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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라를 회복하여 예슈아를 닮아가는 성도님들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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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묵은 땅의 문제이다
우리는 모두 땅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땅에 동일하게 비를 내리시며 키우신다. 그런데 어떤 땅은 복을 받고 영원히 있을 것이고 어떤 땅은 저주를 받고 불사름이 될 것이다. 그들이 받는 것은 같지만 결과가 다르다.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하나님에게 있지도 환경에 있지도 않다. 전적으로 자기 땅의 문제이다. 비를 흡수할 수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묵은 땅을 기경하고 여호와께 돌아가 공의를 심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인애(긍휼, 경건)를 거두게 될 것이다. 호세아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내리시는 비가 공의라고 말하고 있다. 공의를 비처럼 내리시는데 그것을 흡수하는 자 곧 공의를 자기 마음에 심는 자가 경건함을 거두는 좋은 밭이 될 것이다(호10:12).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호10:12)
2 나쁜 땅 vs 좋은 땅
땅에서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이유는 무엇인가? 성경은 땅에 살면서 염려하고 돈을 따르고 쾌락을 따르기 때문에 온전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말한다. 반면 정직하고 선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들이 좋은 땅이고 인내로 열매를 결실한다고 말한다(눅8:14,15). 이 말은 쉽게 말하면 염려하기 때문에 말씀을 지키지 못하고 돈을 따르기 때문에 불순종하며 쾌락을 따르기 때문에 말씀으로 인해 환란이 올때 인내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순종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가 공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염려인지, 돈인지, 쾌락인지 돌아봐야 할 것이다. 염려는 좋은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 아니라 농사를 망치는 방법 중에 하나이다. 왜냐하면 염려는 자신을 믿지 못하거나 이웃을 믿지 못하는 것이고 결국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이므로 불신의 열매를 거두는 된다.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눅8:14,15)
3 온전함에 이르는 열매
말씀을 자세히 보면 '저주를 받는다'가 아니라 '저주함에 가깝다'라고 말한다. 왜 저주를 받는다고 표현하지 않고 저주에 가깝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 이 말씀은 두가지 땅을 비교하고 있다. 복받는 땅과 저주함에 가까운 땅이다. 그리고 누가복음에서 '가시 떨기 나무는 온전히 결실하지 못했다'라고 말하는데 영어 성경은 '온전함에 이르는 열매를 내지 못했다' (bring no fruit to perfection) 라고 번역하고 있다. 즉 이 땅의 비유는 '온전함'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온전함에 이르느냐 아니면 온전함에 이르지 못하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복받는 땅과 저주함에 가까운 땅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순종하는 땅과 불순종하는 땅이라기 보다는 순종하는 땅과 적당히 순종하는 땅으로 우린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순종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온전함을 보신다. 그것은 율법의 행위로 온전해 지지 못하는 것과 같다. 행위가 존재하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온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생명을 다해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준행하느냐 아니냐에 있다(신6:5,6). 즉 부분이냐 전체이냐이다. 어떠한 계명은 덜 중요한 계명도 있고 더 큰 계명도 있다(마23:23). 그러나 작은 계명일지라도 무시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것이 마태복음에서 예슈아께서 말씀하시는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지키지 않고 그렇게 가르치는 자가 천국에서 가장 작은 이유이다(마5:19).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눅8:14,15)
4. 가장 중요한 율법, 기본 중에 기본
예슈아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함께 변론하고 계셨다. '변론하다'의 헬라어 뜻은 '함께 조사하고 토의하고 논의하고 질문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하브루타를 하고 계셨다. 그들이 율법에 대해 여러 질문을 했고 예슈아께서 잘 대답하시는 모습을 한 서기관이 지켜 보고 있다가 그 서기관도 예슈아께 질문했다. "모든 율법중에 가장 첫째가 무엇입니까?" 그 말은 율법 중에서 가장 중요한 율법이 무엇이냐는 질문이다. 그때 예슈아께서 모든 마음과 모든 목숨과 모든 뜻과 모든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이 가장 첫째되는 중요한 계명이고, 둘째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으로, 이보다 더 큰(위대한, 높은, 강한) 계명은 없다고 대답하셨다(막12:28-31). 만약 우리가 이 대답을 예슈아로부터 직접 듣는다면 우린 어떻게 생각했을까? "여호와께서 유일한 하나님이시므로 여호와를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라 이것이 가장 즁요한 율법이다." 예슈아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다. 우린 어쩌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예슈아께서 그분과 동일한 분이시거나 동일하진 않아도 하나로서 같은? 분이라고 그러므로 우린 예슈아를 온맘다해 목숨다해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예슈아께서는 스스로를 아버지와 동일시하시며 자신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아버지만 선한 분이시므로 자신을 선한 선생이라고 부르지도 말라고 하셨다(막10:17). 이처럼 율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여호와를 유일한 신으로 믿고 그분을 목숨다해 사랑하는 거라고 가르치셨다.
