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화
김윤환
대문을 열고 왼쪽으로 돌아가면
창고로 쓰던 반지하방을 월세 5만 원에
몇 년을 옥살이처럼 산 적 있었다
일터에서 돌아와 문을 열면
어둠은 기다렸다는 듯 내 품에 안겼고
나는 그것이 무서워
창이 있었으면 좋겠다 싶어
가장 어두운 쪽에 창을 그리고
거기에 해를 그려 넣었다
쉬 잠들지 않는 밤이면
어스름 꿈결에 어느 소녀가 창틀에 앉아
햇살 같은 미소를 보내곤 했는데
화들짝 놀라 눈을 뜨면
촛농이 흘러내리듯 검은 창들이 온 방에 흘러내렸지
들어오고 싶지 않은 방에도 달력은 있었고
아무것도 적히지 않는 빈칸마다
따라갈 수 없는 시인의 시를 채우곤 했는데
시인과 흘러내린 창문과 어둠이
늡늡한 노래가 되어 아침이면 내 등을 적시곤 했다
지금은 지상 위에 집 한 칸을 갖고 살지만
아직도 그림자의 끝은
반지하 방 검은 창가에 걸쳐 있고
불과 열한 계단 아래의 방이었지만
오르는 일은 내려가는 일보다 어두웠지
장마가 오면 마치 깊은 저수지로 들어가듯
두려움과 안온함이 나를 감싸고 있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없었다면
난 아직도 바닥에 누운 검은 창틀과 하나가 되어
그 열한 계단 밖의 세상을
먼 하늘처럼 그리워만 하고 살았으리라
오늘도 왼쪽으로 돌아가면
삐걱 반지하의 문이 열리고
어둠은 여지없이 나를 감싸고
손 한 번 잡은 적 없는 소녀는
내가 그려놓은 창틀에 우두커니 앉아 있다
푸른곰팡이는 꽃이 되어
한 폭의 벽화로 남아 있고,
햇살은 언제나 낯설다는 듯
그늘에만 꼭꼭 숨어 있었다
김윤환
1989년 《실천문학 등단》
시집 『그릇에 대한 기억』 『내가 누군지를 지우는 동안』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