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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항사지 석탑의 조탑명(造塔銘)
탑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조형미 분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이 탑은 건립 시기나 조탑의 목적 등이 적힌 조탑명(造塔銘)이 새겨져 있어
탑파사 연구에 있어서 매우 소중한 석탑이라 할 수 있다.
동탑 상층 기단 중대 신부의 벽판석에 조탑명이 새겨져 있다.
"二塔 天寶十七年戊戌中 立在之 娚姉妹三人 業以成在之 娚者 零妙寺言寂法師在旀 妹者照文皇太后君妳在旀 妹者敬信大王妳在也.
두 탑은 천보 17년(경덕왕 17년. 758년) 무술 중에 세워져 있다.
오빠와 자매, 3인의 업으로써 이것을 이루었다.
오빠는 영묘사의 언적법사이시며, 자는 소문황태후이시고, 매는 경신대왕의 이모이시다." (박경식. 한국의 석탑 P235. 학연문화사. 2008년)
[출처] 김천 갈항사지(葛項寺址) 동서 삼층석탑 1 : 오빠와 자매, 3인의 업(業)으로써 이것을 이루었다. (신라 정형양식의 통일신라시대 석탑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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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통일신라 석탑을 마주하다.
1. 석가탑과 견줄 만한 조형미
마지막으로 갈항사지 동서 삼층석탑을 찾아본 것은 2022년 초봄이었으니,
벌써 한 해를 훌쩍 넘겨버렸다.
이 2기의 석탑은 국립중앙박물관 거울못 뒤편에 있는 야외 석조물 전시장에
여럿의 다른 석탑들과 함께 있다.
갈항사지 동서 삼층석탑은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석가탑)과 함께 담백한 세련미를 뽐내는
통일신라 전성기에 만들어진 빼어난 작품(국보)으로 평가받고 있는 석탑이다.
8세기 신라 정형양식석탑(定型樣式石塔)의
대표적 석탑의 하나로 불리는 탑이라 할 수 있다.
야외 석조물 전시장과 갈항사지 동서 삼층석탑 전경. 2022년 초봄.
국립중앙박물관 야외 석조물 전시장. 멀리 가자
일찍이 우현 고유섭(又玄 高裕燮) 선생님은
"하층 기단은 중계된(中繼)된 팔석 계합식이며
상단 신부석은 넉 장 판석의 엇물림식 조립이고,
그 갑석은 넉 장 등분 계합으로서 정연한 결구미를 갖고 있다..
상단 낙수면도 완만하고 아름다운 유선(流線)을 보이고.. 처마는 매우 아름답게 뻗어있다.. 서탑은 십삼 척 일촌 구 푼, 모두 단려(端麗) 하고도 아순(雅淳),
가장 문아(文雅) 한 탑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고유섭. 조선탑파의 연구(하) 각론편 17. 김천 폐갈항사(廢葛項寺)
동서 삼층석탑. P 111. 悅話堂. 2010.
진홍섭(秦弘燮)은 "이 탑은 균형 잡힌 아름다운 탑이며 수도(필자 주 :경주)가 아닌 금릉이라는 지방에 이러한 탑이 조성된 것이 주목된다."라고 하였다.
진홍섭. 한국의 석조미술. P 142. 문예출판사. 2003.
장충식(張忠植)은 "아무튼 이 탑은 조탑명(造塔銘)에 의하여 경덕왕(景德王) 17년(758년)에 건립된 신라 석탑의 기준을 이룩하였다는 점에서 크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동시에
그 양식적 계보는 바로 석가탑 양식을 추종하며 이를 정립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라고
하였다.
장충식. 신라석탑연구. 갈항사지 동서 삼층석탑. P 134. 일지사. 1999.
또, 박준식은
"갈항사지 금당의 남쪽에 동서로 세워졌던 쌍탑으로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을 가지고 있다.
이 탑은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웠는데 상륜부만 없어졌을 뿐
나머지는 완전하게 남아있다.
이 탑은 석가탑에 비해 규모는 작으나 조립 방식이나
조형미에 있어서 석가탑과 견줄만하다."라고 하였다.
박준식. 여행길에 만난 신라탑. P 99. 계명대학교출판부. 2011.
이 밖에도 많은 학자들이 이 탑에 대하여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고 있으나
여기서 일일이 다 열거할 수는 없다.
요즘처럼 향기롭고 맑은 계절에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직접 한 번 나드리 해보시면
어떨까 한다.
