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에세이>(12)
현재와 미래적 삶의 간극에 대한 블랙 코미디
마린 아데의 <토니 에드만>
김 문 홍

지금 이곳의 삶에 대한 블랙 코미디
늘 앞만 보고 걷는 사람은 가까운 주변을 보지 못 한다. 마치 숲 속에 든 사람처럼 나무는 보되 숲을 보지 못 한다. 삶의 목표를 먼 미래에 둔 사람 역시 현재를 잘 보지 못 한다. 그런 사람들은 주변만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잘 보지 못 한다. 행복이 멀리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역시 눈앞의 행복은 잘 보지 못 한다. 마치 행복은 멀리 있고 무척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하루하루의 작은 행복들이 쌓이고 쌓여 큰 행복이 되는 줄을 모른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자신의 잘못을 깨달을 때가 있다. 신기루를 쫓듯 내달리다 모든 것을 다 잃고 난 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는다.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는 그 은혜와 고마움을 모르다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야 왜 좀 더 잘해 드리지 못했을까 후회하곤 한다. 작은 즐거움이나 하찮은 기쁨이 사실은 그들에게 큰 행복이 될 줄을 모르고 지낸 것이다. 지금 이곳의 행복이 실은 값진 것임을 깨닫는다.
독일 베를린 학파의 여류 감독 마린 아데가 연출한 〈토니 에드만〉(2016, 162분)은 현재와 미래의 행복에 대한 블랙 코미디이다. 베를린 학파란 뉴저먼 시네마 이후 침체되었던 독일 영화계에 2000년대 이후에 새바람을 일으킨 일군의 감독들의 영화 운동을 일컫는다. 마린 아데 역시 그 중의 한 사람으로 〈에브리원 엘스〉라는 작품으로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은곰상을 받았을 정도로 주목 받는 감독이다. 이 작품 역시 2016년 칸 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되어 비평가들로부터 찬사를 받은 바가 있다.
이 영화는 아버지와 딸의 행복에 대한 줄다리기를 유머로 풀어내면서 미래의 목표 달성을 위해 현재의 행복을 잊고 사는 현대인들을 풍자하는 블랙 코미디이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영화적 장르를 암시하고 있다. 택배원이 문을 두드리자 빈프리트 콘라디(페터 지모나세크 분)가 나와 물품을 획인하고 난 뒤 안에 있는 동생을 향해 소리친다. 동생이ㅐ 출감하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택배원에게 설명한 뒤 그는 안으로 들어간다. 곧바로 한 사내가 등장하자 택배원은 의아한 눈초리로 그를 살핀다. 그는 농담이라면서 택배원을 안심시킨다. 방금 전에 안으로 들어갔던 그가 변장을 하고 나와 동생 행세를 한 것이다. 그는 좋게 보면 유머를 잃지 않는 사람이고, 나쁘게 말하면 실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관객들에게 인지시킨다. 그는 전처와 이혼한 채 빌리라는 늙은 개와 함께 살고 있는 외로운 늙은이다.
그에게는 이네스 콘라디(산드라 휠러 분)라는 딸이 하나 있다. 그녀는 컨설턴트 전문 회사의 중견 간부로 루마니아 지사로 발령 난다. 그녀가 임지로 떠나기에 앞서 전처의 집에서 미리 생일파티를 하게 된다. 딸은 마당 한쪽에서 긴 전화통화를 할 정도로 업무에 바쁘다. 이 영화는 그가 휴가차 딸과 함께 루마니아에 가게 되면서 겪게 되는 좌충우돌을 그리고 있다. 이 영화는 인과 관계의 뚜렷한 극적 서사도 없이 일상 속의 작은 에피소드로 진행되면서도 관객들에게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토니 에드만이라는 가명을 쓰는 아버지인 그가 빚어내는 유머와 돌출 행동이 곳곳에 큰 방점을 찍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업무에 쫓기는 딸인 그녀가 아버지의 유머에 의해 점점 본래 모습을 찾아가는 과정이 가슴 뭉클한 감동을 주고 있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이 두 사람의 밀고 당기는 줄다리기의 끝이 어떻게 될까 하는 궁금증이 끌어당기는 흡인력 때문일지도 모른다.
