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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학창시절에 선생님께서 판서를 하시며 수업하시면, 받아 적기 바빴던 기억이 있다. 최근에는 아주 중요한 개념이 아니고는 잘 안 적는다. 왜냐하면, 강의의 맥을 잘 깨닫는 것이 세세한 사실의 기억보다 가치 있다고 생각해서, 맹목적으로 강의의 내용을 받아 적지는 않는다. 오히려, 무턱대고 받아 적다 보면, 그 순간 강의되는 더 중요한 내용을 놓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칠판은 어떠한 정보를 잠시 동안 저장함과 동시에 언제든지 새로운 정보의 출입이 가능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컴퓨터의 RAM이나 cache memory의 개념일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우리의 뇌는 벌써부터 이러한 마음의 칠판을 사용하고 있었다. |
마음의 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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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뇌에는 바닷말처럼 생긴 '해마(hippocampus)'라고 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 곳은 우리가 배우고 익히며 암기하는 기능의 관문 역할을 하고 있다. 브로드만 28지역인 내후각뇌(entorhinal) 피질은 우리 대뇌의 다양한 피질 지역에서 정보를 받아 해마 구조에 기억을 만들 수 있도록 제공한다. 이 내후뇌 피질은 관통 경로(perforant path)를 통해 치아-이랑(dentate gyrus)의 과립 세포(granule cell)들로 정보를 전달한다. (이 과립 세포들의 줄기살들을 '이끼(mossy) 섬유'라고 한다.) 해마체는 그 구조를 크게 CA 지역과 피라미드 세포들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이끼 섬유 경로는 해마체의 CA3 영역에 있는 피라미드 세포들의 가지살들로 연결된다. CA3 영역의 피라미드 세포들은 두 방향으로 갈리는 줄기살들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해마체에 머무르면서 CA1 영역의 피라미드 세포와 시냅스를 이루고 (이를 '쉐퍼(schaffer) 곁가지 경로'라고 함), 다른 하나는 해마체를 떠난다. 마침내, CA1 피라미드 세포들의 줄기살들은 내후각뇌 피질로 재 투사되는 해마이행체(subicular complex)로 연결되고, 치아-이랑을 제외한 해마 구조의 모든 뉴우런들은 대뇌 피질의 다른 지역으로 줄기살들을 보낸다. 따라서, 해마 구조는 뇌 전 영역의 기억 기능을 제어하기에 좋은 형태를 이루고 있다. 필자가 우리의 뇌를 만두피에 비유한다면, 이 해마 부분은 만두피를 싸잡는 쭈글쭈글한 말단 부분으로서 우리 뇌 전체의 정보를 집결하고 관장하기에 아주 좋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
양파와 사과
이끼 섬유와 CA3 피라미드 세포 사이의 시냅스에서의 '장기 강화(長期 强化: LTP(long-term potentiation))' 현상은 오직 이끼 섬유 줄기살들의 고주파 자극으로만 발생한다. 즉, 해마 조직의 다른 시냅스와 달리 이 지역의 장기 강화는 입력 자극의 강도에만 의존하는 비-연관적인 형태이다. CA1 피라미드 세포의 연관된 장기 강화(associative LTP)는 시냅스전(前)의 고주파 입력과 다른 흥분 입력으로 인한 시냅스후(後) 세포의 동시적인 흥분 전위로부터 발생한다. 이 연관된 장기적 강화가 일어나는 지역의 NMDA 수용체들은 평소 Mg2+ 이온으로 막혀 있다가, K나 AMPA 수용체들에 의한 전위-변화로 Mg2+가 떨어져 나가게 되어, NMDA 수용체 통로를 통해 Na+나 Ca2+의 세포 내 유입과 K+의 세포 밖 유출이 가능해진다. 만약, 해마 조직의 NMDA 수용체를 차단시키면 시냅스후(後) 흥분 전위에 효과를 최소화시키므로, 관통 경로와 쉐퍼 곁가지들의 연관된 장기적 강화의 흔적은 사라진다.