지금 이 시기는 야외 석조물 전시장을 찬찬히 둘러보기에
아주 적합한 빛나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2. 갈항사지 석탑의 조탑명(造塔銘)
탑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조형미 분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이 탑은 건립 시기나 조탑의 목적 등이 적힌 조탑명(造塔銘)이 새겨져 있어
탑파사 연구에 있어서 매우 소중한 석탑이라 할 수 있다.
동탑 상층 기단 중대 신부의 벽판석에 조탑명이 새겨져 있다.
"二塔 天寶十七年戊戌中 立在之 娚姉妹三人 業以成在之 娚者 零妙寺言寂法師在旀
妹者照文皇太后君妳在旀 妹者敬信大王妳在也.
두 탑은 천보 17년(경덕왕 17년. 758년) 무술 중에 세워져 있다.
오빠와 자매, 3인의 업으로써 이것을 이루었다.
오빠는 영묘사의 언적법사이시며, 자는 소문황태후이시고, 매는 경신대왕의 이모이시다." (박경식. 한국의 석탑 P235. 학연문화사. 2008년)
조탑명(造塔銘). 육안으로 보기에는 글자가 매우 희미하였으며
사진으로도 또렷하게는 볼 수 없다.
서적을 통하여 내용을 알아보았다.
2022년 초봄. 국립중앙박물관 야외 석조물 전시장. 멀리가자
우선 탑의 건립 시기가 명기되어 있는 것은
매우 드문 경우라 학술적으로 매우 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를 기준으로
신라 석탑의 조형적 특징의 변화를 구분 지어줄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석가탑이 751년 불국사 창건 시 세워진 것이라 하였을 때는,
갈항사지 석탑은 수도 경주에서 전파된 양식을 충실히 모방한 것으로
처음에는 평가하였다. 그러나 최근 석가탑 중수기가 발견되었고,
이 중수기에 의하면 석가탑이 혜공왕(재위 765~785) 대에 만들어졌음이 밝혀져
갈항사지 동서 석탑이 오히려 석가탑보다 10여 년 앞서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갈항사탑이 석가탑을 모방한 아류가 아니라 이미 지방에까지 퍼진
이 시대 석탑의 한 유형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알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3. 함께 떠나는 시간 여행 : 원성왕(재위 785~798)과 계오부인(조문황태후) 이야기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10권 신라 제38대 원성왕(元聖王) 조를 보면
원성왕의 이름은 경신(敬信)이고, 어머니는 계오부인(繼烏夫人) 박 씨(朴氏)라고 했다.
그러면 조탑명에 새겨진 조문황태후는 계오부인 박 씨이다.
실제로 삼국사기에도 원성왕이 즉위한 후 다음 달에
어머니 박 씨를 소문태후(昭文太后)로 추봉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조문황태후는 소문태후 동일인으로 보고 있다)
시간적으로 탑이 조영된 758년은 경덕왕 재위 기간(742~765)에 해당하며,
그 뒤 혜공왕(재위 765~785), 선덕왕(재위 780~785)을 거치고
785년이 되어서야 원성왕이 즉위하니
탑을 만들고 나서 대략 27년이 지난 후 일정 시점에 탑에 조탑명을 새겼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조문황태후'니 '경신대왕'이니 하는 글이 들어있으므로
원성왕이 이미 즉위한 후의 기록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758년 원성왕(김경신)의 외가 사람들(모친 계오부인, 오라버니 언적법사, 계오부인의 여동생) 삼 남매는 갈항사에 탑을 공양하며 염원을 빌었다.
그 염원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혹 아들 경신이 왕위에 오르기를 기원했는지도 모르지 않는가), 공교롭게도 계오부인 박 씨의 아들인 김경신은
신라 제38대 원성왕으로 왕위에 오르는 그야말로 드라마 같은 일이 벌어졌다.
삼국사기에는 선덕왕이 갑자기 타계한 후 후사가 없어
무열왕계인 김주원(金周元)을 왕으로 세우려 했으나
김주원의 집이 서울(경주) 북쪽 20리에 있었는데,
갑자기 홍수로 물이 불어나 알천(閼川. 지금의 경주 북천)이 범람하였고
이를 건너지 못해 서울로 들어오지 못하였다.