에피소드의 곳곳에 숨겨 놓은 인물의 행동과 서사의 방향을 예고하는 복선을 찾아 나름대로 상상하고 예단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러면서도 이 영화는 기존의 멜로드라마의 클리셰를 차용하지 않고 독창적인 서사를 전개하고 있다.

아버지의 유머가 은유하는 것
아버지는 루마니아에서도 늘 유머로 딸의 주위 사람들을 당혹하게 한다. 자신을 테니스 코치로 위장하기도 하고, 때로는 루마니아 주재 독일 대사로 자처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딸에 대해서는 예의를 지킨다. 빈프리트 콘라디라는 자신의 본래 이름을 숨기고 ‘토니 에드만’이라는 가명으로 행세한다. 그 위장술의 한 방편으로 틀니를 자주 이용한다.
딸인 이네스는 아버지라는 존재가 불편하기 짝이 없다. 컨설턴트를 따내야 하는 상대 회사의 사장에게 업무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어떤 때는 사장 부인의 쇼핑에 동행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늘 딸의 주위를 맴돈다. 이상한 돌출 행동으로 딸의 체면과 자존심에 상처를 주기도 한다.
아버지의 유머와 이상한 돌출 행동은 딸에 대한 일종의 암시이며 관심을 환기하기 위한 철없는 보챔이기도 하다. 딸의 목표는 현재가 아니고 미래에 있다. 미래에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현재의 즐거움을 잊는다. 미래에 좋은 직장, 안락한 삶을 위해서는 현재를 혹사해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가치관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와는 정반대이다. 현재의 삶을 즐겁게 즐기는 것이 곧 행복인 것이다. 미래는 그때 생각할 일이고 하루하루의 소소한 행복이 중요하다는 것이 그의 낙관적 인생관이다.
그러나 딸은 아버지의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버지의 삶의 철학을 인생을 통해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경상도 식의 이런 조크가 있다. “너거는 늙어 봤나, 우리는 젊어 봤다.”라는 말이 있다. 늙은이는 과거의 경험을 통해 인생의 지혜를 터득하고 있지만 젊은이는 아직 그것을 모른다는 뜻이다. 국내의 어느 석학은 “젊은이의 가장 큰 실수는 자신이 늙는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젊은이는 늙고 늙으면 반드시 죽는다. 이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라는 말을 하고 있지 않은가.
아버지 토니 에드만의 유머는 딸에 대한 일종의 암시이다.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한 번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이미 지나간 물에는 발을 담글 수 없는 법이다. 하루하루의 소소한 행복이 쌓이면 미래의 큰 행복이 될 수 있고, 미래는 예측 불가능한 시간이기 때문에 현재에 만족하며 즐기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라는 것이 곧 아버지의 지론이다. 아버지의 유머는 딸에게 ‘지금 이곳’의 삶을 깨우치기 위한 하나의 은유이다.
아버지와 딸이 부활절 행사 기간에 루마니아의 어느 가정을 방문한다. 그 자리에서 아버지는 자신이 키보드를 연주하면서 딸에게 노래를 부르게 한다. 휘트니 휴스턴의 ‘The greatest of all'이라는 노래이다. 그 노래의 가사 후반부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가장 큰 사랑을 얻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에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위대한 사랑이죠.‘라는 대목이다. 아버지는 현재의 삶을 즐기며 행복을 즐기고 있는데 딸은 그것을 모르고 있다. 즉, 아버지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데 딸은 그렇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 속의 아버지는 무심한 듯 행동하면서도 딸에게 속 깊은 정을 보내고, 유머를 보내면서도 딸이 그 진의를 파악해주기를 끊임없이 시도한다. 이 영화는 딸이 유머의 진의를 파악하고 자신을 찾아가는 심리적 추이의 여정을 그리고 있다.

