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쇠로 대문을 따고 들어오자마자 한기와 함께 이것저것 뒤엉켜 엉망이 되어 있는 방 풍경이 덩그라니 놓여 있다. 윗층에 올라가서 어른들에게 저녁 문안 드리고 나서 빗자루부터 들고는 방 구석구석 훔쳐댔다. 부시럭대며 한동안을 오가고 물건들을 제 자리에 놓고나서 한 일은 방 불을 끄고는 간만에 먼지를 턴 성냥을 긋는 것이었다. 촛불을 휘황히 밝히고는 싱크대로 가서 간만에 원두커피를 우려냈다. 쿠르르르르르...... 하며 물내리는 소리가 상당히 푸근하고 정겨웠다. 온 집안이 커피 향기로 뒤흔들릴 무렵에 가장 큰 컵을 꺼내 가득 부어 방으로 들고 왔다.
좋은 음악을 켜고 간만에 가을에 젖어보려 했지만 자꾸만 방해하듯 눈 바깥에 펼쳐지는 정경 하나. 마음을 다잡으며 커피를 마셔보지만 이 맛이 아니다... 예전에 마셨던 것과 같은 것인데도... 더 진하고 뜨거운 검은 빛이 가득 고여 있던... 입 안에 담기면 고스란히 녹아내리던 그 종류가 맥... 뭐였더라... 입 안에만 맴돌 뿐 떠오르지는 않는다. 음악 소리가 조금씩 잦아든다. 차이코프스키의 현악 세레나데를 들으며 조금은 현재 자체를 즐기고 싶었는데 또 다른 마음 한 켠은 전혀 다른 곳으로 달려간다.
사람의 마음 속에는 몇 개의 도시가 있고 그 속에 몇몇이 살아 있는 것일가... 아니, 온갖 살았던, 살지 않았던 시대가 범벅이 되어 있고 그것들 하나하나가 지금이라는 시간보다도 때로는 섬뜩하리만큼 아름답고, 잔혹하다. 차원을 따질 수 없는 기억들은 서로 오가면서 한 사람을 울고 웃게 만든다. 음악은 때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질서 속에서 마구 풀어냈다가 다시 첫 구절을 울려 이전을 돌아보도록 한다. 현악이 풍성하고 짙게 녹아내린 블루마운틴 - 헤이즐넛을 다시 한 모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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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출근을 하면서도 언니는 늦잠을 잘까 몇 번이고 확인하며 깨우고 있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대문은 닫혔고 총총걸음으로 내려가는 계단울림소리가 멀어지면서 서서히 의식이 또렷해졌다. 부시럭... 혹여 싶어 두 겹이나 덮은 이불이 갑갑했다. 방은 웃풍이 돌아 싸늘했고 겨울 되면 그 어떤 외투로도 소용없도록 추워질 것이다. 몸이 따끈따끈할 때 보일러에 목욕물을 맞추어놓고 화장실로 뛰어들어갔다.
작년 겨울, 물은 차고 방은 춥고... 대책 없이 차와 촛불에 의지해서 버텨냈던 시간들이 새삼 용해진다. 11월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오들들... 팔에 소름이 돋는데 그 때는 어떻게 살아냈을까... 나중에 보일러를 뜯어보고서야 모터에 물이 새면서 녹이 슬었음을 알 수 있었고 보일러 수리하러 오셨던 아저씨는 혀를 찼다. 어떻게 사셨는지 신기하다고. 물이라도 따뜻하고 방바닥이라도 뜨끈해지면서 더욱 지내기는 편해졌다. 부실공사 덕에 휘도는 웃풍은 앞으로도 대책이 없겠지. 시간이 어느 새 8시 30분을 가리키고 서둘러 물을 잠그고 머리를 털면서 마루로 나왔다.
채 말리지 않은 머리카락이 신경이 쓰였다. 얇고 손상되어 뒤엉키곤 했고 손가락으로 아무리 떼어내도 자꾸만 뭉쳤다. 숱도 없어 더욱 초라하게 내려앉은 것을 몇 번 빗질로 갈무리 하고 가방을 다시 점검했다. 음반과 mp-cdp, 반납해야 하는 책 세 권, 잘 때 입을 반 팔 티셔츠와 반바지, 수첩, 간단한 그림도구... 짐이 대책없이 많은 것을 보고는 단 하루 오갈 것이 맞는지 싶어 한숨이 나왔다. 더 큰 배낭을 꺼내 밀어넣고는 윗층 어른들에게 인사드리러 올라갔다.