이는 필시 김주원을 임금으로 모시지 말라는 하늘의 뜻이니
지금 서울에 들어와 있는
상대등 김경신을 왕으로 추대하자는 뭇사람의 의견으로 대신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는 간략한 기사만 나온다,
그런데 삼국유사에는 사실 여부는 둘째로 하고 아주 소상하게 이 일을 기록하고 있는데
매우 흥미롭고 소설 같은 스토리가 적혀 있다.
다음은 삼국유사 기이 제2 원성대왕 (三國遺事 紀異 第二 元聖大王) 조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찬(伊湌) 김주원이 처음에 상재(上宰)가 되었고 원성왕(김경신)은
각간으로 상재의 다음 자리에 있었다. 원성왕은 꿈에 복두(幞頭. 두건의 일종. 귀인이 쓴 모자)를 벗고 흰 삿갓을 쓰고 12현의 가야금을 들고 천관사(天官寺) 우물 속으로 들어갔다. 기이하여 사람을 시켜 해몽을 하였더니
"복두를 벗은 것은 직책을 잃을 조짐이고, 가야금을 든 것은 칼집을 쓸 조짐입니다.
우물에 들어간 것은 옥에 갇힐 조짐"이라 하여 흉몽이라고 했다.
원성왕은 근심하여 문을 닫고 병을 칭하여 밖에 나가지도 않았다.
그런데 아찬(阿湌) 여삼(餘三, 혹은 여산 餘山이라고도 한다)은 길몽이라고 하고
꿈해몽을 해드릴 테니 왕위 오르거든 저를 버리지 말라고 부탁한다.
내용인즉 "복두를 벗은 것은 그 위에 사람이 없다는 뜻이고,
흰 삿갓을 쓴 것은 면류관을 쓸 장조이고, 천관사 우물에 들어간 것은 궁궐로 들어갈 좋은 징조"라고 했다. 그러면서 "청컨대 몰래 북천신(北川神)에게 제사를 지내라고" 했고
김경신은 아찬의 말에 따랐다.
그리고 얼마 후 선덕왕이 죽자 나라 사람들이 김주원을 왕으로 삼아 궁궐로 맞아들이려고 했으나 주원의 집이 서울 북쪽에 있어 갑작스러운 홍수로 불어난 북천을 건널 수 없었고, 김경신은 먼저 들어가 즉위하였다는 내용이다.
나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어쩌면 성공한 쿠데타 같은 것인데 모종의 이야기로 꾸며 만든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아주 흥미진진한 스토리 인 것은 틀림없다.
원성왕의 어머니를 비롯한 외가의 발원 덕인지
이리하여 왕위에 오른 원성왕은 성군이 되었다.
삼국유사는 원성왕을 '원성대왕' 칭하였다.
즉위 후 꿈 해몽과 북천신에 제사 지낼 것을 가르쳐 주어
원성왕이 왕위에 오를 수 있게 도움을 준 아찬 여산(阿湌 餘山)은 등극하였을 때
이미 죽었으므로 그의 자손을 불러 벼슬을 내렸다.(삼국유사. 기이 제2 원성대왕조)
우리가 역사 시간에 배운바 원성왕 즉위 4년(788년) 봄에
'독서삼품(讀書三品)'을 정하여 벼슬길에 나가는 길을 열어 인재를 공정하게 등용하였고, 또 6년(790년)에는 '벽골제'를 더 늘려 쌓고 역사(役事)를 일으켜 나라를 융성하게 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긴 위대한 왕이었다.
원성왕릉 전경. 통일신라시대 가장 완비된 능묘제를 보여준다고 한다.
돌사자 두 쌍, 문인석 한 쌍, 무인석 한 쌍과 무덤임을 표시해 주는 화표석(華表石) 한 쌍이 서로 마주 보고 차례로 서있는 멋진 릉이다. 2022년 여름 경주. 멀리가자
삼국사기에는 왕이 즉위 14년(798년) 겨울 12월에 세상을 떠나자
유명으로 널을 들어다 봉덕사(奉德寺) 남쪽에서 태워버렸다고 했고,
삼국유사에는 왕의 릉이 토함산 서쪽 동곡사(洞鵠寺.
지금의 숭복사 崇福寺)에 있다 했으며 최치원이 지은 비문이 있다 했다.
이를 근거로 지금은 한때 괘릉(掛陵)이라 불렸던 토함산 서쪽 숭복사 옆에 있는
릉을 바로 원성대왕의 릉으로 비정하게 되었다.