가식 없이 진실과 대면하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가히 충격적이다. 딸 이네스는 생일파티를 위해 회사 직원들과 지인들을 자신의 집에 초대한다. 딸이 옷을 갈아입기 위해 입고 있던 원피스를 벗는다. 그런데 옷이 잘 벗겨지지 않는다. 마침 현관의 벨이 울린다. 딸은 급한 김에 옷도 입지 않은 알몸 상태로 현관문을 열러준다. 당황해 하는 사람들에게 알몸 파티이기 때문에 알몸이 아닌 사람은 입장을 허락할 수 없다고 한다. 돌아가는 사람도 있고, 어떤 이는 돌아갔다가 다시 알몸으로 방문하기도 한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아버지가 이곳을 찾아온다. 온통 털 복숭이 곰의 복장을 뒤집어 쓴 채 방문하여 파티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버린다. 아버지가 집을 나가자 딸은 가운 차람으로 아버지의 뒤를 따른다. 곰의 복장으로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딸은 그것이 아버지인 것을 직감한 것이다. 그러다가 두 사람은 어느 공원에서 깊은 포옹을 하며 화해를 한다.
알몸 파티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무것도 걸치지 않는다는 것은 타인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는다는 것은 사회적 체면이나 타인의 시선과 같은 가식을 벗어 던진다는 뜻이다. 사회적 자아를 버리고 원초적 상태로 돌아감을 의미한다. 딸은 비로소 알몸파티를 통해 그동안 잃어 버렸던 자기 자신을 되찾은 것이다. 아버지의 유머와 돌출 행동의 진의를 파악한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알몸을 바라본다는 것은 도덕과 사회적 불문율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딸이 알몸파티 모임에서 아버지를 대면한다는 것은 어린 시절의 천진무구한 동심으로 돌아갔다는 뜻이다. 비로소 딸은 현재의 자신을 발견하고 진정한 행복의 의미를 깨닫게 된 것이다.
마지막 시퀀스에서 딸의 즉흥적 유머와 돌출 행동을 바라보면서 관객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할머니 장례식장에서 딸은 아버지를 만난다. 마당 한쪽에서 딸은 이상한 모자를 쓰고 아버지의 틀니를 끼운 채 아버지 앞에 당당하게 선다. 이제 자신도 아버지처럼 유머감각으로 현재의 소소한 행복을 즐기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아버지의 진의를 파악한 딸의 표정에 장난기가 흐르는 가운데 엔딩 크레딧이 떠오른다.
마린 아데의 블랙 코미디인 〈토니 에드만〉은 162분이라는 짧지 않은 러닝 타임이지만 관객들은 지루함을 느낄 틈이 없을 정도로 템포가 빠르다. 서사를 관통하는 메인 플롯과 이를 보조하는 서브플롯도 없지만 소소한 재미를 선사한다. 이는 에피소드마다 큰 방점을 찍는 유머와 관습적 서사를 탈피한 감독의 창의성이 빛을 발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앞으로만 내닫고 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면 보이는 것마다 즐겁다. 그러다 문득 초라한 자신을 발견하게 되면서 당혹감을 느낄 것이다. 현재를 즐기는 것이 곧 행복이다. 행복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일상의 소소한 행복이 쌓이어 도도한 행복의 흐름을 만든다. 유머 감각을 잃지 않은 채 어쩌다 한 번쯤 돌출 행동을 해보는 것도 행복을 가꾸는 좋은 기술일지도 모른다. 카르페 디엠! 현재를 즐겨라. 지금 이곳 우리의 화두일 수도 있다.
첫댓글 감독이나 연출가, 그리고 작가의 철학이나 시선이
어디를 향하느냐에 따라 이 사회에
주는 울림은 큽니다.
현재를 잊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젊은이가
꼭 봤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