그럼 예슈아는 누구신가? 여호와께서 보내신 그분의 아들이시고 메시아시다. 대제사장으로서 교회의 머리이시고 영원한 중보자이다. 하나님(여호와)과 사람 사이에 영원한 중보자라고 말씀하시면서 스스로 여호와라고 말하면 그것이 더 이상할 것이다. 예슈아께서 아버지와 하나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진리' 때문이다. 한 진리를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일 수 있는 것이고 우리도 하나일 수 있는 것이지 동일한 분이라는 뜻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 기본 중에 기본이 율법에서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라는 사실이다. 어쩌면 많은 사람이 기본을 모르는 것은 율법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막12:28-31)
5 천국에 가까운 자
예슈아의 대답을 들은 서기관은 그 신명기 6장 말씀이 '진리'라고 동의했다. 그리고 온 마음과 뜻과 목숨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이 가장 중요하다는 예슈아의 대답에, 그는 마음과 명철과 목숨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조금 다르게 표현하며 예슈아의 답변에 만족했다. 그는 '뜻'을 '깨달음(명철)'으로 표현했다. 즉 말씀을 깨달아 하나님을 바르게 알 지 못하면 결코 자신의 뜻을 온전히 드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예슈아와 하브루타를 하는 이유인 것이다. 이들이 이렇게 변론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왜 율법을 주셨는지 그 뜻을 깨닫기 위함이다. 예슈아께서 이 서기관의 대답을 듣고 천국과 멀지 않다고, 천국과 가까이 있는 자라고 칭찬하셨다(막12:32-34).
어떻게 이 서기관의 대답만 듣고 천국에 가까이 있는 자라고 칭찬하실 수 있었을까? 예슈아께서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중요하므로 다른 율법(번제, 제물등)은 필요없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물론 더 중요한 율법과 덜 중요한 율법이 있다. 그러나 그 어떤 율법도 폐하고자 하신 것이 아니라 온전함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서기관은 율법을 왜 주셨는지 그 목적과 율법이 가르치고 있는 것이 결국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즉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고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어떤 것을 폐할 필요도 폐할 수도 없음을 그는 온전히 이해하고 있었다. 이런 자에게 천국이 가깝다고 말씀하셨다면, 오늘날 율법의 진정한 목적과 본질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고 준행하는 자들은 진정 천국이 가까운 것이다.
서기관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예수께서 그가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막12:32-34)
6 우리 눈을 의로움에 두라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교만하다고 비방하고 낮추어 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시선을 그런 자들에게 두어서 그렇다. 언제나 의인은 소수이고 악인은 다수이다. 그렇다고 모든 소수가 의인이라는 말은 아니다. 의인이 많지 않다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가 다수의 악한 자들에게 시선을 두면 언제나 이스라엘은 악한 자들 뿐이다. 물론 대부분 악한 자들이다. 언제나 그렇다. 그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소수지만 선한 자들에게 우리 시선을 둘 때 우리에게 소망이 있다. 마카비 시대에도 마찬가지이다. 다수의 악인에게 시선을 두면 수전절은 불법한 역사일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때나 오늘이나 의인 한명을 찾으신다. 아주 적은 의인들이 목숨을 걸었기에 성전이 회복될 수 있었던 것이다.
언제나 의인의 싸움은 불가능해 보이는 현실에서 믿음으로 돌파하는 것이다. 항상 순종하기 좋은 환경이고 승리할 만한 분위기라서가 아니라, 믿는 자들이 순종할 수 있는 환경를 만들고 승리하는 기류로 바꾸는 것이다. 그 사람들이 머리이고 리더인 것이다. 같은 것을 보나 우리 눈이 불의에 있으면 불의한 자들 투성이고 언제나 실패할 수 밖에 없지만, 우리 눈을 의로움에 두면 반드시 의로운 자를 찾아내어 소망에 충만한 자가 되고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모든 두려움(염려)을 내어 쫒는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다. 온전히 믿을 때(사랑할 때) 완전함을 이룰 수 있다. 우리가 죄를 두려워함으로 여호와를 경외해야 하지만, 세상을 두려워한다면 형벌이 따른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요일4:18). 그러므로 우리 눈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세상은 반대로 보일 수 있다. 그것이 우리의 마음이고 믿음이다(마20:15).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마20:15)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요일4:18)
7 온 마음을 드리지 못하는 이유
우리 삶속에 보물이 무엇인가? 보물은 자신이 가장 귀하게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만약 돈이라면 그곳에 마음이 있을 것이고 하나님이라면 그분께 마음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나 예슈아께서 그렇게 믿음을 강조한 것이다. 이는 율법이 필요없거나 행위(순종)가 필요없어서가 아니라, 결국 그 근본이 마음에 있고 거기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앞에서 밭을 두가지로 나누었다. 좋은 밭과 가시밭이다. 이는 좋은 마음과 악한 마음으로 나눌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한다. 즉 마음과 뜻과 목숨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재물을 염려함으로 나누어진 마음을 말하고 있다. 즉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지 못하는 것이다. 물론 재물이 필요없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둘 다 사랑할 수 없으므로 하나는 중하게, 다른 하나는 경히 여길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상태이다(마6:23-25). 이처럼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있다면, 다른 말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자신의 보물이고 우상인 것이다.
반면 좋은 땅은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지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나쁜 땅은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돌보심을 신뢰하지 않고 염려함으로 재물을 위해 계명을 어겨야 할 때 불순종을 선택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중간한 태도는 하나님께서 분명히 드러내시기 위해 마음을 시험하실 것이다. 결국 이러한 재물과 염려하는 마음은 우리로 온전한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한다. 재물을 전혀 신경쓰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그렇다면 6일동안 일하고 게으르지 말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다만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온전히 있을 때 우리의 먹고 사는 문제는 그분께서 해결해주실 것이다. 우리는 참새보다 귀하다(마6:26,27).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마6:21 24-27)
샤밧 예배: 토요일 11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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