아직 출근 전인 어머니와 할머니께서는 담소 중이었고 내 몰골을 보면서 결국 한 말씀하시고 말았다. 그 머리는 어떻게 할 수 없겠니... 안 그래도 말리면 묶어버릴 거라고 아뢰고서야 풀려났다. 찌개에다 밥을 말아서 대충 먹는 둥 마는 둥하고 일어섰다. 시간도 촉박했지만 묘하게 불편했다.
분명 그 분은 나를 사랑하고 계실 것이다. 나 역시 예전에는 분명 같은 신뢰로 그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묘하게 핀트가 맞지 않은 시간들 속에서 결국 책임과 의무 외에는 내게 남지 않았고 그 분이 관심까지도 서걱대면서 짓눌렀다. 함께 했던 시간만큼 함께 할 시간이 절대 보장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이제는 조금씩이라도 더 가까워져야 하지만... 아직은 무거웠다. 그 마음은 버스를 타러 정류장에 갈 때까지 불편하게 했다. 집을 한 번 더 돌아보고 - 드문 일이다 - 길을 건너갔다.
깜박 잊을 뻔했다. 시간보다 일찍 나섰던 이유는 9시에 문을 여는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려고 했던 건데... 정류장 바로 건너편에 있는 도서관이 고맙기만 했다. 조금이라도 더 멀었으면 기차 출발시간을 맞출 수 없었을런지도. 서둘러 달려가서 2층 대여실을 열었는데... 도서관장이 자리를 비웠다. 일단 책부터 반납자리에 던져넣고는 서둘러 아무 책이나 세 권 집어들었다. 종종거리고 있으려니 느즈막히 기지개를 켜며 들어오는 관장은 멋쩍은 듯 웃으며 반납처리 해주었고 같은 태도로 대여까지 끝냈다. 목례 후 계단을 내려가자마자 빠른 걸음으로 횡단보도를 건너갔다.
영등포 행 버스에 몸을 던지고서야 안심이다. 가장 좋아하는 좌석에 앉아 창가를 바라보려니 어느 새 원종대로 곁의 논은 벼베기를 끝내고 황량하다. 여름 내 맡았던 거름 냄새도 나지 않고 열어둔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은 제법 코트 끝을 날카롭게 비집고 찬 기운 가득 남겼다. 뒤 자리에 앉은 이가 재채기를 했다. 가장 좋아했던 길이 지나고 서울로 들어서자 특유의 갑갑한 공기 때문에라도 더 이상 창문을 여는 것은 무리였다.
...커피는 식으면서 더 씁쓸하고 목에서 꺼끌거린다. 컵 바닥에 조금 괴어 흔들리는 물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과감하게 개수구에 부어버리고는 새로 뭉게뭉게 김 서리게 따뜻한 것으로 포트에서 따라내렸다. 나흘 뒤나 한 달 뒤나 달라질 것이 무엇일가. 그 시간, 그 순간에 그렇게 밖에 느낄 수 없었다면 그 순간으로 수없이 돌아가도 같은 감정을 겪으며 역시나 반복하며 살게 된다. 최선을 다해 살고 있어서는 아니나 주어진 것대로 받아들이는 천성 때문이라 여겨진다. 지금 의자에 앉은 나와 나흘 전의 내가 다른 점은 나흘이라는 시간 때문만은 아니다. 기억이란 식으면서 씁쓸해지는 커피가 아니다. 언제나... 그것이 식지 않게 불을 때는 무언가가 있다. 그것이 장작이든 석탄이든 중요하지 않다. 단지... 버려질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일단 속을 커피로 더 덥히면서 다시 한 번 그 속에 들어가 나흘 전과 같은 무언가를 바라보고자 한다면 지금의 내가 그 때보다 더 큰 것을 얻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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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분을 남기고서 도착한 버스는 종점답게 사람이 전부 내려주기를 기다렸다가 사라졌다. 길만 건너서 에스컬레이터를 타면 되었는데 역시 하지 않았던 일 - 왔던 길을 한 번 더 되돌아보고 지하도로 내려갔다. 머뭇거리면서 수줍은 기억은 내가 아직은 이 곳에 무언가를 남겨두고 왔고 그 때문에 되돌아와야 할 것임을 상기시켜주었다. 지금은 두고 가지만 또한 마음에 담고 가는 것이라고. 누구를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태어나서 처음 가보는 단독 여행이었다. 물론 식구들에게는 동호회 사람들과 미리 선약을 하고 가는 것으로 했다. 그 곳에 도착하면 동호회 사람 하나가 마중 나와 있을 것이다. 얼굴도 모르고 물론 만난 적 없는 미지의 한 사람이. 단지 낯설은 아이디 하나와 본명 하나, 작은 찻집 하나, 그리고 오면 재워주겠노라는 약속 하나만 믿고 덜컥, 짐을 싼 것이다. 무모하기까지 한 결심을 밀어붙이게 한 힘은 충동뿐이 아니었다.