숭복사지 대숭복사비 : 원성왕릉과 가까운 경주시 외동읍 숭복사지(崇福寺址)에 있다.
비는 모두 훼손되어 비편으로 일부 남아있고 쌍귀부(雙龜趺)만 남아 경주박물관에 있다. 비문 내용은 헌강왕 11년(885년)에 이 자리에 있던 곡사(鵠寺)라는 절을 크게 중창한 뒤
명칭을 숭복사로 개칭하고 최치원(崔致遠)에게 비문을 짓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여기 이 비는 경주시가 2010년부터 2013년까지 내용을 고증하고 최치원의 글자를 집자하여 새로 새긴 것이다. 쌍귀부도 경주박물관의 것을 모방하였고
이수도 고증을 통하여 새로 건립하였다. 2022년 여름. 경주시 외동읍 숭복사지. 멀리가자
숭복사지 전경. 석물이 흩어져 있고, 그 옆에는 숭복사지 삼층석탑을 보수하느라 펜스가
둘러쳐 저 있었다. 현재는 보수가 끝나 깨끗이 정리되었다는 말은 들었다,
2022. 여름. 경주시 외동읍 숭복사지. 멀리가자.
이제는 다시 원래 갈항사지 동서 삼층석탑이 있었던 김천시 남면 오봉리 폐사지를 찾아갈 시간이다. 대략 1,300년 전에 있었던 이 아름다운 탑의 고향을 향하여 길을 떠난다.
('김천 갈항사지 동서 삼층석탑 2'에서 계속)
2023년 신록이 우거진 5월에. 김천 갈항사지에서. 멀리가자
[출처] 김천 갈항사지(葛項寺址) 동서 삼층석탑 1 : 오빠와 자매, 3인의 업(業)으로써 이것을 이루었다. (신라 정형양식의 통일신라시대 석탑 4)|작성자 멀리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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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항사 동·서석탑은 주민등록이 여러 번 바뀌었다.
김천 남면 오봉리가 본적인데 현재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정원에 가 살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삼층석탑으로 알려진다.
삼국유사 권4 승전촉루 편에 승전법사가 개창했다고 적었다.
생일이 서기 692년(통일신라 효소왕 1)이다.
신라가 불교문화를 찬란히 꽃 피우던 때.
갈항사 쌍석탑은 758년(경덕왕 17)에 축조,
30여 년 뒤인 원성왕 대(785〜798)에 석탑기를 새겼다.
일제강점기에 해체, 일본으로 가져가려 이전을 시도했는데 해체하니
동탑 기단에서 이두문으로 된 명문(銘文)이 나왔다.
신라시대의 탑에서 이렇게 건립 연대와 경위가 명확히 밝혀진 것은 이 탑뿐이라 알려진다.
1916년 2월, 명문이 있는 동탑을 일본으로 가져가려고 인천 부둣가까지 운반,
미처 배에 싣지 못하고 잡초 속에 방치되어 버렸다.
그해 6월에 동탑이, 1921년에 서탑이 각각 조선총독부 박물관이 있는 경북궁 정원으로 주민등록이 옯겨졌다.
김천 남면 원래의 자리에는 표지석만을 남겨놓은 채. 동·서 두 탑은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99호로 지정,
2005년에 현재의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정원으로 또 옮아 살게 되었다.
갈항사 쌍석탑은 신체의 각 부위가 균형을 이뤄 몸매가 좋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자랑하는 국보 제112호인 감은사 삼층석탑과 건립 연대와 모양이 가깝다.
건립 연대로 봐 감은사 삼충석탑(682년),
불국사 석가탑(742년;종전엔 751년으로 봤음),
갈항사 쌍석탑(758년) 순이다.
세 탑은 몸매가 매우 닮았다.
갈항사 쌍석탑의 생가터를 찾아가 볼라치면 지금 사유지로 남아 있어
승용차 진입조차 어렵다.
석조 석가여래좌상(보물 제245호), 비로자나석불좌상이 남아 생가를 지키고 있다.
동탑에서 청동사리함과 금동사리병, 서탑에서 청동주전자, 자기 조각, 썩은 종이, 골편 등이 나왔는데
현재 국립대구박물관에 가 있다.
1995년 경북궁 복원사업 때 이 삼충석탑을 반환해 주도록 문재원 전 향토사연구회장이 주도해 간곡히 요청했으나
국립중앙박물관으로부터 거절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