.
“소리없이 세상을 움직입니다!” 한때 방송에서 많이 들을 수 있었던 광고 문구였습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철강기업이 자사 제품을 알리느라고 만든 것인데, 당시 들을 때에도 꽤 세련된 표현이었습니다. 아무리 전자산업과 인공지능 로보트가 인기를 끌고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온다고 해도 지금 세상은 여전히 고대로부터 이어진 철기 시대임을 깨우쳐주는 말이었습니다.
철을 비롯한 광물자원은 땅에 묻혀 있습니다. 이상하게 이 자원들은 비슷한 성분끼리 몰려서 묻혀 있습니다. 철광석은 물론 금, 은, 동, 아연 같은 일반 금속들이나 아주 귀한 다이아몬드나 석유와 가스까지 다 그렇습니다. 지구의 지질학이나 천문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관찰한 바에 따르면, 지구가 생성될 무렵에 우주를 떠돌던 작은 별들이 무수히 그리고 오랜 기간 동안 지구의 중력에 끌려와서 부딛쳤는데, 그때마다 지구의 크기도 불어났지만 충돌 시의 충격으로 말미암아 지구 속 깊숙이 묻혀 있던 광물들도 비슷한 밀도를 지닌 금속 성분끼리 뭉치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사는 집이나 일하는 건물, 강을 건너게 해 주는 교량은 물론이고 섬과 섬 사이의 바다를 가로지르는 교량, 바다 속에 길을 내어 대륙과 대륙을 이어주는 해저터널 등 지금의 인류 물질문명을 지탱해 주는 구조물들에는 모조리 철 성분이 들어가 있습니다. 자동차, 선박, 비행기나 우주선 등 모든 이동수단도 기본 구조는 철로 된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통신수단도 예외가 아닙니다. 생활 속에서 흔히 쓰는 물건들이나 전투를 위한 살상무기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아직은 철기시대입니다.
그래서 오랜 구석기와 신석기 시대를 거쳐 청동기를 사용하게 되었을 무렵에, 철을 가공할 줄 아는 사람들이 문명에서 앞서 나갔습니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철 성분이 들어간 도구들을 더 많이 사용하게 되지만, 겉에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물건을 겉으로 감싼다고 하더라도 도색을 해서 쓰지 철 성분 그대로 노출시키는 경우는 없습니다. 철 성분이 공기 중이나 물 속에 들어 있는 산소와 만나면 산화되어 녹이 슬어서 수명이 단축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현 시기 인류 문명의 도구적 중추인 철은 진리의 탁월한 비유 소재가 되어 줍니다. 인류가 물질문명의 세상을 소리 없이 조용히 철을 통해 움직이듯이, 하느님께서는 인류의 인생과 역사를 소리 없이 조용히 진리를 통해 움직이십니다. 각 분야에서 다양한 모습과 흐름으로 나타나는 이 진리를 무시하고서는 모처럼 이룩한 성과가 다 허물어집니다. 진리는 정신문명의 철과 같습니다. 철이라는 재료가 단단하다면 진리 또한 견고하게 인간의 현실을 받쳐 주고 있습니다.
진리는 인식과 실천의 차원에서 믿음과 계명으로 나타납니다. 세상과 인생을 움직이는 힘입니다. 그런데 진리를 인식하고 믿는 마음에 기쁨이 없거나 여유가 모자라면, 진리를 실천하는 계명 윤리가 사람들을 속박합니다. 옳다고 느끼면서도 부담스러워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성의 윤리와 간음 금지 계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은 생명의 바탕이 되는 질서입니다. 성의 축복이 아니면 우리는 태어나지도 못했을 것이고 우리 역시 후세를 태어나게 할 수도 없습니다. 독신으로 살거나 정결서원으로 성을 봉헌한다고 해도 성의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철이 도색되듯이, 성이 인격성을 통해서 나타나야 제 구실을 합니다.
그래서 생명의 기운으로 작동하는 성의 기능과 질서가 윤리의 매우 중요한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진리에서 우러나오는 인식과 실천이 그리고 믿음과 계명이 제대로 성의 기능과 질서에 작동하게 되면, 기쁨과 여유가 생겨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생명에 대한 환희와 새로운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 희망마저 생겨날 수 있는 반면에, 그 반대가 되면 성 본능에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동물의 세계보다도 못한 추하고 고통스러운 지옥이 펼쳐집니다.
철기 시대를 발달시켜온 인간의 지성과 영성의 수준이, 아직까지는 성의 본능과 질서를 온전히 통제하기에 몹시 버거운 상태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 결과, 물질과 돈에 따라 붙는 탐욕과 더불어, 가장 많이 죄가 저질러지는 자리가 바로 성의 현실입니다. 하느님이라는 진리를 굳이 외면하려는 사람들은 성의 쾌락을 탐닉하려 들고, 성의 자유를 만끽하려 들지만 그렇게 남용되는 성의 질서로는 인생과 세상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타락과 무질서와 혼돈만이 남게 될 뿐입니다. 따라서 성에 대해서는 인간의 지성과 영성이 허용하는 한 보수적인 접근이 필요합니다. 성을 하느님께서 주신 귀한 선물이요 은총으로 받아들이고, 인간으로서의 품위와 정성을 들이려는 자세가 인생과 세상을 새롭게 할 것입니다. 성의 자유는 성적 쾌락을 소유하려는 데에서가 아니라, 성의 질서를 진리에 따라 인간답게 꽃피우려는 조용한 마음에서 나옵니다. 철(鐵)이 조용히 세상을 움직이듯이, 성(性)도 소리없이 인생을 움직입니다.
교우 여러분!
인간의 욕구는 조용하고 부드럽게 나타납니다. 마치 하느님께서 엘리야에게 나타나신 모습과도 비슷합니다. 하지만 훈련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바로 이 경우에 그 욕구를 사랑과 선행으로 승화시키라는 하느님의 목소리도 역시 조용하고 부드럽게 들려옴을 느낄 수 있어야 하고 마음의 귀로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성적인 욕구의 본질인 성 에너지는 생명의 기본 에너지이기 때문에, 성적인 매력 또한 이성 간에서만이 아니라 성령의 이끄심을 느끼는 영적 감각과 온유함과 겸손함 등에 고루 작용합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 대해서나 이웃에 대해서도 발해야 할 인간적 매력의 바탕이 성적 매력인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중요한 것은 율법주의에 빠져서 욕구를 억누르거나 다른 이들을 불필요하게 단죄하지 말고 인간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되, 사랑과 선행을 향한 행위를 행동으로 옮기는 데 있어서 철저하게 관철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생명의 말씀을 조용하게 그러나 철저하게 지키는 그리스도인이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