...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바뀌지 않을 무언가를 지닌 사람.
도시에서 태어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이삿짐 싸는 일이 번다하다. 해외까지 나서는 사람들은 예외로 하고라도 직장과 집값, 아이들의 교육을 문제로 몇 번은 터를 옮겨잡게 되는데 그러면서 그 전과의 인연이 끊어지고 새 인연과도 다리 놓이기 전에 또 떠나고 만다. 그런 기억들이 반복되면 더 이상 정을 주기 힘들어지고 으레 그런 일로 여겨진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이사 기록이 열 몇 번이 넘고 어떤 순간에 놓쳐버린 사람들을 그리워하고 찾을 수는 없고... 고향이 없는.
처음 50년 된 곳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전설의 고향인 줄 알았다.
한 곳에서 나고 자라서 지금껏 살고 있다는 사람을 확인해보고 싶었다.
살면서 변하지 않을 것, 혹은 나에게 남아 있는 것, 의미 있는 것들을 골라내어 지금이라도 고향을 만들면 어떨까.
한 주는 족히 지갑 속에서 묵어 꼬깃한 표를 꺼내 개찰구의 직원에게 내밀었을 때 그 무덤덤한 얼굴과 무표정한 손짓으로 꼭 그와 같은 자국을 표에 찍어냈다. 다시 지갑 안으로 자취를 감춘 표는 마치 그 상처를 드러내기 싫어 숨은 것 같았다. 저런 표정으로 줄 선 사람들에게 한 번 씩 흔적을 남기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를 곱씹기에는 기차가 너무 일찍 왔다. 6번째 차칸을 확인하고 뛰어올랐다.
운수 좋게 창가자리였으며 햇빛이 들지 않으면서도 밝았다. 커튼을 젖히고 바깥을 내다보려니 기차는 곧 속력을 내며 일정하게 덜컹거렸다. 가방을 대충 내려놓고는 가장 편한 자세로 의자를 젖히고는 곧장 잠들어버렸다. 아침에 급히 준비하고 돌아다녔던 게 체력저하의 원인이며 아직 마르지도 않은 머리 때문에 감기기운이 들었다는 것을 되짚은 것은 그로부터 사흘은 지난 뒤였다.
잠들기 직전 기차가 수원역을 향하고 있을 때 핸드폰이 자신의 존재를 온몸으로 알렸다. 잠 많은 나를 염려한 듯 선배 언니의 전화 "무사히 출발했니?" 하는 내용의 것, 그리고 회사에서 리테이크 때문에 월요일에 일찍 출근할 것을 당부하는 실장님 - 출발하지 않았다면 붙잡고 싶으셨으리라. 하지만 기차 안이라는 말에 한숨만 쉬시면서 잘 다녀오라시고는 끊으셨다. 기묘하고 아슬아슬한 쾌감 속에 다시 핸드폰을 끄고는 눈을 붙였다.
