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5월의 첫날을 시작합니다.
어떤 종교적 행위보다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중요한데
이것을 알지 못하니 답답하기만 합니다.
사람에게 어떻게 보이는가가 아니라,
주님 앞에 어떤 존재인가를 늘 생각하게 하옵소서.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저의 부정성을 보혈로 덮어 주옵소서.
정결한 마음 주시옵소서.
성령님, 진리를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 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 다윗의 아들 압살롬에게 아름다운 누이가 있으니 이름은 다말이라 다윗의 다른 아들 암논이 그를 사랑하나
2. 그는 처녀이므로 어찌할 수 없는 줄을 알고 암논이 그의 누이 다말 때문에 울화로 말미암아 병이 되니라
3. 암논에게 요나답이라 하는 친구가 있으니 그는 다윗의 형 시므아의 아들이요 심히 간교한 자라
4. 그가 암논에게 이르되 왕자여 당신은 어찌하여 나날이 이렇게 파리하여 가느냐 내게 말해 주지 아니하겠느냐 하니 암논이 말하되 내가 아우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사랑함이니라 하니라
5. 요나답이 그에게 이르되 침상에 누워 병든 체하다가 네 아버지가 너를 보러 오거든 너는 그에게 말하기를 원하건대 내 누이 다말이 와서 내게 떡을 먹이되 내가 보는 데에서 떡을 차려 그의 손으로 먹여 주게 하옵소서 하라 하니
6. 암논이 곧 누워 병든 체하다가 왕이 와서 그를 볼 때에 암논이 왕께 아뢰되 원하건대 내 누이 다말이 와서 내가 보는 데에서 과자 두어 개를 만들어 그의 손으로 내게 먹여 주게 하옵소서 하니
7. 다윗이 사람을 그의 집으로 보내 다말에게 이르되 이제 네 오라버니 암논의 집으로 가서 그를 위하여 음식을 차리라 한지라
8. 다말이 그 오라버니 암논의 집에 이르매 그가 누웠더라 다말이 밀가루를 가지고 반죽하여 그가 보는 데서 과자를 만들고 그 과자를 굽고
9. 그 냄비를 가져다가 그 앞에 쏟아 놓아도 암논이 먹기를 거절하고 암논이 이르되 모든 사람을 내게서 나가게 하라 하니 다 그를 떠나 나가니라
10. 암논이 다말에게 이르되 음식물을 가지고 침실로 들어오라 내가 네 손에서 먹으리라 하니 다말이 자기가 만든 과자를 가지고 침실에 들어가 그의 오라버니 암논에게 이르러
11. 그에게 먹이려고 가까이 가지고 갈 때에 암논이 그를 붙잡고 그에게 이르되 나의 누이야 와서 나와 동침하자 하는지라
12. 그가 그에게 대답하되 아니라 내 오라버니여 나를 욕되게 하지 말라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마땅히 행하지 못할 것이니 이 어리석은 일을 행하지 말라
13. 내가 이 수치를 지니고 어디로 가겠느냐 너도 이스라엘에서 어리석은 자 중의 하나가 되리라 이제 청하건대 왕께 말하라 그가 나를 네게 주기를 거절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되
14. 암논이 그 말을 듣지 아니하고 다말보다 힘이 세므로 억지로 그와 동침하니라
(본문 주해)
1~2절 : 다윗의 장남인 암논이 배다른 누이동생 다말을 사랑하여 상사병이 든다.
다말은 다윗의 셋째 아들 압살롬의 친누이였다.
다말이 ‘처녀이기에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은 공주를 보호하기 위하여 경비를 둔다거나 처소를 다른 곳으로 정하여 둔 것으로 본다.
그런데 다말에 대한 암논의 마음은 사랑이 아니라, 단지 더러운 정욕임이 후에 드러난다.
3~5절 : 요나답은 암논과 사촌지간으로 간교한 자였다.
다말에 미쳐있는 암논에게 그녀를 강간할 수 있는 계략을 말해 줌으로 그는 차기 왕위에 오를 서열 1위인 암논에게 아부한다.