더 자세히 살펴 보면, 'NMDA (N-Methyl-D-Aspartate) 수용체'는 지금까지 알려진 유일한, ①전위차와 ②리간드(ligand: 라틴어 '결합하는'이라는 뜻으로 수용체의 특정 부위에 달라붙는 화학적 물질을 의미함.)에 함께 제어되는 이온 통로이다. 즉, 약간의 탈분극(①)과 신경 전달 물질의 결합에 의한 활성 변화(②) 모두가 이 수용체 통로의 열림에 필요하다. 따라서, NMDA 통로는 평상시에 하나 이상의 Mg2+들이 세포 안 쪽에서 통로 벽에 붙어 있다가, 종종 같은 세포 내의 K나 AMPA수용체들에 의하여 생긴 전위 변화로 떨어져 나간다. 또한, 이 NMDA 수용체는 적어도 두 개의 활성-변이 리간드(흥분성 아미노산 신경 전달 물질, 글라이신)들을 필요로 한다. (참고로, 글라이신 억제성 수용체는 척수에 현저하게 존재하며, 특히 피질/척수 경로에는 고농도로 존재한다. 반면에, NMDA 수용체는 대뇌 반구에 우세하게 분포하며, 더욱 재미있게도 학습과 기억에 관계 있는 해마체(hippocampus)에 고농도로 존재한다. 반복과 각성이 중요한 학습과 기억의 특징을 전위차와 리간드(ligand)가 함께 제어한다는 NMDA 수용체의 특징과 유의하며 생각해보면 흥미롭다. 이처럼, NMDA 수용체의 연관된 두 사건의 동시적 자극 성질을 생각하건대, 우리가 맛있는 사과를 양파와 구분하여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사과의 맛과 색깔과 냄새 등이 '사과'라고 하는 이미지와 함께 학습되고, 기억되어 우리의 머리 속에 함께 저장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연관되어 기억된 정보를 가능한한 차단시켜, 눈을 가리고, 코를 막고, 맛을 못느끼게 하면, 우리는 우리가 지금 먹고 있는 아이스크림이 딸기 아이스크림인지 초코렛 아이스크림인지도 좀처럼 구분할 수 없다.
더욱이 중요한 점은 NMDA 수용체는 Na+나 K+뿐 아니라 Ca2+도 투과시킨다. 이 Ca2+의 투과는 신경 세포 안에서 특히 시냅스전(前) 말단에서 여러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한, 2가의 양이온인 Ca2+는 세포의 분극을 심하게 약화시키며, 심지어 세포를 괴사시킬 수도 있다. 이는 알쯔하이머 병과도 관계 있고, 특히 학습 및 장기 기억과 관련하여 연구되고 있다. NMDA 수용체는 세포를 자극해서 보통 상태보다 높은 수준으로 전위를 높여, 세포가 동시에 하나 이상의 신호에 반응할 수 있는 기작을 제공한다. '학습(Learning)'은 근본적으로 자연스런 항상성(homeosis)을 거스른다. 따라서, NMDA 수용체는 일반적인 항상력(homeostatic force)을 극복하고 장기적인 기억을 만들게 된다. 반면에 NMDA 수용체의 부적당한 활성화는 바람직하지 않은 학습을 초래할 수도 있다.(예, 간질)
수영하는 쥐
모리스의 물-미로 실험
ⓒ Neuroscience: Exploring the Brain (1996 Bear et al.)
이처럼 해마체에 있는 NMDA 수용체가 기억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재미있게 알아낸 실험이 있다. 에딘버러 대학의 심리학자 모리스(Morris)는 그의 물 미로 (water maze) 실험에서 이를 발견했다. 즉, 뿌연 물이 담긴 조그마한 수영장을 만들고 쥐를 수영하며 놀게 하였다. 여기에, 수영하다가 쥐가 올라가 쉴 수 있도록, 수면에서 약간 아래로 보일 듯 말 듯하게 작은 플랫폼을 만들어 주고, 쥐가 이 플랫폼을 찾아가는 경로를 추적하여 기억력을 분석하는 실험이다. 순진하게 수영을 즐기던 쥐는 처음 한동안 이 플랫폼의 위치를 기억하지 못하여 우연히 부딪히기 전에는 올라가 쉬지 못했다. 그러나, 공간 기억으로 어느 정도 새로운 환경에 익숙해지게 되면, 곧바로 플랫폼을 찾아 올라가 쉬곤 하였다. 하지만 해마체 부위에 손상을 입은 쥐는 시간이 충분히 오래 지나도 플랫폼의 위치를 좀처럼 기억하지 못했다. 더욱이, 평범한 쥐들도 NMDA 수용체 기능을 막는 물질이 해마체에 투여 됐을 때, 위의 해마체가 손상된 쥐와 마찬가지로 플랫폼의 위치를 기억하지 못하고 헤매는 현상을 발견했다. 이 '수영하는 쥐' 실험을 통해 그 작은 NMDA 수용체가 우리의 커다란 기억 세계에 얼마나 엄청나게 작용하는 지 알 수 있다. (1977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인 일리야 프리고진의 '나비 이론'이 생각난다. 나비 한 마리가 얇게 퍼덕거리는 날갯짓이 먼 곳에 이르면 폭풍을 일으킬 수 있다는 혼돈의 이론이다.)
이처럼 뇌의 해마 구조에서 형성되는 단기 기억은 짧은 시간 동안 제한된 양의 정보를 저장함으로써 순간 순간으로 이루어지는, 과거가 되어지는 현재의 정신 세계를 연속시키는 기능을 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단기 기억이 일어나는 현상을 '마음의 칠판'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기억이 장기 기억으로 굳히기 위해서는 반드시 단기 기억의 상태를 거쳐가야 한다. 따라서, 단기 기억이 장기간 유지되면, 그에 따른 장기 기억 형성 가능성이 높아진다. 우리의 머리 속에 있는 모든 오래되고 친숙한 기억들은 처음에는 우리에게 모두 낯 설은 일로 출발했다는 것만 생각해도 이것을 이해할 수 있다.