한참을 쌔근거렸을 것이다. 깊게 잠들어 업어가도 모르도록. 꿈도 꾸지 않고 고스란히 감각으로 느끼는 시간을 잘라내는 수면은 지극히 일상적이다. 이를 '복' 이라 하며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때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 오히려 잠이 없고 늘 '현실'을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복된 것 아닐까. 무언가 가치있는 일과 생각에 몰두할만한, 혹은 가능성을 지닌 시간을 충분히 가질 수 있는 것이... 늘 잠에 취해 살았던 때에 가졌던 기억들은 단편적이고 강렬한 색을 띄고 있다. 질서나 개연성 없이 토막난 시간은 어느 순간 끊어져 버린 삶의 고리만큼이나 당연한 것이었다. 어떻게 하면 하루 최소한 18시간을 온전히 누리며 살 수 있는 것일까... 하고 바랬는데 막상 그렇게 살아야 할 때가 오고나니 이도 저도 아닌 속에 있다.
이마 위로 몇 가닥 드리워진 잔머리 때문에 눈을 떴다. 문이 열리고 제법 많은 사람이 오르내렸다. 영등포 역 승강장에서 보았던 멋쟁이 아가씨가 바깥 창문에서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었다. 덜컹... 하고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할 때에 옆자리에 덩치 좋은 사내가 와서 앉았다. 그렇게 대전 역을 출발할 때 속에서 전율이 일었다. 이 뒤로는 한 번도 밟아보지 않은, 이름만 들었지 한 번도 눈으로 확인해보지 않은 곳들이 될 것이다. 내려감기는 눈을 비비며 한껏 젖혀진 허리를 일으켰다. 하늘은 대전 역 위로 점차 흐려져 푸른 제 빛을 잃고 지저분한 회범벅이었다.
10시 40분 출발해서 대전까지 얼추 두 시간은 걸린다. 식사 때가 되어 있었고 부지런히 오가면서 김밥과 도시락, 간식들을 파는 사람을 몇 번이고 바라보다가 겨우 고른 것은 커피 한 잔이었다. 잠도 덜깨고 속은 허출하고... 빨대를 꽃아 한 모금 들이 마실 때 목에서 식도를 타고 내려오는 그 짜르르한 달콤 쌉쌀함에 절로 취해든다. 최근까지 마셨던 수많은 분말커피와는 비교할 수 없다. 그리고 다른 무엇도 더 뱃속에 넣어 그 본연의 향을 흐트러뜨리기 싫어졌다.
배낭이 상당히 무거웠다. 아침에 정신없이 쑤셔넣고 도서관에서 뛰어나오면서 어떤 책인지 확인도 하지 않았으니... 책은 물건들과 뒤엉겨 포개져 있었다. 이슬람에 관한 역사책 한 권, 파트라스 쥐스킨트의 <콘트라베이스>, 후설의 <시간의식>. 이것들을 왜 빌렸을까... 잠시 손에 들었다가 다시 집어넣고는 가방에서 음반을 꺼내 mp-cdp에 넣고 <예습> - 공식적인 목적은 경아님의 쇼팽 연주회였으니까 - 을 시작했다. 꼬로도는 거침 없이 피아노를 두들겼다. 다소 무겁고 어두운 음향은 녹음연도 때문이 아니라 연주 성향이다. 그러면서도 손은 날렵하게 건반을 땋아내렸고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수십년 지난 나에게까지 그 시대의 쇼팽을 들려주었다. 한동안 듣다가 곡목들을 바꾸어 브람스 - 베토벤 - 멘델스존 - 사라사테...를 부지런히 오갔다.
구릉 건너 도로에 구미 - 김천이라고 쓰여진 간판을 보며 순간 피식... 웃음이 터졌다. 키득거리고 웃자 옆좌석의 남자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민망한 듯 고개를 다시 돌렸다. 엉뚱한 것이 머리 속이라 왜 갑자기 운전면허 필기시험문제가 떠올랐을까. 예문으로 꼭 한 번은 나온다는 푸른 교통 표지판에 구미, 김천이라고 표기되어 있었다. 문제지가 바뀌지 않으니 언니와 어머니, 동생, 아니 숱한 사람들이 구미와 김천이라는 곳을 보면서 그 문제와 함께 지명을 외웠을 것이다. 나를 포함해 그런 곳이 있는지 없는지 가보지도 않았던 이들까지. 눈으로나마 실재함을 확인했으니 그 나머지 역시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진해의 님과 비단이라는 이름의 강아지...