그것은 다윗 왕이 다말에게 암논의 시중을 들도록 명령하게 하여 다말이 거절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6~14절 : 요나답의 계략대로 암논이 병든 체 하고 있다가 다윗이 오자 다말이 과자를 만들어주면 낫겠다는 말을 한다. 암논이 다윗의 허락을 받고, 다윗이 사람을 보내어 다말에게 암논을 위하여 과자를 만들어 주게 한다. 과자를 다 만들자 사람들을 밖으로 몰아내고 다말을 침실로 들어오게 하여 동침하자고 한다.
다말이 거절하면서 여러 가지 이유를 말하지만 암논이 힘으로 다말을 강간한다.
(나의 묵상)
다윗의 강간죄와 살인죄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암논이 다말을 강간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이 사건으로 암논이 죽게 되고, 또 압살롬의 반역 사건으로 이어지니 다윗에게 나타난 죄들이 그의 아들들에게도 반복적으로 나타남을 보여준다.
다말을 강간하고 난 후 그녀를 내치는 암논의 그 마음에 분노가 치솟지만, 그 이상한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죄악 된 본성을 가진 나는 죄악 된 인간의 이랬다저랬다 하는 그 마음-누군가를 죽도록 사랑하다가, 죽도록 미워하는 마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애초에 사랑이 아니라, 더러운 정욕이었을 뿐이다. (언젠가 목사님이 주일 설교 시간에 우리의 ‘사랑’이라는 단어가 너무 함부로, 구분없이 마구 사용된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참 맞는 말씀이다.)
치를 떨게 하는 암논의 정욕, 생각해 보면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율법이 뭐라고 하든지, 혈연관계가 어떻든지, 다말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자기 욕심만 차리면 그만인 암논의 그 정욕이 바로 육신의 정욕이다.
내게도 그와 같은 본성이 가득하다.
어떤 것에 열렬하게 집착했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이내 그에 대해 시들해지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꼭 사람만이 아니라, 다른 것에도 미쳐 살아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육신의 정욕은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과 함께 범벅이 되어 나의 옛 사람의 본성을 이룬다.
성경이 인간의 다양한 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이는 이유는 그 죄인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야만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러 가지 추잡한 사건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언약은 신실하게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내가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할 때 암논의 정욕은 이해할 수 없다.
‘뭐 이 따위 인간이 있나?’ 하고 흥분한다. 다윗의 간음과 살인을 볼 때처럼......
그러나 내가 죄인인 것을 알게 되면 그 정욕을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그것을 옳은 것이라고 말하지 않겠지만...... 같은 종류로서의 이해이다.
이 땅을 살아가노라면 내가 암논이 되어 말도 안되는 정욕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때로는 기회주의자요 간교한 요나답이 되어 얇게 뜬 눈으로 세상을 살피는 자가 되기도 한다.
혹은 다말처럼 황망한 일을 겪기도 한다.
그런데도 나 자신이 암논인지 요나답인지 다말인지 눈치도 채지 못한다.
그러나 말씀 앞으로 나아가면 암논의 정욕과 요나답의 간교함과 다말의 처량한 신세가 내 안에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날마다 내 죄가 들통이 나고, 그 암담함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면서 예수님만이 나의 구주가 되시고, 그 주님을 더욱 깊이 알아갈수록 주님만 의지하게 된다.
그러니 십자가에 연합되어 내 안에 있는 암논의 정욕과 요나답의 간교함과 다말의 처량한 신세를 다시 보는 것이다.
불같은 정욕을 십자가 못 박고, 내 이익을 따라 움직이고자 하는 본능을 십자가에 못 박고, 본의 아니게 당하는 황망한 사건 앞에서도 주님 앞에 선 자로 있으니 평안함을 잃지 않는 것이다.
말씀을 통해 매번 나의 죄가 들통이 나는 것은 참 아픈 일이지만, 보혈로 덮어주시고 그에 의지하게 하시니 날마다 평안인 것이다.
(묵상 기도)
주님,
다윗의 죄, 그 자녀들의 죄
그리고 저의 죄가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끝이 없습니다.
주님 아니시면
출구 없는 생지옥의 세상 속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점점 말라 죽어갈 뻔했습니다.
저를 이 생지옥 속에서 구해 주시고
매일의 말씀의 빛 안에 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매일 들통나는 나의 죄로 마음은 아프지만
그것이 주님의 뜻임을 알기에 담대하게 나아갑니다.
성령님께서 저의 일생을 주관하여 주실 것을 믿으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