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양
최정란
투명한 현을 허공에서 팽팽하게 당기며
두 절벽에 바람을 거는 악공은
절벽을 내려오는 방법을 알기까지 얼마나 오래
벼랑을 살았을까
기름진 평야에 적응하기에 실패하고
완만한 풀밭에 제 영역 만들기에 실패하고
위로 위로 쫓기다 가파른 바위능선을 서식지로 삼은
초식동물, 뿔이 제 심장을 향해 꼬부라진 짐승
수시로 제 안에서 천길 벼랑이 솟아나는 짐승
제가 제 벼랑인 짐승
바위산의 뼈에 살을 붙이고, 대를 이어 피가
벼랑으로 스미는 동안
대를 이은 몰락이 일상이 되도록, 작은
실수를 허용하지 않는 무심한 추락이 뼈에 각인되도록
가파른 발굽이 단단한 절망에 최적화되도록
바위산을 타지만
몰락에도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어
무너뜨려도 다시 솟는 벼랑을 박차야 하는 순간이 있다
누군가의 뿔을 밟지 않고는 건너뛸 수 없는 벼랑
그래도 건너뛰어야 하는 벼랑
죽어도 다른 산양의 뿔을 디딤돌로 딛을 수는 없어
죽을힘을 다해도 안전한 착지에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건너편 절벽을 향해 몸을 던진다
탁탁, 추락 아닌 추락을 박차며
탁탁, 추락일 수밖에 없는 추락을 박차며
맞은 편 절벽을 향해, 처음 출발한 절벽을 향해
탁탁, 날마다 솟아나는 벼랑을 박차며
탁탁, 모든 아득을 밀어내며
맞은 편 절벽을 향해, 처음 출발한 절벽을 향해
허공이 갈라지고 허공이 비워진다
절벽을 박차며 지그재그 허공을 내닫는
피투성이 발굽이 마지막 절망을 걷어차는 동안
천 길 바닥이 다가오고, 혼절한 혼이 몸을 빠져나가면
천 길 골짜기 풀밭에 산양이 숨을 내려놓는다
산양이 내려놓은 마지막 숨을 받아
바람의 활이 연주하는 허공
절벽을 틀로 삼는 거대한 현악기가 완성된다
피투성이 발굽의 노래, 가파른 벼랑의 노래
절체절명도, 절박함도, 무모함도 모두 어쩔 수 없이
노래가 되는 벼랑 에 산양이 산다
최정란
경북 상주 출생. 2003 <국제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 『장미키스』『입술거울』『여우장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