...역이름이 잘 떠오르지 않아 지도를 찾았으나 집에는 역사부도 외에는 없었다. 대전에서 대구까지의 약간은 지루하고 긴 철로에서 난생 처음 보는 - 혹은 이름만 들었던 곳들을 확인하며 지나갔던 기억 속에서 묘하게 간판만 하얗게 날아갔다. 순서도 뒤엉켜 왜관... 밀양... 구미... 순서에 전혀 연관이 없다. 대전을 넘어가면서 아직은 벼베기를 하는 논들이 여럿 보였다. 전혀 다른 세상... 다 떠나버렸으리라 생각했던 가을이 아직도 한창 진행되는 곳... 나뭇잎도 아직은 샛빛을 띄고 가득 매달려 흔들리고 산에는 단풍이 휘황한... 마음 저리게도 서툴게 밀어놓은 도로와 골프장자리가 아쉽지만...... 그 자리에서 보았던 진귀한 장면 하나 떠올리게 하는데는 모자름 없었다.
오후가 되면서 태양이 반대편으로 넘어갔는지 따갑게 창을 뚫고 내려쪼이기 시작했다. 바깥 온도와는 상관 없이 내부는 후덥지끈했고 짐이 될까봐 코트는 벗어놓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자꾸만 무릎 아래로 흘러내리려는 가방까지도 버겨워갔다. 커튼을 치려다가 옆에 앉은 남자에게 양해를 구하려고 처음 말문을 열었다. ...저, 창문을 가려도 될까요? 덩치만큼이나 무거운 어조로 그러시지요... 하고 다시 고개를 돌리는 무표정한 입매는 아는 누군가와 닮았다. 확실히 무게 있는 사람들은 어딘가 닮은 얼굴을 하고 있다. 가벼운 인상이 아닌... 입술 위로는 상당히 귀족적이고 섬세한 메달의 옆모습 같았다. 코도 약간은 낮으면서도 굴곡진 형태가 분명했고 눈가는 단정하니 시선을 책에 향했다. 책 내용은 얼핏 보아 종교서적이었는데 틈틈이 페이지를 넘기면서 오래 생각에 잠긴 듯 눈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햇빛은 가리면서도 한 쪽으로는 바깥을 볼 수 있게 틈을 주어 젖혀놓았다.
대전을 넘어 한창 구릉지대로 들어서는데 맑은 하늘 가 위로 흰 두 줄의 구름이 보였다. 어릴 때의 순진한 생각으로 지구는 구름이 흘러가는 방향으로 돈다고 믿었는데 이 날은 조금 달랐다. 한 쪽으로 돈다면 이 두 구름이 같은 쪽을 향해 돌아야 했으련만. 구불구불 대성한 서예가의 필체, 혹은 장승업이나 김홍도 같은 화가가 굵은 붓을 잡아 단번에 농담을 살려 그어놓은 그것은 분명 용이었다. 까마득히 아래에서 숨막힐 듯 창밖을 넘겨보는 나와는 아무 상관 없이, 그렇게... 서로를 향해 맹렬한 속도로 흘러들고 있었다. 푸르른 하늘물 위를 날렵하게... 그리고 아무 두려움 없이 머리부분부터 충돌하는 순간,
...마른 번개 하나 없이 하늘은 밝고 조용했다.
지상에서 채 백 년 되지 않은 철이무기 하나만 요란한 소리를 내며 제 길을 달리고 있었다.
진해 바로 직전에 옆자리 남자는 하차했다. 늘 떠들기 좋아하고 처음 보는 사람에게 스스럼 없던 나는 온데간데 없었다. 몇 시간을 오면서 고작 나눈 말이라고는 커튼 쳐도 되냐, 그래라 뿐이라니. 아니, 차 속에서 했던 말을 다 합쳐도 세 마디 될까말까 했다. 난생 처음 홀로 여행 속에서 침묵을 배웠다. 멍하니 공상에 잠길 겨를도 없이 "...종착역인 마산, 마산입니다" 하는 안내 멘트에 따라 부시럭거리며 짐을 고쳐싸고 아까 마셨던 커피 잔까지 챙겨들었다. 창 밖으로 보이는 마산 역은 작고 평범했다...
PS : 아직도 진해에 도착하지도 않았습니다. 좀 늘어질 거 같은 예상이 듭니다. 아니면 너무 허무하게 끝날 거 같은... 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